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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
-김지란 두번째 시집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감동 기제를 고도화한 문장으로 소통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언어의 시적 순기능과 확장성 그리고 명징성에 관한 말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시가 품은 기운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시를 구조하고 있는 시어들로 형용한 사유가 자연스럽게 문장의 적층(겹)을 이뤄 감싸준다. 평범한 언어가 갖는 단선적인 의미보다 질료적 정황까지 담지한다는 의미다. 문장 속에서 체험적 정서와 욕망의 투사로 발화한 상상력을 부양하는 의미언은 당연한 것이다. 시가 일반적인 언어로 이행되는 의사 전달체가 아니고 다층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더 나아가 시로 말해야 하는 것은 사실적인 보편성에서도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 위선의 언어로 화려한 분장을 하듯 치장한 시어는 진정성과 멀어 가식임을 알게 된다. 특히 감정선에 뇌동한 행간의 부림은 불필요한 시어를 조작한다. 그렇지 않기 위해 대상에 대한 통찰과 냉정한 언어의 절제까지 의식한 표상이어야 한다. 누구도 가 보지 못한 시의 길은 위 몇 가지만 보더라도 매우 신중해야 함과 동시에 최대한의 충족을 위해 가야 할 험난한 길임을 말해준다. 더불어 시란 문장은 항상 새로움에 대한 실천으로 시적 발현을 개연성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추가된다. 이외에도 더 많은 시론을 탐구하며 시를 써온 김지란 시인이 추구해 온 문학은 삶과 병행하는 것이어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많은 고투와 난관에도 단절되지 않기 위한 투지의 결실로 첫 시집 《가막만 여자》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를 통해 보여주는 언어의 변신은 상당한 긍지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 변화를 이룬 알레고리는 다양한 시적 상징으로 진전을 거듭한 것이어서 사유는 깊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혼자라서 외롭거나 그렇다고 홀가분한 것만은 아니어서 스스로 매달린 매듭을 풀지 못한 채 목울음을 울어야 하는 ‘목어’다.
화암사
꽃의 한 생애가 내리는 누각
매화나무 창문을 뒤로하고
머리가 용龍인 물고기 한 마리 걸려 있네
배를 가르고
온몸 가득했던 탐. 진. 치를 빼낸 텅 빈 고요
한때는 근심의 그늘이 깊어
어딘가에 숨고 싶었네
이 절寺 저 절寺 다니다가
불명산 자락에서 꽃비를 맞고 늙어가는
그대가 맘에 들어 그 속으로
세貰 들려고 하네
한동안 모든 걸 닫아걸고
안거에 들 수 있다면
새벽 숲의 새들
서늘한 바람, 알 수 없는 눈길들
허공으로 날려버린
나를 떠난 것들이 다시 돌아와
가만가만 내 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겠네
나를 잃어 가는 것인지
찾아가는 것인지
그러다
밤낮으로 두드리는 것들의 말이 귀에 익으면
내 속의 나를 꺼내
푸른 바다로 훨훨 날아 승천하려 하네
-<우화루 목어> 전문
“머리가 용龍인 물고기 한 마리”가 존재한다. 화암사 우화루의 목어木魚는 스스로 말을 발설하지 못한 업보를 안고 태어났다. 그래서 누군가가 목어의 몸통을 두드려줘야 몸속에 든 말을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해 고유한 언어를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바다로 흘러들지 못하고 타자에 의해 물고기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이니 본성은 잊어야 한다. 여기까지 흘러온 시간만을 기억하는 목어의 슬픈 내력이다. 모든 것을 잃고서야 그 대가로 얻은 형상을 자신의 것인 양 부여받은 목어, 정처 없는 유랑을 끝내고 싶어 그토록 소망하며 “이 절寺 저 절寺 다니다가/ 불명산 자락에서 꽃비를 맞고 늙어가는/ 그대가 맘에 들어 그 속으로/ 세貰 들려” 찾아든 곳의 안도가 깊다. 모든 것을 거저 얻은 것이기에 더는 무엇을 또 원하랴. 이제 욕망 훌훌 벗어던지고 본래의 푸르렀던 나무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망 하나뿐 “새벽 숲의 새들/ 서늘한 바람, 알 수 없는 눈길들/ 허공으로 날려버린/ 나를 떠난 것들이 다시 돌아와” 준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가만가만 내 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겠”다는 화자의 참회 같은 간절함은 그토록 원했던 푸른 과거로의 귀환인 것이다. 바다를 가리키는 나침반(소리)을 따라나서려는 본능은 아직도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욕망이다. 그토록 궁극 하던 지점은 오래전부터 소망했던 나무의 꿈이었고 의식으로 현재화되면서 자아의 주체를 각성하게 한다. 찰나처럼 스치는 근원은 자신도 모르게 육화된 대상에서 사유한 응축까지를 궁리하게 한다. 그 시간은 항상 현재라는 모습으로 재현되지만, 그것 또한 인연에서 비롯한 과거라는 무의식에서 작동한다.
핸드폰을 요리저리 허다봉께 사진이 나오더라
그걸 본께 어찌나 반갑든지
꼭 느그 아부지 살아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봤당께
기운이 내려앉아 당신 몸도 간수 못 하는데
그 순간 생기가 돌았을까
느릿한 말에 곧은 심지처럼 힘이 박혀 있었다
이십 대에 남정네 따라와
비릿한 갯벌에 닻을 내렸던 어머니
아버지의 바다에 정박한 조그만 배였구나
당신 보내시고도
닻을 거둬들일 줄 모르는 배
닻에 붙은 따개비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구나
인연이라는 밧줄로 묶인 고독한 제자리
바다 내음
당신이라는 닻꽃으로 피어났다
*닻을 닮은 꽃 이름
-<닻꽃> 전문
사람은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고 경과한 과거를 현실처럼 되돌아보며 지극하게 순해지는 감성체다. 한평생 연을 맺어 사노라면 알콩달콩 좋은 일만 있을 수 없기에 선택을 통해 기억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애매하게도 나쁜 기억보다 가슴 아린 추억으로 새록새록 돋아나 산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 놓는 것이 망자亡者다. 부부라는 인연으로 만나 고락을 함께 한 연유가 크다. 하지만, 두 분의 삶을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아버지가 꿈속에서 보인다는 어머니다. “핸드폰을 요리저리 허다봉께 사진이 나오더라/ 그걸 본께 어찌나 반갑든지/ 꼭 느그 아부지 살아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봤당께”라며 반색하는 엄마다. 사별 후 수년이 흘렀으니 훌훌 잊고 기운도 차릴 만 한데 나날이 더 쇠약해져 가는 엄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그런 건가 싶다가도 안타까운 슬픔이 도지는 것은 “이십 대에 남정네 따라와/ 비릿한 갯벌에 닻을 내렸던 어머니”는 화양 바닷가에서 홀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배’처럼 그저 들고나는 바다의 물때에 맞춰 낡은 목선의 뱃전을 들썩일 뿐이다. 남편 떠나보낸 상실감을 털어내지 못하고 ‘닻’에 붙은 ‘따개비’처럼 “인연이라는 밧줄로 묶인 고독한 제자리/ 바다 내음/ 당신이라는 닻꽃”으로 조금사리 물 때 따라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엄마가 여수시 화양면 ‘발통기미’ 바닷가에서 하얀 닻꽃으로 피어 웃고 있다. 살며 지독한 아픔을 겪었어도 꼭 가슴속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A4 종이 서류 모서리에 눈동자를 스쳤다
원시림을 빠져나온
빗방울들이 내게로 왔다
밤새 그치지 않는 호우주의보
첫사랑, 첫출산, 첫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깜깜하고 어두운 혹독한 시절의 맛
나무는 어디에 많은 빗방울을 뭉쳐 숨기고 있었을까
아픔을 보듬고 따뜻한 흙빛으로 돌아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속말이 일시에 밀려왔다
보이지 않아 서서히 잊히는 것들과
보이는 모든 풍경의 비밀을 읽어내는 일
나무들의 이력을 겨우 정독하고 나서야
아픈 시야가 맑아졌다
처음 햇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돌담 위 담쟁이덩굴에 한동안 붙들려
내게로 오기까지의 경로를 생각했다
나이테보다 깊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해묵은 나를 깨운다
눈을 다친 이후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눈물의 이면> 전문
간혹 순백의 종이가 파리하도록 가냘프게 보였지만, 모서리를 세울 때가 있었다. 그랬어도 설마 ‘칼’ 끝을 세워 나를 겨눌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삿된 마음도 모른 채 ‘너’를 불러 허술한 마음을 종종 알려주었고, 여의치 않으면 길게 써 내려간 비망록을 매정하게 내친 적도 있었다. 너를 끝까지 믿었기에 일말의 미안함을 가졌던 적도 없고, 세상살이란 것이 다 그런 거라며 더 많이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랬던 것을 앙갚음이라도 하려 했던 것인가? 순간 “A4 종이 서류 모서리에 눈동자를 스쳤다”며 저 무심한 듯 순한 하얀 속에서 칼끝을 치고 들어와 동공을 덮친 것이다. 아뿔싸 늦은 후회는 소용없는 것으로 딱히 슬픔과는 먼, 얇은 종이를 촉감으로만 분별하다 벌어진 일이다. 한참의 통증이 멎은 뒤 생각해 보니 종이이기 이전 우람한 나무였단 것을 떠올렸다. 지금은 하얗게 표백한 종잇장에 불과하지만, 직립의 본성을 잃기 전 치열한 경쟁에서 모질게 살아남은 ‘나무’였단 것을 잊은 자신을 반성한다. 통증으로 깨달은 지난 시간의 교만했던 삶의 함수가 ‘나’로 환기되면서 “빗방울들이 내게로 왔다/ 밤새 그치지 않는 호우주의보/ 첫사랑, 첫출산, 첫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깜깜하고 어두운 혹독한 시절의 맛/ 나무는 어디에 많은 빗방울을 뭉쳐 숨기고 있었을까”라며 하찮게 여긴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과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은 더 애처롭단 것을 깨달으며 가슴속 억눌러 있던 참회가 눈물로 흘러나왔다. 생애 상처 같은 시간을 숙명처럼 베어 물고 태어난 것들이 죄다 버림받았어도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매몰차기만 했었다.
바람을 받아낸
낡은 갑바에는 먼바다의 풍랑이 새겨져 있다
파도치는 길목에서
어군탐지기처럼 사셨던 아버지
돌아오는 뱃고동 소리에도 비린내가 묻어왔다
요양병원 병상
산소호스를 꽂은 아버지의 숨소리는
부레 속 희박한 공기에 의지해
못다 쓴 바다의 서사를 기록하려는 듯
비릿한 필체를 품어냈다
-<비린내> 부분
어부의 삶을 살아온 “당신이 남긴 비릿한 내음이 깊”은 향수가 되어 그립다. 아버지의 몸은 온통 비린내로 진동했고, 어릴 적부터 익숙해진 생선 냄새가 되레 좋았다는 화자의 말이다. 첫 시집 《가막만 여자》에서 “여전히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가막만 바다// 그 거대한 원고지 앞에 나는 다시 서 있다”는 화양(여수시 화양면) 바다는 아버지의 노역 같은 생으로 스며든 비린내를 기억한다. 아련함은 마음속 잊을 수 없는 상처처럼 속절없는 그리움이 된다. 화양면에서도 외진 바닷가 수줍은 포구가 달빛을 불러 엄마를 비추는 ‘발통기미’ 바닷가, 작은 목선을 내려놓으면 홀로 물때에 맞춰 찰싹찰싹 뱃머리를 두드려 아버지를 불러내곤 했다. 아버지한테 잡힌 물고기가 목선木船의 흘수선吃水線 위로 끌어올려질 때 사나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 목선의 선창에 달라붙은 생선 비늘들이 아버지의 마음처럼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였다. 바다에서 별이 되지 못한 물고기가 바람 부는 날이면 유난히 비릿한 바다를 비집고 나왔다. 아버지의 삶으로 진동하는 생선 냄새는 생의 깊이를 알 수 없듯 끝없는 파도처럼 그리움의 바다를 드나들었다.
종화동 부둣가
안강망 선원들 육지로 발을 내딛는다
파도에 깨지고 바람에 부서지다 들어오는
바다 사내들을 위로해주는 조금 때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마중물
한 사나흘 분분히 일어나는
바다의 소문에는 레이더를 거두고
물살 센 이곳에 다시 닻을 내려
새로운 그물을 투망 해놓았다
만선의 꿈과 해풍에 달궈진 심장은
어군 탐지기 대신 사람들의 눈만으로 관측이 된다
만년 허기진 바다 사나이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속말들
세류에 휩쓸리고 부글거리다
기어코 한바탕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게 사람 사는 거라 위로하는
맥주 거품이 넘쳐흐르는 곳
출렁거리는 세파 위에서 만선호프호
다음 사리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들의 어창에는
환한 보름달이 가득 찰 것이다
-<만선호프 > 전문
‘만선호프’가 위치한 곳은 육지다. 배의 어창을 가득 채우고 싶은 어부한테 ‘만선’은 간절한 소망이다. ‘만선’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의 상징적 이미지로 환기된 탓이다. 김지란 시인은 여수 화양 외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갯내 물씬 풍기는 《가막만 여자》란 첫 시집을 통해 여수를 상징한 바다 이미지를 서정적인 정서로 형상화 한 역작이다. 우리가 알지 못한 밀물과 썰물을 타고 드나드는 뱃사람들의 애환이 담담하게 일렁인 바닷가의 삶이 그렇다고 꼭 슬프거나 고통스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삶의 질곡을 즐기는 듯 살기 때문이다. 화자는 안강망 어선을 타고 나간 이십여 명의 어부들이 ‘물 때’에 맞춰 항구로 귀항하는 것을 매번 봤을 것이다. 뱃일이 힘들다 보니 기피 직종이 된 안강망 어선의 선원들도 다국적인들이다. 필리핀과 베트남, 한국인이 뒤섞여 보름 동안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 보면 육체적 피로와 함께 뭍에 대한 향수가 고조될 것이다. 어부들에게 보름 만의 귀환은 휴식 그 이상의 활력을 충전할 기회다. 그들이 하선한 곳은 “종화동 부둣가/ 안강망 선원들 육지로 발을 내딛는다/ 파도에 깨지고 바람에 부서지다 들어오는/ 바다 사내들을 위로해주는 조금 때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마중물”로 그날을 손꼽았을 것이다. 어부들의 마음속에 뜬 그믐 달빛으로 건너온 시간의 파도는 생사를 건 고투 그 자체다. 간간이 들려오는 바다의 소식이란 것은 물빛 가득한 적막과 외로움이 전부다. 경험 많은 어부들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해 “물살 센 이곳에 다시 닻을 내려/ 새로운 그물을 투망 해놓았다지만,” 쉽지 않다. 바다에서는 그물을 거두지만, 이제는 “만년 허기진 바다 사나이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속말들/ 세류에 휩쓸리고 부글거”린 바다 남정네들의 욕망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어부들의 거칠어진 객기를 어디다 풀어놓을 것인가? 그들은 바다보다 더한 격랑이 이는 곳이 유흥가란 것을 간과하고 있다. 무방비로 상륙을 하고 나면 만만찮은 파랑을 맞을 것이다. 그들이 물고기처럼 포획당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 시달린 갈증은 물을 마시면 그만이지만, 육지에서의 허기는 거품 가득 예쁜 아가씨의 손맛으로 올린 500cc 맥주가 최고다. 연거푸 들이마신 맥주 탓에 취기가 돌 때쯤 환상의 시간을 잊고 몸을 배에 실어야 한다. 사위가 잦아든 밤바다에 뜬 ‘환한 보름달’이 그녀처럼 아른거린다. 며칠 전 ‘만선호프’의 구석자리에서 은근슬쩍 눈길 건네던 그녀의 얼굴이 번져온 것은 한참 뒤였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참새 한 마리 푸드덕 받아 안았다
원래부터 새의 영역인 듯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부딪치는 발랄한 날갯짓
깃털로 쓰는 자유를
한 편의 시라고 말해도 되나
하나둘 늘어가는 연작시에
먼 과거의 영혼인 듯
새의 필체를 따라다닌 시간
한 보름쯤 몸을 바꾸면
오래전 가슴에 묻어둔 슬픔 한 자락
날개 돋은 시로 변할까
오후의 햇살이 펼쳐지는 순간
아무 일 없이
새는 잠시 닫힌 허공을 찾아
유유히 날아가버리고
깃털 하나 잡아채지 못한 나는
결제 처리할 서류를 한 장 두 장 넘긴다
날개 품은 겨드랑이가 가렵다
-<불안한 자유> 전문
새가 날갯짓으로 얻은 자유를 만끽하다 엉뚱한 곳으로 불시착했다. 본능으로 파동을 읽어내고 깃털을 눕히거나 펼친 횟수까지 가늠해 날아들었을 새였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난관에 처해 버렸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참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든 곳은 화자의 사무실 안이다. 새들의 영역이 아닌 곳의 족속에 놀라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새에게는 비상 상황인데 다른 방도가 없다. 날아든 경로를 틀어 다시 빠져나가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그렇지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오래전 사무실이 들어서기 전 그 땅은 새들이 비행하던 공역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무실 안 꼬여버린 경로를 찾느라 퍼덕이는 새의 “깃털로 쓰는 자유를/ 한 편의 시라고 말해도 되나”라며 화자는 “먼 과거의 영혼인 듯/ 새의 필체를 따라다닌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새’가 왔다 간 의미와 간단없이 날갯짓하는 몸짓은 절명을 앞둔 절창인 것이다. 죽음 이전 생애를 적어나가는 ‘새’의 문장을 또박또박 필사한 화자다. 한동안의 찰나를 휘젓고 간 새가 자유로워지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으로 드디어 “오후의 햇살이 펼쳐지는 순간/ 아무 일 없이/ 새는 잠시 닫힌 허공을 찾아/ 유유히 날아”갔다. 사무실에 갇혀 ‘나’ 스스로 포기해 버린 ‘자유’를 생각했다. 훨훨 난다는 것의 또 다른 유형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문한다. 몸속 원초적인 생명 본능은 실천궁행으로 극복이란 말과 동일하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는
얼굴의 모반
수국꽃숭어리로 가리면 아무도
못 볼 거라며
희미하게 웃던 언니
꽃이 된 언니와 별들의 무리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별들의 소리가
빈집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수국 수국 환한 발음 곁에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침묵의 축제> 부분
이소와 귀소를 생각해 보았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텅 빈 개념의 ‘빈집’은 살던 사람이 떠나간 이후를 말해준다. 물론 이소란 말은 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을 말하는 거지만, 딱히 구별할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사람 떠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을 지키고 있는 쓸쓸한 마당과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슬레이트 지붕이며 마루, 외양간은/ 오랜 기다림에 지쳐” 더 초라해졌다. 물꽃이라 불리는 ‘수국’이 한가득 피었다는 ‘빈집’의 풍경을 보여준다. “여름날 빛과 적막을 물에 풀어/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 물길을 열었다”는 수국의 아름다운 만개로 적막하던 집마당이 환해졌다. 오래전 그 집에 살던 수국처럼 고왔던 ‘언니’를 떠올린다. 그 언니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는/ 얼굴의 모반/ 수국꽃숭어리로 가리면 아무도/ 못 볼 거라며/ 희미하게 웃던 언니”가 예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저 어디쯤에서 환하게 반겨줄 것 같은 언니가 ‘빈집’에서 얼굴에 핀 ‘모반’을 보이며 수줍게 웃고 있다. 물의 마음을 닮아 핀다는 수국을 보며 언니의 고운 마음을 생각했다. 언니가 감당했던 상처가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준 것이다. 오랜 시간 가로질러 온 아련함이 가슴을 거슬러 역류해 온다.
<노랑바위>라는 시를 통해 화자의 가슴으로 기억하는 색감처럼 번져온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 가면 돌곶이가 나왔고 먼저 눈에 띄었을 ‘노랑바위’가 그곳에 있다. 그 ‘노랑바위’를 둘러싸고 있던 곳이 세월이 흘러서인지 구멍 난 퍼즐처럼 당시와 달라진 것이다. 한적한 어촌 ‘발통기미’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즐겨 찾던 ‘노랑바위’란 것도 어린 눈에 비친 ‘노랑’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가 도감의 색도처럼 선명한 ‘노랑’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던 소녀적 꿈이 착색된 “고향집 갯가에는 유난히 노란색을 가진/ 동산 같은 바위가 있었다/ 혼자 들어가면 꽉 차던 바위 속 동굴/ 나만의 은신처”여서 마냥 좋았다가도 동굴 안으로 바닷물이 밀쳐 들면 불안해지곤 했다. 유년의 셀렘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이 사라진다는 것이 슬픔 같기도 했다. 긴 세월을 더듬어 찾아간 동굴 안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고교를 졸업할 즈음을 떠올리며 “나는 여기 어떤 마음을 가둬놓고/ 객지로 떠났나”라고 물어보지만, ‘노랑바위’는 말이 없다. 동굴 속 “깊은 움/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려”보는 ‘나’를 알아본 듯 여전한 ‘파도’가 짠내처럼 훅 밀려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물빛’과 ‘밀물’이 차오르는 ‘발통기미’ 바다, 유년의 꿈이 가슴만큼 차오른 그곳에서 누군가는 낭만의 한때를 새기고 있을 것이다.
돌산 군내리에서 연락선을 타고
대두라도* 가는 길
오래전 연락이 끊긴 이름을
반기는 파도가
뱃머리로 다가와 안부를 묻고 있다
바다 깊숙한 수심을 전하느라
간간이 흔들리는 부표들
출렁거리는 심연을
빨강과 파란 깃발로 흔들고 있다
작은 섬을 건너가는 배
마치 물수제비처럼
바다의 수면을 스칠 때마다
환호하듯 손 흔드는 횡간도와 나발도의 기척만큼
뱃고동 소리 깊고 길어
고요했던 인연들을 설레게 한다
당신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어
수없이 던졌던 말들 잔잔한 파도에 안겨
잠시 이별한 숨결을 고르고 있다
뱃머리를 틀면서도
이름 대신 길게 내뱉는 뱃고동이
유별한 사랑처럼 당신을 부르고 있다
* 여수시 남면에 있는 섬.
-<소통하다> 전문
섬과 섬으로 다도해를 이룬 여수 연안은 점점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풍랑이 이는 날만 빼고 하루 한 번, 아니면 며칠에 한 번 정도 부정기적으로 배가 오간다는 섬들은 언젠가부터 쓸쓸해졌다. 육지로 말하면 산간 오지쯤인 “돌산 군내리에서 연락선을 타고/ 대두라도 가는 길” 파도가 뱃머리를 가르는 연락선이 기적을 울리면 “오래전 연락이 끊긴 이름을/ 반기는 파도가/ 뱃머리로 다가와 안부를 묻고” 깊숙한 바다의 심연을 전하느라 부표에 매단 빨강과 파랑 깃발이 부산하게 나부끼는 데 그 속내는 안녕하다는 마음일 터, “바다의 수면을 스칠 때마다/ 환호하듯 손 흔드는 횡간도와 나발도의 기척만큼/ 뱃고동 소리 깊고 길어/ 고요했던 인연들을 설레게 한다”는 섬사람들만의 그리움을 전하는 속말이다. 뱃머리를 트는 항로의 수심은 여전한데 뭍으로 나갈 사람 없다는 섬을 두고 “당신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어/ 수없이 던졌던 말들 잔잔한 파도에 안겨/ 잠시 이별한 숨결”을 고르지만, 쓸쓸함이 번져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응당 만나야 할 당신은 보이지 않기에 깊은 속내 숨긴 바다를 돌아나가는 뱃고동이 유정有情한 풍경을 더해준다. 누군가에게 쉽게 던진 말 한마디가 소중한 생의 의지가 되거나 상처가 되기도 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삶의 고비를
어떻게 넘겼던가
두 눈 질끈 감고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지
지금 내 모습이 딱 공벌레구나
혼자 소리 없이 웃는데,
“고구마 캐다가 날 새겄다”
시어머니 지청구가 날아온다
이십 년 동안 넘지 못한 큰 산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
-<고구마를 캐다가> 부분
새소리에 주위로 시선을 돌리니
동그런 봉분들이 모인 양지바른 곳
미역맛이 나는 미역취나물 꽃과 이파리
아는 맛들을 눈으로 꺾어
조물조물 무쳐
슬그머니 조촐한 생일밥상에 나를 올린다
늦가을 고독한 밥상에
산과 하늘과 바다가 얼크러진다
-<가막만 안심밥상> 부분
‘사노라면’과 ‘살다보면’의 의미는 모호하지만, 두 어휘 속 담겨있는 공감 차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사노라면’이 함의한 담론적 의미는 세월을 더하다 보면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해했다. 먼저 ‘살다보면’으로 표상되는 <고구마>란 시 속 현실 정황을 통해 말해보자. 고구마 줄기가 한여름 불같은 연정에 들뜬 숨을 가을 햇살에 고르고 있다. 언제든지 사랑은 식을 수 있단 것을 보여주듯 지표면에도 머잖아 찬 서리가 내릴 것이다. 시댁에서 무성한 줄기를 걷어내며 묵직하게 달려 나온 고구마를 캔다. 들뜬 소녀처럼 고구마 고랑을 파헤치니 “몸을 동그랗게 만 공벌레/ 뿔뿔이 흩어지는 바퀴벌레/ 온몸 꿈틀대는 지렁이/ 오히려 달라붙는 거미들/ 고구마밭은 그들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것을 바라본 마음이 잠시 먹먹해졌다. 나이는 피해 갈 수 없는 것, 세상을 보는 연륜도 깊어져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방금 전 그들만의 세상을 파괴해 버린 ‘나’를 보며 지난 시절이 오버랩 된다. “수시로 찾아오는 삶의 고비를/ 어떻게 넘겼던가/ 두 눈 질끈 감고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지/ 지금 내 모습이 딱 공벌레구나/ 혼자 소리 없이 웃”으며 멍 때린 순간도 잠깐 “고구마 캐다가 날 새것다”는 시어머니의 지청구에 “이십 년 동안 넘지 못한 큰 산”, 갑갑한 가슴으로 횡격막이 꽉 조여왔다는 시 속 정황이 실감을 생생히 부조한다. 고루한 시어머니의 언어 습관을 극복하지 못한 화자의 심리적 해소 지점은 또 다른 삶으로 변주되곤 했는데, 세월이 무장 흘러야 되는 것도 아님을 말해준다.
그렇게 ‘사노라면’으로 볼 수 있는 <가막만 안심밥상>은 가슴 한켠으로 밀려오는 슬픔을 위로한다. ‘안심산’은 여수 안산동에 있다. 화자가 사는 근처의 낮은 산으로 건강을 위한 코스로는 그만일 것이다. 산행을 즐긴 듯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산을 오르는 중 엄마의 전화 한 통, 생일날 미역국은 먹었냐는 말에 설움이 북받친다.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 아침 “해마다 오는 생일/ 뭐가 중요하냐며 남편에게/ 퉁사리를 듣고 나온” 설움을 삭히지 못했다. “그래 생일이 뭐 별건가”라며 서운한 마음을 길가에 핀 애먼 꽃들한테 발설했다. 시적 화자인 김지란 시인은 야생화를 즐겨 찾는 생태 환경 전문가여서 꽃과의 감정 교환도 일상이기에 길가에 핀 야생화가 허투루 보일 리 없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을 보며 맺힌 마음이 환해진 것이다. 안심산 중턱에 올라 한눈에 펼쳐진 가막만이 시적 상상력으로 유입되면서 “윤슬로 반짝이는 물결무늬는/ 살랑살랑 유연한 미역/ 드문드문 박혀 있는 무인도는/ 꼭 소고기 건더기 같아/ 한순간 눈앞의 풍경에서/ 자박자박 파도가 끓고/ 바다미역국 한소끔 끓어오르”고, “동그런 봉분들이 모인 양지바른 곳/ 미역맛이 나는 미역취나물 꽃과 이파리/ 아는 맛들을 눈으로 꺾어/ 조물조물 무쳐/ 슬그머니 조촐한 생일밥상에 나를 올린다”는 문장에서 ‘사노라면’이란 말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생을 교란한다.
퇴근길 택시 안
문득 눈을 돌리니
차창에 붙여진 긴급 연락 스티커
○○운수, ○○주유소, ○○정비소
무심코 소리 내서 읽다
○○식당에서 웃음이 큭 나왔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것만큼 긴급한 게 어디 있겠어
회사와 식당은 사람에게 밥을 주지만
택시는 주유소 정비소에서 밥을 먹는다
사람이나 기계나
다 먹어야 사는 일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다이어트 한다고 아침 점심 굶은
텅 빈 복腹
긴급 구조신호 요란하게 보내온다
-<긴급> 전문
‘산다는 것’은 처처마다 다른 유형을 나타낸다. 화자의 시적 발상은 개개의 삶에 대한 천착에서 비롯되었다. 사소한 일상이 시적 정황으로 유입되면서 예기치 않던 삶으로의 반경들을 사유로 확장해 간다. 누구나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긴급’은 ‘119’다. 어디에서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이자. 방책인 것이다. 하지만 택시 안 덕지 덕지 붙여놓은 “○○운수, ○○주유소, ○○정비소” 란 스티커들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며칠 후 식당에서 밥을 먹다 당시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고, 직업마다 다른 ‘긴급’이란 의미를 생각하니 세상이 요지경이구나 싶어진 것이다. “사람이나 기계나/ 다 먹어야 사는 일”인데 벌서 며칠 째 “다이어트 한다고 아침 점심 굶은/ 텅 빈 복腹/ 긴급 구조신호”에 연락해야 할 곳이 어딘가를 화자만이 알고 있다.
<말 보시>에서 어린 날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바닷가의 추억이 이채롭다. 바닷물이 빠지면 갯벌에서 “발에 걸리는 뭉툭한 무엇/ 큰 피조개였다 그것도 여러 마리/ 너무 좋아 설핏 눈물도 났었”다는 데 그것을 본 동네 어른께서 “다 자기가 먹을 복은 가지고 태어나는 거여”란 말이 지금껏 귀에 맴돈다는 데 “살다 보니 뒤늦게/ 한 생을 돌고 돌아온 이 말이/ 나의 심장에 박혀/ 지금껏 날 일으키며 살아온 것 아닌지”, “빈손일 때에도/ 그 한마디가 힘이 되었다”는 축복 같은 주문呪文을 기억한다. ‘보시’란 것이 ‘자비’이고 ‘베풂’이라고 할 때 선한 말의 기운이 세상살이 미치는 영향을 이르고 있다.
시 <잠언집>은 살아온 삶을 안타까운 현실로 확인시켜 준다. 오랜만에 고향 근처 목욕탕을 간 것이다. 힘겨운 할머니의 뒷모습으로 이어진 굴곡진 생이 “리아스식 해안선을 닮은 것”처럼 펼쳐졌다. 간간이 들린 대화를 맞춰보면 “돌산 토박이로/ 평생 물질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들이/ 수증기 물방울처럼 똑 똑 떨어진다”는 이력을 전언하고 있다. 거기에 더한 천식이 된 ‘기침소리’와 ‘가빠진 통증’이 온몸을 종단하며 남은 생을 종용하고 있다. 할머니에게 남은 것이라곤 “까맣게 변한 엉덩이 살”과 “숨비소리가 빠져나간 몸”이 전부인 슬픈 내력뿐이다. 노역 같은 생로병사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당신을 돌보지 못한 할머니를 보며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당신께서 원하는 것을 이뤘는가를 묻지는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을 떠나보낸 화양 바다의 현재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아픈 것이다.
액자 속에 고이 갇힌 연보랏빛 저고리 젊은 엄마
산그늘에 앉아 같이 부르던 오동잎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랏빛 저고리는 빛이 바래고
압화押花 된 엄마의 오월이 풀리면
그리움은 엷어져 슬퍼지던가
잃었던 계절에 물이 오르고
오동나무는 넓은 이파리를 펼쳐 그늘을 엮는다
그늘은 한 잎 한 잎 이어지고
져버린 꽃들이 다시 가슴에서 피어나
연보라 진 엄마의 내력을 챙겨 적는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봄
당신의 눈동자는 어느 별로 반짝이고 있을까
-<오동나무꽃 소고小考> 부분
연하게 핀 오동꽃의 색감으로 상기된 마음이 들떴던 오월이다. 그런 날은 왠지 기분이 좋아져 어머니가 생각났다. 언제나 다소곳이 젊은 날의 초상처럼 수수했던 기억을 오래 간직하려는 듯 “액자 속에 고이 갇힌 연보랏빛 저고리 젊은 엄마”의 옷매무새가 떠올랐다. 그날은 “산그늘에 앉아 같이 부르던 오동잎 노래가 흘러나”왔고, 목소리만큼 자꾸만 “보랏빛 저고리는 빛이 바래고/ 압화押花 된 엄마의 오월이 풀리면/ 그리움은 엷어져 슬퍼지던가”라고 묻는 애수 젖은 발화가 가슴으로 번져오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이행하는 화자의 것처럼 슬픔에 감전되고 만다. 봄이면 해마다 피고 지는 오동꽃이다. 산과 개울가 어디를 가리지 않고 물색을 풀어내는 어머니의 곱던 추억이 되어준 풍경이 화자의 가슴속으로 물수제비를 뜨며 건너왔다. 한동안 마음을 끌다 오월 신록에 묻히고 마는 ‘오동나무꽃’처럼 자꾸만 쇠잔해 가는 ‘당신’을 불러본다.
김지란 시의 사유 지점들에서 서정성으로 환기한 시적 발현은 매번 아련함을 더해 다가왔다. 그러한 결과는 시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뤄낸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새롭다는 것 시적인 변화를 위해 본능 속에 잠재된 성장환경에서 체험한 추억에 머물지 않는다. 도시적인 감각으로 발화한 사유를 시적 서정으로 변주해 가는 문장의 부림도 상당한 것으로 김지란 시인만의 변별적인 시적 성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사스레피나무>에서 “누구는 생선 썩는 냄새 같다고/ 코를 움켜쥔 나무”에 대한 “그때는 보지 못한/ 자디잔 꽃들이 땅을 향해 꽃등을 켰”다는 순정한 생각을 전개해 간다. 특히 작은 생명을 움켜쥐고 핀 꽃을 담아낸 <봄날>에서 경이롭게 바라본 시선에 멈추지 않고 생명성이 충만한 “큰개불알풀 냉이 꽃다지 벼룩나물/ 광대나물 금창초 꽃마리 별꽃을 불러보다가/ 지난 해동 무렵 소식 끊긴/ 그대를 불러 안부를 물었다”며 이종異種 간의 안부를 통해 마음속 상처가 되었던 젊은 날을 소환한다. 소중한 아기를 얻기 위한 고통으로 각인된 오랜 난임의 시간들을 환기한 것이다. 타자화된 아픔을 “내 안의 피지 못한 꽃봉오리들/ 봄 젖을 빠는 소리”로 치환하여 스스로를 위로한다. 한때 “내 몸속에는 밤낮으로 나를 지켜보는/ 당신의 동그란 눈동자가 자라고 있다/ 감히 터트릴 수 없는” 지독한 불안을 야기한 난임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금껏 떨칠 수 없다. 이런 삶의 서사들이 시의 가장자리들을 에워싸고 있어 시가 지향하는 이해 공감은 클 수밖에 없다. 김지란 시인은 삶 속에 육화된 사유를 오랫동안 떨치지 않고 응시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 삶의 모습이 시의 세계로 유입되어 발현된 것임을 궁금해하며 김지란 시에 다가간다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박철영 약력
1961년 전북 남원 식정리에서 태어나 한국방송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2016년 《인간과문학》으로 평론 등단. 시집으로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 『월선리의 달』『꽃을 전정하다』, 산문집으로 『식정리 1961』, 평론집으로 『해체와 순응의 시학』, 『층위의 시학』이 있다. ‘더좋은 문학상’ 수상. 순천작가회의 회장 역임. 한국작가회의 회원, <숲속시> 동인. young200107@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