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으란 말도 없는데 덜프덕 앉으며 옹녀 년이 먼저 물었다.
"자네가 우리 영감님헌테 받은 것이 산내골 논 열마지기 문서라고 했는가?"
"그런디요?"
논문서부터 들먹이는 것이 그걸 내놓으라고 하는 수작이구나 싶어,
옹녀가 눈을 치켜 뜨며 대꾸했다.
"그 논문서 내게 돌려주게."
이천수의 마누라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멋이라고요? 논문서를 내노라고요?"
옹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풍지가 퍼르륵 떨었다.
문밖에서 섭섭이네가 킁킁 헛기침을 했다.
"이보씨요, 마님. 논문서럴 왜 내놓라고 허요?
내 뱃속으로 들어 가 똥된지 오래인 그걸 멋 땜시 내노란다요? 못 내놓겄구만요."
내킨김에 옹녀가 한 마디 더하는데, 이천수의 마누라가 주먹으로 방바닥을 쿵 내려쳤다.
"못 내논다고?"
"못 내놓지요. 못 내놓고 말고요. 그것이 어떤 것인디, 내논단 말이요.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넘의 집 손얼 이어주겄다고 내 한 몸 내놓고 받은 논문선디,
그것이 목심과도 바꾼 것인디, 어뜨케 내논다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자 이천수의 마누라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옹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 목심과도 같은 논문서인 줄 나도 아네. 그걸 모를 내가 아니제.
허나 자네가 할 일을 다 했는가? 논 열마지기 문서는 자네가 아들을 낳아줘야만
자네껏이 되는 것이 아닌가?"
"아덜얼 날까 못날까넌 지달려보면 알겄제요."
옹녀의 말에 이천수의 마누라가 흠칫 놀랐다.
"지달려보면 안다고?"
"아, 씨럴 뿌려놨응깨, 거그서 싹이 날랑가 안 날랑가 지달려봐야 헐 것이 아니요?"
"자네가 정녕 씨럴 받기넌 받았는가? 그 양반과 합궁을 허기는 했는가?"
이천수의 마누라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옹녀의 아랫녁을 흘끔거렸다.
"이년이 비록 남정네는 첨이었제만, 바보 천치가 아닌담에야 제 밭에 씨가 뿌려졌는가
안 뿌려졌는가 그것도 모르겄소? 글고 논문서는 내가 이 집에 가마타고 들어옴서
이미 내껏이 되었소. 이집 양반이 그랬소.
아덜만 하나 낳아주면 논 열마지기가 아니라 스무 마지기, 서른 마지기라도 준다고 했소.
아니, 나럴 안방차지럴 시킨다고 했소. 헌깨, 이미 똥 된지 오래인 논문서는 들먹이지 마씨요.
이년이 그리 호락호락헌 년이 아니요."
"멋이여? 호락호락헌 년이 아니다?"
"아, 안 그요? 씨럴 뿌리라고 밭을 내준 대가로 논문서를 받았는디,
기왕지사 씨넌 뿌렀는디, 논문서럴 내노라고 허니, 성깔 안 날 년이 어딨겄소?
성님겉으면 그럴 수 있겄소?"
"성님?"
이천수의 마누라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아, 한 서방님얼 뫼셨응깨 성님동상이 아니요?
앞으로도 이년언 동상 노릇 잘 험서 이 집에서 살라요.
성님얼 성님으로 잘 뫼심서 살라요. 다행이 아덜이라도 낳게 되면
그 아들 성님 아들로 디리고 성님 뫼시고 살라요."
옹녀의 말에 이천수의 마누라가 잠깐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 없네. 설령 자네가 씨를 받았드래도 그 씨가 싹이나기는 애당초 글렀네.
그 양반은 죽은 씨를 가진 남정네여. 달마다 달거리 잘허는 계집헌테도
씨를 못 내리는 양반이여. 내가 백번 양보험세. 논문서는 없는 걸로 할 것이니,
오늘 당장 내 집에서 나가게. 내 서방님 잡아묵은 자네 얼굴 두 번 다시 보기 싫네."
이천수의 마누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논문서를 돌려받을 요량도 아니면서
논문서 얘기를 꺼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자기를 어수룩하게 보고,
논문서를 돌려달랬다가 돌려주면 좋고 안 돌려주어도 그만이라는 배짱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옹녀의 머리 속으로 간교한 궁리 하나가 떠올랐다.
"못 나가겄구만요. 나가봐야 집도 절도 없는디, 이 집을 나가 어디서 산다요?
글고 한 번 씨받이로 들어가면, 그래서 씨를 받으면 열 달은 그 집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소.
씨가 내렸는가, 그 씨가 싹이 나서 잘 크고 있는가, 지켜봄서 열 달은 산다고 들었소.
주모 아짐씨가 그럽디다."
어차피 억지였다. 문중 사내들을 데려다가 몽둥이질로 내쫓는다면 꼼짝없이 쫓겨날 판이었다.
문중 사내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말썽이 담 밖을 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 날 옹녀 년이 아니었다. 이천수의 마누라가 꼬리를 내렸으니,
이번에는 이 쪽에서 꼬리를 세울 차례였다. 그래서 못 나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서방 잡아 먹은 계집을 날마다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이천수 마누라가 그리하면 함께 살세, 하고 나올까봐 속은 켕기면서도
옹녀가 겉으로는 고집을 부리고 나갔다.
"그래서 내 집에서 열 달을 살겠다?"
"글구만요. 놀고 묵기에는 이 년도 염치가 없응깨, 부억일이라도 험서 살랑만요.
들 일이라도 험서 살랑만요. 나가봐야 어느 주막의 부억데기 백이 헐 것이 없는디,
발정난 사내놈들의 더러운 눈길얼 어찌 보고 산다요?
성님, 제발 이 년얼 나가라고 허지 마시씨요.
꼭 나가라고 허실라거든 차라리 이년얼 쥑여뿌리씨요.
살아서는 이 집얼 못 나가겄구만요."
옹녀가 말끝에 눈 빤히 뜨고 이천수의 마누라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참말로 우리 집 양반의 씨를 받았는가?"
"안 받은 씨를 받았다고 했다가 그 벌얼 어찌 다 감당헐라고요?
천벌이 내릴 일이제요. 은대암 부처님께 맹세코 씨럴 받기넌 받았구만요."
"그 씨가 쭉정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이렇게 허면 어쩌겄는가?"
이천수의 마누라가 은근히 말했다.
"어뜨케요?"
"자네를 이 집에 두고는 내가 하루도 맘 편히 못 사네. 내 자네헌테 집 한 채를 줌세.
산내골에 가면 소작인이 살던 초가집이 한 채 있네. 그 집얼 자네헌테 줌세.
글고 내가 돈백냥에 쌀 두 가마를 내줌세. 산내골에 가서 살면 안 되겄는가?
돈 백냥이면 자네 한 몸 일 년언 묵고 살 것일쎄."
"글씨요이."
옹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천수의 마누라가 손을 덥석 잡고 나왔다.
"그렇게 허세. 자네가 멀 걱정허고 있는가도 내가 아네.
혹시나 내 서방님의 씨가 자네 뱃속에 자리를 잡지 않았는가,
그걸 걱정허는 걸 다 알고 있네. 허나, 아까도 말했지만 내 서방님의 씨는 쭉정이네.
아직꺼정 달마다 달거리를 꼬박꼬박허는 내가 아는 일일쎄. 섭섭이네도 알고 있네.
그래도 만에 하나 자네가 내 서방님의 씨를 받아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때는 따로 생각해보세. 자네가 이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아도 좋고,
정말 자네가 아들이라도 낳아 대를 이어준다면, 내가 이 집이라도 내어줌세. 허니,
이번에는 내 말대로 허세."
이천수의 마누라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정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당장 예, 그러겄소, 하고 나간다면 너무 경망스러워 보일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겄구만요, 하고 안방을 물러나와 별채 제 방에서 한 나절을 곰곰이 궁리에 잠겨있는데,
섭섭이네가 눈을 새치롬하게 뜨고 찾아왔다.
"도독년."
섭섭이네가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먼 소리요?"
"논문서도 모잘라서, 집문서에 돈 백냥꺼정도 모잘라서 생각해 보겄다고?
참말로 니 년이 이 집에서 살고 싶은겨?"
"그렇소. 안방마님얼 성님으로 모시고 천년만년 살고 싶소.
헌깨, 아짐씨는 내 일에 감놔라 배놔라 상관허지 마씨요."
옹녀가 표독스레 내뱉는데, 섭섭이네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마루에 툭 던졌다.
제법 덜퍽 소리가 나는걸로 보아 이천수 마누라가 약조했던 돈백냥과 집문서가 들어있는 것이
. 그걸 뻔히 알면서 옹녀 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멋이요? 그것이."
"마님께서 약조허신 돈 백냥허고 산내골에 있는 집문서일쎄.
집언 비어 있응깨, 소제만 허면 당장이라도 잘 수 있을 거구만.
어서 떠나게. 마님 말씸이 따로 인사럴 챙길 필요넌 없다고 했네."
"내가 못 나가겄다먼요?"
옹녀 년이 이미 마음의 작정을 했으면서 짐짓 물었다.
"가는 것이 좋을 것이여. 마님얼 센찮게 보면 큰 코 다쳐.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분이여. 시방사 자식도 못 낳고 헌깨
성깔이 많이 죽었제만, 한 때는 그 성깔 이겨묵을 사람이 운봉인근에서는 없었구만.
아랫것덜이 잘못허면 첨 한두 번언 눈얼 감아주다가도 세 번 네 번 잘못허면,
그때는 어장얼 내는 분이여. 어디 그 뿐인 줄 알어?
한번언 오입허고 들어온 서방님의 바지럴 벳겨놓고 아무데나 내두르는 이놈의 물건을
짤라뿌리겄다고 은장도를 휘두른 분이여. 자네겉이 한찮은 계집 하나 쯤 물고를 내는 것은
식은 죽먹기구만. 존 말로 헐 때 나가는 것이 상책이여."
섭섭이네가 마루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주섬주섬 주어 섬겼다.
낯빛으로 보아 이 쪽을 겁주려고 그냥 해 보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이 한 번 죽제, 두 번 죽소. 죽일라면 죽이라제."
옹녀가 고개를 외로 꼬았다.
"허참, 내 말대로 허랑깨. 안 그러면 내 손에 지게 작대기가 들릴지 몰라,
이 년아. 마님이, 옹녀 저 년을 쳐 쥑이라고 허시면 쎄려 쥑이는 수 밖에 있간디,
정 내 손에 지게 작대기를 들게 헐 판이여?"
섭섭이네가 이번에는 눈을 부릎 뜨고 노려 보았다.
"흐따, 아짐씨가 독살시럽기도 허요이. 눈에서 살기가 도요."
옹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보따리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따로 챙겨들고 나갈 다른 봇짐도 없었다.
"쌀도 두 가마럴 준다고 했는디, 그것언 어쩐다요?"
"낼이라도 박서방얼 시켜 보낸다고 했구만."
"그럴 것이 멋이다요? 쌀얼 두 가마럴 옮길라면 어채피 구루마를 챙겨야헐 판인디,
시방 돌라고 허씨요. 며칠 동안 맴얼 앓아서 그런지 내가 다리에 히말때기가 하나도 없소.
쌀가마 우에 앉아서 갈라요. 산내골에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옹녀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털썩 주저앉자 섭섭이네가 물었다.
"쌀구루마만 챙겨주면 시방 떠날 것이여?"
"그럴라요."
"알았구만. 내가 마님께 그리 전허제."
섭섭이네가 부리나케 돌아갔다가 이내 다시 왔다.
"가세. 박서방이 구루마에 쌀얼 실어놓고 지달리고 있구만."
"그럽시다. 이왕이면 간장이며 된장겉은 건개도 좀 실어놓제요."
"안 그래도 내가 몇 가지 실어놨구만.
산내골 집이 사람사는 동네허고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건개 얻어묵는 것도 심들 것 같애서."
"고맙소, 아짐씨. 낭중에 꽃 피면 한 번 놀러 오씨요."
"흐, 썩을 년. 넘의 집 살이 허는 년이 꽃구경이 당키나 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섭섭이네가 입가에 벙긋 웃음을 띠었다.
이 년 저 년하면서 욕지기는 내뱉아도 마음이 악한 아낙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갈라요, 성님. 만수무강허시씨요."
안 방 앞에 서서 옹녀가 작별인사를 했으나 이천수의 마누라는 헛기침 한번 하지 않았다.
대꾸없는 방문을 향해 눈을 한 번 흘겨주고 옹녀가
쌀구루마 위에 몸을 싣고 이천수네 집을 나왔다.
가는 길에 주막에 들려 논문서를 찾고, 박서방한테 장국밥과 탁배기 한 병을 사 먹였다.
"사내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니 년이 그 골짝에서 며칠이나 버틸랑가 두고보자이."
운봉 주막의 주모가 함께 살자는 것을 마다고해서 그런지 헤어지는 순간에 악담을 했다.
"그런 말씸 마시씨요. 사내라면 입에서 신물이 나요.
앞으로넌 가운데 다리 달린 짐승허고는 상종않고 살라요."
"흐, 산내골에 사내초상날 일언 없겄구만. 어떤 년언 복도 많아."
주모가 침을 찍 내갈겼다.
'흐흐, 주모 아짐씨가 샘이 났는갑구만. 씨받이로 들어갔다가 헌 일도 없이
논 열마지기에 초가일 망정 집 한 채에 돈얼 백냥이나 챙겨가꼬
쌀구루마 타고 간깨, 시암이 났는갑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옹녀가 보따리에서 돈 서른냥을 꺼내어 주모 손에 쥐어 주었다.
"멋인가?"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다 주모 아짐씨 덕이 아니요? 중천비라고 생각허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