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龍 山
龍 山 昔 日 最 風 流 (용산석일최풍류) 지난 날 이곳은 풍류로 이름을 날리던 곳
曲 曲 紅 亭 岸 岸 樓 (곡곡홍정안안루) 굽이굽이 화려한 정자들과 물가에 누각들
白 首 重 來 征 戰 後 (백수중래정전후) 난리 후에 늙은 몸으로 다시 찾아 와 보니
壞 垣 春 草 不 勝 愁 (괴원춘초불승수) 무너진 담장에 자란 봄풀도 근심에 잠겼네
<어 휘>
昔 日 : 지난 날
曲 曲 : 굽이 굽이
岸 岸 : 물가 곳곳마다
重 來 : 다시 돌아 옴
征 戰 : 전쟁, 전란
壞 垣 : 무너진 담장
<지은 이>
김유(金瑬, 1571-1648), 자는 冠玉 (관옥), 호는 北渚(북저)이며, 시호는 文忠으로 인조 반정의 주역이다.
1571년 태어나 22세에 부친이 충주 탄금대전투에서 순사하고, 이듬 해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고, 32세 주서가 되었으나 鄭仁弘
(정인홍)의 배척을 받고 사직하다. 33세 전적과 형조 좌랑이 되었고, 收稅官(수세관)으로서 義州(의주)에
갔고, 이듬 해 충청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38세에는 호조 정랑이 되어 臨海君(임해군) 옥사에 문사랑이 되고, 이듬 해 李恒福(이항복)의 종사관으로
關西(관서)에 가서 關防(관방)의 형세를 살폈다.
41세 부교리가 되었으나, 鄭仁弘이 李滉(이황)과 李彥迪(이언적)을 무함하자 空館(공관)을 주도하여 革職
(혁직)당하였다. 이듬 해 江界府使(강계부사)가 되어 임기를 마친 뒤 돌아오자, 가선(嘉善)으로 자급(資級)이
올랐다. 46세에 聖節使(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고, 그 후에 廢母論(폐모론)이 대두되자 申景禛(신경진),
李曙(이서), 具仁垕(구인후) 등과 함께 反正(반정)을 모의하였다.
53세 3월 12일, 아들 金慶徵(김경징) 및 申景裕(신경유), 李聖淵(이성연) 등과 力士를 이끌고서 다른 부대와
함께 彰義門(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고, 反正 이후의 모든 수습책들과 군무를 결정하였으며,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아 이 해 겨울에 靖社功臣(정사공신) 1등으로 錄勳(녹훈)되어, 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李适(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天安에 머물다가 다시 公州로 가고, 還都(환도) 후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57세 2월, 金兵(금병)이 平山(평산)에 침입하자 八道都體察使(팔도도체찰사)에 제수되어 임금을 모시고
江都(강도/강화도)로 들어갔다가, 還都(환도)한 후에 우의정이 되어 都體察使와 文衡(문형/대제학)을 겸하
였으며, 이듬 해 左議政(좌의정) 兼 世子傅(세자부/세자의 스승)가 되았다가 八道都體察使(팔도도체찰사)와
영의정에 올랐다. 淸兵(청병)이 침입해 오자, 임금 인조를 호종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抗戰
(항전)하였으나 江都(강도)의 敗報(패보)가 전해지니 출성하여 항복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67세 봄, 환도 후에 아들 金慶徵(김경징)이 江都(강도)의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賜死(사사)를 당하였고,
7월에는 兪伯曾(유백증)의 상소로 파직되고 삭탈당하면서 향리로 방출되었으나, 沈器遠(심기원)의 모반을
평정하여 寧國功臣(영국공신)에 봉해졌다. 이후에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하였다가, 78세 윤 3월 5일에 별세
하였다. 공의 부친은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탄금대 전투에서 순절한 김여물
(金汝勿) 공이다. 공은 부친이 순절한 이듬 해 모친께서도 별세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로 선조 조에
과거에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부친과 절친하였던 이항복 선생의 후원을 받았다.
후에 광해군 시대 권력의 핵심 세력이었던 대북파의 견제를 받으면서, 출사와 낙향을 거듭하다 인조반정을
도모하여 그 주역으로 성공하면서, 이후로 정권의 최고 실세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위에 소개한 시는 제목이 용산(龍山)으로 지금의 서울 용산 일대를 찾아 가 둘러보며, 그 감회를 읊은 시다.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고서 과거에 화려했던 이 지역을 둘러보고, 이를 회고하며 지은 시로써 한강에
인접한 용산 일대가 당시에도 매우 번창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