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2. 02
삭제 문서 일부를 공개한 산업부의 ‘아이디어 원본’은 사실 국민의힘 여성 간판 윤희숙의 적시타가 견인했다.
‘나는 임차인’이란 국회 5분 발언으로 스타가 된 그 이름은 허명(虛名,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이 아니었다. 이번 메가톤급 북원추(北原推, 북한 원전 추진의 약어로 삭제된 산업부 비밀문서들의 이름) 의혹과 관련해 그녀는 엊그제 페이스북에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청와대를 궁지로 모는 회심(會心)의 외통수를 두었다.
“초점은 누가 문건을 만들었냐가 아니라 왜 삭제했느냐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공무원이 밤을 틈타 사무실에 잠입했고, 파일복구를 대비해 가명을 씌워가며 삭제했어야 했는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둠 천지다. 청와대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왜 지웠는지다. 법적 대응을 하신다니 차제에 정말 잘 됐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테니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신속하게 고소장 접수해 제대로 조사하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이 산업부의 관련 문서 삭제 사실이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충격적인 이적행위라며 청와대의 이실직고(以實直告)를 요구한 데 대해 대통령 문재인이 이실직고 대신 발끈, 대변인 강민석의 입을 통해 북풍 공작 운운하며 법적 대응을 언급했을 때 다른 야권 정치인들은 국민의 입을 막으려느냐고 흥분했다.
윤희숙은 흥분하지 않고 “좋다, 하자”고 한 것이다. ‘우린 밑질 게 없다’는 기세였다. 밑질 게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까게 되면 너희들은 더 많이 까게 돼 있다’는 역공이어서 더 가공(可恐)했다. 발끈한 청와대는 잘못하면 전 법무부장관 추미애가 검찰총장 윤석열을 징계하기 위해 판사 사찰 건을 만들어 냈을 때 추임새를 넣는답시고 국정조사 필요성을 제기, ‘누구 자리 깔아 줄 일 있느냐’는 당내 반발로 스타일을 구긴 민주당 대표 이낙연 꼴이 되게 생겼다.
/ ⓒ데일리안 DB
청와대나 당이 고소하게 되면 산업부 문서 삭제 공무원들은 물론 남북회담 진행 청와대 관계자들까지 소환돼 북원추 관련 사실을 낱낱이 고백해야만 될 것이다. 그래야 김종인을 이적행위 발언으로 처벌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산업부가 ‘서기관 개인의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국민을 바보로 아는 해명을 했다가 윤희숙의 역공에 맞장을 뜨려고 한 것인지 아예 문건 일부를 공개했지만(문제의 3가지 시나리오는 이미 언론 보도로 알려져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정권이 하는 이런 일이 늘 그렇듯 그것으로 의혹이 깨끗이 해결될 수가 없다.
핵심은 그 문서를 왜 몰래 야밤에 들어가 삭제하려 했으며 그 문서가 작성될 무렵에 열린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대통령 문재인이 북한 김정은에게 ‘발전소 문제’라고 말하며 건넸다는 USB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었느냐는 것이다. 탈원전(脫原電) 슬로건 아래 경제성 평가를 조작하면서까지 멀쩡한 원자력 발전소 폐쇄 등을 강행하는 이면에서 북한에 원전을 지어 주거나 DMZ 또는 남한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을 보내 주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의혹과 분노가 비등하고 있다.
2019년 12월 1일 밤 산업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문서 중에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외에 pohjois(뾰요이스, 핀란드어로 북쪽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한낱 아이디어에 불과하고 떳떳하다면 왜 이런 암호 파일명을 달았겠는가?)가 포함된 데는 해석과 추측이 다양하다. 탈원전 밀어붙이기 명분 탈색(脫色) 우려가 그 하나로 지목된다.
북한 원전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핵 물질과 핵기술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원전 건설 포함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대북 협력은 북한이 핵 폐기를 완료한 후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복귀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전면 사찰을 받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모를 리 없는 문재인 정권의 북원추는 북한에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뭔가 말 못 할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윤희숙이 다그친 대로 청와대는 김종인을 빨리 고소해 검찰에서 고소인 측 조사를 받아야 한다.
정부와 집권 민주당 사람들의 의혹 반박과 해명도 흥미롭고 퍼즐 맞추기처럼 숙제를 던져 주고 있다. 민주당 의원 윤준병은 “북한 원전 지원은 박근혜 정부 때부터 검토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산업부 소방수로 나선 대변인은 ‘지난 정부 아이디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부인, 윤준병을 머쓱하게 했다. 문서 삭제 목적이 박근혜 정부 보호가 되어 버리는 모순 때문에 그랬을까?
또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일은 USB(Universal Serial Bus, 작은 이동식 기억장치) 제공 대목이다. 북한도 이제 엄연한 한 나라로 대접해야 하는 세상이 됐으니(외국에서는 정부의 공식 명칭도 그렇고 언론이나 사람들이 당연히 South Korea, North Korea로 부른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는 건 정상회담이고 그 자리에서 덕담과 선물이 오갈 수 있다. 그런데, USB?
이건 뭔가 확실한 설명, 즉 이실직고가 필요한 행위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교환된 서류나 중요한 약속 또는 제안이 포함된 말들이 있었다면 그 내용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제목과 개요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남북 경제협력 아이디어였건 청사진이었건 국가 이익, 나아가 국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들을 USB에 담아 김정은 손에 선물처럼 안겨 주고는 비밀에 부쳐 왔다.
당시 남북회담을 주도한 국정상황실장이었던 민주당 의원 윤건영이나 현 통일부장관 이인영은 USB에 원전의 원 자도 없다는 둥 그 정보를 독점하면서 “국민 여러분은 자세한 내용은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 북한에 원전 지어 주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니….”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참으로 오만하고 음흉한, 그러나 북한과 김정은 앞에서는 극도로 깍듯한 586 주사파 운동권 출신의 정권 핵심들이다.
이들과 대통령 문재인의 이실직고는 검찰 앞에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국민은 알고 싶다. 북원추 문서들을 왜 삭제하려 했고 USB로는 뭘 약속했는가?
정기수 / 자유기고가 ksjung72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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