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말까는 없다
하얀 뭉게구름이 군데 군데 하늘을 떠다니고 햇살은 노객들의 체온을 후끈 후끈 달아 올리고 있습니다. 30℃를 오르내리는 낮 시간대에는 외출을 삼가하라는 폭염 주의보가 스마트폰에 뜹니다. 씨모우 위짜추 서류바 조단서 까토나 백년지기 노객들에겐 그저 마이동풍으로 흘리기 일수입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에는, 태풍이 엄습하는 날에는, 오늘처럼 30℃를 넘나드는 폭염에는 밤이면 잠도 안 자고 배가 고파도 밥을 안 먹으며 숨 조차 안 쉬는 인간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영하 10℃ 이하라고, 너무 덥다고 산행을 마다하는, 약속을 깔아 뭉개는 얼치기 인간들은 많기도 합니다. 그날의 날씨에 따라서 노심초사하거나 까말까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백년지기 노객들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작렬(炸裂)하는 태양빛을 저 마다의 멋진 선그라스로 자외선을 차단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운길산역을 뒤로 하고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는 옛 양수대교를 건넙니다. 왼쪽으로는 물의 정원의 다리 아치(Arch)가 운길산을 배경으로 하얀 포물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노객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양수철교와 예봉산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저 멀리 팔당호에는 가득한 물결로 평화스럽기 까지 합니다. 다리 밑으로 내려섭니다. 북한강 물가를 가까이 끼고 노적봉 골무봉으로 오를 작정입니다. 잠시 걸으니 커다란 은행나무가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400여년 이상의 온갖 풍파를 홀로 견뎌낸 보호수입니다. 행목유상(杏木有常)이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레 꽈리를 트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인간백세불급(人間百歲不及)이라지만 400년 이상을 이 곳 이 자리 한 곳에서 무엇을 바라며 누구를 기다리며 그렇게 긴 긴 밤을 지새웠을런지 대답이 없습니다. 흐르는 한강수에 온갖 고뇌와 절망감을 씻어 버리며 통한의 눈물로 버티여 온 역사의 산 증인(證人)과도 같습니다. 초라한 노객의 마음에는 경외감(敬畏感) 마저 듭니다. 타는 목마름을 시원한 얼음물로 씻어 내리며 발길을 재촉합니다. 더 이상 물가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없으매 북한강로로 올라섭니다. 벚나무 열매 뻦지가 까맣게 깔린 도로 곁을 줄곧 걷다가 양수1리 마을회관으로 방향을 틉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펜션 양의 집들이 띄엄 띄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길가에는 살구가 노오랗게 익어가고 탐내는 이 하나도 없습니다. 몇개를 입안에 넣으니 쌔큼 달콤한 향기가 침샘을 자극합니다. 야생 살구답게 열매 자체가 씨로 가득하여 살구의 살은 껍질 뿐입니다. 마당재를 향하여 오릅니다. 벚고개 쉼터에서 배낭을 풀고 빵이며 찰떡 배 초코렛 요구르트 얼음물로 숨고르기를 합니다. 청계산 중턱 정도에서 다시 양수역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갑니다. 부용리 버스정류소 앞에 구멍가게로 들어갑니다. 시원한 막걸리 두병과 골뱅이 통조림과 참치통조림으로 처진 몸을 추스립니다. 김치도 막걸리도 추가하여 권주가를 곁들이니 바로 시골 주막이 따로 없습니다. 마늘을 추스리던 주인 할매의 넋두리를 거둘며 생년월일이 막내 보다는 한살이 많은 누나입니다. 농사에 얽매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흔하디 흔한 여행 한번 제대로 못 해 보았다는 푸념도 털어 놓습니다. 영감을 원망도 해 보지만 방법이 없다는 체념은 마늘 다듬는 손놀림으로 풀고 있습니다. 잘 먹었다는 인사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양수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네시 사십분이 지나고 있습니다. 출출한 위장을 달래려고 장어 맛집 2층으로 올라갑니다. 장어가 노랗게 익기도 전에 푸레쉬 네병 막걸리 맥주를 권주가로 띄웁니다. 푸레쉬 두병 추가로 얼큰한 기분이 더위에 지친 심신을 날려버립니다. 양수역 앞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뜨거워진 간열(肝熱)을 조금이나마 식혀봅니다. 2차의 아쉬움을 마음 속에 꾹꾹 누르며 본연의 원위치로 냉정을 되찾기로 합니다. 언제까지 이 다짐이 지속이 되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2017년 7월 1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