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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그리고 로마법
김영희*
1)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영국법과 로마법
Ⅲ. 스코틀랜드법과 로마법
Ⅳ. 미국법과 로마법
Ⅴ. 영미 또는 영미법계와 로마법
Ⅵ. 맺는 말
접수일 : 2015. 9. 18. ∥ 심사개시일 : 2015. 10. 5. ∥ 게재확정일 : 2015. 10. 26.
[국문 요약]
세계의 법계는 일반적으로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 양분된다. 그러나 로마법적 요소는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등 영미권 주요 국가들의 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커먼로
가 형성되던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 및 유럽 대륙 내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이 처했던 여러 여건상 대륙 내 국가들에 비해 적게 영향 받았을 뿐이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비슷한 여건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의 정치적 대립
사정상 로마법을 충실하게 계수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에는 영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를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법에 대해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법을 통해 로마법
에 접근함으로써 로마법적 요소를 추가한 바 있다. 그런즉 영미법 역시 로마법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고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한편 영국은 중세 후반으로 가면서 영국법의 독자성
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다. 영국이 처했던 정치적 사정에 그 큰 원인이 있었는데,
영국의 외국법 배척 정책으로 인해 영국법의 로마법에 대한 의존도는 상당히 낮아지게 되었다.
*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법학박사
8 法史學硏究 第52號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국법은 그들이 주장하는 독자성을 상대적 의미에서 인정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미법의 역사를 볼 때 오늘날 영미법이 세계 법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위상을 차지하는 것에는 분명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이 식민지 건설을 통해
세계 곳곳에 영미법을 전파하고 미국이 현대사를 주도하면서 세계의 법체계에서 영미법 체계의
독자성과 중요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주제어] 법계, 로마법, 영미법, 영국법, 미국법, 스코틀랜드법, 독일법, 보통법, 커먼로
Ⅰ. 시작하는 말
세계의 법계는 일반적으로 로마법계(유럽대륙법계)와 영미법계로 구분된
다. 그렇게 구분할 때의 기준은 로마법과의 연결성이다.1) 로마법계 법들은
로마법을 계수하였거나 계수한 법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는데, 우리
법도 독일법을 매개로 하여 로마법계에 속한다.2) 이에 비해 영미법계 법들
은 영국법(커먼로)을 토대로 하여 발전한 법들이다. 영국에 커먼로가 형성되
던 시대에 유럽 대륙 전반에서 로마법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로마법
을 계수하지 않고 소위 고상한 독립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3)
그런데 영국이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다는 통설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커먼로가 형성되던 당시에 영국이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변방 국가였다고 하
더라도 유럽 전반을 휩쓸었던 로마법의 영향이 영국에만 미치지 않았다고 하
는 것은 설득력이 적다는 것이다. 후술하다시피, 당시 유럽 국가들은 로마가
1) Hessel E. Yntema, “Roman Law and Its Influence on Western Civilization”, 35 Cornell L. R.
77(1949), p.77; Ben W. Palmer, “An Imperishable System: What the World Owes to Roman
Law”, 45 American Bar Association Journal 1149(1959). p.1220; Alan Watson, “Roman Law
and English Law: Two Patterns of Legal Development”, 36-2 Loyola L. R. 247(1990), p.247;
Peter Stein, “Roman Law, Common Law, and Civil Law”, 66 Tulane L. R. 1591(1992), p.1591;
김동훈, 「독일법과 미국법의 교류」, 법과 사회 제14호(법과사회이론학회, 1997), 230면.
2) 최병조 대표 편역, 한국 민법의 로마법적 배경과 기초(법무부, 2013), 9면; 현승종, 로마법(일
조각, 1987), 3면.
3) Charles P. Sherman, “The Nineteenth Century Revival of Roman Law Study in England and
America”, Yale Law School Faculty Scholarship Series Paper No.4443(1911), p.624f.; Stein,
Ibid.(각주 1), p.1591; 새라 워딩턴 지음, 임동진 옮김, 형평법(소화, 2009), 45면; 김동훈, 앞의
논문, 233면.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9
톨릭교회로 인해 공통적으로 로마교회법을 국내법의 일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고등 법학교육은 국적과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대륙 내 특정 대
학들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을 내용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4) 게다가 당
시 유럽 국가의 지배자들은 혈연관계로 얽혀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는 각
국가가 취할 법체계들이 공통성을 가질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정은 대륙 내 국가들에서나 영국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로마
법과 관련하여서도 일단은 영국도 대륙 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법의 영
향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논거들에 대해 이는 영국이 로마법에서 영향을 받았
다는 논거이지 계수를 하였다는 논거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5) 그렇다면
영국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를 ‘계수’와 ‘영향’의 차이 문제로 돌려야 하는
것일까?6)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계수를 한 것’, ‘크게 영향
을 받은 것’, ‘계수를 하였으되 궁극적으로 성공에 이르지는 못한 것’, ‘영향
권에 있었으나 계수를 하지 않은 것’ 등을 구분하여야 할 맥락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법계를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 대분하는 차원이라면
‘계수’와 ‘영향’이라는 표현 차이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
각한다. 이와 같은 필자의 생각은 자국의 로마법 계수를 조기계수와 본계수
로 나누어 설명하는 독일의 예를 참조함으로써 강화될 수 있다.7) 후시대의
본계수가 성공하였을 경우에는 선시대의 조기계수를 조기‘계수’라고 부를 수
있으되, 혹여 후시대의 본계수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선시대의 조기
계수를 조기‘계수’라고 부르는 대신 ‘영향’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으되 계수는 하지
4) 김영희, 「대학의 유형별 기원에 관한 고찰-법학교육 전개 과정에 관한 고찰도 아울러서-」, 법사
학연구 제36호(한국법사학회, 2007.10), 239면.
5)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인위적인 채택에 따른 계수(artificial adoption)와 자연스러운 영향 관계
(natural relationship)의 문제로 다루기도 한다. Fritz Pringsheim, “The Inner Relationship between
English and Roman Law”, 5-3 The Cambridge L. J. 347(1935), p.347f.
6) 로마법의 계수(reception), 영향(influence), 동화(assimilation), 도입(imposition), 이식(transplantation),
채택(adoption) 등의 표현 차이에 초점을 두는 논의가 있음에 대해서는 최종고, 서양법제사 전정
신판(박영사, 2003), 177면, 각주 5를 참조하라.
7) 최종고, 앞의 책, 177면 이하.
10 法史學硏究 第52號
않았다는 것이나 영국도 나름대로 로마법을 계수하기는 하였지만 결과적으
로 대륙 내의 국가들만큼 본격적인 계수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나 객관적
으로 동일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판단일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합당하다
고 하겠다.
그런데 영국법과 로마법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로마법
계수 내지 영향 문제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 연구가 항상 영국의 로마법
계수 문제로 수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수렴되어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예
를 들어 오늘날 여러 연구가 영국의 커먼로가 그 초기 단계에서 로마법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8) 이러한 연구 결
과는 그 유사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영국이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다는
통설을 바꾸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유사성 정도
가 상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유사성은 계수와 무관하게, 법 발전의 초기 단계
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공통성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9)
그런 한편 영국법의 로마법 계수 혹은 로마법과의 유사성 문제는 또 다른
로마법 계수 내지 영향을 고찰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
법적 요소들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즉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은
영국법이 로마법을 계수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법은
영국법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영국법이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면 미국법에 로마법적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영국법
말고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게 된다. 나아가 어쩌면 미국법에 로마법적 요소
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영국법과 다른 어떤 곳(독일법10)) 모두에서 찾아야 할
8) Watson, Ibid., p.248; Stein, Ibid.(각주 1), p.1591; 가정준, 「미국계약법의 구조와 이해」, 재산법
연구 제23권 제3호(한국재산법학회, 2007), 29면 등.
9) Edward D. Re, “The Roman Contribution to the Common Law”, 29 Fordham L. R. 447
(1961), p.449f.는 영미법의 로마법 계수 여부에 대한 복잡한 반응과 함께, 영미에서 로마법의 계수
와 무관하게 외국법으로서 로마법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것의 장점을 열거해놓고 있다.
10) 그렇게 다른 어떤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할 때 그 다른 어떤 곳은 후술하다시피 로마법을 전적으로
계수하였던 독일법이다. Stefan Riesenfeld, “The Influence of German Legal Theory on American
Law: The Heritage of Savigny and His Disciples”, 37 Am. J. of Comp. Law 1(1989), p.2f. 미국
이 고전주의 법학 시대에 독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 글 뒤, ‘IV.
미국법과 로마법, 2. 미국의 고전주의 법학과 독일의 판덱텐 법학’ 부분을 참조하라.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11
수도 있다.
이렇듯 영국법과 로마법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영국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만 다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법체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게 만든다. 우선 영국법을 고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영미
법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영미법으로서가 아니라 영국법과 미국법으로
분리하여 고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흔히 우리는 미국법이 영국법
과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만 미국법이 이질적인 독일법에 의도적으로 접
근하여 로마법적 요소들을 받아들였던 사실을 고찰하게 만든다. 또한 그 모
든 법의 계수와 영향의 배경에 정치적 맥락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국법과 로마법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 계수 또는 영향
으로 인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법 형성과 발전 단계상
공통현상에 대해서도 고찰하게 만든다. 나아가 영국법과 로마법의 관계에 대
한 연구는, 우리법이 로마법계 법이라는 점에서, 우리법과 영미법의 비교 연
구를 재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미법이 로마법을 계수하였거나 적어도 상당
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법도 영미법도 로마법의 현대적 변용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그런즉 이제 그와 같은 다양한 고찰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의 기초 작업으
로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과 그들이 차
지하는 의미 맥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Ⅱ. 영국법과 로마법
1. 12세기 영국에서 커먼로 성립
오늘날 영국법의 기초를 이루는 커먼로(common law)는 대략 12세기에
11) 로마법의 현대적 변용(관용)에 대해서는 정종휴, 역사속의 민법(교육과학사, 1994), 45면과, 최종
고, 앞의 책, 185면을 참조하라.
12 法史學硏究 第52號
성립하였다.12) 그런즉 영국의 커먼로를 말한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1
세기 이전이 배제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국의 법제사를 놓고는 11세기 이
전의 영국법도 다루겠지만,13) 로마법(대륙법)과 대비해서 커먼로를 말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만약 로마법(대륙법)과 대비되는 커먼로
를 말하면서도 11세기 이전을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보통은 커먼로를 구성하
는 한 부분인 관습법에 연결시켜 그렇게 하게 된다.14)
그런데 커먼로가 12세기에 성립하게 된 데에는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1066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28생-
1066즉위-1087사)의 영국 침공이 그것이다. 윌리엄의 영국 침공은 결과적
으로 성공하였는데, 헨리 2세(1133생-1154즉위-1189사)에 이르렀을 때 영
국 국가체계 전반을 두고 중앙집권화가 도모되었다. 그렇게 하여 갖추어지게
된 법체계가 바로 영국의 커먼로 체계이다.15) 그 법체계가 커먼(common)인
것은 그것이 당시 영국의 왕권이 미쳤던 지역 내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성
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 있어 영국에서 커먼로(보통법
common law)는 유럽 대륙의 보통법(ius commune)과 동일한 맥락의 표현
이기도 하였다.16)
12) Gerald J. Postema, “Classical Common Law Jurisprudence”, Part I, 2 Oxford U. Commonwealth
L. J. 155(2002), p.157.
13) 11세기 이전의 영국법에 대해서는 F. W. Maitland/ F. C. Montague, A Sketch of English Legal
History (Putnam’s Sons Press, 1978(1915)), p.1f.를 참조하라.
14) Postema, Ibid.(각주 12), p.158f.; Maitland/Montague, Ibid., p.2, p.30. 그런 한편 11세기 이전을
영국의 커먼로 역사에 포함시키면 오히려 커먼로와 로마법과의 연결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면
이 있다. 기원전부터 오랜 기간을 두고 반복되었던 로마군의 점령으로 인해 로마법적 요소들이 영
국의 관습법에 들어가 있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Re, Ibid., p.455f.와
Maitland/Montague, Ibid., p.22f.를 참조하라.
15) Postema, Ibid.(각주 12), p.158; Maitland/Montague, Ibid., p.36. 이 시대의 주요 법학자로는
Glanvill, Bracton 등이 있다. 이들이 로마법에 상당히 정통했음은 분명하다. Charles P. Sherman,
“The Romanization of English Law”, 23 Yale L. J. 318(1914), p.326; George Burton Adams,
“The Origin of the Common Law”, 34-2 Yale L. J. 115(1924), p.119f.; Maitland/Montague,
Ibid., p.43f. 그런 한편 이들의 활동에 앞서 Lanfranc은 정복왕 윌리엄과 그 아들 세대에 총리대신
과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를 겸직하였던 자로서, 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비아
에서 로마법을 공부했다. 그는 영국법 초기 체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러므로 영국법 초기
체계에 로마법적 요소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Sherman, Ibid.(각주 15), p.321; 최종고, 앞의
책, 390면.
16) Yntema, Ibid., p.87; Postema, Ibid.(각주 12), p.158; 최종고, 앞의 책, 385면.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13
그렇지만 사실 헨리 2세가 중앙집권화를 도모한 것으로 커먼로 체계 성립
을 설명하기에는 모자란 면이 있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도모가 성공
하였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기에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지, 왕의 중앙
집권화 도모가 유럽 대륙의 로마-보통법 체계에 비견되는 영국-커먼로 체계
를 ‘체계적으로’ 성립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커먼로 체
계의 성립을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헨리 2세의 중앙집권화 도모를 넘어,
그 무렵의 영국의 법체계 전반에서 ‘체계화되었음’의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
어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헨리 2세 시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커먼
로 체계 성립의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로, 헨리 2세는 새로운 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새로 법원을 만
들 당시 영국에는 이미 교회법원들과 지방법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즉
새 법원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중앙집권적인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새 법
원은 국왕의 직속 기구(국왕재판소, 왕립법원 curia regis)로 만들어졌으며,
국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판사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새 법원
이 생겨난 후로도 물론 교회법원과 지방법원들은 여전히 작동하였다. 하지만
점차 영국의 법원들은 왕의 법원 아래 정비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왕의
법원의 판사들이 기록한 재판 자료들은 커먼로의 가장 큰 특징인 판례법(선
례구속) 체계의 기초로 되었다.17)
둘째로, 헨리 2세가 만든 법원은 사법기관일 뿐만 아니라 행정기관의 일부
이기도 하고 입법기관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커먼로에서 법원의 역할이 분쟁
해결을 넘어 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출발점으로 되었다.18) 오늘날
영미법에서는 판결이 판결을 넘어 case ‘law’인 것의 역사적 배경을 헨리 2세
시대의 새 법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그 당시에 왕의 법원
17) 이때의 가장 중요한 법자료는 주요 판결이 실렸던 연감(Year Book)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시기부터
이미 선례구속이 원칙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Postema, Ibid.(각주 12), p.160. 선례구속의 원칙은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원칙이다. Gerald J. Postema, “Classical Common Law Jurisprudence”, Part
II, 3 Oxford U. Commonwealth L. J. 1(2003), p.12.
18) 이 당시 판사의 일은 실체법적 권리 상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일이었음이 명백하
다. Postema, Ibid.(각주 12), p.162, p.164.
14 法史學硏究 第52號
이 사법기관일 뿐만 아니라 입법기관이기도 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회
가 그런 왕의 법원을 제치고 법을 제정하는 전임기관인 입법부가 되었을 때
에는 입법부가 법원보다 우위에 서고, 최고법원이 입법부의 한 조직을 이루
는 결과를 가져왔다.19)
셋째로, 커먼로의 성립은 중앙집권적으로 통일된 소송 체계 수립이라는
점에서 소송차원의 의미가 강하다.20) 그래서 헨리 2세의 법원이 한 일 중에
소장(칙서소장, 영장, 소송명령서 writ) 제도를 도입하여 재판 절차상 통일
성을 도모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 헨리 2세 이전의 영국에도 법원이 존재하
였고 재판도 존재하였지만, 이제 왕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으려면 해
당 사건이 재판을 받기에 적합하다는 소장을 발급받아야 한다는 절차적 통
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 소장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재판의 증가와 함께 곧 사안별로 유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3세기 후반이 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유형의 소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
비된 소장 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21) 이것이 바로 커먼로 체계의 기본이
며, 이 체계는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사법체계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22)
2. 로마법과 커먼로의 유사성
세계의 법계를 커먼로(영미법)계와 로마법계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는 하지만23) 이 구분은 기본적인 의문을 잠재시켜 놓고 있다. 영국의 커먼로
는 12세기에 성립하여 13세기에 발달하였는데, 로마법은 고전기만으로 한정
19) 그런즉 실제로 제정법이 늘어나던 17세기 후반에 커먼로와 제정법 사이에 법의 위상에 관한 재고
찰이 이루어졌다. Postema, Ibid.(각주 17), p.19. 영국에서 입법기관에 의한 입법의 중요성 대두에
대해서는 A. W. B. Simpson, Legal Theory and Legal History: Essays on the Common Law (The
Hambledon Press, 1987), p.390f.를 참조하라.
20) Adams, Ibid., p.118.
21) Watson, Ibid., p.256.
22) 커먼로 체계에서 일어난 19세기 이후의 사법 제도 변화에 대해서는 Simpson, Ibid., p.383을 참조
하라.
23) Watson, Ibid., p.247; Stein, Ibid.(각주 1), p.1591.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15
시켜도 1-3세기에, 특히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에 그 정점에 달하였다
는 사실이 그것이다.24) 영국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와 직결될 수 있는 이
의문과 관련해서는, 특히 계수 여부에 대한 연구 결과를 구체적으로 인용하
지 않는 추상적인 논의에서는, 오히려 영국이 로마법을 계수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어쨌거나 유럽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로마가 선재했었고, 영국이 커먼로를 성립 및 발전시키고 있을 때에
대부분의 유럽 대륙 내 국가들은 로마법을 계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 커먼로의 초기 단계를 보면 로마법과 유사한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25)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로마법도 커먼로도 구체적인 사건 중심으로 논의와 결정을 통해
발전하였다. 로마법이나 커먼로나 이른바 결의론(casuistry)적 방법을 사용하
여 법리를 발전시켰던 것이다.26)
둘째로, 로마법도 커먼로도 소송을 중심 삼아 발달하였다. 소송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소권을 부여받아야 했다는 것도 공통적이었다. 소권과
관련하여 로마법에서 법무관이 부여하였던 방식서(formular)나 영국법에서
챈슬러가 부여한 소장(writ)이나 그 역할은 비슷하였다.27)
셋째로, 로마법도 커먼로도 엄격한 판단과 형평에 의한 판단이라는 이중
체계를 취하였다. 로마법은 엄격법(시민법)과 성의법(법무관법)을 기초로, 커
먼로는 보통법(common law)과 형평법(equity law)을 기초로 소권을 부여하
고 판단을 하였다.28)
넷째로, 로마법도 커먼로도 소송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각 법체
계에서 논점을 정하여 소송을 하게 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전달하는 일은 법무
관 내지 판사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해당 논점을 전제로 증명을 받고 판단을
내리는 일은 심판인(iudex) 내지 배심원(jury)이 담당하였다.29) 그런데 이 후
24) 로마법의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현승종, 앞의 책, 10면 이하를 참조하라.
25) Watson, Ibid., p.247; Stein, Ibid.(각주 1), p.1591; Yntema, Ibid., p.78.
26) Yntema, Ibid., p.78; Pringsheim, Ibid., p.356.
27) Stein, Ibid.(각주 1), p.1592; Pringsheim, Ibid., p.358.
28) Yntema, Ibid., p.78; Pringsheim, Ibid., p.357, p.360; Stein, Ibid.(각주 1), p.1594.
16 法史學硏究 第52號
자의 사람들은 지금의 판사가 담당할 일을 수행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의 판사
처럼 법의 실체적인 면을 분석하고 심리할 능력을 가지지는 못했었다. 두 법
체계 모두에서 심판인 내지 배심원은 비법률가였다.30)
다섯째로, 로마법과 커먼로가 공통적으로 소송을 두 단계로 나누어 담당자
를 달리 했다는 것으로부터 여러 중요한 공통 요소들이 파생되었다. 두 법체
계 모두의 발달 초기에 상소 제도가 없었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31) 비
법률가들이 담당하였던 판단을 내리는 일은 신이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졌는데, 그 판단은 신의 판단인 만큼 최후적인 것으로서 상소가 필
요 없었다.32)
여섯째로, 로마법과 커먼로에서 구제방법상 원칙은 공통적으로 금전배상
이었다. 비법률가인 심판인이나 배심원은 실체적인 권리관계를 분석하지 않
았으므로 실체적인 권리관계를 반영하는 내용의 판결이 내려질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심판관이나 배심원은 비법률가였던 만큼 그들의 임무는
판결과 동시에 종료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실체적인 권리관계를 반영하는 판
결(이행판결)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판결 후에 그 이행 여부를 관리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판결의 내용은 즉각적이고 단순해야 했는데, 두 법체계에
서 공통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금전으로 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33)
일곱째로, 로마법과 커먼로에서 공통적으로 금전배상을 원칙적인 구제수
29) Yntema, Ibid., p.85; Stein, Ibid.(각주 1), p.1593. 참고로, 로마법 발전에서 고전기, 그중에서도
최대 발전기라고 할 성기에 해당하는 2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로마법상 소송 체계는 방식서 소송체
계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로마법 논의는 방식서 소송 체계 아래의 로마법을 가리킨다.
30) Stein, Ibid.(각주 1), p.1592. 이와 같은 배심제도의 기본적인 단점은 시대가 가면서 조금씩 개선은
되나 결국 19세기 커먼로 개혁의 주된 대상 중 하나로 된다. Simpson, Ibid., p.398f.
31) 영국과 미국에서 상소의 제도화는 18세기 내지 19세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즉 상소제도는 커
먼로적인 것도 아니고, 반드시 헌법적인 권리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어 왔다. Stan Keillor,
“Should Minnesota Recognize A State Constitutional Right to A Criminal Appeal?”, 36 Hamline
L. R. 399(2013), p.402. 나아가 상소심 제도를 두는 것과 보편적으로 그러하듯이 상소심이 다중으
로 존재(항소심-상고심)여야 하는지 여부의 문제 그리고 상고심이 법률심이어야 하는지 여부의 문
제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Martin Shapiro, “Appeal”, 14 Law & Society Review 629
(1980), p.631f. 영미법상 상소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Mary Sarah Bilder, “The Origin of the
Appeal in America”, 48 Hastings L. J. 913(1997), p.923f.와, 조규창, 비교법 상(소화, 2005),
381면 이하를 참조하라.
32) Stein, Ibid.(각주 1), p.1593.
33) Stein, Ibid.(각주 1), p.1594.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17
단으로 삼았다고 할 때, 금전배상이 아닌 다른 구제방법이 필요한 경우에는
심판인이나 배심원이 아닌 공무원이 관여를 하였다. 로마법상 법무관에 의한
특시명령(interdictum)이나 커먼로상 챈슬러에 의한 금지명령(injunction)이
그 예이다.34)
3. 로마법계와 영미법계 구분에 대한 재고
(1) 로마법계와 영미법계의 구분 문제와 영국법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의 분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마법과 커먼로(영미법)의 발전 초기 단계를 비교
하여 보면 그 실체적인 내용에서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이 존재한다.35) 오늘
날 영미법계의 법률가가 볼 때 오늘날의 로마법계 국가의 어떤 법이 익숙하
지 않을지는 몰라도, 로마법은 오히려 익숙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의문은 두 가지 방향으로 탐구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영미법계의 법률가에게 익숙할 수도 있는 로마법이었는데,
로마법계의 법이 익숙하지 않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아마도 로마법 내지 로마법계 안에서 벌어진 변형 및 발전에서 찾아
야 할 것이다.36)
그 다른 한 가지는, 세계 법계를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 양분하는 문제와
영국 커먼로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는 적절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
닌가 하는 것이다. 커먼로가 성립하던 시기는 대륙에서 로마법이 한창 발전
하던 시기였는데 커먼로의 내용을 보면 로마법과 상당히 유사하므로 그 시기
의 커먼로가 통설의 주장처럼 로마법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고 하기는 어렵
다고 봐야 한다. 그런즉 통설이 주장하는 것은 커먼로도 로마법의 영향을 받
34) 로마법상 특시명령에 대해서는 현승종, 앞의 책, 262면 이하를 참조하라. 커먼로상 금지명령에 대
해서는 워딩턴, 앞의 책, 82면 이하를 참조하라. 그밖에 로마법과 커먼로가 민사법 영역에서 유사
성을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Pringsheim, Ibid., p.360f.를 참조하라.
35) 이에 비해 로마법(대륙법)과 영미법(커먼로)의 기본적인 차이로 열거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김동훈,
앞의 논문, 231면 이하를 참조하라.
36) Stein, Ibid.(각주 1), p.1594.
18 法史學硏究 第52號
기는 하였으되, 커먼로의 로마법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이후에 커먼
로가 자신의 로마법적 색채를 상대적으로 빨리 탈색시켜 상대적 의미에서 독
자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강조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영국의
커먼로는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던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로
마법계 법들을 상대로 독자성을 주장할 정도가 되어 로마법계와 더불어 세계
의 법계를 양분하게 되었다고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 커먼로의
로마법 계수 여부 문제와 세계 법계의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의 양분 문제는
구분될 수 있게 된다. 계수는 하였으되(영향을 받았으되) 이후 독자성을 확
보하면서 세계 법계를 양분할 정도가 되었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수를 하지 않았고(영향을 받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성립되고 발전하여 세
계 법계를 양분하게 되었다는 무리수를 두는 데에서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
는 또 다른 논의와 접하게 된다. 즉 커먼로가 로마법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
던 것이 분명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영미법계의 여러 학자들이 로마법 ‘계
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한 것에서 세계 법계의 양분과 관련된 정치
적 함의를 논해야 하게 된다.37)
(2) 로마법계와 영미법계 사이의 차이점의 출발점은 유사점
법계의 양분이 미치는 기본적인 영향 내지 부작용은 각 법을 각 법계 안에
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영미법계의 법은 영미법 체계 안에서만 보려
는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38) 영미법상 특성이라고 하는 어떤 것에 대해
역사적 고찰을 한다 해도 커먼로 초기 단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뿐, 로
마법까지 올라가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런 식의 고찰은 결과적으로 영미
법상 특성을 고찰한 것이 아니라, 영미법이 로마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 내지
37) Sherman, Ibid.(각주 3), p.624; Re, Ibid., p.453; 정종휴, 앞의 책, 32면 참조. Re는 이와 같은
태도를 편협한 애국심(insular patriotism)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Re, Ibid., p.494. 이에
대해서는 이 글 뒤, ‘(7) 영국의 로마법 불계수 주장의 정치적인 맥락’ 부분을 참조하라.
38) 이러한 태도는 영국의 법률가들에 의해 조장되었던 태도이기도 하다. 후술하다시피 영국의 중세
및 근세 법률가들은 커먼로의 독자성을 위해 ‘외국법(foreign law)’ 개념을 사용하여 외국의 법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 글 뒤, ‘(6) 12세기 영국의 커먼로의 독자성은 합리화된 것’ 부분을
참조하라.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19
영미법과 로마법 모두가 가지는 유사성을 고찰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
게 된다.39)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영미법은 로마법계 법에 비해 소송 위주
로 발전한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영미법과 로마법 사이의 유사
성 맥락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
첫째로, 두 법계 모두 사례(판례)위주로 결의론적으로 법리를 전개시켰다.40)
다만 법학자의 역할이 영미법계에서보다 로마법계에서 훨씬 크기는 하였다.41)
둘째로, 두 법계 모두 소송을 중심으로 법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로마법계
에서는 법전화 작업으로 인해 실체법과 절차법의 분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졌
다. 영미법계에서도 실체법과 절차법의 분리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되 그 분
리는 로마법계에서만큼 명확하지는 않았다.42) 상대적 차이에 불과하였을 이
차이는 후대로 가면서 로마법계의 대규모 법전화 작업의 계속과 영미법계의
판례법 체계 고수로 인해 확대되게 되었다.43)
셋째로, 두 법계 모두 소권 부여와 판단에 엄격한 체계와 상대적으로 융통
성 있는 체계라는 이중체계를 취했다. 그런데 로마법에서는 고전기 후기인
3세기경에 이미 엄격법 체계와 성의법 체계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
다.44) 이에 비해 영미법에서는 19세기에야 보통법원과 형평법원 사이의 공
식적인 통합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중적 체계 사고가 영향을
미치는 면이 있다.45)
넷째로, 두 법계 모두 초기에는 비법률가에게 판결을 맡겼었다. 그러나 로
마법에서는 3-4세기경에 단일 소송 체계로 통합되면서 법률가가 재판의 전
과정을 맡게 되었다.46) 그에 비해 영미법에서는 19세기에야 민사사건에서
39) 이 글 앞, ‘2. 로마법과 커먼로의 유사성’ 부분을 참조하라.
40) Yntema, Ibid., p.78; Pringsheim, Ibid., p.356.
41) Watson, Ibid., p.249.
42) Stein, Ibid.(각주 1), p.1598.
43) Stein, Ibid.(각주 1), p.1594.
44) 현승종, 앞의 책, 22면과 259면과 264면을 합하면 본문과 같은 계산이 나온다.
45) Simpson, Ibid., p.396f.
46) 현승종, 앞의 책, 263면 이하.
20 法史學硏究 第52號
배심제의 폐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법률가가 재판의 전 과정을 맡게 되
었다.47)
다섯째로, 두 법계 모두 초기에는 상소 제도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로
마법의 경우에는 3-4세기경에 단일 소송 체계로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상소
제도가 등장하였다.48) 이에 비해 영미법에서는 19세기에야 상소 제도가 일
반화되었다.49) 물론 19세기 이전의 영미법상으로도 지역별 분야별로 복잡한
법원들이 존재하였고50) 그들 사이에 사실상 위계질서가 있기는 하였다. 보
기에 따라서는 영국에서 커먼로가 성립되던 12세기의 왕립법원(국왕재판소)
은 그 자체가 일종의 상소법원이었다. 커먼로가 성립하게 되는 12세기 이전
부터 지역법원과 교회법원 등이 존재하였지만 그 판단에 만족하지 못한 사건
들이 새로 생긴 강력한 왕의 법원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법원들
과 새로 생긴 왕립법원 사이에 그리고 왕립법원과 왕립법원 사이에 사실상
위계질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위계가 반드시 상소 체계를 뜻하지는 않았
다. 오히려 그렇게 복잡한 법원 체계와 사실상 존재하는 위계질서를 정리한
것이 19세기 영국의 소송 체계 개혁이며, 그때에 법원이 통폐합되면서 영국
에서 상소 체계가 정식으로 수립된 셈이다.51)
여섯째로, 두 법계 모두에서 민사소송상 권리구제 방법으로 금전배상이 원
칙이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실체법 체계가 발전하면서 로
마법계 법들은 강제이행을 또 하나의 원칙으로 세웠고, 영미법은 여전히 강
제이행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다.52)
일곱째로, 두 법계가 금전배상이 아닌 다른 구제방법이 필요한 경우에 예
외적으로 인정하였던 특시명령이나 금지명령은 이후 두 법계 각각에서 위상
이 달라졌다. 로마법계에서는 금전배상 원칙 외에 강제이행 허용이 또 하나
47) Simpson, Ibid., p.399.
48) 현승종, 앞의 책, 264면.
49) Keillor, Ibid., p.402.
50) 최종고, 앞의 책, 384면.
51) Shapiro, Ibid., p.639.
52) Re, Ibid., p.481; Stein, Ibid.(각주 1), p.1593.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21
의 원칙으로 되면서 특시명령에 해당하는 제도가 오히려 예외적이 되었고,
영미법에서는 강제이행이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고수되면서 금지명령이 여
전히 의미있는 구제방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53)
그런즉 이와 같은 설명들을 종합해보면 ‘영미법은 로마법계 법에 비해 소
송 위주로 발전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표현은 ‘로마법도 영국의 커먼로도 소
송 중심으로 법이 발달하였다’는 로마법과 영미법 사이의 유사성과 연관된
표현일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이 영미법의 특
성으로 말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영미법은 그와 같은 커먼로 초기의 성질들을 후대에도 기본적으로 유지한 것
에 비해, 로마법계 법에서는 해당 국가의 부침과 법학자들의 활동과 법전화
작업 등을 계기로 다양한 변용이 일어났다는 중요한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영미법계의 특성이 두
법계의 유사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부정될 수 없다.
(3) 교회법을 매개로 로마법이 영국의 커먼로에 미친 영향
서술하였듯이 로마법과 영국의 커먼로는 발전 초기 단계에서 여러 유사성
을 가졌다. 이 유사성은 일반적으로 커먼로가 로마법을 계수하였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법의 계수나 영향과는 전혀 별개로 법 발전 단
계에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후자의 설명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되,54) 여기서는 전자로 설명하든 후자로 설명하든 부정할 수
없는 교회법을 매개로 한 로마법의 영향에 대해 검토하려고 한다.
12세기경부터 성립된 영국의 커먼로를 영국적 관습법 체계의 통일화 작업
이라고 할 때 커먼로는 ‘관습’법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55) 커
먼로는 관습법, 봉건법, 장원법, 교회법, 제정법 등 당시 영국에 적용되고 있
는 다양한 법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 교회법의 기반은 커먼로가 성립
53) Re, Ibid., p.481; Stein, Ibid.(각주 1), p.1594; 워딩턴, 앞의 책, 82면.
54) 조규창, 앞의 책(하), 437면 이하 참조. 이에 대해서는 이 글 뒤, ‘(5) 커먼로와 로마법의 유사성이
법 발전 초기 단계의 공통성일 가능성’ 부분에서 서술한다.
55) 최종고, 앞의 책, 385면 이하 참조.
22 法史學硏究 第52號
하기 이전인 11세기 이전의 영국에도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영국의 교회법
부분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은, 커먼로 성립 당시에 영국의 법률가들이
그것을 로마법적 요소라고 인식하였든 아니 하였든, 커먼로에 대한 로마법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교회법 관련한 부분을 보면, 이 부분은 확실하게 로마법적인 요
소(roman-canon law)로 말해진다. 중세의 교회법은 어느 나라의 교회법이
든 그 주요 내용이, 극히 종교적인 내용을 논외로 하면, 로마법에 기초를 두
었기 때문이다.56) 당시의 교회들은 유럽 대륙에 공통된 국제 조직의 일부를
이루었고, 영국에 위치한 교회라고 하더라도 영국의 조직인 것이 아니라 로
마교회의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로마법과 밀접한 연결을 가졌던 교회법은
그것이 커먼로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커먼로가 로마법과 유사성을 가지는
바탕으로 되었다.57) 그리고 이는 영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단지 영향 여부가 아니라, 교회법이 영국의 커먼
로 안에 포섭되는 데에 따른 정당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면서 커먼로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외국법(foreign laws)에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데, 로마법에 기초를 두는 교회법은 외국법
적인 것이기는 하되 커먼로에 수용되어 있기는 하였기 때문이다. 커먼로에
교회법이 계속적으로 수용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
능하다.
그 한 설명은, 관습법과 교회법과 로마법이 모두 섞여있는 부분에서는 그
것의 로마-교회법적 성격 포함은 크게 문제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58) 영
국이 가졌던 로마-교회법적 내용들이 영국의 관습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그들이 주장하는 고유의 커먼로가 성립하기 이전 시대부터 교회법
내지 교회법원이라는 체계를 자신의 법 내지 법원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 아
56) 정종휴, 앞의 책, 34면; Re, Ibid., p.455.
57) 그런즉 교회법은 당시 유럽 세계의 보통법이었다. 정종휴, 앞의 책, 36면.
58) 특히 영국 고유의 관습에 의하였을 것 같은 자식, 결혼, 유언 및 상속에 관한 것은 많은 부분이
관습이 아니라 교회법에서 온 것들이다. David J. Seipp, “Reception of Canon Law and Civil Law
in the Common Law Courts before 1600”, 13-3 Oxford J. of Legal Studies 388(1993), p.396f.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23
래 적용된 것의 한 내용이 로마-교회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59)
교회법이 커먼로에 수용되어 있는 상태가 유지된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
은, 교회법원의 독자적인 관할에 관한 한, 즉 교회법이 영국에 필요하고 적
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교회법을 영국의 법이라고 인식하였다는 것
이다.60)
그런즉 영국에서 교회법은 외국법적인 것이되 일부러 문제 삼지 않는 한
외국법적 색채가 문제될 일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 13-16세기의 영국의 법
자료들은 영국의 법률가들이 자국의 교회법 전문가나 로마법 전문가나 심지
어 유럽의 법률가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영국의
법률가들이 법리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주위의 교회법 전문가나 로마법 전문
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이 일반적이었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61) 그
러므로 영국이 교회법과 로마법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은 커먼로 성립 당시의
현상이 아니라, 영국이 커먼로의 독자성을 주장하여야 하고 로마의 교회법을
부정하여야 하였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62)
그런 한편 영국의 교회법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영국의 형
평법(equity law)이다. 영국의 형평법은 커먼로의 특징을 이루는 중요한 부
분으로 말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커먼로와 교회법과 로마법의 교집합이
이루어지는 부분으로도 말해질 수 있다. 이 형평법 내지 형평법원의 관념이
로마법에서 엄격법인 시민법에 대응되던 성의법인 만민법(ius gentium)에서
온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63) 실제로 영국의 형평법원에서 사용된 법원
칙은 로마법상 형평(aequitas)이었다.64) 그리고 영국의 형평법원의 판사들은
대부분 로마법과 교회법을 교육받은 주교들이었다. 게다가 형평법원에서의
소송절차 또한 교회법 소송절차와 유사하였다. 따라서 형평법원 체제 내에서
59) Re, Ibid., p.486.
60) Seipp, Ibid., p.394.
61) Seipp, Ibid., p.390.
62) Seipp, Ibid., p.389; Sherman, Ibid.(각주 15), p.328.
63) 로마법이 법계를 막론하여 서구법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로마법상 만민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Yntema, Ibid., p.79.
64) Palmer, Ibid., p.1220; Re, Ibid., p.481.
24 法史學硏究 第52號
교회법의 역할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영국의 법은 그렇게 교회
법 및 형평법이 매개가 되어서라도 로마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
었다.65)
(4) 로마법에 대한 회피 내지 배척의 시작
그런즉 영국이 로마법을 본격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로마법
의 영향을 받는 것이 영국의 관습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66) 그러던 영국
이 국내외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강조할 필요가 생기자 로마법을 회피하기 시
작하였다. 그렇지만 영국의 법원에서 로마법은 어려울 수 있는 존재였지 처
음부터 회피하거나 배척할 존재는 아니었던 만큼 그 시작은 전혀 격하지 않
았다. 영국의 법률가들은 세속법원에서 영국의 법과 로마법을 같이 인용하여
야 할 때 로마법의 우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식으로 소극적인 회피를 하였
을 뿐이다. 그 명분도 로마법에 기반한 논리가 너무 장황하다거나 라틴어 사
용으로 인하여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극적 회
피는 영국의 법률가 중에 자국에서 교육받은 배경을 가진 자들이 느는 것에
비례해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로마법이 커먼로에 비해 법
리적으로 더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로마법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리
한 쪽으로 영국의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가 일반화
되자 영국의 법률가들은 로마법에서 많은 것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커
먼로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로마법을 회피하고 배척하려 들었다.67)
65) Re, Ibid., p.479, p.484f.; 김성태, 「영국 계약법리 발전과정에서의 교회법의 역할」, 민법학논집
제2권(박영사, 1995), 272면.
66) Sherman, Ibid.(각주 15), p.327. 커먼로에 포함되어 있는 로마법적 요소들에 가장 큰 기여를 한
12세기 영국 법률가로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으로 주석학파의 일원이기도 하였던 Vacarius를 들
수 있다. 최종고, 앞의 책, 390면 참조.
67) Richard H. Helmholz, “Continental Law and Common Law: Historical Strangers or Companions”,
1990 Duke L. J. 1207(1990), p.1214f.; Seipp, Ibid., p.414f.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어떤 제도는
그들이 버린 어떤 제도에 기반을 둔다. Bilder, Ibid., p.967. 그러나 Helmholz, Ibid.(각주 67),
p.1215f.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13-16세기 사이의 영국 법사료들을 실증적으로
분석해보면 당시의 영국 법률가들이 로마법을 회피하거나 배척하였다는 증거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25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시작된 영국법의 로마법에 대한 회피 내지 배척에
서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바뀐 계기는 헨리 8세에 의해 영국 교회가 유럽의
교회에서 독립하게 된 일이었다. 영국이 정치적 이유에서 교회법을 배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은 로마교회와 대척관계에 있으면서도 국제관
계상 나름의 관계는 유지하여야 했으므로68) 교회법에 대한 배척은 직접적인
대상을 지목하지 않고 외국법(foreign laws)에 대한 배척으로 완곡하게 표현
되었다.69) 그리고 그 과정에서 로마법은 교회법의 토대로서 그리고 영국의
법률가들이 보기에 필요 없이 복잡하고 어려운 외국의 법으로서 같이 배척되
었다.70)
(5) 커먼로와 로마법의 유사성이 법 발전 초기 단계의 공통성일 가능성
앞서 서술하였듯이 영국 커먼로의 특성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을 커먼로 성
립 시대를 놓고 살펴보면 로마법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와 같은 유사성은, 영국법이 사실상 로마법을 계수했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
지만, 법 발전 초기 단계에 나타날 수 있는 공통성 때문일 가능성도 없지 아
니하다.71) 법 발전 초기 단계에 나타날 수 있는 공통성으로 보되 거기에 그
당시 교회법이 가졌던 유럽적 보편성을 합하면 영국의 커먼로와 로마법은 충
분히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영국의 커먼로 성립 단계와 로마법의 성립 단계는 대응적
으로 비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므로 그 유사성을 초기 단계의 공통성으로
68) 헨리 8세가 16세기 전반에 교회를 개혁한 이후 영국 내에서 교회법 교육을 금지하였지만 교회법
교육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법을 교육할 때에 교회법 교육을 그에 포함시켜
하는 것으로 그 필요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 로마법에 대해
서도 부정적이게 되었다. Seipp, Ibid., p.396.
69) 이 배척이 완곡하게만 표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은 대륙과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대척적인 관계
에 있다는 적이론(enemy theory)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Seipp, Ibid., p.389 참조.
70) Re, Ibid., p.488. Re, Ibid., p.453은 영국의 로마법 계수 여부와 관련된 정치적 맥락의 의미를 외교
적 맥락으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법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외국의 법
(foreign laws)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영국이 영향 받은 외
국의 법은 로마법일 수밖에 없다.
71) 법 발전 단계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조규창, 앞의 책(하), 437면 이하를 참조하라.
26 法史學硏究 第52號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로마법은 기원후 1-3세기에 집중
적으로 발전하였고, 커먼로는 12-13세기에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자의 주장이 그저 1,000년을 넘는 시간 차이에 근거를 두는 것만은 아니
다. 필자의 주장은 오히려 12-13세기의 영국 자체에 근거를 둔다. 영국이 유
럽 국가 중의 하나로서 대륙 내의 국가들과 전반적인 교류를 하였다고 할
때, 12-13세기의 영국은 12-13세기의 대륙 내 국가들과 비슷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12-13세기 영국에서 로마법의 위상은 12-13세기 대륙 내
국가에서 로마법의 위상을 전제로 가감을 하여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로마법은 교회법이나 관습법에 내재되어 중세 유럽인들의 삶을 규율하고 있
었으며, 그것은 영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아야 한다. 영국의 법률
가 입장에서 커먼로의 독자성을 강조할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법적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시킨 커먼로의 독자성 강조는 호응하기 어렵다는 것이
다.72) 그런즉 필자는 커먼로와 로마법의 유사성을 법 발전 초기 단계에 나타
날 수 있는 공통성 정도로 보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6) 영국의 커먼로의 독자성은 합리화된 것
그렇다면 다음에 살펴야 할 것은 영국의 커먼로는 과연 그것이 성립하고
발전하던 12-13세기, 그리고 형평법까지 존재하게 된 14세기에 법계를 양분
시킬 만큼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는가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커먼로는 로마
법계 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기는 한다. 비록 상대적인 수준이라
고 하더라도 커먼로가 분명 로마법계와 비교되는 독자적인 법체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양대 법체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독자성에 주목하
여 커먼로가 성립하던 12세기의 영국을 다시 보면, 12세기 영국의 커먼로에는
12세기의 로마법과 차이나는 영국법적인 것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12
세기 영국의 법상황은 현재의 법계 양분을 합리화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오늘날의 법계 양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12-13세기
72) Sherman, Ibid.(각주 15), p.327 참조; Richard H. Helmholz, “Magna Carta and the Ius
Commune”, 66-2 Uni. Chicago L. R. 297(1999), p.360 참조.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27
로 거슬러 올라가 봐도 당시의 영국의 법 상태에서 독자성의 증거들이 기대처
럼 찾아지지는 않는 것이다.73) 그런즉 우리가 커먼로 성립기로 거슬러 올라가
고찰을 하는 것은 그 시대에서 독자성을 찾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늘날
인정되는 커먼로 독자성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라
고 할 것이다.
그런 한편 영국 커먼로의 독자성이 커먼로가 형성되던 12-13세기가 아니
라 14세기 이후에야 그나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국과 비견되는
유럽 대륙 내 국가들의 본격적인 로마법 계수가 13세기 말 이후에 이루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14세기에 이르렀을 때 영국은 보통법과 형평법을 아우르
는 커먼로 체계를 갖추게 되고 이에 비해 유럽 대륙 내 국가들은 로마법의
보통법(ius commune)화를 이루게 되면서 두 법 사이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커지게 되었고, 이 차이가 커먼로의 독자성의 근거로 되는 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2-13세기를 놓고도 이미 영국의 법과 대륙의
법들 사이의 구분을 예견할 수가 있다. 영국과 대륙 국가들 사이에 로마법에
임하는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륙의 국가들은 로마법을 적극적
으로 계수하면서 공통적인 법체계를 가지게 되었고,74) 영국은 로마법을 적
극적으로 계수하지 못하거나 안 하면서 대륙과 차이나는 체계를 가지게 된
셈이다. 이때에 성립된 영국의 법체계를 커먼로(common law)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대륙의 국가들이 로마법을 중심으로 보통법(ius commune) 체계
를 성립시킨 데에 따른 표현 차용이라는 점이 커먼로와 로마법의 관계를 웅
변해주고 있는 것이다.75)
73) Re, Ibid., p.470; Sherman, Ibid.(각주 15), p.324.
74)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유럽 대륙 내 국가들의 입장에서도 사실 로마법이 외국의 법(foreign law)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관념 아래 로마법을 자신들의 선임자의 법이라고 보는 합리
화를 해서라도 로마법을 전면적으로 계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은 특히 독일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최종고, 앞의 책, 179면.
75) Re, Ibid., p.470; Sherman, Ibid.(각주 15), p.324.
28 法史學硏究 第52號
(7) 영국의 로마법 불계수 주장의 정치적인 맥락
오늘날의 커먼로는 영국의 커먼로로 시작하였는데, 영국의 커먼로라는 표
현을 가능하게 하는 영국이라는 나라는 앞서 서술하였듯이 11세기 후반 이
후에야 존재한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것이 커먼로를
가지는 영국의 시작인데 그 정복이 1066년경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영국의 커먼로가 12세기에 성립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듯
이 윌리엄의 영국 정복 이후 헨리 2세가 사법체계를 중앙집권화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즉 영국에서 커먼로의 성립 자체가 극히 정치적인 뉘앙스를
가진다.76)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했던 당시에도 영국에 법이라고 할 것은 존
재하였지만, 그것들은 새로운 국가 수립으로 인해 더 이상 커먼로를 가지게
되는 그 영국의 법이 아닌 법들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77)
그런데 오늘날의 영국을 연 윌리엄이 로마법을 알든 모르든 그리고 영국
커먼로의 기초를 수립한 헨리 2세가 로마법을 알든 모르든, 그들의 지배 체
계는 대륙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왕 아래에서 법을 담당하
였던 자들은 대륙에서 로마법 및 교회법을 공부한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국 커먼로의 기본 체계가 로마법의 그것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기는 어려
웠다. 로마법과 완전히 다른 바탕을 가지고 영국 고유의 커먼로를 성립시키
려면 그 당시 법을 담당한 자들이 영국 고유의 법 및 소송 체계에 정통해야
하였을 것인데 그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임을 쉽
게 추측할 수 있다. 영국 정복과 더불어 지배계층이 바뀐 상태의 영국에서
‘고유’라고 할 법 및 소송 체계라고 할 것이 도대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상황에서 영국의 법을 담당한 자들이 가진 것은 대륙의 법학자들만큼 충
분하게 교육되지는 않은 로마법과 교회법에 대한 지식 정도였기 때문이
다.78) 그런즉 영국의 법 담당자들은 그런 한계 내에서 영국의 법을, 그러니
까 나중에 영국의 커먼로라고 평가받게 될 그 법을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었
76) Postema, Ibid.(각주 12), p.165.
77) Maitland/Montague, Ibid., p.3f.
78) 영국의 법률가들이 가졌던 로마법이나 교회법 지식들이 얼마나 정확했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Seipp, Ibid., p.412; 김성태, 앞의 논문, 270면.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29
을 것이다.
그런 한편 영국을 정복하여 커먼로를 성립시킨 세력은 본래 프랑스 노르
망디를 배경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을 정복하여 국가를
수립하였을 때 주요 임무는 프랑스 내지 유럽 대륙에서 독자적인 영국을 만
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법체계는 정치적 맥락에서 중앙집권화되어야
했다. 하지만 영국의 법체계의 중앙집권화는 당시의 선진 법이었던 로마법을
반드시 배제하고 이루어져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즉 영국 법체계의 영
국화는 로마법에 대한 의도적 배제가 아닌, 로마법을 도입하는 것을 둘러싼
현실적 제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법이 영국에 유입되는 유일
한 통로는 지배층 자식들이 대륙으로 유학하는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통로
로는 영국 내의 법 수준이 대륙의 로마법 수준을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이
다. 아무리 실무 중심으로 발전하는 커먼로라고 하더라도 법체계에서 인위적
인 이론 전개는 필요하였는데79) 대륙의 로마법 수준을 따라가기 힘든 현실
에서 실무를 통해 교육을 받은 대다수 영국의 법률가들이 영국적인 법체계의
특성을 강조하는 상황이 겹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영국법은 나름
대로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로마법을 제대로 계수해야 할 필
요성은 실질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80) 그리고 16세기에 영국의 헨리 8세가
로마교회와 대립하는 정치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로마법(교회법)에 대한 배척
은 정치적 차원에서 사실상 공식화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영국의 법이 대륙의 로마법과 양분되는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중세 이후 유럽 대륙 내에서 로마법이 부흥하고 발전해
나간 것과 영국에서 영국법이 로마법에서 멀어져 간 것에 비례하여 영국적인
것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의 합이라고 할 것이다.
79) Postema, Ibid.(각주 17), p.1f.; Postema, Ibid.(각주 12), p.157.
80) Helmholz, Ibid.(각주 67), p.1214f.
30 法史學硏究 第52號
Ⅲ. 스코틀랜드법과 로마법
1. 스코틀랜드의 로마법 계수
(1) 로마법계 스코틀랜드
이 글에서 스코틀랜드법을 살펴보는 이유는 스코틀랜드가 넓은 범위의 영
국에 속하되 법체계상으로는 영미법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에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는 대표적인 로마법계 국가였으며, 지금도 기본적으로
는 로마법계 국가이다.81) 스코틀랜드가 로마법계 국가라는 점은 영국의 로
마법 계수 여부에 관한 논의에서 지정학적 여건 요인의 비중을 낮추고, 그에
비례하여 정치적 여건에 대한 비중을 높이는 면이 있다. 지정학적 여건으로
인해 영국에 로마법이 계수되는 일이 어려웠다면 유럽 대륙과 지정학적으로
조금 더 멀리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에는 로마법이 계수되는 일이 더 어려웠어
야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스코틀랜드는 매우 성실한 수준으로 로마법을 계수
하는 길을 갔고 영국은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스코틀랜드가
로마법계 국가가 된 역사를 살펴보자.
스코틀랜드가 국가를 이루는 것은 대략 11세기경 이다. 하지만 스코틀랜
드와 영국이 국경을 접하는 외형까지 갖추게 되는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
이다. 그런데 스코틀랜드가 11-12세기에 국가를 이루는 것은 영국이 국가를
이루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에 서술하였듯이 1066년에 노르망디 공
작이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오늘날 영국의 토대를 세웠는데, 그때
잉글랜드 지역에 있던 토착 지배층이 정복세력에 밀려 북쪽으로 이동하여 그
지역의 토착층과 함께 이룬 것이 스코틀랜드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
황은 스코틀랜드의 법체계가 영국의 법체계와 달라질 원초적 계기를 제공하
였다.
81) William M. Gordon, “Roman Law in Scotland”, R. Evans-Jones Ed., The Civil Law Tradition
in Scotland (Edinburgh, 1995), p.13; 최대권, 영미법 개정증보판(박영사, 1995), 279면. 하지만
Pound는 같은 상황을 ‘법률용어를 제외하면 커먼로가 로마법을 극복한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R.
파운드 저, 김증한 역, 영미법의 정신(민중서각, 1956), 14면.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31
그런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워낙 로마법의 영향력이 강하였다보니 로마법
영향의 기원을 3세기경에 있었던 로마군의 스코틀랜드 점령까지 올라가 찾
기도 한다.82) 하지만 그와 같은 시도는 설득력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 로
마군의 점령은 스코틀랜드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 지역에서도 행해졌으며, 더
욱이나 스코틀랜드 지역의 점령은 법체계를 수반한 통괄적인 형태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83) 그러므로 스코틀랜드 자국사에서는 로마법 영향
의 기원을 3세기경 로마군의 점령기까지 소급시킬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
로는 이때의 점령에는 이후에 계수되는 로마법의 문화적 바탕이 된 것 정도
의 의미만 부여하는 편이다.84)
(2) 스코틀랜드의 법 발전 시작과 로마법 계수의 시작
12세기 정도에 영국과 영토적으로 구분되는 스코틀랜드가 성립하였다고
할 때 스코틀랜드에서의 법 발전은 영국에서의 법 발전과 비슷한 시기에 시
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로마법계 국가라고 하여 스코
틀랜드의 법 발전 시작이 12세기에 로마법 계수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의 스코틀랜드법의 대종을 이룬 것은 한편
으로 스코틀랜드의 인적 구성을 이룬 픽트족(Picts), 스코트족(Scots), 브리튼
족(Britons), 앙글레스족(Angles)의 법과 관습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이 당시의 유럽 대륙이나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법이 바탕에 놓여 있는
교회법이었다.85)
그러다가 13-14세기에 유럽 대륙에서 로마법이 크게 발전하면서86) 스코
82) Gordon, Ibid., p.15f. 참조.
83) 기원을 전후로 한 로마군의 영국지역 점령들은 법적 맥락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Maitland/
Montague, Ibid., p.21; Re, Ibid., p.455f. 로마 입장에서도 영국(브리튼)이 로마법을 고착시킬 만
큼 의미 있는 곳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Re, Ibid., p.456에서 Mommsen 재인용. 그러나 군사
적 점령이기는 하지만 점령자의 법이 피점령지의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Maitland/Montague, Ibid., p.22 참조; Re, Ibid., p.457 참조.
84) Gordon, Ibid., p.14.
85) Gordon, Ibid., p.13f.; Maitland/Montague, Ibid., p.22.
86) Gordon, Ibid., p.15; 조규창, 앞의 책(상), 535면 이하; 정종휴, 앞의 책, 43면; 최종고, 앞의 책,
50면 이하.
32 法史學硏究 第52號
틀랜드는 로마법을 계수하게 되었다. 로마법이 스코틀랜드에 유입되는 주된
통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지배층 자식의 유럽 유학이었다. 스코틀랜드가
로마법 체계를 세우기 위해 유럽 대륙에 법 담당자들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장래 지배층이 될 자가 대륙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이 로
마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 내지 통로는 영국의 경우에도 마찬가
지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는 로마법을 계수하였기에 그러하다. 그 차이는 스코틀랜
드의 경우에는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로마법 계수에 우호적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영국과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던 만
큼 영국과 다른 체계로 독립적 위상을 가질 필요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로마법에 우호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87)
(3) 스코틀랜드에 13세기에 계수된 로마법과 14세기에 계수된 로마법
스코틀랜드에서 로마법 계수가 시작된 시기는 대략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사이라고 본다. 그런데 13세기와 14세기에 스코틀랜드 기록에 나타나는
로마법 관련 자료들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13세기에는 민사소송 관련한 로
마법 참조가 로마법 자체보다 교회법에 대한 참조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14세기에는 로마법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참조로 나타났다. 그런
데 스코틀랜드에서의 이러한 사정은 12세기경에 시작된 유럽 대학의 역사와
13세기경에 본격화된 법학의 발전, 그리고 14세기경에 이루어진 로마법의
보통법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88)
즉 12세기 유럽의 대학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이 교육되었다고 할 때 두 법
교육의 전개 상황에 약간 차이가 있었다. 교회법 교육은 교회의 존재 및 성
87) 최대권, 앞의 책, 276면 이하.
88) Yntema, Ibid., p.86; Simpson, Ibid., p.394; 조규창, 앞의 책(하), 415면 이하; 정종휴. 앞의 책,
39면; 김영희, 앞의 논문(각주 4), 235면. 이는 오늘날 미국법이 세계적으로 중요시되는 것과 미국의
로스쿨 제도가 세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과도 일맥상통한다. 마티아스 라이만(Mathias Reimann),
「Transatlantic Models: Influences between German and American Law」, 서울대학교 법학 제41
권 제2호(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0), 258면.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33
직자 교육과 맞물려 일정 수준으로 항상 행해져왔다. 이에 비해 로마법 교육
은 14세기 이후에 보편적이고도 실용적인 것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
제의 로마법대전이 11세기에 재발견되어 그때 이후로 유럽에서 로마법이 부
흥하기는 하였지만 13세기에 주석학파가 그 기본 연구를 행한 다음에야 14
세기에 들어서 주해학파가 연구도 교육도 본격적으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다.89) 그리하여 14세기 이후로 로마법은 유럽 대륙 전반을 아우르는 보통법
(ius commune)으로 되면서 외형상 세속적인 영역에서, 그러나 실제로는 종
교적인 영역에서도 교회법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런즉 성직자 후보가 대학에
가서 법을 공부하였다고 할 때 교회법에 대한 교육과 로마법에 대한 교육은
같이 행해졌고, 학위도 양법박사 학위로 수여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법의 바탕이 어차피 로마법에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교
회 입장에서는 성직자들의 세속법(로마법)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지 않도록
제어하려 하였을 뿐이다.9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제어 시도는 성공
적이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유럽 대학에서의 법 교육 사정 내지 법 발전 상황은 스코틀랜드
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에서 로마법
관련 기록이 주로 교황과 관련한 교회 서류에 남겨졌다. 그러던 것이 점차
엄밀히 말하면 교회 서류는 아닌 공증인들의 서류에도 로마법 관련 내용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4세기에는 로마법 관련 기록이 교회 서류
가 아닌 세속법원 자료들에도 일반화되었다.91)
89) Gordon, Ibid., p.15. 하지만 같은 상황을 놓고도 14세기의 중세 로마법 발전보다 그와 같은 발전을
가능하게 한 12세기와 13세기의 로마법학을 로마 고전기 이후의 로마법 최대 발전기로 보는 시각
도 있다. Palmer, Ibid., p.1150.
90) 김영희, 앞의 논문(각주 4), 258면 참조.
91) Gordon, Ibid., p.16f. 스코틀랜드에서 14세기에 로마법이 법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재판 기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법과 관련하여 주요 직책을 맡게 되는 자들의 개인적인 행적
추적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중세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자료 보존이 많아지면서, 스코틀랜드의
법률가들이 언제 유럽의 어느 대학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어떤 법률 작업을
하는지의 자료들이 많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때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성직자 겸 법률가로 Adam
Urry가 있다. 글래스고우의 성직자였던 그는 교회법보다도 로마법에 더 정통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Gordon, Ibid., p.16.
34 法史學硏究 第52號
(4) 스코틀랜드 학생들의 유럽 대학 유학과 법학 교육
그런 한편 12세기경에 유럽 대륙의 대학에서 법 교육이 행해졌다고 할 때에
대륙에 이어 대학이 설립되었던 영국과는 달리 스코틀랜드에는 14세기에 들
어서도록 대학이 설립되지 않았던 것도 스코틀랜드의 로마법계화를 촉진시켰
다. 스코틀랜드 지배층 입장에서는 유학지로 전통의 유럽 대학과 새로 생긴
영국 대학 중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 영국의 대학은 지역적이고 경제적
인 장점은 있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회피되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학생은
주로 오를레앙과 파리의 대학을 선호하였는데, 이와 같은 선호에는 해당 시기
의 정치적 상황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교회의 대분열 시대
에는 스코틀랜드가 아비뇽 파에 가담하면서 아비뇽 대학이 선호하는 대학으
로 되었다. 그러다가 1413년에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첫 대학인 세인트 앤드류
스 대학이 세워지고 1422년에 해당 대학에 교황의 허가가 내려지면서 스코틀
랜드 내에서도 교회법 및 로마법 교육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후
로도 상당 기간 스코틀랜드의 법 교육은 스코틀랜드에서가 아니라 유럽 대륙
에서 행해졌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와 대학은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므로 대륙
에서 법 교육을 받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스코틀랜
드의 경우에 스코틀랜드 고유의 법보다 로마법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게 하는
상태를 유지시킨 요인으로 되었다.92)
(5) 16-17세기의 스코틀랜드법의 독자적 발전
스코틀랜드에서 법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스코틀랜드 고유법이 득세를 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마법 기조의 스코틀랜드법이 상당한 정도로 체계화되고 스코틀랜드 내의
법교육도 제 궤도에 이르러 스코틀랜드 고유법을 체계화할 수 있을 수준이
되면서 로마법에 대한 의존도와 유럽 대학에 대한 의존도가 모두 낮아진 것
이다. 그렇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아무래도 스코틀랜드의 정치적이고 종교
92) Gordon, Ibid., p.19f.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35
적인 사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 및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이 이루
어져 스코틀랜드가 신교인 루터파로 전향하면서 로마교회법의 구속력이 낮
아졌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법원에서 엄밀한 의미의 로마법은 로마교회의
영향력 감소와 무관하게 사용되었으나, 교회법의 영향력의 감소에 비례하여
스코틀랜드 관습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93)
그리하여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법이라고 할 것의 체계가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실체법 관련 논문이라고 할 Craig의 Jus
Feudale가 1606년에 나오기도 하였다. 봉건제도가 부동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그 저서에는 스코틀랜드적 사정이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되어 있었
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Stair와 Mackenzie 등의 스코
틀랜드 주요 법률가들의 저서에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94) 하지만 Craig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의 주요 법률가들은 기본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로마법을
공부한 로마법학자들이었으므로 그들 저서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로마법에
의 의존도는 여전히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법의 위상은 조금씩 상승하였다.95)
물론 17세기 이후에도 스코틀랜드 법실무에서 로마법 참조는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로마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자연적인 합
당한 법이어서 참조되는 것으로 되었다. 로마법이 중요시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인식 변화는 결과적으로 실무에 큰 변화를 가져왔
다. 로마법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이성적이고 자연적이며 합당한 내용이 아니
라면 참조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96)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17세기에
일어난 이와 같은 로마법의 위상 변화를 17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자생한
로마법의 영향력 감소 현상으로 설명할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17세기의
93) Gordon, Ibid., p.23f.
94) 특히 이와 같은 스코틀랜드 법학의 스코틀랜드화는 18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된다. Gordon, Ibid.,
p.31; Smith, Ibid., p.41.
95) 당시의 스코틀랜드 법원은 동료조합체적 성격을 가졌으므로 아무리 스코틀랜드 고유법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로마법을 모르는 사람이 판사로 등용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Gordon, Ibid., p.31.
96) Gordon, Ibid., p.27 참조.
36 法史學硏究 第52號
스코틀랜드의 그와 같은 변화는 16세기의 유럽 대륙 내에서 있었던 법학 사
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유럽 대륙에서 16세기 이후에 인
문주의가 대두되고 자연법학의 영향력이 로마법에 깊게 각인된 것이97) 17세
기에 이르러 스코틀랜드의 로마법 사조에 반영되어 마치 로마법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98)
2. 영국과 스코틀랜드 통합 이후의 스코틀랜드법
(1) 1707년의 영국과 스코틀랜드 통합과 독립적인 사법체계 유지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1707년에 통합되었다.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
면서도 혼인을 통하여 혈연관계도 유지하였던 두 나라는 왕위승계를 위해 이
미 1603년에 왕조통합을 이룬 바 있지만, 1603년의 동일자 양국 왕위 유지
는 두 나라의 법체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에 비해 1707년의
통합은 국가가 통합된 것이므로 법체계에 변동이 올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통합 협상은 두 국가가 그간 유지하여온 독자적인 법체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런즉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은 두 국가의 법체계에, 적어
도 당장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통합 이후로도 스코틀랜드는 16세기
이후 시작된 스코틀랜드법의 발전 방향을 지켜나갔다.99)
(2) 18세기 말 이후 스코틀랜드법의 로마법에 대한 의존 감소와 영국법에 접근
18세기 초반에 국가 통합이 이루어지고 나서 18세기 중반에 나온 스코틀
랜드 법서들을 보면 여전한 로마법 중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스코틀랜드법을 앞세우는 구성을 하고 있다.100) 그러다 18세기 말 이후에
97) Smith, Ibid., p.38 참조.
98) 이 대목에서 그냥 로마법이 아니라 네덜란드법, 즉 로만-더치로(Roman–Dutch Law)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네덜란드 태생의 Grotius에 의해 자연법학이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최종고,
앞의 책, 187면; Smith, Ibid., p.44; Peter Stein, Roman Law in European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99f.
99) 최대권, 앞의 책, 277면.
100)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법률가로는 Erskine 등이 있다. Gordon, Ibid., p.31, p.33.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37
나온 법서들을 보면 로마법에 대한 의존이 분명하게 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
다. 이와 같은 변화는 한편으로 16세기 이후 계속되어온 스코틀랜드법의 발
전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1707년에 있은
국가 통합 이후에 영국법의 실질적 영향력 증대에 따른 로마법의 영향력 감
소로 설명될 수도 있다.101) 스코틀랜드에서 로마법이 적게 참고 되는 것과
스코틀랜드에서 영국법을 참고한 법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같은 시
기인 것이다.102)
이렇듯 스코틀랜드가 로마법에서 멀어지고 영국법에 접근하는 것은 스코
틀랜드의 법실무 부분에서도 분명한 현상이 되었다. 우선 스코틀랜드의 고위
판사들은 영국의 고위 판사들과 한 나라 안의 동료관계처럼 자리매김 되었
다. 영국의 대법원(House of Lords)은 스코틀랜드 대법원(Court of Session)
을 선례로 구속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 입장에
서는 영국 대법원의 궁극적 최고 법원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의 국민들은 법적으로 한 국가로 통합된 영국이 미치는 경제
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법률가들은 영국
법에 정통하여야 할 현실적인 필요에 놓였다.103)
이와 같은 스코틀랜드 측 사정에 비해 영국의 경우에는 스코틀랜드 법률가
들의 영국 접근에 오히려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1707년에 국가를 통합하면서
각자의 법체계를 유지한 것은 나름의 정치적 경제적 손익계산에 의한 것이었
으므로, 영국은 스코틀랜드법 떠안기에 적극적일 필요가 별로 없었다. 영국으
로서는 오히려 어떻게든 한 번 더 심리를 받을 기회를 잡고 어떻게든 이겨보
려고 영국의 최고법원을 찾아 밀려드는 스코틀랜드 사건을 통제하려는 입장
이었다. 하지만 점차 영국의 법실무도 스코틀랜드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
다.104) 1707년의 국가 통합시에 원칙으로 삼은 독립된 법체계 유지는 여전하
101) 최대권, 앞의 책, 278면.
102) Gordon, Ibid., p.33.
103) 상법과 형법 같은 영역에서는 영국법의 영향력이 한층 직접적이었다. Gordon, Ibid., p.26f.
104) Gordon, Ibid., p.34; Sherman, Ibid.(각주 3), p.625; Alexander J. Black, “Separated by a
Common Law”, 4 Indiana Int’l & Comp. L. R. 15(1993), p.17.
38 法史學硏究 第52號
였지만 100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현실은 서로의 법에
대해 알아야만 하도록 얽혀있는 상황으로 된 것이다.105)
(3) 19세기 말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역사적 전거가 된 로마법
19세기말이 되었을 무렵 스코틀랜드에서 로마법의 영향은 확실하게 쇠퇴
하였다.106) 하지만 로마법의 쇠퇴가 스코틀랜드법에서 로마법적 색채의 제
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법의 기초에 로마법이 있는 것은 19세
기말 이후에도, 그리고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로
마법은 차차 역사적 전거로 되어갔다. 그리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성에
따라 영국법 쪽으로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영국은 대표적인
영미법계 국가이고, 스코틀랜드는 로마법계이면서도 영미법의 색채가 강한
국가로 되었다.107)
그런 한편 20세기 후반 이후로 영국법과 스코틀랜드법은 이전보다 더 접
근을 할 유인과 그러지 않을 유인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 체제는 영
국법과 스코틀랜드법이 접근을 해야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한 국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108)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강해진 스코틀
랜드의 영국으로부터 독립 운동은 스코틀랜드법의 영국법에 접근을 늦추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05) Kenneth Reid/ Reinhard Zimmermann Ed., A History of Private Law in Scotland, Vol.I.
Introduction and Proper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13.
106) Smith, Ibid., p.46.
107) 민사법에 관한 한 스코틀랜드는 확실히 로마법계이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커먼로가
가지고 있는 형평법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계약법에서 약인 법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Black, Ibid.,
p.19; 최대권, 앞의 책, 279면.
108) Gordon, Ibid., p.40. 물론 영국이 대륙법(로마법)과 친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Helmholz,
Ibid.(각주 67), p.1207f.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39
Ⅳ. 미국법과 로마법
1. 영국법과 미국법의 분기
(1) 영국법과 미국법, 그리고 영미법이라는 표현
미국은 영국과 더불어 영미법이라는 명칭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영미법의
기원부터 보면 영미법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영향력을 어쩔 수 없이 내포한
다. 영미법의 기원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하여 적어도 오늘날 미국법이 영미법이라고 부르는 것의 내용적 특성
에 1/2의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미국은 영국에서 독
립한 이후 꾸준히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여전히 영국
산 커먼로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109) 그
런즉 영미법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법이 영국의 커먼로에서 여전히 크게 달라
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미국의 기여도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미’법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치적 뉘앙스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한편 오늘날 영미법이라고 하거나 커먼로라고 하지 않고 굳이 미국
법이라고 부르는 일도 많다. 전통적인 영국의 커먼로에서 벗어나 미국적 특
성을 가지는 내용이라면 미국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미국적 특성을 가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법이라고 부른
다면 이 또한 오늘날 미국이 영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반영한다
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미법이나 커먼로라고 부르는 대신에 미국법이라
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적절한 수위 조절을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구체적인 법 내용에서 영국의 법과 미국의 법이 거의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국과 미국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다른 경우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110) 그 대표적인 예가, 영미법이 갖는 특성으로 언급되는 보통법과
형평법의 이원적 구조이다. 영국의 커먼로는 보통법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109) 김동훈, 앞의 논문, 231면.
110) 조규창, 앞의 책(상), 457면 이하 참조.
40 法史學硏究 第52號
후 형평법에 의해 보완되었다가 두 법이 통합된 상태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커먼로는 보통법과 형평법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에서 성립하였다. 그런즉
이원적 구조가 작동하는 원리는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래서
세워지는 법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된다.111) 또 다른 예는, 영미법이 갖는
또 다른 특성으로 언급되는 실무를 기반으로 하는 판례법 체계이다. 이 체계
아래서는 영국과 미국의 실무가 달라지게 되면 그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영국
의 판례법과 미국의 판례법도 달라지게 된다.112)
(2) 미국법 발전에서 시대
미국법에서 시대는 식민지시대, 미국법 창조시대, 그리고 미국법 발전시대
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113) 우선 식민지시대는 1600년경에 미국에 식민
거주지들이 설치되면서부터 미국 독립을 위한 조직적 움직임이 생기기 전인
1750년경까지와, 1750년경부터 독립혁명이 일어난 1776년경까지의 시기로
나뉜다. 이 시기를 식민지시대로 묶으면서도 또 구분하는 이유는 영국법 계
수와 관련한 상황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즉 전자의 시기는 결국은 성공
적이 된 미국 식민지의 위상이 불확실하던 상태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미
국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미국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
여 이 시기에 미국 사회에 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굳
이 이름을 붙이면 이 시기 미국에는 실제적이고 비기술적인 개척법이 존재하
였는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조리와 식민지의 관습이었다. 그런 한편 필요한
법이 있다면 영국으로부터 수입되어 미국법으로서가 아니라 영국법으로 적
용되었다. 이에 비해 후자의 시기는 영국법 계수시대이다. 미국이 식민지로
111) 영미법과 커먼로를 동의어로 사용할 때 그 커먼로는 영국의 커먼로와 미국의 커먼로로 나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과연 미국 고유의 보통법(커먼로 common law, ius commune)이라는 것이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미국의 커먼로라는 표현은 사용을 자제하여야만 하게
된다. 최종고, 앞의 책, 455면 참조.
112) Postema, Ibid.(각주 12), p.168f. 참조
113) 최종고, 앞의 책, 420면 이하. Friedman은 숫자(세기)로 시대구분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구분선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대략 일치한다. 로렌스 프리드만 저, 안경환 역, 미국법의 역사(청림
출판, 2006)의 목차 부분을 참조하라. 이에 비해 조규창, 앞의 책(상), 429면 이하는 미국법제사를
독립 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분하고 있다.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41
서 성공을 거두며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대로서, 1750년경부터 독립혁명이
일어난 1776년경까지가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미국 식민지 사회의 발전과
미국 식민지 위상의 향상에 따라 영국의 법들이 미국으로 대폭적으로 계수되
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훈련받은 법률가들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이다.114)
그 다음은 미국법 창조시대이다. 독립혁명이 일어난 1776년경에서 미국내
전이 완료된 1865년경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미국은 국가의 독립
과 더불어 법의 독립을 선언한 셈이었으므로 미국의 법체계를 창조하여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미국의 법체계 창조는 사법부 주도와 법학자 주도의 양
편으로 행해졌다. 사법부 주도의 법 창조는 역설적이게도 영국에서 이루어진
실무(판례) 위주 법 발전의 미국식 재현이었다. 이에 비해 법학자 주도의 법
창조는, 아무리 그간에 실무 위주로 법을 발전시켜왔다고 하더라도, 독립과
더불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법을 체계화시켜야 함을 생각할 때에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이었다. 영국의 법체계를 그대로 활용하든, 영국이
아닌 유럽 대륙의 법체계를 수입하든,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어떤 체계를 만
들어 내든 그나마 법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갖춘 법학자들이 어떻게라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미국법 창조시대에 미
국에서 활동하는 법률가들이 대폭 증가하였으며, 법학자들도 늘었고, 미국의
특징이라고 할 로스쿨에 의한 법학교육도 시작되었다.115)
그리고 그 다음은 미국법 발전시대이다. 미국의 내전이 완료된 1865년 이
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국법은 말 그대로 미국적으로 발
전하였다.116) 미국 독자의 판례집이 정비되기 시작하였으며, 미국 독자의 로
스쿨에 의한 법학교육도 본격화하였다. 법학적으로는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여러 주의 및 사조들이 등장하였다. 1865년경에 시작하여 1970년
대에 이르기까지는 고전주의(classicists), 진보주의(진취주의 progressives),
현실주의(realists), 그리고 절차주의(process jurists) 등의 순으로 주의나 사
114) 미국 식민지시대의 법에 대해서는 프리드만, 앞의 책, 43면 이하를 참조하라.
115) 프리드만, 앞의 책, 139면 이하 참조.
116) 프리드만, 앞의 책, 431면 이하 참조.
42 法史學硏究 第52號
조가 전개되었다.117) 이에 비해 1970년대 이후로는 여러 주의나 사조가 동
시대에 공존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118) 하지만 이와 같은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법 발전시대 이후의 미국법은, 현재도 포함하여, 현실적 가치
추구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통틀어 법현실주의로 표현되고 있다.119)
(3) 미국법의 영국법에서 독립과 미국법과 대륙법의 교류 증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을 때 그 시대 법률가들의 가장 큰 임무
는 미국법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120) 하지만 현실 여건과 이상에는 차이
가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영국법 인정 및 답습과, 미국법에 비하여 상
대적으로 발달하여 기교적이고 기술적인 면을 가지는 영국법에 대한 심한 반
감이 병존하였다. 어쨌거나 미국의 법 ‘창조’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의 법률
가들이 할 수 있었던 우선적인 선택은 영국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었다. 독
립 미국의 모든 구성원이 독립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영국법의 답습은 현실
적인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보기에 영국의 법은, 독립이라는 명
분을 떠나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법에 비해 체계도 모자라고 논리도 모자
라 보이는 면이 있었다.121) 그래서 미국은 영국의 법보다 더 나아보이는 유
럽의 다른 법들을 참조하길 원했는데, 그때에 유럽에서 다른 법들이란 로마
법계의 법들이었다. 특히 당시의 유럽의 로마법계 법들은 자연법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후의 상태였는데, 이는 미국의 법률가들로 하여금 로마법계의 법
들을 우호적으로 고려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미국 법률가들은 유럽의 자연법
학적 로마법이 말하는 이성적 원칙과 정의 개념이 미국의 정치적 이념에 적
합하다고 보았던 것이다.122)
117) Thomas C. Grey, “Modern American Legal Thought”, 106 Yale L. J. 493(1996), p.494f.
118) Donald H. Gjerdingen, “The Future of Our Past: The Legal Mind and the Legacy of Classical
Common-Law Thought”, 68 Indiana L. J. 743(1993), p.769f. 법경제학, 비판법학, 법여성학 등이
그것이다.
119) 법현실주의에 대해서는 최봉철, 「법현실주의」, 미국학연구소 편, 미국 사회의 지적 흐름-법(서
울대학교출판부, 1999), 3면 이하를 참조하라.
120) 파운드, 앞의 책, 121면.
121) Helmholz, Ibid.(각주 67), p.1222.
122) Franz Wieacker, “The Importance of Roman Law for Western Civilization and Western Legal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43
그렇지만 아무리 미국이 영국과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법 대신에 로마법이나 로마법계의 법을 도입하는 일은 수범자인 국민들
을 설득하는 것에서도, 그 법을 학습해야 하는 법조인들을 설득하는 것에서
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름 설득할 요인이 있기도 하였다. 국민들에
대한 관계에서는, 독립 미국이 확대되면서 이주자가 영국 일변도에서 유럽
대륙 각 국가로 확대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미국 국민의 인적 구성 변화로
인해 영국법이 아닌 유럽 대륙의 법을 도입하는 것이 일면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123) 그런 한편 신생 미국의 법률가들은 어차피 미국에서
로마법 체계가 영국의 커먼로 체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확
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는 차원에서 독일법
(로마법)에 관심을 두는 것에 잠재적 동의를 해주고 있었다.124)
2. 미국의 고전주의 법학과 독일의 판덱텐 법학
(1) 영국의 커먼로에 존재하던 로마법적 요소의 미국법에 승계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는 일단은 미국법이 영국법을 거의 전적
으로 승계했던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영국의 커먼로의
바탕에 여러 로마법적 요소들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미국의 커먼로
로 옮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커먼로가 미국의 커먼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로마법적 요소들이 의도적으로 제거되었다고 보기는 거의 힘들다
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커먼로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이 실체적 권리관
계나 소송 법리의 기초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그와 같은 로마법적 요소
들을 제거해내고 계수한다는 것은, 로마법과 영국 커먼로와 미국이 갖고자
하는 커먼로에 대한 지식과 방향성이 확고하지 않다면, 너무나 어려운 일이
Thought”, 4-2 Boston College Int’l & Comp. L. R. 257(1981), p.260; Helmholz, Ibid.(각주 67),
p.1221f.
123) 아예 대륙법적 체계로 시작하였던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Sherman, Ibid.(각주
3), p.625. 루이지애나 주의 대륙법 전통에 대해서는 조규창, 앞의 책(상), 491면 이하를 참조하라.
124) Helmholz, Ibid.(각주 67), p.1227.
44 法史學硏究 第52號
었기 때문이다.125)
(2) 독일의 판덱텐 법학과 미국의 고전주의 법학
미국이 독립을 이룬 후에 자신의 법체계를 창조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당
시 미국 법률가들의 우선적 임무였다고 할 때 그들이 영국법 외로 관심을
둔 것은 독일법(로마법)이었다. 당시의 유럽 법학 중에서 독일 법학의 발전
이 뛰어났고, 그와 더불어 독일의 정치 경제 발전 및 독일의 대학 교육 체계
가 미국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독일의 법학을 끌어나갔던
것은 Savigny를 중심으로 한 판덱텐 법학(로마법학)이었다.126)
그렇지만 독일의 판덱텐 법학은 미국이 도입하기에 부담스런 존재이기도
하였다. 독일 판덱텐 법학이 가지는 논리 체계성에 대해서는 그 탁월성을 인
정하지만, 미국으로 가져와 적용시키기에는 그 도그마성이 지나치게 강하다
는 점에서 회의적 견해가 주류였다. 그리하여 절충은 독일의 판덱텐 법학을
미국의 법을 체계화해나가는 일에 참고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127) 이는 아
무리 미국법이 실무 위주로 판례 위주로 발전하는 법체계라고 하더라도 일정
125) 예를 들어 미국 계약법상 약인(consideration) 법리는 로마법상 causa 법리와 연결을 가지고 있는
데 로마법적 요소가 부담스럽다고 하여 미국의 계약법에서 약인 법리를 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법상 causa 법리와 영미법상 cause 및 consideration 법리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Melius de Villiers, “Consideration in the Roman Law of Contract”, 6 J. of Comp. Legis. & Int’l
Law 3d ser. 120(1924)를 참조하라.
126) Savigny를 중심으로 한 독일 판덱텐 법학자들의 소개 및 업적에 대해서는 Riesenfeld, Ibid., p.2f.
를 참조하라. Savigny는 독일에서도 유럽에서도 중요한 법학자이지만 미국 민법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유럽의 법학자이기도 하다. 특히 1803년에 나온 Savigny의 점유론은 그 자체로서의 영향도 크
지만, Savigny식 이론에 대한 Holmes의 반론을 통해 미국법상 실용주의를 탄생시킨 계기 역할을
하였다. Richard A. Posner, “Savigny, Holmes, and the Law and Economics of Possession”, 86
Virginia L. R. 535(2000), p.535f.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Holmes가 Savigny를 비판하는 주요 이유
가 Savigny가 너무 로마법적이라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 올리버 웬델 홈즈 2세 지음, 임동진 옮김, 보통법 하(알토란, 2011), 13면 이하. 만약에 Savigny가 로마법을 조금이라도 덜 중시하고 대신
로마법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독일법을 조금이라도 더 중시하였다면, 독일법과 미국(영국)법은 게
르만적 공통성을 통해 연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Savigny가 미국법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가 달라
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대다수 미국 법률가들의 생각은, 독립 미국이 법 체계화를 위해
남의 나라 법들(foreign laws)을 참고할 필요는 있지만, 로마법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그에 대한 지
나친 몰두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즉 Holmes는 Savigny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미국법에
Savigny의 영향을 각인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Posner, Ibid., p.541f. 참조.
127) Posner, Ibid., p.538f.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45
정도의 체계화는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절충이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독일의 판덱텐 법학이 미국법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구체적인 내용의 법 이론 차원과 법 관련한 포괄적인 사고 차원 모두에
서 그러하였다.128) 하지만 그 두 차원을 굳이 비교하면 독일의 판덱텐 법학
은 미국법에 구체적인 내용의 법 이론을 통하여 보다, Savigny가 주장했던
법 사고 및 역사 사고를 통하여 영향을 미쳤다. Savigny는 법이 민족문화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구성성분을 이룬다고 보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국의 커먼로에서 독립한 미국 커먼로의 자주성의 정당화 논거가 되
어 주면서 Savigny는 미국이 참조할 만한 독일법학자의 대명사격으로 되었던
것이다.129) 그런 Savigny이었기에 그의 학문으로서 법학의 필요성에 대한 강
조도 미국법의 체계화 과정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130)
그런데 미국 법제사를 보면 미국 커먼로의 기초가 마련된 1860년 이후
1920년대 사이의 시기를 고전주의 법학 시대(classical legal science)라고 부
른다.131) 이 시기는 미국법이 독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을 받던 시기와 겹친
다.132)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 미국 법제사에서 고전주의 시대가 미국
128) 많은 실체적인 민법 개념들이 미국으로 수입되었다. 예를 들어 Savigny의 처분을 위한 계약행위로
서 물권변동 이론이 미국법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Savigny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미
국법상 계약과 증서(deed) 교부의 설명에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Riesenfeld, Ibid., p.3f.
129) 법의 민족적 자주성의 대표적인 주장자로서 Savigny의 색채는 그가 국가를 초월하는 로마법 전문
가임으로 인해 탈색되는 측면이 있다. Posner, Ibid., p.538.
130)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미국의 법전화 시도도 독일법적 체계화 영향의 대표적인 예라고
본다. 라이만, 앞의 논문, 256면.
131) 법학에서 고전주의라는 명칭은 다른 학문이나 예술에서 말하는 고전주의라는 명칭과 공통적인
기초를 가진다. 질서 잡히고 균형을 이루며 보편성을 가지고 시대를 초월하는 영구성을 가지는 성
질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Patrick O. Gudridge, “Persistence of Classical Style”, 131
U Penn L. R. 663(1983), p.663. 미국법에서 고전주의 시대를 가리키는 시기는 학자별로 다소 차
이가 있다. 예를 들어 Gjerdingen, Ibid., p.743은 고전주의 시대를 남북전쟁 때로부터 1937년까지
로 보고 있다. 그가 1937년을 고전주의 시대의 종료점으로 보는 이유는 자율 및 방임을 원칙으로
하던 연방대법원의 태도를 바꾼 West Coast Hotel Co. v Parrish 판결이 이 해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워싱턴 주의 최저임금 규정의 합헌을 선언하면서 자율 및 방임이 포기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런즉 이 판결의 의미를 중요하게 보지 않으면 미국법상 고전주의 시대의 구분선이 달라
질 수도 있다. Gjerdingen, Ibid., p.765, n.33 참조.
132) 김동훈, 앞의 논문, 233면 이하. Reimann은 미국법에 대한 독일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를 대략
1870년에서 1930년까지 및 1930년에서 1950년까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렇게 나눌 때 전자는
미국의 법학자에 의한 독일 학습 시기가 되고, 후자는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법학자에 의한 영향의
시기가 된다. 라이만, 앞의 논문, 254면 이하.
46 法史學硏究 第52號
법의 로마법식 체계화로 표현하고 있지는 아니하다. 오히려 미국에서 고전주
의 법학은 법을 다른 사회과학에서 독립시킨 후 커먼로 원칙에 기초하여 극
히 과학적인(학문적인) 작업을 통해 다루었던 Langdell로 대표되는 법률주의
(자유주의 legalism) 추구로 표현되고 있다.133) 이와 같은 표현은, 미국법이
아무리 그 체계화 과정에서 로마법(판덱텐 법학)의 영향을 받았었다고 하더
라도, 결국 미국식 커먼로의 바탕을 이룬 것은 영국식 커먼로 및 미국식 자
유주의였던 것으로 역사가 정리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의 유래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은 워낙 영국의 커먼로에 존재하던 로
마법적 요소가 미국의 커먼로로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독일의 판덱텐
법학을 통해 도입된 것인지 사실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 둘 다 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둘의 비율을 비교하라면,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
중에는 영국의 커먼로에 존재하던 그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을 가능
성이 크다. 미국이 독일 판덱텐 법학으로부터 받았던 영향이 주로 법 개념과
연역 사고 등의 기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134) 독일의 판덱텐 법학이 미국법
의 기본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것은 미국법이 그것을 수용할 만한
기반을 이미 가지고 있기는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반은
영국의 커먼로로부터 물려받은 로마법적 요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
고 그런 맥락에서 독일의 판덱텐 법학이 미국법에 미친 영향은 미국 커먼로
에 내재하였던 것들의 체계화라고 할 수도 있다.
(4) 미국에서 고전주의 법학 시대의 종료와 법현실주의의 대두
미국의 고전주의 법학은 미국 커먼로의 독립과 체계화를 추구하였다. 그리
133) 프리드만, 앞의 책, 770면 이하; Grey, Ibid., p.495. Gjerdingen, Ibid., p.745는 이를 커먼로식
자유주의(common-law liberalism)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4) Riesenfeld, Ibid., p.2; Posner, Ibid., p.538. 미국이 독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독일식 법 개념과
법적 사고이지, 독일 민법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독일 민법을 받아들이면서
독일식 법 개념과 법적 사고 전반을 같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47
고 그 과정에서 도그마적이고 체계적인 독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을 많이 받
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미국은 신생 국가로서 생동적인 산업 발전과
사회 진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성공과 더불어 미국에서 독
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은 언제 그랬었는가 싶게 쇠퇴하였고, 법에서 미국적
인 것이 내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전주의는 실용주의(pragmatism)를 주
장하는 진보주의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135)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진보주의의 행보였다. 고전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진보주의는 이후 현실주의로 승계되어, 미국 법제사상으로는 고전주
의와 진보주의 및 현실주의가 사상적 대립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실제의 법
정책을 놓고는 오히려 진보주의와 현실주의가 비슷한 입장인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와 진보주의가 비슷한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미국의 커먼로를
체계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임무가 고전주의만으로 완수되지는 않았기 때
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보주의는 고전주의가 행하던 미국 커먼로의 체계화
작업을 이어서 수행하여야 했던 것이다. 현실주의는 이와 같은 진보주의의
애매한 태도와136) 진보주의의 작업이 수반할 수 있는 추상화와 비현실성에
보다 확실하게 반기를 들었다.137)
그런 한편 미국에서 독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이 쇠퇴한 것을 법의 사조가
바뀐 것 외의 것으로, 즉 고전주의가 물러나고 현실주의가 대두한 것 외의
요소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첫 번째는, 미국의 언어적 정치적 배경이 영국
에 있다는 내재적 한계라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재적 한계가 존재
하는 상태에서 독일법(로마법)에 접근이 있었던 것이므로 이 내재적 한계 자
체가 미국법이 독일법(로마법)에서 멀어지는 새삼스런 이유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독일 판덱텐 법학의 영향력 쇠퇴의 요소는 영국이 가깝다는
내재적 요소가 아니라 독일(로마)이 멀다는 외재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수준 이상으로 판덱텐 법학을 참조할 경우
135) Grey, Ibid., p.498f.
136) 진보주의는 progressive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보수주의라는 주장이 있다. Gabriel Kolko,
The Triumph of Conservatism (Free Press, 1963), p.2f.
137) Grey, Ibid., p.500f.
48 法史學硏究 第52號
에 로마법이 미국법에 줄 수 있는 산출물에 대한 회의로 인해 미국에서 로마
법의 영향이 쇠퇴하였다고 할 수 있다.138) 미국이 영국법에 거리를 두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비록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미국 입장에서 영국의 법을 그대로 계수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불필
요한 면까지 들여와야 하였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런 문제점이라면 영국법보
다 독일법(로마법)이 한층 심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번째는, 독일
의 군국화와 나치의 등장이라는 요소이다. 미국과 독일이 적국관계에 놓이면
서 미국의 법률가 입장에서 독일법은, 그러다 보니 로마법도 같이, 가능한
한 수입하지 말아야 할 법으로 되었다. 그렇지만 로마법이 미국법의 적인 것
은 아니었고, 로마법은 독일법이 아니라도 영국 커먼로의 기초에 영향을 준
법으로 미국의 커먼로와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미국에서
로마법은 참고의 대상이 아니라 법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그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139)
Ⅴ. 영미 또는 영미법계와 로마법
1. 법계 구분과 로마법과의 관계의 정치적 맥락
다분히 민사법을 전제로 하는 구분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법체계를 로마법
계(유럽대륙법계)와 커먼로계(영미법계)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
나 커먼로의 성립과 발전은 많은 부분에서 로마법에 힙 입은 바가 크다. 이
는 영국의 민사법이나 민사소송 체계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 내지 로마법
과의 확연한 공통성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그런즉 로마법계와 커먼로계는 구
138) Posner, Ibid., p.539f.
139) 그렇다고 하여 미국 내에서 독일법학의 영향이 완전히 그치게 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다른
분야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법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김동훈,
앞의 논문, 238면; Ugo Mattei, “Why the Wind Changed: Intellectual Leadership in Western
Law”, 42 Am. J. of Comp. Law 195(1994), p.205, p.209f.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49
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특히 그 발전 초기로 올라갈수록 양대 체계를 이룰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의 법체계는 로마법계
와 커먼로계로 대분된다. 이는 어쨌거나 두 법계를 구분할 만한 특성들이 존
재하기는 한다는 의미이기는 하다. 다만 그것이 정말로 특성적인 차이일 수
도 있고,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하는 차이일수도 있을 뿐이다. 게다가 오늘날
에는 법계 사이의 유사성이 높아져 그와 같은 특성적 차이는 별다른 중요성
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140)
이와 같은 사정상 우리는 세계의 법체계를 로마법계(유럽대륙법계)와 커
먼로계(영미법계)로 나누는 것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정치적 맥락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141) 그 맥락을 나누면, 첫째로, 법계의 양분에 유럽 중심적 사
고가 자리하고 있다. 로마법계와 커먼로계(영미법계, 영국법계)의 차이가 상
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유럽 중심으로 보면 유럽 법
내에서 이 두 법계는 구분될 만한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둘째로, 세계를 대
상으로 한 식민지화가 유럽 국가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법계 구분의 배경으
로 연결되어 있다. 점령지에 이식된 법이 로마법계 법이거나 영미법임으로써
결국 세계의 법계가 그 둘로 구분될 기초가 다져진 셈이다. 그리고 셋째로,
세계의 현대사가 영국과 미국에 의해 주도되어 온 것이 법계 구분을 유효하
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영미법이 가지는 특성이 상대적 차이에 불과하다고 축
소시켜 볼 면이 없지 않지만 영국과 미국이 가지는 영향력에 가중치를 주면
영미법은 그 특별한 위상을 차지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법계와 커먼로계의 구분을 정치적 맥락에 연결시키는 정도
가 아니라, 아예 정치적 맥락에 중점을 두고 로마법계와 커먼로계의 구분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재고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재고찰해 볼
우선적인 것은, 영국이 어느 때부터인가 영국법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는 사
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국법의 독자성 주장은 당시 영국이 처했던 여러
140) 조규창, 앞의 책(상), 147면.
141) 정종휴, 앞의 책, 33면 참조. 다른 다양한 법계론에 대해서는 조규창, 앞의 책(상), 145면 이하를
참조하라.
50 法史學硏究 第52號
사정들을 고려할 때 적절한 선택인 셈이었다. 우선 영국은 유럽 대륙의 경쟁
국가들 수준에 상응하는 로마법 연구를 할 학문적 자원을 가지지 못했다. 게
다가 영국은 그 역사에서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차지할 명목을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가진 적이 없었으므로 로마법을 계수하여야 할 이념적 상황에
놓여 있지도 않았다. 이에 비해 영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주성을
내세우며 교황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의 왕과 대립각을 보일 일이 많았다. 그
리고 영국 법률가들의 다수는 영국 내에서 실무를 통해 법교육을 받은 자들
로서 영국법적 특성의 인정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할 때 영
국은 법에 있어 대륙적 대세에 속해있지 않음만 감수한다면 대륙처럼 로마법
을 전면적으로 계수하지 않는 것이 큰 손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의 법과
대륙의 법이 다르다는 것이 영국에 보호 장치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런
즉 영국은 로마법을 계수할 기초가 중세의 관습과 중세 교회법을 통해 이미
영국 내에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법 계수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영국은 커먼로 성립 초기부터 로마법을
배제하였던 것이 아니라 16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행하였던 고립 정책을
통해 영국을 로마법계가 아닌 국가로 만든 셈이었다.142)
이렇게 정치적 맥락에서 영국법이 의도적으로 로마법에서 멀어져간 것으
로 본다고 할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법은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로마
법과 연결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8세기 초에 있었던 영국과 스코틀랜드
의 국가 통합이 바로 그 기회였다. 하지만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국가는 통합
하더라도 각자의 커먼로 체계와 로마법 체계를 유지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
와 같은 합의는 결국 로마법을 영국의 법체계 안에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정
치적 선언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43) 이는 역으로 스코틀랜드가 영국 내로
통합되는 것에는 합의하면서도 굳이 로마법 체계를 고수하기로 선택한 것의
정치적 함의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한편 미국의 경우는 영국의 커먼로와 로마법이 다른 식으로 그러나
142) Sherman, Ibid.(각주 3), p.624f.; Helmholz, Ibid.(각주 67), p.1226.
143) Postema, Ibid.(각주 12), p.165는 영국에서 커먼로의 성립 자체를 정치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51
마찬가지로 정치적 맥락에서 연결되는 예를 보여준다.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
을 이루면서 영국의 커먼로를 거의 그대로 계수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미국
은 영국의 커먼로를 거의 그대로 계수하는 이면에서 미국법의 독자성을 확보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의 정치적 맥락이
미국법의 독자성 확보를 해당 시대 법률가들의 임무로 만든 것이다. 그 임무
수행 과정에서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 사이에 미국의 법률가들
은 영국 이외의 법과 법학에 관심을 돌렸었는데, 그 관심 대상이 바로 독일
의 판덱텐 법학, 즉 로마법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법은 다시 한 번 그 기초에
로마법적 요소들을 보태게 되었다.144) 하지만 이후 미국은 미국이라는 국가
의 성공과 더불어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에 대해 더 이상 논하
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그들의 정치적 태도에서 그러하였듯이 법에 있어서
도 미국법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그 태도를 확실히 하였다.145)
2. 19세기 이후 법계 구분의 의미
18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그리고 지금은 일반화된 여러 국가에서의 법전화
사업 및 제정법 증가는 상대방 법에 대한 파악을 어렵게 만들었다.146)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속해 있는 법계에 대한 확인은 상대방 법에 대한 파악에
효율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설령 상대방이 속해 있는 법계의 내용이 상대방
법의 내용과 구체적인 사항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법계에
속해있는가 자체가 상대방 법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다.147)
144) Riesenfeld, Ibid., p.1f.
145) 오늘날 영미의 법률가들은, 특히 미국의 법률가들은 대체로 법계를 나누는 것에 관심이 적은 편이
다. 조규창, 앞의 책(상), 150면. 이는 영미의 외국법에 대한 배척 태도와 영미법의 독자성 주장
전통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146) 조규창, 앞의 책(상), 113면. 독일 민법학의 영향력은 독일 민법전의 성공과 별개로 민법전 이후로
감소되고 있다. Mattei, Ibid., p.215. 유럽 대륙 내 국가들은 로마법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별로 민법전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오히려 해당 국가들 사이에 법적 분열이 나타났
다. 프레데릭 헨리 로슨 저, 양창수 전원열 역, 대륙법입문(박영사, 1994), 60면.
147) 19세기에 법계를 막론하고 새로운 법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19세기에 비교법이란 개념이 구
성되었다는 것은 연결점을 가진다. 조규창, 앞의 책(상), 19면, 34면 참조.
52 法史學硏究 第52號
그런 한편 19세기에 이루어진 산업 및 경제 발전은 모든 법계에서 새로운
법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기계 산업의 발전은
어느 법계에서든 계약법과 불법행위법을 발전시켜야 할 이유가 되었는데,
이때의 법 발전은 기존 법계의 특성과 연결시켜 설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런즉 이때를 계기로 정비되고 발전된 법 내용들은 각 법의 법계적 의미를
희석시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법 발전이 법계 구
분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면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두 법계 모두에서 새로
운 법 발전은 기존의 법체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세계의 법들이 법계를 막론하여 유사한
내용을 가지는 일이 매우 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 아래
서도 법계를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 나누는 일은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국
가 간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서로의 법의 동화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작은
차이에 상대적으로 민감해지게 되었는데, 그 차이의 근본을 법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법계 구분의 의미가 법
내용의 구체적인 차이보다, 각 법계에 따른 법 사고와 연역 논리 등의 차이
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148) 내용적으로 유사한 법이라
고 하더라도 각 법계가 가지는 사고와 연역 논리상 차이에 따라 법 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49) 그런즉 법계를 구분하는 일은 여전
히 같은 법계라면 같은 만큼 다른 법계라면 다른 만큼의 효율적 대처를 가능
하게 해주는 셈이다.
148) 그리하여 더 이상 법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전통을 말해야 한다. 존 헨리 메리만 저, 윤대
규 역, 시민법전통-대륙법과 영미법의 비교-(철학과현실사, 1995), 15면.
149) 예를 들어 로마법계에 속하는 우리 민법과 영미법계에 속하는 미국법은 계약위반(채무불이행)과
관련하여 비슷한 내용의 법리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법리도 가지고 있다. 그
런 반면 결정적인 차이를 법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운용상 유사하게 처리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비슷한 법리를 가지고 있되 차이 나게 운용하기도 한다. 이 계약위반의 예에 대해서는 김영희, 「미
국법상 계약위반에 관한 연구」, 민사법학 제70호(한국민사법학회, 2015.03), 613면 이하를 참조
하라.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53
3. 세계의 미국법 계수와 법계 구분
오늘날 미국이 세계의 법을 주도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은 법을 수출하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150) 그렇지만 그 수출품이 구체적
인 내용의 미국법인 것은 아니다. 그 수출품은 바로 미국법이 가지는 어느
법체계에든 적용이 가능한 합리적인 법 사고와 연역 논리이다.151) 그런데 이
는 미국이 독일법을 수입하던 때에 이미 드러난 바였다. 미국법이 독일법에
서 필요로 했던 것은 특정 법률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정의된 개념에서 규칙을 연역해내는 법적 사고와 논리 기술이었다. 그러했던
것이 지금 미국법을 수입해가는 국가 입장에서 마찬가지가 되었다. 아무리
미국 주도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한 합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면 그런 미국법적인 것은 수입해가지 않는 것이다.152)
하지만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미국법으로부터 수입하여 가는 것이 보편적
인 적용이 가능한 합리적인 법 사고와 연역 논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국
식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오늘날 미국법을 영미
법이라고 부르기보다 흔히 미국법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도 드러나 있다. 실
제 내용을 분석해보면 영미에 공통되는 커먼로의 것이라고 할 것인 경우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영미법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미국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 법과 관련하여 오늘날 영국보다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고, 대
응하여야 하는 상대가 바로 미국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얹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존재한다. 미국법이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는 한 영
국법도 로마법도 상당 정도 그 위상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법의 바
탕에 영국법이 그리고 로마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50) Wolfgang Wiegand, “The Reception of American Law in Europe”, 39-2 Am. J. of Comp. Law
228(1991), p.229; 라이만, 앞의 논문, 259면.
151) 조규창, 앞의 책(상), 501면. 이는 오늘날 유럽 법률가들에게 일반화된 미국 유학 내지 연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에 가서 미국식 법적 사고를 배워오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봘터, 최병
조 역, 「<자료> 독일의 민사소송연구 50년: 구성주의에서 국제적 개방으로」, 서울대학교 법학
제39권 3호(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1998), 258면.
152) 김동훈, 앞의 논문, 242면 이하.
54 法史學硏究 第52號
Ⅵ. 맺는 말
일반적으로 세계의 법계는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로마법계와 영국 커먼로
의 영향을 받은 영미법계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마
법적 요소들은 영국법에도, 넓은 의미의 영국에 속하는 스코틀랜드의 법에
도, 그리고 미국법에도 존재한다. 영미권에 속하는 이들 나라의 법에 존재하
는 로마법적 요소들은 법계의 양대 구분의 타당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 연구는 바로 그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연구 결과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영국법은 그 성립기인 12세기에 유럽
대륙 내의 국가들에 비해 로마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기는 하였다.
하지만 영국법이 다른 대륙 내 국가와 마찬가지로 로마법의 영향권 내에 있
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비슷한 여건에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영국과의 정치적 대립 상황상 로마법을 충실하게 계수하는 길
을 걸어온 바 있다. 그리고 미국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는 영국법에 존
재하는 로마법적 요소의 승계와 미국법이 의도적으로 도입한 로마법적 요소
의 합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독자적인 법체계
수립을 위해 영국법 외의 법에 관심을 돌렸었는데 그때에 미국법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로마법(독일법)이었던 것이다.
연구 결과가 이와 같다면 결국 영미권 국가들의 법에 존재하는 로마법적
요소들은, 아무리 오늘날의 영미법의 독자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로마법에 기원을 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세계의 법계를 로마법계와 영미법
계로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법체계 기원적 의미를 부여받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법체계는 여전히 로마법계와 영미법계
로 대분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로마법계와 영미법계의 기원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 그리고 두 법계 사이의 실제적 내용 차이가 어느 정도이든
간에, 그렇게 대분하는 것이 각 법계가 사용하는 법적 사고와 연역 논리를
대변하면서 해당 법계에 속하는 어떤 법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영국법, 스코틀랜드법, 미국법, 그리고 로마법 55
그 법의 운용을 예상하여 대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한편 법계의 구분이 본래 정치적 함의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로마법
계와 영미법계로의 대분이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것이
다. 세계사가 유럽 국가 주도로 움직이던 상황에서 세계의 법계가 로마법계
와 영미법계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을 유럽 측에
포함시켜 계산하면, 세계의 법계가 로마법계와 영미법계로 나뉘던 때나 오늘
날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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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일 : 2015. 9. 18. ∥ 심사개시일 : 2015. 10. 5. ∥ 게재확정일 : 2015. 10. 26.
58 法史學硏究 第52號
<Abstract>
English Law, Scottish Law,
U.S. Law and Roman Law
Kim, Young-Hee*
153)
It is general to classify the global legal systems into the civil law system
and the common law system. The civil law system has originated from the
Roman law, and the common law system from the English common law.
However this ritual classification has less obvious factors. Most of all, the
English common law contains some features of the Roman law from its
beginning of the 12th century. The Scottisch law has faithfully accepted the
Roman law with its political bearings with England. In addition, the U.S. law
has carried out legal exchanges with the German roman law during its classical
legal science period. Therefore it is desirable to give a new role or meaning
to the ritual classification into the civil law system and the common law system.
[Key Words] Legal System, Roman Law, English Law, U.S. Law,
Scottish Law, German Law, Common Law
* Associate Professor, Yonsei Law Schoo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