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5,1-13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이 아닌 대략적인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 즉 종말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 그 종말의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 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다. 24:29,31,36,50,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일부분을 설명해 주신다.
‘등’은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햇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들고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길을 밝히게 했다.
이때 ‘등’은 각자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신앙인이 주님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신앙인의 신앙 생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예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에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 지기도 했다.
‘처녀’란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 처녀가 ‘열 명’이라는 것은 그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성경에서 ‘10’ 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이 탈출기 20:3-17 절. 시편 33:2 에 등장하며 예수님께서는 ‘10’ 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 28 절. 루카 15:8; 19:13-17 절 참조. 또한 ‘열 명’은 하나의 유대교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수였다. 그리고 유대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 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구절의 ‘열 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처녀들에 속한다. |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5 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처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7 장 24 절에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라고 하셨고, 또 7 장 26 절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라고 하셨다. 여기서 ‘어리석다’ 라는 말은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슬기롭다.’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으며, 또 한 매사에 성실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슬기롭거나 어리석은 것은 지성의 우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머리가 영리하거나 멍청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신랑이신 야훼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을 맺는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호세 2:18; 이사 54:5)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표현하고 있다(2 코린 11;2). 그런데 여기서는 신부가 아닌 신부의 여자 친구들이 교회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처럼 교회는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불완전한 공동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종말의 축복, 또는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을 상징한다.
지금 우리는 언제 재림할지 알 수 없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같은 상황이다. 내가 어리석은 쪽에 속하거나 슬기로운 쪽에 속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랑이 올 때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과 신앙 생활의 성실성이 드러날 것이다. |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불을 밝힐 때 사용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유분의 기름이 없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이 구절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뒤 8 절을 보면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말을 통해서 볼 때 등에 기름을 넣어 오기는 했지만 여유분의 기름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 기름이 없다는 뜻이다.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신앙인들이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느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이사 61:1; 즈카르야 4 장; 히브 1:9).
특히 본문에서는 성령 하느님의 내재하심과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신앙 생활의 힘을 주시는 성령 하느님의 체험을 못한 형식적 신자로 볼 수 있다. 사실 형식적인 주일 미사 참례,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힘에 의해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등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들은 처음부터 등에 넣을 여유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단지 기름을 등에만 준비해 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슬기있다’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회적인 신앙 체험이나 생활로 온전하지 못한 믿음과 결여된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로 기쁨과 즐거움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그렇게 빨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된다고 하더라도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신다.
‘졸다가 잠이 들었다.’ 처녀들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로 있다가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졸았기에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께 책망받는 것은 단 한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재림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뜻한다 |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한밤중에’,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주님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 24:42-44 절, 1 데살 5:2 절에서 표현된 것처럼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3) 또한 주님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탈출기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 탈출기 12:29.
‘소리가 났다.’, 소리는 갑자기 났으며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무리들이 지르는 소리였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외침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5 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러운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런 상황을 통해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의 내용이다. 기다리던 분이 오신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희망의 시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기쁨과 심판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는 자만이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모두 일어나’, 외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님을 맞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날까지는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밀과 가리지의 비유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13:24-30.
‘등을 챙기는데’, 여기서 ‘챙긴다’라는 단어의 원어인 ‘에코스메산’은 ‘정렬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준비한 기름을 등잔에 채워 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어리석은 처녀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구별된다.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우리 등이 꺼져 가니’, 심판 때에 어리석은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꺼져 가니’는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 은총의 결여, 힘을 주시는 성령 하느님과의 단절 등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기름을 나누어 다오.’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나누어 달라는 어리석은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총과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의 평가는 자기 삶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얻어서 주님 앞에 내 놓을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이 없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또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심판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등이 꺼져 가니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실제 상황이라면 당연한 부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이 회개하지 않고 남에게 회개를 대신해 달라고 하는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회개는 나누어 줄 수가 없다. 자신의 회개는 자신이 해야만 한다. |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안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슬기로운 처녀들이 자기들도 모자라게 되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고 하면서 거절하는 모습이 이기적인 태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을 ‘회개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의 거절은 당연한 일이다.
기름을 빌려 달라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빌려주면, 빌려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모자랄 터이니’란 말 속에 절대적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총과 신앙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 에스켈 18:2-4; 요한 14:16. 참조.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여기서 상인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부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암시한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답이 담겨 있다. ‘가서 사라’,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한 것이다(이사야 55:1; 요한 묵시록 3:18).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은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하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인한 기도와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평소에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함께’ 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기도와 노력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만(종말과 심판 전까지 만)가능한 일이고, 재림, 종말, 최후의 심판이 닥치면 그런 기도와 노력을 할 시간이 없다.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너무 늦어버린 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회개도, 또 남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너무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이다. |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이 구절을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준비하던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천국이 준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 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 라는 것이다.
‘문은 닫혔다.’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티나의 관습에 기인한 듯한다. 루까 13:25 절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구원 받은 것을 뜻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뜻한다.
‘문은 닫혔다.’ 라는 표현은 최후의 심판 때에는 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것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니 좀 봐줄 수 있는 것 아니냐?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태도를 꾸짖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 닥친 뒤에 뒤늦게 후회하는 태도를 뜻할 뿐이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나중에’는 최후의 심판이 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이다.
따라서 ‘나머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온 어리석은 처녀들이다. 그런데 사실 실제 혼인 잔치에서 이렇게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리는 일은 없다. 그래서 문을 열어 달라고 사정할 일도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한 번 내려진 판결은 취소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지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 그래서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것이다. 너무 늦어버린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먼저 주목할 것은 ‘주님, 주님’ 이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절은 7:21; 22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신앙고백적 호칭을 사용하여 외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랑일 것이다. 그리고 신랑은 재림하신 예수님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씀은 엄숙하게 선언한다는 뜻이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여기서는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심판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 믿음으로 그리고 성실한 신앙생활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 (창 18:19; 요한 10:14). 또한 이런 엄중한 대답이 7:21-23; 루까 13:25 절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금 이 이야기 속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7:23).’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는 말은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뜻이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깨어 있어라’, 이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 재림과 심판을 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영적인 깨어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늦어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뜻도 들어 있고,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오시기 때문에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구절은 열 처녀의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