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석대 영양 천씨 문중을 찾아서
명나라 천만리장군 후손 천찬석을
입향조로 하는 지역의 세거 성씨
천씨(千氏)의 본관은 영양(潁陽) 단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영양 외에도 개성·강화·광주 등 9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영양 천씨의 세거지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천씨 세보』에 의하면 영양 천씨 시조는 명나라 초의 조신인 천암(千巖)이며, 그의 후손이 영양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나라 말기 무과에 급제,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명장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영량사(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그의 아들 천상(千祥)·천희(千禧)와 함께 우리나라에 건너와 평양·곽산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유재란 때도 양호(楊鎬)·마귀(麻貴) 등과 함께 다시 나와 직산·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천만리는 명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며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천암을 시조로, 천만리를 중시조로, 조상들이 세거했던 영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 33년(1600) 태풍과 폭우로 명나라 배 40척이 부서지고 200여 명의 명나라 수군이 익사했다. 당시 수군은 선상에서 생활해야 했으므로 피해가 컸던 것이다. 그 명나라 군사의 시신을 묻은 곳이 지금 수영의 백산이다. 태풍으로 돌아 갈 전선이 깨져 사라지자 부산의 명군들은 대부분 조선에 귀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천만리장군이다. 당시 명군의 군량책임자는 호부낭중 동한유와 천만리장군이었는데 동한유는 1599년 귀국하고 천만리 장군은 남아 영양 천씨의 시조가 되었다.(중시조 천만리의 기공비로 자성대 공원 정상에는 ‘총독장화산군영양천공지비(摠督將花山君潁陽千公之碑)’가 세워져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들이라는 명령 때문에 천만리의 4세손 천찬석은 17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지내던 중 명나라가 망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석대 하리마을로 피란, 이주하였다.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영양 천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영양 천씨는 2,478가구에 8,035명(남자 4,314명, 여자 3,721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 상리 마을에 영양 천씨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또한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2006년 2월에 보관 중인 효행 청원서와 행정 문서 110여 점, 호구 단자 120여 점, 교지류, 5대에 걸친 6명에게 내린 효자와 효부임을 인정하는 「포창완의문」 등 고문서 272점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하였다. 5대에 걸친 6명에게 내린 효자와 효부임을 인정하는 포창완의문도 기증되어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높이 평가하던 조선시대의 효행 정책을 알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이며, 효자마을임을 입증하는 최고의 자료이다. 영양 천씨 석대동파 문중에서 부산박물관에 기증한 고문서 중 53점을 선별하여 오대육효 고문서(五代六孝 古文書) 도록을 발간(2006년) 하였다. 이것은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 기증한 고문서를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