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가을 하늘이 이어지다가 110일 만에 초미세먼지가 되돌아와 마스크 쓸 이유가 추가된다..
탐방일: 2020.10.21.(수요일) 흐림/미세먼지: 나쁨~보통
탐방지: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실자생식물원-태봉정-태봉재-정기봉-지봉산-수련원갈림길-골남이고개-상소동산림욕장갈림길-머들령보루-머들령-머들령마을-소룡골입구정류장
동선표
대전과 충남 금산의 경계선 추부터널을 지나면 추부면 마전리에 조선 태조대왕태실의 버스정류장이 있다..
6년 전에 다녀갔던 태실자생식물원..
향토사학자 강성복님이 자료제공한 '태봉에 묻어둔 왕도의 꿈'을 그대로 옮겨 본다..
태봉 또는 태실이라 함은 왕실에서 아이를 출산하면 그 태를 묻어두었던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안태(安胎)의 풍습은 비단 왕실뿐 아니라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는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태는 곧 생명의 근원인 까닭에 그 처리를 함부로 하지 않고 손액(損厄)이 없는 방위와 장소를 가려 묻거나 태웠던 것이다.
왕실에서 태를 안치하는 것은 나라의 대사일 뿐 아니라 그 행렬을 맞이하는 지방에서도 큰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왕의 태실지가 안치된 현이나 군을 승격시킨 예도 종종 볼 수 있는데, 태조의 태를 봉안한 진산군도 주(州)로 승격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치한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2년째 되는 1393년이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고향인 함흥땅에 비장된 태를 만인산에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가봉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천리길이 넘는 변방으로 태를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조의 태실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태조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편찬되는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는 만인산 성봉(지금의 정기봉)에 대한 기록이 추가로 등장하는데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태조2년(1393) 계유년에 태조의 태실을 안치하고 진산군을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했다. 태종13년(1415)에 다시 군으로 개칭했다.”[세종실록지리지](1454)
“만인산: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후박하고 물이 깊으며(土厚水漂),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한 것이 연꽃과 같다. 태조의 태를 묻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만인산: 차령에서 뻗어내렸는데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태조대왕 어태(御胎)를 봉안했다.”[여지도서](1759~1765)
18세기 유일한 군현지도인 [해동지도](1747~1750)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는데 진산군 지도와 함께 연꽃에 비유되는 태실의 지세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 정조년간의 [여지도서]를 비롯, 조선 후기에 편찬되는 [진산군읍지](정조년간), [호남읍지](1871) 등에는 만인산을 태실지로 점복한 내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태실이란 지기가 좋은 곳에 태를 안치하여 왕조의 번영을 이어 가려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지관이 만세를 이어갈 터로 지목한 곳에 태조의 태를 안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피상적인 논리만으로 태조 태실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발복을 위한 명혈을 찾고자 했다면 도성과 가까운 지역에도 얼마든지 좋은 터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만인산을 고집한 까닭은 무엇일까?
형국론에 따르면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에 위치한 지역은 산의 형상이나 물의 흐름이 나란히 왕도에 반기를 들 지세로 알려져 있다.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차령이남 공주강 외곽은 배역할 땅이니 그 곳의 인재는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긴 것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지세를 일러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반궁수(反弓水)’로 풀이했다. 즉 왕도가 있는 한양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건국될 무렵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반궁수의 핵심이요 이씨를 제압하는 마이산에 대한 비책을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성계가 마이산의 지명을 속금산(束金山)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여기서 속금이란 ‘금기운을 묶어둔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개국 초기에 이성계는 장차 왕도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마이산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풍수설에 의거한 좀더 적극적인 비보처(裨補處)가 강구되었을 터인데, 그 장소로 취택된 곳이 바로 만인산 태실이다. 태조는 무학의 조언을 받아들여 마이산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성봉 아래에 태를 안치, 이씨 왕조를 위협하는 금기운과 반궁수를 동시에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이산은 금극목의 원리에 따라 목기운을 압박하는 격이 되지만, 반대로 금기운은 화극금(火克金)의 원리에 의해 상극인 화기(火氣)에 제압을 당한다. 그런데 바로 태실이 안치된 성봉은 오행에서 화(火)에 해당한다. 그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연꽃이다. 다시 말해 옛 문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연꽃같다는 성봉의 지세는 곧 금기운을 차단하는 화기에 비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꽃의 한복판인 연심에 태실을 안치한 까닭은 이씨 왕조를 압박하는 마이산을 제압하기 위한 고도의 비결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궁수의 지세를 염두에 두고 좌향을 보면 이 태조의 태실지는 자좌오향(子坐午向:북쪽을 등지고 정남방을 향한 좌향)으로 배치되어 화살촉인 마이산을 정면에서 막아서는 형국이 된다.
일제가 풍수설을 역이용하여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그 만행이 조선왕조의 태봉에 미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태실지가 왕조의 발복과 번영을 위한 목적에서 조영된 것이라면, 이를 간과할리 없는 일제가 태조의 태봉을 겨냥한 의도는 분명하다. 신작로를 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가까운 노선을 지척에 두고 굳이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 험로를 택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 수십 개소의 태실을 파헤쳐 태항아리를 창경궁으로 이관한 뒤, 경기도 고양군에 합장을 하고 서삼릉이라 이름했다. 이때 태조의 태실도 파괴되어 이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근래(1993)에 복원된 이태조의 태실의 본래의 위치는 중부대학교 본관 뒤편의 봉우리이다.
금산군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한(1000개의 자연공원 가꾸기)사업에 태실공원이 포함되어 2001년에 아름다운 주민의 쉼터로 조성되었으며 예쁘게 가꾸어 조성한 현 부지는 마전리 송영근(宋英根)씨가 금산군에 기탁한 부지로 자활근로사업과 공공근로사업으로 조성하였으며 1억5천만원의 예산절감의 효과를 보았으며 지금은 매일 많은 주민들의 산책과 휴식처로 각광을 받으며 아름다운 자생식물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금산군 추부면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아주 상세하고 좋은 자료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향토사학자 강성복
추부면 추부문화의집
자생식물원 관람은 생략하고 태봉정으로 오른다..
태봉정(胎封亭)에서 걷기 준비..
태봉정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원태실을 볼 수 있다..
태봉재(胎封岾)
마전리 소재 조선 태조대왕태실에서 시경계선으로 이동하여 2구간 종점이자 3구간 시작점인 태봉재에서 대전둘레산길을 이어간다..
이 지점부터는 경계선를 따르지 않고 대전땅으로 걷게된다..
향토사학자 강성복 자료에 따르면 성봉이었던 정기봉...
동구 청소년자연수련원으로 하산예정이었지만 오후 1시도 지나지 않아 계속 걷기로 한다...
508.2봉(좌)와 삼각점봉(541.4)을 향하여..
골남이고개...
508.2봉에서 바라 본 식장산...
지금 다가갈 삼각점봉..
상소동산림욕장(1.7km) 갈림길..
삼각점봉
하늘물빛정원의 장산저수지...
머들령 보루...
나뭇사이 서대산..
상소동산림욕장(1.2km) 갈림길
머들령 추억
2016.8.30 충청투데이에 게재되었던 대전지명연구회장 조영연님의 글을 올려 머들령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머들령, 유성자음의 중첩이 지어내는, 유려한 시적인 이름이다. 아리랑의 발음과 통하는 점이 있다. 죽령, 조령, 추풍령, 괘방령 모두 아름다운 이름들이지만 이만큼 운치 있는 이름도 드물다.
일제강점기 마달령(馬達嶺)이란 볼 품 없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도상에 공식적으로 자리잡힌 이름이다.
머들령은 대전 식장산에서 만인산 정기봉 가는 도중 칼날 같은 능선 중 가장 낮은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높이 거대한 암벽(쪽바위라고도 함)이 2m 정도를 사이 두고 대칭으로 마치 문 모양으로 세워져 그 틈새로 대전에서 금산 추부로 넘나들던 오래 된 옛길이다. 머들령마을(마달촌) 주막에서 한 잔의 탁주로 목을 축이고 쪽바위에 이르러 땀을 식힌 다음, 요광원에서 쉬어가던 장사꾼들, 고을 원님들, 장가 시집가는 사람들, 나무꾼들, 부모님 손잡고 쫄래쫄래 외갓집 가던 애들, 이 고장 사람들이 무수히 밟고 다니던 길이었다.
지금은 고개 밑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와 신 국도 터널과 그 진입을 위한 우람한 교각들로 인해 용도도 잃은 채 거의 흔적을 볼 수 없게 돼 잊혀졌지만 소룡골 마달촌(머들령마을-지금도 민가 몇 채가 두 도로의 교각들 사이에서 초라하다) 안길로 들어가 고개에서 땀을 식힌 행인들은 내림길로 요광원까지 갔다. 아직도 고갯마루에는 큰 나뭇짐 등이 통과하던 바위 위 다른 길, 안전을 빌며 가던 성황당의 자취도 남았다.
이제는 터널 위 소롯길은 그마저도 수풀 속에 잠들어 있다. 50년 전만 해도 이 쪽바위재에서는 금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과 대전에서 가져오는 물건들을 사고파는 작은 장터가 되넘기(지역민들은 되매기라고 함)장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추억담이 전한다.
머들령 입구 장구목 주막은 산 넘어갈 사람들이 몸을 추스르고 넘어온 사람들이, 타는 목을 축이며 다시 힘을 내던 곳이다. 말 타고 넘지 않으면 안 되는 험한 고개라서 마달령(馬達嶺)이라고 한다느니 하지만 격에 맞지 않는 느낌이다.
현재는 발아래 터널 밑으로 지나는 자동차들의 굉음이 고요함과 낭만을 무자비하게 깨 버린다.
지상길이 이제 지하길로 변하고 불과 몇 분만에 통과하는 세상으로 바뀌었으니 실용에 낭만은 쪽도 못 쓰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대진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달터널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곳이다.
머들령이라는 멋드러진 이름을 버리고 억지 한자 이름 마달령을 붙인 것을 무지라고 탓해야 할지 멋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머들령에서 터널 위 소롯길은 7년전 당시 평일산행팀과 거닌 후 와보니 태풍과 장마로 인해 출입금지 패말이 쓰러져 있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지나간 희미한 흔적을 따라 가보지만 7년전 옛길과는 멀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이동하다가 7년전 그 길을 찾아 우거진 나무숲을 헤치며 무사이 빠져 나온다..
머들령 마을(마달촌)
소룡골입구 정류장에서 걷기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