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들이(3)
살아가면서 지난날의 교유를 통한 다양한 우정과 사랑에 대한 보은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은 사람의 기본도리이다. 당대에 그치지 않고 맺어진 도타운 정리를 후대에 전승하여 세교(世交)의 전통을 이어가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은 있어도 선뜻 실행하기 어렵다. 바쁜 일상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시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평소 자주 찾는 수도권 부근의 명소가 바로 『강화도』의 〈전등사〉와 『석모도』의 〈보문사〉이다. 1974년 이른 봄에 〈전등사〉를 찾은 이후 불현 듯 외출을 하고 싶으면 들르는 곳이다. 따로 지인과 그곳에서 합류하여 정다운 대화와 경내의 산책은 물론이고 맛있는 식사를 하기도 한다. 주로 만물이 약동하는 이른 봄과 따사로운 햇살이 무르익는 초가을에 이곳을 찾으면 보람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들르는 곳이다. 해변의 카페에서 떨어지는 석양의 낙조와 살아 숨 쉬는 갯벌이 언제든지 손짓하며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과의 추억이 담긴 나만의 숨겨둔 보물과도 같은 곳이다. 최근 교량가설로 접근이 편리한데 뱃길을 따라 무리지어 군무(群舞)를 추던 갈매기는 사라져 아쉽다.
언젠가는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교동도』를 찾았다. 영욕이 서린 유배지는 안정되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후대의 무관심을 절감토록 하였다. 치욕의 역사도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다수는 「연산군」의 흔적과 역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왔을 것이니 언젠가는 제 자리를 잡아가길 바란다. 「광해군」도 한 때는 이곳을 거쳐 갔고 이후 이 섬은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한편 기독교의 뿌리가 깊어 다수의 관련 시설이 남아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요즘은 섬 지방을 쉽게 다닐 수 있는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한 줌의 섬에 손님들이 밀리면서 전통시장과 카페 혹은 다양한 음식점들이 잘 구비된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조금 이동하면 바로 황해도의 〈연백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섬의 크기에 비해 제법 널찍한 저수지가 있어 많은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곳 『교동도』에 입도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선배님을 방문하였다. 오랫동안 담담한 교유를 통해 항상 변함없는 관심을 주신 분이다. 한 일 년 전에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한적한 섬 마을로 이주하여 조상에 대한 선양(宣揚)사업을 준비 중이시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사연들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부터 주변의 인사를 소개하여 교유의 폭을 넓히도록 주선함은 물론이고 공직자로서 바른 모범을 실천한 분이다. 1979년경에 시골의 본가를 방문했을 때 선친께서는 「근공(槿公)」이란 호(號)와 함께 ‘근공지거(槿公之居)’라고 글씨를 써 주셨는데 아직까지 서재에 잘 보관중이라고 하였다. 호(號)처럼 고고한 무궁화의 기질을 발휘하여 보수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마땅한 이름인 듯하다. 그 글씨는 선친의 몇 안 되는 유물이라 나로서도 매우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필자의 결혼식 참석과 선친의 작고 시 조문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지낸다.
평소 과묵한 성격이지만 논리적이면서 출중한 사고와 촌철살인의 언변은 자타가 인정한다. 종종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화 그 자체에 몰입하지 않으면 서로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고사에 나오는 「가섭(迦葉)」의 잔잔한 미소 같은 표정 속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 때는 역대의 다양한 고위 인사들의 연설문 작성과 번득이는 대북정책을 제시한 막후 조정자였다. 한동안 실질적인 보수의 논객이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애국충정의 다양한 명문장으로 향도(嚮導)의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특히, 지난 1989년 초에는 런던 출장길에 안내를 받아 3일 동안 구경하였다. 나아가 문학과 철학적 감성이 풍부하고 낭만적인 흥취를 아는 분이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타인의 말소리에 다소 경청을 소홀히 하고, 매우 독단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누구나 생각이 다르니 크게 개의할 일은 아니다. 여하튼 예전 두주불사의 카리스마가 넘치던 호쾌한 모습은 무심한 저 세월의 편린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우선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는 생가 터에서 만나 설명을 들었다. 일제 시 어려운 시절에 시각장애인들에게 ‘문자(훈맹정음)’를 창안하여 문명의 빛을 선사하신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선생의 기념사업이 10년 째 진행되는 곳이다. 조그만 섬 지방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식 학문을 배우고도 이를 사회의 냉대를 받고 있던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창안한 공로로 정부는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현재는 서해 바닷가에 생가 터가 복원되었으며 간단한 경위를 알려주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선생의 흉상에는 민족의 시인인 「노산 이은상」의 추모 글이 새겨져 있어 더욱 그 위업을 칭송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쉽지 않은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모님의 역할이 대단하였다. 과연 여장부다운 기백과 교수님다운 다양한 지적 호기심이 좌중을 압도하였다. 「송암」 선생의 외손녀딸로서 이런 오지까지 들어와 불편을 감수하고 선대의 업적을 빛내는 노력을 하기란 남자들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어서 인근 〈남산포〉항 부근에서 점심을 하였다. 저간의 집안 사정, 일련의 세상사에 대한 감회, 인간의 정도와 명예로운 삶과 책임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요즘이 한창 꽃게 철인데 바다건너 『석모도』를 바라보면서 제철 음식을 음미하였다. 커피를 마시러 간 인근의 〈대룡시장〉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전통시장이다. 조그만 골목길로 이어진 곳에 다양한 특산품과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옛 정취를 느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가까운 곳에는 일상에서 벗어나 성큼 다녀올 수 있는 명소들이 즐비하다. 자연 속에서 세상의 풍진을 털고 복잡한 만사를 잊고 지내는 여유를 종종 갖길 희망한다.
모처럼 두 내외분과 함께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잘 보냈다.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맑고 고운 바닷가의 공기와 섬마을의 정취 그리고 영양만점의 특산물을 섭취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보니 젊은 시절에 인간적인 신뢰를 주고받으며 지내온 세월이 그냥 무심코 흐른 것만은 아니었다. 문득 어느 후배에게 비쳐진 나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비록 세월 따라 세상을 대하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간으로서 맺어진 정리(情理)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스스로 주변에 행여 소홀한 면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 부근에 살다가 지금은 예산으로 이사한 지인이 생각났다. 다음 기회에 「추사」의 생가 부근에 살고 있는 그를 찾아보기로 작정하였다. 두 내외분의 환대에 감사하며, 선양사업이 좋은 결실을 맺어 후대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정표의 역할에 충실하길 기원하였다. (2024.5.26.작성/5.29.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