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0]윤후명 '협궤열차'
뒤뚱거리며 힘겹게 달리던 꼬마열차… '서민의 삶' 자체였다
목동훈 기자
경인일보 2014-10-30 제9면
지난 22일 오후 1시께 찾은 인천 소래포구.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 끝을 자극했다. 때마침, 고깃배가 밀물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포구로 들어왔다. 갈매기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솟구쳤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어시장은 젓갈, 꽃게, 생선 들을 사러 온 사람으로 북적였다.
포구를 가로질러 새로 놓인 철교 위로는 전동차가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2012년 6월부터 오이도~송도 구간을 오가는 수인선 복선 전철이다. 철교는 하나가 더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협궤열차가 다니던 것인데, 지금은 인도교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어른 둘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철교 위를 열차가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협궤(狹軌)다.
젊은 세대에게는 협궤열차란 말부터가 낯설 수밖에 없다. 1980년대 협궤열차 운행 모습과 소래포구의 풍경을 감성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이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68)이 1992년 출간한 장편소설 '협궤열차'다.
이 소설은 수인선 협궤열차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옛 애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등 협궤열차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 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중략…)
가을에 그 작고 낡은 기차는 어차피 노을 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1980년대 생활·통학열차 배경 이야기
1937년 일제가 쌀·소금 운송위해 개통
소금수탈 야욕 염전과 소래역 연결도
1995년 '운행중단' 포구는 재래항 유지
작고 느려 버스와 충돌하고도 넘어져
유원지 나들이 등 잊지못할 추억남겨
소래포구 근처에는 협궤열차 소래역이 있었다. 그 옛 역사가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변했다. 한적한 포구마을에 협궤열차 역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소래염전 때문이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경기도에서 나는 쌀과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을 인천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1937년 8월 개통됐다.
일제는 소금을 수탈하고자 소래 갯벌에 염전을 만들고, 염전과 소래역을 잇는 짧은 철길을 놓아 수인선과 연결했다. 소래습지생태공원 입구의 소염교(蘇鹽橋)는 과거 '소금 열차'가 다니던 소래염전지선의 흔적을 증언한다.
1970년대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수인선의 화물과 여객이 크게 줄면서 1973년 11월 종착역인 남인천역(수인역)이 폐쇄됐다. 이후 수원~송도 구간만 운행하다 1977년부터 화물 운송이 중단됐고, 1995년 12월에는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여객 운송마저 멈춰 종운(終運)을 맞이했다.
협궤열차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싣고 달렸다. 쪼그리고 앉은 몸빼 차림의 아낙네, 마고자 차림의 노인네, 피곤에 지친 듯 조는 더벅머리 젊은이, 칭얼대는 어린애를 어르는 아낙네… 왜 이들은 이 조그만 열차에 몸을 실었을까. 수인선은 서민들의 생활선이고 통학·통근선이었다.
윤후명은 1983년부터 약 7년간 안산에서 살았다.
그는 "황량한 땅에 알 수 없는 열차가, 열차 같지도 않은 그게 나타나서 지나다녔다. 이상한 느낌이었다"면서 "살기 좋아서 (수인선 주변) 그곳에서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고독감이나 소외감 속에 살다가도, 그 열차 속에는 그래도 삶이 있다. 서민들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도시가 옛 모습을 잃어 가듯, 소래포구 주변 역시 마찬가지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포구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와 대형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소래에서 '호구포식당'을 운영하는 최재수(79)씨의 얘기가 실감나지 않을 만큼 변했다.
"옛날에는 소래역 바로 앞에서 식당을 운영했었지. 주변이 허허벌판이었어. 아스팔트는 무슨, 죄다 모랫길이었지. 메밀도 심고 그랬어. 그때는 간이역 같았어. 동차도 하루에 3번밖에 안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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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8월 촬영한 협궤열차 내부 모습. /경인일보DB |
배들이 바다에 쳐놓았던 그물을 걷어 어획물을 싣고 들어올 때면 멀리서부터 밀물이 앞서 밀려들어 오고 갈매기 떼가 하늘에 떠오른 것을 먼저 볼 수 있다.
소래강이라고 했지만 말이 강이지 위로부터 흐르는 물도 그저 질척질척한 정도인 데다가 염분에 절고 절어서, 깊게 팬 골짜기는 썰물 때는 회갈색으로 가랑이를 벌린 채 헤벌어져 누워 있는 꼴이었다.
거기서 밀물을 기다리기란 여간 막막한 일이 아니었다. 늘 겪으면서도 정말 물이 넘쳐들 것인가 의아심을 품게 하는 것이 소래의 골짜기였다.
포구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포구만은 재래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래포구를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수인선은 현재 복선전철 조성사업이 진행중이다. 전체 노선 가운데 오이도~송도 구간은 2012년 6월 개통됐다. 송도~인천구간 공사는 내년 말에 끝나고, 수원~한대앞 구간은 2017년 완공될 예정이다.
오이도역에서 송도행 전철을 탔다. 출발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소래포구역에 도착했다. 새 소래철교를 건널 때는 전동차 안에서도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전동차는 빠르고 쾌적했다. 냉난방 시설은 물론 객차 사이에 자동문도 설치돼 있다.
협궤열차 운행 시절에는 어땠을까. 협궤열차는 궤도 너비가 762㎜로, 표준궤간(1천435㎜)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꼬마열차' '작은 철' '소철(小鐵)'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철길 건널목에서 버스나 트럭과 충돌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차체가 작고 가벼운 탓에 자빠지는 쪽은 십중팔구 '꼬마열차'였다.
"협궤열차 타봤어?" 그녀가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무슨 물음인가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중략…) "
그걸 한번 타보고 싶어서. 요전번에도 트럭하고 부딪혀서 넘어졌다면서?" (…중략…) 그 열차가 그런 식으로 넘어지는 것이 어쩌다 없지 않았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불현듯 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일었다. 그것은 욕망에 가까웠다.
실제로 차와 부딪혀 열차가 넘어지고는 했다. 동아일보 1978년 9월 19일자에는 수인선 협궤열차 사고 기사가 실렸다. 전날, 수인선 일리역 남쪽 200m 지점 건널목에서 협궤열차와 시내버스가 충돌한 사고가 났다.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이 실소를 자아낸다. 협궤열차 1개 량이 풀밭에 넘어져 있는 사진에 '버스와 충돌, 나동그라진 협궤동차'라는 제목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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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협궤열차-버스충돌사고' 사진. |
협궤열차로 옥련동에서 신흥동까지 통학했다는 이동열(60)씨는 "열차가 힘이 없어 언덕길에서 낑낑거렸던 기억이 난다"며 "속도가 워낙 느려서 달리는 열차에 뛰어오르는 무임승차도 많았다"고 했다.
소설 '협궤열차'에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오! 인천' 촬영에 수인선 증기기관차까지 동원된 일, 인천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한 남자와 소래철교 위에서 떨어져 죽은 그의 아내 이야기, 어린애가 열차에 치인 사고 등도 나온다.
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점은 수인역이었다. 중구 신흥동 '한별프라이빌' 아파트 인근에 역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화물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 옆에서는 수인선 복선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이 아파트 뒤편 골목에는 '수인곡물거리'가 있다. 과거 수인역 주변에는 큰 장이 형성됐다.
사람들은 협궤열차로 이곳까지 와서 잡곡이나 해산물을 팔았다. 연백상회 유연길(59)씨의 머릿속에는 당시 시장의 활발했던 모습이 아직도 훤하다.
"원래 시장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아파트 쪽에 노상으로 있었어. 365일 내내 장이 열렸지. 지금으로 얘기하면 도매시장 정도 된 것 같아. 옛날에는 장사가 잘됐지. 별놈의 장사가 다 있었어. 근데 지금은 '이빨'이 다 빠졌어." 지금은 장사가 잘 안돼 문을 닫은 가게가 많다는 얘기다.
협궤열차를 타고 안산 쪽으로 망둥어 낚시를 다니고는 했다는 유씨는 "협궤열차, 없애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낭만이 있었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수인역이 1973년 11월 폐쇄되면서 종착역은 송도역이 됐다. 옛 송도역사는 연수구 옥련동 송도역삼거리에 아직 남아 있다.
1985년 7월부터 1988년 1월까지 송도역장을 지낸 박철호(71) 씨는 "역 앞 시장에 수인선 풍물들이 많이 나왔다"며 "보통 2량인데, 주말에는 승객이 많아 1량을 더 달아 운행했다"고 했다. 또 "짐을 나눠 들고, 중매가 이뤄질 정도로 협궤열차 안에는 정이 있었다"고 했다.
수도권 대표 휴식 공간 중 하나였던 송도유원지를 가려면 송도역에서 내려야 했다. 박철호 씨는 "송도역에서 내려 송도유원지를 돌고 외식이라도 하면, 그보다 더 좋은 날이 언제냐"며 "협궤열차는 역사의 산물이고 주민들의 사랑을 받은 귀물"이라고 했다.
송도유원지는 2011년 9월 문을 닫았다.
열차니 배니 하는 탈것들은 공연히 사람의 마음을 들쑤시는 데 뭐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주기 때문이다. 시간을 당겨주고 공간을 넓혀준다. 새벽 협궤열차는 시간과 공간을 열며 앞으로 향하여 나아갔는데, 나는 그 작은 열차에 의탁해 과거로 나아가고 있는 나를 본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주던 그 협궤열차는 빠르고 진동도 거의 없는 전동차로 대체되었다. 최신형 전동차보다는 황량한 들판을 달리던 꼬마열차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아쉬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