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 16
KBO 리그 두산 베어스 외국인 투수 아리엘 미란다(Ariel Miranda). 2016년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데뷔한 그는 빅리그 통산 44경기에 출전해 13승9패를 기록했다. 그 후 미란다는 일본 프로야구와 대만 프로야구를 거쳐 2021년 시즌 두산 베어스로 옮겨와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가 지난 9월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기아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 선발로 나서 노히트 노런을 아깝게 놓쳤다. 9회말 투아웃을 잡고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 안타를 허용해 대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 쿠바 출신인 미란다의 모자에 'SOS 쿠바(CUBA)'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 News1
투수 '트리플 크라운'에 바짝 다가선 미란다. 그는 마운드에 설 때마다 'SOS CUBA'라고 적힌 야구모자를 쓴다. 미란다가 포수의 사인을 보려 두 손을 글러브에 모아 집중할 때마다 중계 카메라에 그의 모자가 클로즈업된다.
'SOS CUBA'
도대체 쿠바에 무슨 일이 있길래. 인터넷에는 최근 쿠바에서 카스트로 형제의 장기집권에 따른 경제위기로 반정부시위 사태가 심각하다고만 나와 있었다. MLB닷컴과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란다는 1989년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나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쿠바야구리그에서 활동했다. 2014년 미국으로 망명해 201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다.
MLB에는 쿠바 출신 스타플레이어들이 많다. 대표적인 선수가 '쿠바산 미사일'(Cuban Missile)이란 별명이 붙은 뉴욕 양키스의 아롤디스 채프먼이다. 한때 LA 다저스에서 류현진과 함께 뛰었고 신시내티 레즈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도 활약했던 야시엘 푸이그도 있다. 푸이그는 아바나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플로리다 해협을 건넌 경우다.
MLB에 가장 많은 선수를 배출한 국가는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그다음이 멕시코, 쿠바, 베네수엘라 등이다. 2020 도쿄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은 도미니카에 패하면서 6개 출전국 중에서 4위를 했다. 멕시코,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같은 중남미 야구선수들의 꿈은 단 하나, 빅리그에 진출하는 것이다.
도미니카공화국 선수들은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 빅리그의 문을 두드려볼 수 있지만 쿠바는 이 길이 막혀 있다. 쿠바가 미국의 적성국(敵性國)이기 때문이다. 62년째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쿠바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 국교가 정상화되는 듯했으나 미대사관 직원들의 원인불명 사망사고로 다시 단절 상태다. 쿠바 야구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먼저 망명자 신분이 되어야 한다. 채프먼과 푸이그가 그랬던 것처럼.
야구 선수들만 미국행(行)을 꿈꾸나. 쿠바 젊은이들 상당수가 미국으로 가기를 희망한다. 일단 미국에 입국하기만 하면 고생을 하더라도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러나 쿠바인의 미국 이민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방법은 망명이나 밀입국뿐.
쿠바 수도 아바나와 플로리다 키웨스트 사이에는 너비 150㎞의 바다가 놓여 있다. 지금도 플로리다 해협은 어둠을 틈탄 불법 밀입국 보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플로리다 해협에서 풍랑으로 보트가 전복돼 상어밥이 된 쿠바인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 3145km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 © AFP=뉴스1
터키 해변의 시리아 소녀와 컨테이너 트럭
아일란 소녀를 기억하는가.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2015년 터키 휴양지 보드람 해변에 세 살 소녀가 나타났다. 파도에 밀려 엎드린 채로. 시리아 난민 쿠르디씨의 딸이다. 시리아는 수년째 내전으로 경제 상황은 참혹하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가장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잘사는 유럽으로 밀입국을 기도한다. 루트는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가까운 터키나 그리스로 가는 길. 터키나 그리스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의 최종 목적지는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이다. 사실상 바닷길이 막히자 최근에는 컨테이너 트럭에 숨어서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례가 빈발한다. 급기야 냉동 컨테이너를 타고 밀입국을 기도하다 떼죽음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집콕하면서 '쓰리 베리얼'이라는 영화를 봤다. 사전 정보 없이 출연진과 제목만 보고 선택한 영화다.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가 주요 무대다. 대부분 사막 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선 길이는 3145㎞. 미국 국경수비대(Guard patrol)가 24시간 철통 감시한다.
토미 리 존스가 주연하고 감독한 '쓰리 베리얼'이라는 영화에 보면 멕시코의 밀입국범죄 조직이 등장한다. 많은 멕시칸들의 꿈은 미국행이다. 미국 땅만 밟으면 비록 밀입국자 신분이라도 허드렛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는 있으니까. 실제로 그렇다. 아메리칸 드림이다.
영화 '쓰리 베리얼'은 주인공이 밀입국자인 멕시코 친구가 국경 수비대의 오인 사격으로 숨지자 고향에 묻어달라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미국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간다는 설정이다. 이 과정에서 멕시칸 밀입국 조직이 등장한다. 멕시칸들은 한 사람당 수천달러씩 내고 밀입국 조직의 안내를 받으며 한밤중에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간다. 지상의 철책이 견고할수록 지하의 땅굴은 더 정교해진다. 팝송 '돈데 보이'(Donde Voy)는 멕시코 밀입국자의 고단함과 서러움을 노래한다.
땅굴은 어둠의 세계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두더지 같은 짐승들의 전용 공간이다. 습하고 냉하고 어둡다. 백열등을 달고 환기통이 없으면 사람은 산소가 부족해 땅굴 속에서 살 수가 없다.
▲ 동베를린의 동독군인이 철조망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모습 / 위키피디아
아주 드물게 땅굴은 희망의 통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베를린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어 있던 냉전시대.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공산주의가 실상은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동베를린 주민들은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자유가 있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목숨을 걸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철조망을 뛰어넘기도 했고, 벽이 세워지자 버스를 몰고 돌진하기도 했다. 장벽이 높아지고 경비가 삼엄해지면서 희생자들이 늘어갔다.
지상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동베를린 사람들은 지하로 눈길을 돌렸다. 동독군의 철통 감시망을 피해 밤마다 땅굴을 팠다. 서베를린에서도 장벽 아래로 땅굴을 파 들어갔다. 먼저 탈출한 이들이 동베를린에 있는 가족과 연인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서베를린 프랑스령(領)에만 땅굴이 10개나 있었다. 영화 '더 터널'(The Tunnel)은 이때의 실화를 다뤘다.
호모 미그라티오(Homo migratio). 이주하는 인간.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은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돌이켜 보면, 인류역사는 호모 미그라티오의 역사였다.
멀리는 4세기 말 게르만족의 대이동부터 1860년대 아이리시 엑소더스까지. 한반도로 시야를 좁히면 1950년 12월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목숨 걸고 미군 수송선을 탄 북한 주민 10만명도 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아이리시 엑소더스, 흥남철수 역시 생존을 위한 호모 미그라티오였다.
▲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 Alberto Korda
체 게바라 공산혁명 후의 쿠바
피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와 손을 잡고 공산혁명으로 집권한 게 1959년. 사르트르 같은 좌익 지식인들은 좌익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아낌 없는 찬사를 보냈다.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완벽한 인간이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베레모를 쓴 좌익혁명가의 사진은 소비된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정권은 평등한 사회를 구현한다는 명분 아래 기업을 국유화했고 사립학교를 없앴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반미(反美)노래를 불렀다. 기업가, 농장경영자, 외국계 회사 대표, 전문직 종사자, 공장주 등 부유층과 엘리트층은 공포를 느꼈다. 암흑시대를 예견한 이들은 비밀리에 가톨릭·미정부와 손을 잡고 어린이들은 미국으로 출국시켰다. 1960년부터 1962년 사이에 1만4000명의 쿠바 어린이들이 부모 없이 미국땅을 밟았다. 이 작전을 가리켜 '피터팬 작전'(Operation Peter Pan)이라 부른다. 미국이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기 전의 일이다.
기업을 국유화한 사회주의 쿠바는 어떻게 되었나. 모두가 잘산다는 평등 사회는 모두가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초대형 초상화가 곳곳에 걸린 아바나 거리는 윤기를 잃고 궁티가 흘렀다. 자유경쟁을 상실한 국영기업들은 생산성이 떨어져 일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1970년대 이후 최근까지 쿠바 젊은이들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었다. 여성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현실의 법칙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에서도 다시 입증되었다.
'피터팬 작전'이 진행중이던 1960년 7월 쿠바 아바나 공항. 난민 여권과 작은 가방을 손에 쥔 열여섯 살 소년 미겔 베이조스가 부모의 배웅을 받으며 미국으로 향했다. 소년의 부모는 산티아고에서 목재소를 운영하다가 공장을 공산정권에 강탈당했다.
▲ '피터팬 작전'중 아바나 공항에서 부모 없이 미국으로 출국하는 쿠바 어린이들 / 위키피디아
미국 땅에 내린 쿠바 어린이들은 마이애미 임시수용소로 들어갔다. 이후 '피터팬 난민들'은 가톨릭교단의 주선으로 미국의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미겔 베이조스는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델라웨어 월밍턴 교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가톨릭계 고교를 마친 베이조스는 난민 장학금을 주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대 공대에 입학한다. 졸업 직전 베이조스는 네 살 아들과 힘들게 살던 싱글맘 재클린과 사랑에 빠진다. 베이조스는 졸업과 함께 에너지기업 엑손에 입사했고 30년간 일하며 성공한 엔지니어로 산다.
베이조스는 장성한 의붓아들이 창업을 하자 투자금을 보태며 적극 응원한다. 그 아들이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의 이름을 미디어에서 접할 때마다 생각한다. 미겔이 '피터팬 난민'으로 힘들고 외로운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과연 싱글맘을 사랑으로 감쌀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제프가 미겔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제프가 되었을까. 최근 미겔 베이조스는 아내 재클린과 함께 자신의 모교인 월밍턴 살레지애넘 고교에 1200만달러(약 135억7800만원)를 기부했다.
▲ 제프 베이조스 / © 로이터=뉴스1
투수 미란다의 'SOS CUBA'로 인해 플로리다 해협의 보트피플, 미국-멕시코 국경의 밀입국, 시리아 난민, 동베를린 주민, 피터팬 난민을 거쳐 제프 베이조스까지 왔다.
우리는 지금 탈레반에 쫓긴 아프가니스탄 난민 행렬을 목격하는 중이다. 그들보다 더 가슴 아픈 이들은 중국에서 공안(公安)에 쫓기며 오도가도 못하는 탈북자들이다.
"난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Donde Voy, Donde voy?)"
조성관 / 작가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