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의 혀 외 9편 / 마 선 숙
전봇대의 혀
이 가을에 실종된 사람들
전봇대에 숨어 있다
부착방지용 뾰족이 틈새로
낡은 가발처럼 달라붙어 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속치마처럼 펄럭이고
유괴된 아이를 찾는다는 울먹임은
쇠창살처럼 먹먹하다
돈 빌려준다는 신용대출 전단지는
혀 빼물고 사람 유혹하고
스포츠 센터 다이어트 광고는
여자들 계모임처럼 야양 떨며 왁자지껄하다
자살클럽 안내는 가면무도회처럼 은근하고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묻는 수련원 포스터는
도둑맞은 답안지처럼 허탈하다
예쁜 아가씨 넘친다는 대양나이트 클럽 광고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대야 나이트로 땅에 떨어져 밟힌다
전봇대는 혀가 길다
나를 분실했으니 찾아주면 후사함이란 스토리까지 달고
숨이 차 쿨럭이지만
북새통들을 낙엽처럼 떨구지 않고
땅에 떨어진 전단지까지
묵묵히 몸에 휘감은 채
희망의 신문고를 울린다
냉동실 이야기
깊은 영하의 방
망각의 늪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온 시래기
몇 달 묵혀 노인이 되어버린 삼겹살
호기심 많은 아이 같은 아이스크림
할 말이 있는 듯 억울하게 입 벌린 통닭
유통기한 지나 녹슨 대문 같은 통조림
논둑길의 그리움 같은 미나리나물
형형히 눈 뜬 살구빛 사탕
화르르 일어나 걸을 것 같은 케이크
불면증 같은 흑갈색의 커피 캔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안 녹을 것 같은 빈대떡이
바다를 항해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일상의 거짓말도 네모로 얼어
맨 아래 칸에 누워 있다
어느 날
얼어붙은 것들이
뜨거운 혀로 세상에 나아가면
각각의 이야기들은
전 생애가 끝나고
냉동실은
다른 이야기들을 기다릴 것이다
습관에 대하여
천사인 척 미소 짓는 너를
무명실 자르듯 끊고 싶어
어머니가 일러준 것과
반대로만 가게 하는 너를
세계와 이별하듯 상큼하게
우아하게 티본스테이크를 썰고 싶은데
시레기국만 입에 당기고
시장옷만 사랑하게 되는 것도 너에게 낚여서야
음식을 오른쪽으로만 씹어 얼굴이 이지러지고
밥을 쫓기듯 먹어 체하고
손톱 물어뜯어 퉁퉁 붓고
불안한 걸음으로 허둥거리고
불면증과 화해하지 못하는 것도
네 손아귀 안에서 서커스 줄처럼 끌려 다니는 내가
기계와 불륜한 것처럼 부끄러워
이제
내비게이션이 일러준 길 버리고
벼랑을 만나도 내 길을 갈 테다
몸속에 거대한 집을 짓고 조종하는 너를 부서트리며
내 자의식의 자리에 창문을 내
권태가 모이는 거리라도 어리석음을 각색해
나방처럼 껍질 깨고 나와
감추었던 날개 퍼덕이고 싶어
어떤 키덜트
대기업 부장으로 퇴직한 남자
사물함 편지처럼 앉아 있다
아침 한 술 얻어먹고 고개 꺾고 집 나간다
발길이 멈춘 곳은 맞은편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그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몰려들어 어깨동무하며
놀자고 조른다
아이들과 물총놀이 딱지치기 가면놀이
종이접기 한다
어릴 때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며
별의 바다를 유영하고 싶어
『어린 왕자』를 열 번 읽었던 그는
자기 속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
정오가 되어 아내가
백화점 문화센터 간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식은밥으로 허기를 때운 후
침대 밑에 숨겨놓은 장난감 꺼낸다
든든한 갑옷 입은 리얼 로봇을 조종하고
인형병기 건담에 열광한다
레고로 탑 쌓고
가짜 총으로 과녁을 겨눈다
미니카를 장애물 없이 맘대로 달리게 하고
무서운 힘을 가진 태권브이와 대화하고
색종이로 학 접어 날린다
바비 인형 꺼내
새옷 갈아입히고 머리도 빗겨준다
그를 제압 명령 두렵게 하는 건 사라졌다
사막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어린 왕자 되어
현실에서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우체통
청계천 4가
골목과 골목이 꿰매 있는
지느러미 달린 붕어빵들이 헤엄치는 시장 네거리
산타클로스 옷 입은 우체통
배고픈 듯 입 벌리고 있다
보석가게 반지같이
말똥말똥 그리움을 기다리지만
스티커 먼지 앉은 바람만 지나간다
스마트하게 문자 주고받는 인파들
망가진 현금 인출기 보듯 곁을 무심히 지나치고
아들아 보아라 하고
침을 묻혀 삐뚤삐뚤 쓴 편지도 한 장 들어오지 않는다
지나던 아이 하나
껌을 껍질에 싸서 구멍에 넣는다
중년 사내 하나가 전단지 들고 가다 귀찮은 듯 구멍에 버린다
내 꿈의 길을 낼 비행운같이 밥알로 풀 발라
답장을 기다리던 설렘은 어디로 갔나
우체통은 바다를 찾지 못한 한 척 배처럼
항구 밖에서 찬비 맞는다
종묘
왕의 제사를 지내는 곳
종묘
고종의 후예들
무임승차 전철 타고 모여든다
갈 곳 없는 사람들 광장
외진 곳에서 돗자리 깔고 바둑 두는 무리들
삼삼오오 시국 토론하며 눈에 핏발 선 잡담들
엄숙하게 무료 영정 사진 찍는 검버섯 노인
먼 산보며 백발가를 중얼거리는 대머리
때 묻은 입성으로 여기저기 손 내미는 검은 안경
무료 커피 봉사자들이 오자
우르르 젊음을 넣어 마신 후
햇볕을 찾아 담벼락에 몸을 기댄다
처진 어깨들끼리
앉아서 끄덕끄덕 졸며
자신을 제사 지내는 것 같은 풍경들
누군가 종이학을 날리자
부리가 시든 누런 학은
체념의 국밥을 싣고 비실비실 날아간다.
검은 스모그를 안고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다
나도 뒤따라가야 할
종묘
그 거리
제사 지내는 곳
찌그러진 양푼에 녹음이
식탁 위 보라색의 무 장다리꽃이 자태를 뽐낸다
썩은 무 뿌리를 물에 담갔더니
무성한 초록으로 합창한다
미나리 뿌리도 잘라 심으니 싹이 파릇파릇하고
고구마 싹이 자란 넝쿨도 눈을 정화시킨다
시집 올 때 갖고 온 양푼을 딸이 찌그러졌다고 버려
애타게 주워 와 물을 붓고 야채들을 키우니
집 나간 자식 돌아온 듯 반갑다
흑백사진 같은 역사가 안부편지처럼 녹아 있는
깊은 우물을 닮은 양푼은
논둑길 밭둑길로 된장찌개 끓여 나르고
시레기국으로 추억을 쌓으며
긴 세월 고목처럼 함께했다
찌그러진 양푼이
고통조차 꽃 피울 날을 기다리며
다가올 미래들을 수채화처럼 그려 본다
찜질방에서 작아지다
사는 게 얼얼해
심장이 비처럼 출렁이면
불임에서 일어나 찜질방에 간다
냉탕 온탕에 삶의 두려움을 변비처럼 밀어내고
신분증 없는 반라의 몸으로 앉은뱅이 슬픔을 눕힌다
아파트 시세 내려앉아 허기진 중년 여자는 찬 식혜를 들이켜고
주식으로 재산 날리고 암전된 노숙자는 흑백영화처럼 멍하다
허탕으로 낮 시간을 죽이던 영업사원은 실버 보험을 떠들고
취직 못한 백수 청년은 사회를 안주처럼 토막 낸다
주름이 번데기 같은 늙은 할머니는 과거엔 예뻤어 하며 젊음을
아쉬워하고
팽팽한 새댁은 족집게로 눈썹 뽑으며 시집을 눈 흘긴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자
잡담들 한 둘씩 악보 접듯 귀환하고
삶의 터전으로 깃들이고 싶었던 침묵도 행렬처럼 몸을 일으킨다
바람을 등진 집에서
불가마에 익은 감자로 노란 전등불 켜고
세 평 마루에 푸른 잔디로 식탁 차려
새벽에 완성하지 못한 문장 하나를 쓴다
속옷처럼 달라붙는 미래에 나를 통과시키고 싶다고
푸줏간에 가서
저녁 준비하러 고기를 사러 갔다
노을 같은 붉은 진열장 속에
토막토막 잘려진 생고기와
냉동 고기들이 도마 위 갈고리에 꽂혀 있고
검붉은 혀 같은 선지가 양푼에 담겨 있다
천정에 매단 비닐끈에 금줄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가격표들
한우 등심 600그램 육만오천 원
호주산 양지 100그램 사천오백 원
미국산 등심 600그램 삼만팔천 원
지갑이 가벼워 한우는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호주산 양지를 한 근 사서 돌아섰다
뒤를 쫓아오는 노을들
세월과 함께 노을이 되어가는 여자
과거 살아온 나의 흔적이
비닐끈에 걸려 경매되면 어떤 값이 매겨질까
나이를 안고
노을 속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얼굴이 선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목요일과 메타쉐콰이어
여름이 함석지붕 위에서
북새통 떨고 사라진 후
가을이 옆구리로 시리게 와도
목요일은 메타쉐콰이어다
숲을 향해 뻗은 나무처럼
버팀목 같은 손수레를 끌고 와 해바라기한다
어깨를 고추 세운 월요일과
삶의 멍에가 조여드는 화요일과
스모그가 깊어지는 수요일을 지나
세상 주름까지 짊어지고
다리가 긴 메타쉐콰이어 흉내를 낸다
영혼까지 당당해 지려 애쓰며
주말의 쉼표까지 들어올리려 한다
ㅡ『우리詩』201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