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온 국민을 힘들게 했지만, 필자에게도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돌이켜보면, 전화위복의 결과인지...?
가구점과 공장을 처분하고 큰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한 나는 한참 동안 두문불출, 아는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을 때, 고교 동창 녀석이 어떻게 알고 술이나 한잔하자며 집으로 찾아왔다. 단짝이었던 그 친구는 반에서 하위권에 맴돌던 성적에도 늘 웃는 얼굴이었는데, 수년이 흘러 만나고 보니 무척 반갑기도 하고,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사업의 실패와 부도 직전의 빈털터리 신세로, 단란했던 가정은 깨지고 이혼서류에 도장 찍는 날 태어나 처음으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하나 있는 딸(당시 초2학년)마저 애기 엄마가 양육하겠다며 데리고 갔고, 그렇게 나는 이 세상 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아 근 6개월을 방황하며 지냈다.
방안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컵라면 봉지와 치우지 못한 쓰레기는 거실을 가득 채웠고, 친구의 연락을 받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못난 내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술 한잔을 나누며, 고교 시절 이야기, 서로 살아온 사연 보따리를 풀어놓고 모처럼 한바탕 웃었다.
친구는 이미 지나간 세월 원망해봤자 돌아오지 못할 일이라며, 충고와 함께 이틀 뒤 면접 준비나 하라며, 이것저것 알려주고는 떠나갔다.
친구가 알려준 곳은 꽤 규모가 있는 경기도의 모 신문사였다.
취재부 확장으로 경력사원만 뽑을 계획임에도 소위 말하는 낙하산인사가 되어버린 처지지만 그래도 새로운 길을 가고픈 마음과 학창 시절 때는 기자가 꿈인 적도 있었기에 난 자신 있게 면접을 통과하고, 늦은 나이지만(당시는 20대 초반 기자가 많았음) 열심히 배우고 따라다녔다.
기자란 무엇인가?
기자의 역할은?
가자의 자세 등등을 귀가 따갑도록 선배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취재요령, 기사 작성법, 데스크 송고 등 하나부터 차근차근 가르켜 주던 선배는 최고의 멘토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몇 해 전에 세상과 이별한 그분은 필자에게는 유일한 스승이다.
그렇게 기자로서 불타는 사명감(?)은 아닐지라도 나름, 최선을 다했고, 늦게 시작한 기자의 길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도청과 시를 오가며, 크고 작은 행사장은 늘 빠지지 않고 다녔고, 그때도 머리가 백발인 필자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는 평과 함께, 오히려 나이가 많은데도 열심히 하는 기자라고 호평이 많았다.
머리는 희고 배는 나오고,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뒤뚱뒤뚱 뛰어가는 모습을 웃는 사람도 많았지만 열심히 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오늘까지 달려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필자는 남보다 다른 점이 있다며, 조그만 일에도 칭찬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누구에게나 칭찬은 보약이 되겠지만, 특히 필자는 그것이 립 서비스라고 해도 칭찬을 해주면 몇 배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한가지 생활철학이 탄생 되었다.
즉, 누구라도 열심히 하거나, 꼭 열심히 아니라도 남에게 칭찬을 아끼지 말자!
또한 크지 않은 선물을 받거나, 조그만 음식을 대접받아도, 조금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칭찬을 하라!
예를 들면, 방금 밥을 먹고 후식으로 귤을 맛있게 먹어 더 이상 귤은 쳐다보기도 싫은데, 옆집에서 접시에 감귤을 담아 건네주었을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어떻게 아시고..., 마침 귤이 먹고 싶었다”며 “정말 고맙게 잘 먹겠다”고 말한다면, 귤을 건네준 사람도 기분이 좋아 다음에도 다른 음식을 나눠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또, 아침에 출근하면, 후배 여사원의 의상이나, 머리모양 등을 보고 아름답다! 멋지다!, 인기 연예인 누구보다 더 예쁘다 는 등의 말을 해 주면 그날 하루는 커피부터 간식까지 대접을 잘 받는 하루가 된다(요즘에는 직장 내 성희롱으로 와전될 수도 있다).
조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갔습니다(양해 바랍니다)
필자는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단독보도와 특종 등을 건지며, 취재 부장, 취재본부장 등의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경기도의 모 신문사에서 몇 년을 보낸 필자는 지방 본부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경기도 안산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경기도 안산에는 지역 언론이 약 7~8개가 있었으며, 인터넷 신문사는 몇 개 안되었다(지금은 인터넷이나, 1인 미디어 시대로 유튜브 방송인들도 무척 많이 늘었지만)
안산시는 국회의원이 4명이나 되는 곳으로, 호남사람들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경상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는 필자(고향 부산)는 늘 따돌림과, 각종모임에도 기지못하는 천대받는 신세가 되었다.
부하직원들도 경상도 상관을 대하기가 불편했는지, 가끔 본사에 항의성 제보도 심심잖게 하고했다.
예를 들면, 취재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면, 전라도가 고향인 부하직원 누구누구 기자를 보내라는, 경상도 사람하고는 말도 하기 싫다 등.
마침 필자가 경기도 안산시에서 몇 년째 활동하던 중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필자의 집은 화랑 유원지(정부합동분향소가 위치한 곳)바로 옆에 있었기에 더욱 그 사건을 밀착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시민들 전체가 트라우마에 휩싸이고, 거리는 침묵과 울분, 원한 등으로 공포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범죄(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단원고 피해 학부모들의 심기를 거슬리는 언행을 하면 즉시 폭력으로 이어지는 등)로 치안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하루가 살 얼음 판을 걷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특히 필자에게 세월호 사건(기자이기에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추정 하여)에 대해 물어오는 이가 종종 있었지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언론의 책무 중 비밀유지의 의무도 있었지만, 필자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으로 유도 질문일 수도 있어, 언론에 보도 안 된 내용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매일 정부 합동분향소에 자리를 잡고 취재를 하다 보면, 각종 단체나,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사람, 그 속에서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북적였다.
특히 전무후무한 일은 연일 세월호에 관한 기사로 도배하던 시기에 특별한 사건사고는 물론, 관공서의 보도자료조차 없어 신문은 물론 방송국에서도 보도할 내용이 부족하여 전국일간지가 하루를 휴관하는 일도 발생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어쩌면 먼 훗날 역사를 평가 할 때 진실은 나타나기 마련이기에 세월호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12부] 기자의 사명을 넘어, 지역발전을 위한 노력
첫댓글 먼 길 돌고 돌아 언론의 길로 오셨습니다.
언젠가 글에서 읽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좋은 삼 금 - 황금, 소금, 지금-
그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고.
국장님께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현재 국장님을 뵈었으니. . .
지금의 모습이 가장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검보다 강한 펜을 쥐고 있는 손.
한 번 휘두르면 세상을 감동으로 물들이는 연금술사.
늘 응원합니다. 오늘도 춤 추셔야겠습니다. 빙그르르~~~!
우와~^^
몸치 인걸 어떻게 아셨을까?
감솨~^^
또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