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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린 등
해 뜨지 않은 겨울 강에
무리를 벗어난 백로가 벌써부터
물속을 쏘아보고 있다
피라미라도 지나 갈 때를 기다리며
아침 내내 그는 그 자리에
짙은 그림자를 꽂아 두고 있다
언 강에 잠겨 시린 두 발 보다
허기진 배가 더 절실한가 보다
구부린 등이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는다
거듭된 실패로 밀려들어 온
고시원은 발이 시리다 늘
기회는 스쳐 지나가기만한다
허기진 젊음이 책상에 꽂힌 채
간절하게 흘러가고 있다
창문은 작고 기다림은 지쳐간다
쏜살같은 날들을 뚫어지게 쏘아 보며
형광등 아래 껌뻑거리는 그의
구부린 등이 밤새도록 정지되어 있다
해 뜨지 않은 겨울 금호강
백로가 언 강에 시린 두 발을 잠근 채
아침 내내 그 자리에서
허기진 그림자를 꽂아 두고 있다
구부린 등이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는다
목수와 아들
뇌성마비
강목수의
아들은 컴컴한 방 어둠을 베고 누워만 있었다
애비에겐 그 방이 늘 선명한 그림자로 따라 다닌다
대패로 밀고 밀어도 비틀어지는 다리
곧은 못만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휘어지는 가슴 위로
해는 기울고 공사장 대들보의 어깨도 기울어지기만 했다
못대가리 정수리에 불이 튀도록 내려친다
아들의 가슴에 불꽃이 튄다
못대가리에 튀던 불이 술잔에 부딪히고
낙지다리가 꼬부라든다
아들의 비틀리는 다리와
애비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맞물린다
까만 별들이 가슴에 부딪혀
뇌성벽력이 후려친다
소나기 사정없이 퍼붓고
아들의 모가지를 휘감던 등나무 등걸이 부러져
새카맣게 타.버.렸.다.
정전
어제는 낙지 다리가 있어 술을 마시고
오늘은 가고 없어 또
또 술을 마신다
아들의 바람손이
애비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화상
미혼모
울화가 끓어 뚜껑을
철컥 철컥 쳐올리며
달아오른 몸뚱이를
순식간에 덮친다
성난 불기가 금새 달라붙고
이내 마구 털어내 보지만
부풀어 오른 물집 속
후회가 가득 고이고
퉁퉁 불어 오른 껍질을 당기면
아! 아-야!
그 날 밤 기어이 찢겨져 버린
속 살
세상 밖으로 벌겋게 들어난다
유산시켜 버리고 싶은 기억들과
부둥켜안고 가야할 상흔들이
밤의 정적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화끈 화끈
화끈 거린다
영식의 볼록렌즈
정신지체아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곱 살에 머물러 살고 있다
해진 주머니 속에서 볼록렌즈와
종이를 꺼내들고
초등학교 문방구 앞 빈 의자에 앉는다
햇살이 조잘대며 그에게 말을 걸자
쪼그리고 앉아 볼록렌즈로
햇살의 말을 새까맣게 받아 적다가
마술처럼 불이 붙자
종이를 흔들며
보란 듯이 히죽 웃는다
하교 길 아이들이 그의 가슴에
아무렇지도 않게 돌을 던지고 가지만
무심하게 싱긋 웃는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자문자답하는 내 옆을
볼록렌즈의 초점을 맞추며
히죽 히죽 웃으며 지나간다
낙엽
심상치 않아
불어오는 바람이, 너는
얼굴까지 빨갛게 불궈진 채 죽으라
죽으라고 가지를 붙들며
맨몸으로 매달리지만
결국 부도난 수표가 되어
지친 다리를 끌며
일용잡급직을 찾아
인도 블럭 위를 절뚝
쩔뚝 뛰어 다니더니
때 이른 얼음비
허공을 베며 내리고
뒤척이며 뒤채이며
축축히 젖은 몸 웅크린 채
도시 거리에서 노숙하고 있구나
너는
로프쟁이의 비오는 날
한 남자가 비를 맞고 서 있다
그의 얼굴에
두 손으로 우산을 받쳐주고 서 있다
기다란 밧줄에 절박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비바람에 젖으며 흔들리며
폐부를 찌를 듯 한 유혹이 매달려 있다
덥석
잡은 로프를 몸에 비끌어 매고
동료와 함께
허공으로 뛰어 내리던 순간
아찔하게! 미끄러지더니
끊어진 끈 그가
툭 떨어져...
하얗게 식어가는 그의 얼굴에
우산을 받쳐주고 하염없이 서 있다
젖는 줄도 모르고
흐르는 줄도 모르고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넋 놓고 서 있다
삼각뿔, 거꾸로 선 하루
수 십 층 허공에 몸뚱아리를 비끄러맨다 그는
5cm 비계목 위에서 허공을 향해 *깨금발로 서서
한 걸음 걸음 삶을 질기게 엮을 때 마다
오줌을 찔끔 찔끔 지린다
공사장 귀퉁이엔
어제 추락한 배씨의 안전모가
찌그러진 채 나뒹굴고 있다, 노랗게
짓밟히고 밟히던 민들레가 눈을 질끈 감고
뒤채이고 채이던 깡통들도 덜 덜 떨며 쳐다보고 있다
튼튼한 땅을 밟고 서서 안전모를 쓴 감독이
조심 하라고 조심 하라고 손짓 발짓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지만
바람에 휘이-청대는 비계목의 곡예 아래
모기 앵앵거릴 뿐이다
비계목공의 하루 하루가
거꾸로 매달려
빈 하늘 참집 천막지붕처럼
시씨벌펄 씨시 팔팔거리고 있다
*깨금발;돋움세의 토속어
가을 언덕에 서면
바람 많이 부는 가을 날
온 정성을 모아 맺은
꿈의 분신에 깃털을 달아
멀리 더 멀리 날려 보냅니다
마른 벌판에 맨발로 뛰어다니며
세상 바람에 속을 비우고 또 비워
속 없는 에미는
손 흔들며 외칩니다
잘 가거라 가서
부디 잘 살아라
고
소리 없이 토해내는
억세의
함성이 들려옵니다
낡은 부부
처음
살과 뼈를 맞대었을 때 너는
뾰쪽하게 내 엄지발가락을 찌르고
뒤꿈치도 물어 뜯으며
꽤나 까탈을 부렸지
인도 블럭에 네 곰배 이마를 처박고는
여지없이 내 발목도 꺽곤 했지
그렇게 절뚝거리며
마음 곳곳에 굳은살을 박으며
닳고 헤오래 신으면 편안한 헌 구두처럼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낡아 낡아
허물까지 감싸주더니
불황의 겨우내
마른 숨을 몰아쉬는 너
이마가 깨어지고
옆구리가 터져
주름진 세월에 헐떡이는 너,
또한
나의 모습을 본다
여자의 삶은 소설책 열두 권이다3
형부는
영화 실미도에서 무장공비를 추적하다 쓰러진 경찰, 우리 형부는
그렇게 영화 속으로 날아가고 언니는 끝난 영화의 깜깜한 세상
속에 스물여덟 청상으로 정지되었다. 순직, 경찰장이 끝나고 가
난한 나라는 언니의 빈 두 손을 꼭 잡고 문 밖으로 내몰며 미안
하다 미안하다 하고 임의로 세간을 접수한 시부모는 집 밖으로 등
떠밀며 재혼하라 재혼하라 하고 단칸방에 일곱 식구 복닥이는 친정
으로 발길을 돌렸다,
60년대의 완행 기차는 느리다
빈 젖을 빨며 칭얼대는 백일지난 아들과
하염없는 언니의 눈물에 눈만 깜빡이는 두 돐 배기 딸
철컥, 철컥, 철컥, 철컥거리는 기차 소리마다 찍히는
언니 가계의 흑백사진,
친정에 가까워질수록 언니 눈앞이 흐려져 느리고
백내장 앓는 카메라 렌즈를 닦느라 느리고
역마다 망막함 태우느라 느리고
다가올 기나긴 세월이 허기져서 느리다
칠순의 언니는 이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서른의 나는 참! 가엽구나“
소소한 아침
기다림의 끝은 언제쯤일까 오늘도
나무는 지루하게 서있고
강은 막연하게 흐르고 있다
시끌시끌한 금호강 삼각주 모래톱,
새들이 모여 앉아 꽤꽥 찌찌 또로롱 수다를 떨고 있고 하얀 이빨 드러낸 햇살이 그 얘기를 엿듣고는 와르르 창으로 쏟아져 들어 온다 애완견 띵이는 햇살이 쏟아내는 소소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며 눈을 지그시 뜨고 있다 노쇠한 걸음을 느긋하게 감싸 안고 업드린 등에
햇볕이 함뿍 내려앉고 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 녀,
껌뻑이는 눈곱과 짓무르는 눈가를 닦아주고는 할 일 없는 손을 이끌고 강가로 나간다 서로 손끝을 밀고 당기며 보폭을 맞춘다 우리는 아직 차가운 바람을 여미며 강가를 동행 한다 손을 놓자 그 녀는 마른 풀 더미를 이리 저리 헤집으며 지나온 흔적들을 추적하고 나는 팔을 크게 흔들며 걷는다 잠시 우리는 홀가분하다
문득! 사라진 그 녀,
다급하고 커다랗게 띵아!- 소리치며 뛴다 놀란 새들도 푸드득! 햇살도 따라와 귀를 쫑긋 거린다 백내장 앓는 그 녀는 두리번거리다가 안도의 숨소리로 뛰어 온다 우리는 서로 다행스럽게 눈 맞추며 희뿌연 시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가끔 연줄을 밀고 당긴다
다시 소소소 속삭이는 햇살,
소문이 퍼졌는지 새들이 유유히 모래톱으로 돌아와 담소를 나누고 강물은 게으르게 흐르고 바람은 사소한 일상들을 취재하며 부산스럽게 뛰어다닌다
금호강 이월, 아직
청개구리가 기지개키더라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보본당*
나를 찾지마라
나는 세상의 어지러운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계절의 징검다리를 마구 건너뛰는
시간의 거친 숨소리 앞에
나지막하게 담을 쌓았다
세상을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생각조차 지워 버린
무심의 하늘 아래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맞는다
산 위로 붉은 해 떠 오르면
지워진 세상의 모든 기억 위에 자라난
회화나무, 그 가지 끝에 돋아나는 푸른 잎를 보라
나는 저 빛나는 생명을 보듬고 살아가겠다
더 이상 나를 찾지 마라
계곡의 적막이 깊게 가슴을 적시고
오랜 세월에 내 살점이 삭아 들어간다 해도
시조 한 수 기-ㄹ-게 뽑으며
여기 이대로 의연하게 앉아있겠다
조선의 선비답게
*보본당(報本堂, 재실);1616년 건축된 경주 최씨 종택의 재실.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1호
찬란하게
악세서리 가게
쇼윈도우는 불빛 찬란하네
스포트라이트 크게 뜬 눈동자가
별귀걸이에 달린
유리알과 마주치는 순간
아찔한 빛줄기를 뿜어내네
빛은 내 어둠을 뚫고 들어 와
남 몰래 감춰 둔
사랑에 스파크를 일으키네
빛나는 시가 아니라
술집 작부가 부르는
지나간 유행가 가사일지라도
내 발목 불끈 잡는 이 있어
그가 뿜어내는 아찔한 눈빛으로
내 유리알 가슴이 찬란하게 빛난다면
내 사랑 모조품이라도
나는 좋겠네
손톱에
1
“봉숭아 꽃물 지기 전에 첫눈이 오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한 말이 화근이었다.
딸애는 내내 봉숭아 주위를 몰래 서성거렸고 저녁나절
땀에 절은 꽃잎 두어 장이 손톱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꿈은 고향에 맞닿아 있었고
딸애는 고향의 팔을 베고 있었다
궁둥이 토닥이던 아빠의 손이 따사로왔고
손톱에는 어느새 발갛게 그리움이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
2
돌아오는 차 속에서
딸애는 손톱을 지우고
봉숭아물도 지우고
꿈 또한 지우고 있었다
고향은 가슴 속 얼룩진
슬픈 그림자로 멀어져 가고
손톱에 지우고 또 지워도
시뻘겋게 남아있는 그리움처럼
딸애의 가슴이 노을로
젖어들고 있었다
바다, 편지
봄
잠기어 들어간다
차가운 바다 속
밀려왔다 밀려가며
발목을 감아 도는 푸른 물풀
너는 그렇게
내 눈물의
모가지를 휘감는구나
가을
나는 알지 못했다
바다에 젖으며
잠겨들지 않고서는
밀면 밀리고
밀린 만큼 다시 밀려와
허리를 젖히며
무릎을 굽히며
그렇게 너는
내 가슴의
뿌리를 휘감아 오는구나
여름
눈을 감지 않고서는
볼 수 없었다
귀를 막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다
몸을 버리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지질러 부르짖던
너의 마음을
섬 속으로 붉은 해 떨어지고
어둠이 물풀처럼 밀려 밀려 와
내 마음의
정수리에 휘감아 드는구나
겨울
어둠 바다에 잠기어
오늘에사
네 가슴 문풍지가 울리는 소리
대바람 같은
젖은 파도소리에
마음을 대어본다
아직
늦지 않았는지
너무 늦진 않았는지
이 편지가
A/S
가습기의 신경을 220V에 꽂는다
퍽!
-주의:220V/110V 겸용
사랑의 선택에 주의하시압-
AS 센타입니까
53 구형 안윤하입니다
교감신경을 무심코 220V에 꽂았습니다
-과부하로 심장이 나갔군요
-엔진을 갈아 끼워야 되겠군요
엔진은 갈아 끼울 수 있나요
엔진을 갈면
달빛 아래 처음 보았던 그 처녀 별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나요
새벽안개 속 가습기처럼 하얀 입김 뿜어내어
목 타는 내 사랑 또 다시 촉촉이 적실 수 있나요
살 냄새 땀 냄새 사람 냄새 촉은촉은 배어나는
인공지능 가습기로 재생될 수 있나요
정전된 지하철애서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가
어디쯤인가요
마흔의 역을 지나
정전된
삶의 지하철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붉은 투피스
장롱 속에
계절마다 자리를 옮기며
갇혀있는 붉은 날개,
때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며 다른 옷들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어깨가
바래져 가고 있다
기억할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더욱 퇴색되어 씁쓸해진다
붉을수록 흐려지는 속도가 빠르다
팔월, 갈채 속에서 웃음소리 만발할 때
배롱나무처럼 피어오르리라
여름이 지나가도 떨어진 꽃잎으로
땅을 발갛게 덮던 시절이 다시오면
장롱 속에서 훌훌 털고 날아올라
붉게 빛을 발하리라
다시 그 계절이 올 때를
바래져가는 어깨를 걱정하며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버릴 수 없으므로
붉게 쌓인 먼지를 닦아
옷장 속에 가둬두는 것이다
맞지 않는 허리와
지나가버린 유행...
그렇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을지도 몰라...
내려 와 보니
길 없는 길
절벽에도
길은 있었다
서해대협곡* 밑바닥까지
내려 와 보니
삶의 뿌리였다
구름 위로 솟아오른
뾰족한 시간들이
벼랑 끝 가파른 바위에
동아줄처럼 매달려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로 흐려져
까마득하기만 하던 앞 날
하얗게 밀려드는 안개를 밀어내며
내딛은 한 걸음
또 다시 한 걸음..
찾으려고만 하면
길은 있었다
살고 보니
세월이
길 이었다
*중국 황산에 위치한 대협곡
춤추는 사람
뇌성마비
나는 관객이 될 수 없어요
나에겐 관객도 없어요 하지만
한 순간도 멈출 수 없이
춤을 추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흉한 몰골 때문에 고통 받는
세상 모든 미물들 앞에서
경련하듯 경기하듯
춤추는 사람이에요
공옥진의 한마당 춤사위의
모델이지요
나의 안무를 보면서
한편으로 위안 받으며
한편으로 눈물로 박수치며
흩어져가는 관객의 마음에
푸른 등꽃이 피어난다면
나는 태어난 보람이 있지요
삶이 너무 아파
우는 사람아
죽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이
추어야하는 나의 춤보다
더 아픕니까
첫댓글 가을언덕에 서면
하겠습니다
여자의 삶은 소설책 열두권이다 3
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