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선란도
제16회 작품상
김진진
#추사 김정희께 드리는 한지의 말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의 그림자가 어두워지기 전에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려 봅니다. 한 줌 햇살이 당신의 옷소매를 건너와 눈썹 그늘 밑을 비추었을 때를 말이지요. 그 한 순간 나를 향해 돌아본 얼굴 위에 첩첩의 언어들이 고이던 것을 생각합니다. 빛바랜 세월을 달음질쳐와 그때 비로소 손 한번 잡아 보았다고 할까요. 그것은 이울 대로 이운 내 속을 마저 퍼내고 난 뒤 고즈넉이 맞이하던 달빛울음 같은 것이었을 테지요. 눈물 자국마저 사라질 즈음이면 명치끝에 실낱 같은 한숨만 걸려 있곤 했답니 다. 그마저도 스러지고 난 뒤 방안 가득 번지던 묵향과 긴 침묵 또한 설렘이었지요. 이루지 못한 것들이 심중에 넘치다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면 비로소 심호흡을 삼키는 셈이었습니다.
고요 속을 건너온 다짐 뒤에 거친 듯 다감하게 스치던 당신의 첫 발자국들을 기억합니다. 동편 햇살에 온화하게 물든 문인석처럼 가만히 내려앉아 오랜 경지를 풀어낼 때의 솜씨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요. 바람을 가르는 방패연의 얼레를 감았다 풀고 감았다 풀 듯, 적절한 기운과 담백한 조화 속을 뉘라서 거닐어 보겠는지요. 그대와 내가 함께 숨 쉴 때면 질박한 솜씨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물레처럼 절로 아귀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수고가 아니었음을 빙긋이 웃음 짓곤 할 수밖에요. 그러니 때 아닌 장단이 절로 솟아 사박사박 풀어헤치는 일필휘지를 단숨에 받아내었던 겁니다.
알 수 없는 고아함이 봉덕사 종소리마냥 내게로 퍼지던 때의 울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 끝 한 끝 갈필 사이로 흐르는 흐뭇한 향기를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신명을 엿보는 자의 즐거움이란 감탄을 누르는 곳에 고여 드는 법이니까요. 버거운 것들을 벗어던진 그대 얼굴은 그저 하나의 자연일 뿐이었지요. 연년세세 쌓아온 내공이 내 몸 위에서 춤 출 때의 신묘함이란 기막힌 어울림이었으니까요.
묽고 여린 선들이 중심을 뻗어 오를 때의 힘찬 맥박과 알맞은 휘저음, 여리게 가로 지를 때의 부드러움과 짧게 흘러내릴 때의 단호함, 왼편과 오른편을 퉁길 때의 자유로움과 사정없이 박차고 나갈 때의 퉁명스러움, 제멋대로의 알 수 없는 불친절과 자만심이 뒤엉킨 쾌활함, 그것들의 화음을 곧장 파악할 줄 아는 예민함과 섬세함, 세상의 잡다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담대함과 예전 그대로의 천진난만함, 묵중한 배포가 흘러넘치는 아리따운 선율을 어이 마다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엇박자로 뒤섞인 한바탕의 힘겨루기였지요. 그 모두가 당신이 내게 새겨놓은 글자들의 전부인 걸 어찌하겠습니까.
초당에 한 자락 바람이 스치면 잠시 숨을 고르던 그대를 떠올립니다. 못물이 맑다 한들 세월을 걸어두었던 섬 집 울안의 참담한 기운까지 걸러주기야 했겠습니까. 본디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구차한 제 삶의 방식을 꾸려나가는 방편이 그러했거니 담아둘 뿐이지요. 야멸찬 쓰라림 속에서 허황한 기대를 몰아내던 삭풍의 순간들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습니 다. 그 시간들이 우리의 만남을 빈번하게 해주었다 해도 차고 메마른 한 때의 굴레를 타고 도는 건 차마 할 짓이 아니니까요.
상적尙迪이 마련한 진득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지나친 호젓함이 길고 긴 병통이 되었을 겁니다. 세상인심 오동지 설한풍 속에서도 발이 바르면 신발이 비틀어지지 않음을 보여준 참된 사나이가 존경스럽습니다. 이국 땅을 헤매 돌면서도 고뇌의 밤들을 지새우는 그대를 생각함이 갸륵하더이다. 그런 훈훈함 마저 없었다면 장대 끝에서 십삼 년을 나는 것이 오죽 했겠습니까. 눅눅함이 웃자랄 때마다 방점을 찍어준 그가 시원한 징검다리였음을 오래도록 담아두어야 하겠지요. 그런 그가 곁에 있었음은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물지 않는 인간의 향기란 바로 그런 것이 겠지요.
하늘빛이 이리도 맑은 날, 오랜만에 난을 치는 모습을 대하니 예전의 울적함을 모두 떨친 듯하여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날아오를 듯 경쾌한 붓의 흐름이 살아있음의 증거인 양 반갑기만 합니다. 번잡스러움을 떨치고 호방하게 펼쳐지는 기백이 온갖 헛됨을 몰아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소산吳小山이 이를 알아보았다는 것이 우스운 일만은 아니올시다. 난을 그리는 것과 참선을 수행하는 것이 결국 하나라는 참뜻을 몰랐다 한들 무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어둠이 반쯤 창살을 물들이는 시간이면 종종 그대의 안색을 살피게 됩 니다. 반월처럼 휘어진 눈가에 묵묵한 대화가 그리워집니다. 고요한 한 낮의 기운이 적적하게 이어지지 않도록 쓰윽 쓱 옮겨가는 당찬 붓끝이 기다려지니까요. 마침내 갈필이 내리는 힘과 무심히 지나는 바람소리가 쌍벽을 이루어 냅니다. 강건하게 내리쏟는 의지와 사무침이 맞물린 사이로 우리의 영혼이 흐를 만한 자국들이 새겨집니다. 끝내 빛살처럼 퍼지는 문자향서권기를 발견합니다.
상서로움이 멀리 있음을 모르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 습니다. 다만 좋은 자질을 갖춘 그대가 그만한 소양과 재주를 품고도 너른 세상과 한바탕 견주지 못하였음을 내내 가슴 아파할 따름입니다. 참된 보상은 멀리 있고 그것이 그대를 비켜가기도 했음이 애석한 일이지요. 정도에 어긋나지 않아도 풍랑이 일 때는 파도를 뒤집어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나운 인심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요를 이룬 경지가 고맙기만 합니다. 끓어 넘치는 세월을 곰삭히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차디찬 마디마디가 새롭기만 합니다. 그 속에 응결된 혼신의 가락들이 못내 자랑스럽습 니다. 인고의 시간은 흩어짐 없이 남아있고 떠도는 이야기는 아직도 무수하게 회자되고 있지요. 살아낸 자의 간결함 속을 지나는 살고 있는 자들의 소란함이 잠시 얼굴을 붉히게 만듭니다.
누군가 객쩍은 말을 하여도 무심해 지는 오늘입니다. 바랄 것 없는 세상이라고 해도 시간의 두께로 남겨진 자취를 거두기는 어려울 테지요. 후세 사람들이 깊고 얕음을 안다면 그대의 향기를 절로 읽게 될 테니 말입니다. 다만 소리가 없는 말과 말하지 않는 말 속에 그 뜻을 알아챌 이 가 몇이나 있으려는지 안타까움만 남습니다. 그대가 나를 떠나기 전에 그대와 나 사이에 고이던 시간들이 영원으로 남게 되었음은 큰 축복입니 다. 계절과 바람이 떠도는 이곳에 이제 묵언黙言만이 걸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