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과 한명회
권력은 역사를 이길 수 없다
며칠 전 「누가 노병을 분노케 하는가?」라는 글을 정리한 뒤에도 마음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정권이 바뀌거나 정치 지형이 흔들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권력의 편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오랫동안 그런 모습은 정치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이익과 출세를 위해 신념과 양심을 쉽게 바꾸는 기회주의는 정치인의 고질병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가 추진하는 육·해·공군사관학교 폐지와 국군사관학교 창설 논의를 지켜보며 그 생각은 무너졌다. 군 출신 중에서도 그런 유형의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군의 고위 지휘관까지 지낸 예비역 장성들과 잘 아는 후배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관학교는 각 군의 역사와 전통, 가치관과 지휘 철학을 계승하는 장교 양성의 산실이자 국가안보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다. 이러한 제도를 충분한 공론화와 군사적 검증도 없이 정치적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흔드는 것 자체도 우려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정책을 정당화하는 일부 사관학교 출신 인사들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군인은 국가와 헌법에 충성하는 존재이지 권력에 충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리를 바꾸고, 어제까지 지켜야 한다던 가치를 오늘은 스스로 허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군인의 명예와 양심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조선왕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권력의 형태는 시대마다 달랐지만, 권력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태도는 놀라울 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사육신은 수양대군의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혹독한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당대에는 역적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입었고, 저잣거리에 시신이 효수되는 치욕까지 겪었다. 그러나 세월은 권력의 판결을 뒤집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조정은 그들의 충절을 인정하고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나라와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기억한다.
반면 계유정난의 일등공신 한명회는 생전에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영의정을 두 차례 지냈고 두 딸을 왕비로 만들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당시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에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한때는 시대를 지배했던 권신이었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은 권모술수와 권력욕의 상징으로 기억될 뿐이다.
사육신과 한명회는 한 시대를 살았지만 역사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다. 권력은 당대의 승자를 만들 수는 있어도 역사의 승자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는 드물다. 사육신이 남긴 것은 벼슬이 아니라 절개였고, 한명회가 잃은 것은 권세가 아니라 역사적 정당성이었다.
오늘날 사관학교 통폐합 논란도 다르지 않다. 합동성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합동성은 각 군의 전문성과 전통을 유지한 가운데 협력을 강화하는 개념이지 장교 양성 체계를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관학교는 단순히 장교를 배출하는 대학이 아니다. 육군은 지상전과 기동작전, 해군은 해양통제와 함대 운용, 공군은 항공우주작전과 공중우세 확보라는 서로 다른 전장 환경과 작전 개념을 중심으로 장교를 양성한다.
이에 따라 요구되는 전문성과 지휘 철학, 조직문화 또한 크게 다르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장교 양성의 출발점부터 하나의 틀로 묶는 것은 다양성을 경쟁력으로 삼아야 할 군사조직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 합동성은 각 군이 자기 전문성을 충분히 갖춘 뒤 상호 협조하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든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군사강국은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각각 운영하면서 임관 이후 합동참모교육과 합동지휘과정을 통해 합동성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는 각 군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합동작전 능력의 출발점이라는 공통된 인식 때문이다. 우리 역시 과거 합동군사대학교를 창설했다가 다시 각 군 대학 체제로 환원한 경험을 통해, 조직의 물리적 통합이 곧장 합동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일부 예비역 장성들이 정치 논리를 군사 논리인 것처럼 포장하며 통폐합을 정당화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군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정신과 문화가 곧 전투력을 형성한다. 사관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각 군의 역사와 리더십, 그리고 국가의 안보 철학을 이어가는 상징적 제도다. 이를 단지 정치적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흔드는 것은 국가안보를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는 처사다.
사육신과 한명회는 단지 조선 시대의 두 인물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 앞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지킨 사람과, 권력에 맞춰 자신의 신념을 바꾸어 간 사람을 상징한다. 시대는 달라도 권력 앞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선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순간의 권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양심과 신념을 지킬 것인가.
정권은 바뀌고 권력은 사라진다. 그러나 군의 전통을 허물고 국가안보를 흔든 정책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남는다. 그 정책을 입안한 사람도, 침묵한 사람도, 앞장서 동조한 사람도 모두 역사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역사는 느리지만 결코 잊지 않는다. 순간의 권세는 사람을 취하게 하지만, 끝내 남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양심과 신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에 대한 해바라기성 충성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진정한 충성이며,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판단이다. 군인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 역시 권세가 아니라 국가와 양심이다.
첫댓글 조 박사님, 힘찬 글 잘 읽었습니다.
양심과 신념!
국가와 양심!
고맙습니다.항시 존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