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외적 성장과 번영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거대한 성전의 종교를 파괴하셨고, 광야와 빈들로 나가셨다. 힘 있는 사람들보다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아무리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애와 화려하고 부유한 교회당의 모습은 어울리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으로 수십억, 혹은 수백 억짜리 교회당을 짓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라고 외치는 것은 왠지 억지스럽다. 교회는 겉을 치장하기보다 속을 정화해야 할 일이 시급하다. 한국 교회의 구제헌금이 전체 헌금 사용액의 3%에도 못 미치는 현실 속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사도 바울은 어떠했는가? 그는 성령충만을 강조했던 인물이고, 성령의 은사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누구보다도 방언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전 14:18). 하지만 그는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라도 남에게 덕을 끼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고전 14:19).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 큰 은사만 사모한다고 책망한 것은(고전 12:31),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표면적인 은사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 13장).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아직도 방언과 각종 초자연적인 은사를 그토록 사모하는가? 심지어 성경을 공부하고 깨달아 가르치는 것을 비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위해 그런 은사활동을 하는가? 어떤 점에서 그런 은사활동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혹시 그것이 교회성장과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인가?
영성과 목회!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영성의 깊이가 반드시 외적인 교회성장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성이 깊어도 교회는 외적으로 크게 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외면하고 떠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요 6:66) 어떤 심정이 되셨을까? 외적 성장만을 두고 본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처럼 실패한 목회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대부분의 제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를 외면했고 부인했다.
그러므로 영성과 목회의 성공 여부는 반드시 비례관계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영성이 깊기에 오늘 같은 부패한 시대에 목회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천박한 영성을 가졌기에 이 시대에 인기있는 목회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름도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목회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올바르게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요 5:41), 요즘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으며 인기를 누리는 목회자들이 많으니 참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이 교회와 직분자들에게 권면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보다도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고,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했던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열매 맺기를 강조했다(롬 1:13; 7:4; 고전 14:14; 고후 9:10; 갈 5:22-23; 엡 5:9; 빌 1:11; 골 1:6, 10; 딛 3:4). 그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했다(갈 5:22-23). 그가 요구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은사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게다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자동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행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간의 지탄을 받는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일삼는 경우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감정에서 나온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 신앙에 기초한 삶의 결실이요, 요란한 능력이 아니라 잔잔한 인격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는 바울의 말은 그런 점에서 깊이 새겨야 할 덕목이다.
또한 바울은 집사와 장로 및 감독들에게도 초자연적 은사를 갖추라고 하지 않고, 철저하게 인격을 다듬으라고 요구했다. 생활이 검소하고 단정하며,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가 되라고 했다(딛 3:2-9). 오히려 그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고 경고했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8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