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호-죄에 대한 승리는 가능한 것인가? 1.승화된 욕망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을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무엇을 얻으면 더 얻고 싶어하는... 좋아하고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은 정도와 양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존재 하는 것 같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재물이든, 명예이든, 건강이든, 사회의 인정이든, 아니면 애정이든 말이다.
사람에게 욕망은 왜 존재할까? 이것은 좀 우스운 질문 같지만,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인 듯싶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의 저변에 깔려있는 이 욕망 때문에 모든 문제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욕망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곧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부족감과 허전함,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이 욕망을 일으키는 근본 출발점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나타내는 과도한 식욕이나 정욕, 또 육체적인 쾌락에 대한 과도한 욕망, 그리고 물질이나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타내는 지나친 집착이나 욕망은 마음에 채워지지 못한 어떤 욕망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 곧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허전함과 부족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열렬히 추구하게 하고, 바라게 하고, 가지고 싶어하게 만드는 욕망, 그리고 아무리 가지고 얻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인간의 마음속에는 꼭 가져야 하고, 꼭 있어야 하고, 꼭 채워져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해야 인간은 비로소 충족감과 만족감을 얻게 되고, 그제서야 인간은 과도한 욕망을 버리게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찾아서 가져야 할, 영혼과 마음 속 깊이 모시고 있어야 할 영원한 존재, 신이신 하나님이시다. 전도서 3장 1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태초에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림을 당한 것, 죄를 짓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존재, 곧 신을 잃어버린 분리에서 오는 허전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마음속에 하나님을 발견하여 가지기 전에는 그 근본적인 욕망이 채워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고, 하나님을 찾도록 의도하신 것이다. 그 태초에 하나님(신)과 함께 있었던 행복을 다시 찾으려는 마음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또 행복해지지도 않고,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 계명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이다. 십계명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하시려고 주신 법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선언하신 법이다. 그것은 또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법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계명 중에 제일 처음에 언급하신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에 관한 것이었을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존재”이신(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존재가 아닌, 존재물에 불과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양한 우상들을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계명들을 주신 것이다. 사실, 우상이란 모든 존재물들에 대한 탐욕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 불과하고, 또 그것은 어떤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그 존재물이나 그것을 향한 자기의 욕망에 스스로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의 우상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날처럼 형상화된 우상을 섬기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우상은 재물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혹은 자신의 일일 수도 있고, 자녀나 배우자일 수도 있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우상들은 우리의 욕망으로 표출된다. 마음에 품고 있는 우상은,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열망과 욕망을 너무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설사 그것을 손에 넣었을지라도 더 가지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영혼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의 상태이다. 안식의 비밀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하면 우리의 욕망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 신과 하나가 되는 충족감과 만족감을 마음속에 갖는 것이다. 마음속에 영광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골 1:27)의 임재를 가지는 것, 그리하여 유한한 인간의 마음과 성품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변하는 행복을 가지는 것, 그것이 욕망을 해결하는 길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만세부터 감추어 오신 “하나님의 비밀”(골 2:2)이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의 생애에 이루어질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히브리 4장에 언급된 “영원한 안식”이기도 한 것이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진 사람만이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진정한 안식의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승화된 욕망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너무 충족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바라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늘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게 된다. 다만 자신이 경험하는 행복과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할 뿐... 우리 모두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의 모든 욕망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아름다운 욕망으로 승화시킨다면, 우리의 욕망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승화된 욕망 -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을 닮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고 싶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가지고 싶고, 하나님과 늘 함께 살고 싶은 - 욕망은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원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작업을 하실 것이다. 우리의 하찮은 세속적인 욕망을 승화된 아름다운 욕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놀라운 작업을...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사람은 생명이 유지되어 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이 어떠한 삶이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맥박이 뛰고 있어도 식물 인간이 되어 있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하는 자체만을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는 좀 난처합니다. 그 사람이 신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가진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세상의 유혹과 죄의 힘에서 승리를 경험케 하며, 곤란과 시련들에서 견디며 이기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는 자의 승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우리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알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처럼, 줄기차게 기도하여 응답 받은 것처럼, 낙심치 말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한갓 지적인 동의를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이나 십자가의 공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지적인 동의만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와 세상과 죄를 승리하는 믿음 말입니다. 이번 호는 승리하는 믿음에 대한 기사들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영혼에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3."무엇"과 "어떻게"의 투쟁
사람은 “무엇”을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를 살피신다.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판단하신다.
사람은 사장이 되기 원하고 국회의원이 되기 원하며 대통령이 되기 원하고 목사가 되기 원하며 장로가 되기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살피신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일을 하는가를 바라보신다. 사람은 목적을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목적을 이룰 때 사용하는 방법과 과정을 살피신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사장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목사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사람에게서 구원이 이루어질 때 그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모든 목적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은 구원에 집중하는 대신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사장은 사업의 성장에 집중하고 목사는 교회의 성장에 집중하며 대통령은 자신의 업적에 집중한다. 사람은 “무엇”에 집중한다. 무엇이 되기 위하여 밥을 먹고, 무엇이 되기 위하여 학교에 다닌다. “무엇”에 집중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평화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 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다. 사업을 확장시키지 못한 사장과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목사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 못한 대통령의 마음에는 늘 불안과 불만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에 집중한다. 그는 “무엇”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크기와 인기와 평판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불만족이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청의 9급 공무원일지라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늙은 집사일지라도,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조그만 시골 교회의 목사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잔잔한 평화가 존재한다. 그는 오직 자신이 하는 작고 평범한 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온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일은 언제나 진리와 일치하며 정직하고 순결하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의 영혼 속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져 간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이 되었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과 방법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가로 결정된다. “무엇”이 되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마귀의 우선적인 공격 목표가 된다. 마귀는 어떤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을 쓰러뜨릴까? 그리고 그는 왜 마귀의 시험에 미혹되어 쓰러지게 될까?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말들을 속삭임으로써 그의 신앙과 양심을 흔들어 놓는데, 이 속삭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그는 쓰러지기도 하고 더 높은 신앙으로 올라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 이제부터 그의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투쟁의 장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귀의 속삭임 : 이 바보야, 방법과 수단이 성공의 비결임을 모르니? 신앙과 마음의 순결함만으로는 안돼!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살펴보렴. 크리스챤 학교를 세워서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 청년들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의롭지 못한 부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아부의 웃음을 웃어주어야 하며, 그들의 불의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준다는 표시를 해주어야 해. “섭리는 언제나 강한 군대와 함께 한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은 지금 네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란다. 아무개 목사도 설교 단상에서는 항상 믿음과 진실에 대해서 설교하고, 아무개 장로도 언제나 진리와 원칙에 대해서 말하지만, 교회를 건축할 때나 어떤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을 따르고 있잖니? 진실과 순결함은 천사들의 나라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는 어느 정도의 술책이 섞이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어.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성숙하고 지혜 있는 어른처럼 사업을 하기 바란다. 너무 진리나 거룩함을 강조하지마.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는 외형과 숫자에 시선이 집중되지. 그들은 어떤 것이 진리이며, 누가 진리를 가르치는 가에는 무관심하지. 그들의 눈과 귀는 어느 교회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며, 누가 더 재치 있고 재미있게 교회를 운영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어. 자네가 지금처럼 진리에만 매달리면 결과는 항상 실패일 뿐이야. 죄 없는 네 부모와 처자까지 너의 무모함 때문에 슬픔과 비애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는 걸 생각해 보렴. 비록 네가 아무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고 할지라도, 네 방법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거야.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불쌍한 부모님과 처자식을 위하여 왜 너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네게 불가능하거나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단다. 적당한 수단과 방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야. 너의 실수를 올바로 잡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 수단을 부리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야! 알겠니?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 : 아! 누가 마귀의 이 교묘한 논리에 맞설 수 있겠는가? 결론은 확실하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진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방법과 수단을 부리지 않는 한, 실패는 정한 이치이다. 다음과 같은 의혹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혹시 조금 전에 귀에 들린 음성은 마귀의 음성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그 음성이 더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 아닌가?” 바로 이때에 또 하나의 음성이 양심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들려 왔다. “의는 의고, 불의는 불의다. 진실은 진실이고, 부정직은 부정직이다.” 아, 누가 이 음성에 항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넘어져서 코가 깨어지더라도 그리고 돌이키지 못할 만큼 실패할지라도 의와 진리는 지켜져야만 한다. 이 순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의는 성공보다 중요합니다. 조그만 일에 정직을 지키는 일이 위대한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장사는 생활의 한 방편에 불과하며 선교 사업은 의에 이르는 길에 불과할 뿐입니다. 의가 성공의 시녀로 전락될 수는 없습니다. 장사도 교회도 학교도 선교도, 모두 의를 배우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업의 목적은 사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인내, 믿음, 극기와 같은 신앙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고 교인들이 모두 교회를 등지고 떠날지라도, 학생이 학교를 떠나 교실이 텅 비게 될지라도, 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겠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사업보다는 정신과 방법을 존중하신다. 왜냐하면 정신과 신앙은 영원까지 들고 갈 수 있지만 사업은 내가 이 땅을 떠날 때에 모두 두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나의 목적과 간증이 아무리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방법과 수단이 거룩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자 집중하는 사람들은 결국 넓은 길을 걷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의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짧은 인생 동안 우리 모두가 배우게 되는 교훈이다.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고 좁아서 찾는 이들이 적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평안과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4.이 모습 이대로 갑니다
서정희 이 모습 이대로 갑니다 갈 곳도 없고 쉴 곳도 없어 당신이 계신 곳 바라보았을 때 이미 멀리도 마중 나와 있는 당신을 봅니다 이 모습 이대로 갑니다 변함없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신 당신께 이 모습 이대로 갑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구차한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저 달려와 꼬옥 안아주는 당신께 당신의 품에서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의 나도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다고 여겨주는 그러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습 이대로 갑니다 내가 갈 곳이 그곳 뿐이기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분이 당신이기에 이 모습 이대로도 갑니다.
5.시간 치료법
이 기사는 Escape to God 에서 발췌 편집하였습니다 목사 사모의 편지 얼마 전에 우리는 어떤 목사 사모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번에 전화했을 때 나는 바쁜 생활을 정리하고 시간표를 만들어 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성경 읽기에 바쳐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인 남편은 나의 신년 결심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혼자서라도 결심을 실천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이 있고, 더 좋은 것이 있으며, 그리고 최고로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최선의 것을 선택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나는 지금 덫에 걸린 기분입니다. 나는 시간표를 짜서 성경 연구반 교사와 지도자, 두 교회의 선교부 지도자, 두 교회의 모금 운동 책임자, 건강 및 절제 책임자, 지역 봉사부 임원, 두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지도자 및 교사, 교회의 뉴스레터 그리고 주보 편집까지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교회의 주말 노력 동원과 매달 있는 목회자 모임에 남편과 함께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그 외에도 나는 지도자 세미나를 비롯해서 해마다 각종 집회와 관련된 다른 여섯 가지 교회 행사에 남편과 함께 가담해 있고 양쪽 교회의 직원회에도 매달 꼬박꼬박 참석합니다. 두 교회에서 여러가지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양쪽 교회 직원회에는 꼭 참석해야 합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시간에 쪼달리면서 내 인생에 필요한 성화와 거룩한 영적 경험을 접어놓고 집에서까지 가사에 뒤지지 않으려고 바둥대는 것은 정신없는 일 아닌가? 남편은 집안 일에는 협력하지 않고 주부인 나는 가계부 관리를 비롯해서 많은 시간을 남편의 비서로 일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내 일과는 해도 해도 끝나지 않으며 불평하는 사람을 달래느라 동분서주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목사 사모들에게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런 짐을 지우지 않으신다. 그 사모는 모든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여인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쉴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어느 지혜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급하고 복잡한 활동을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들은 인자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결코 그들에게 지워주시지 않은 책임들을 스스로 떠맡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도록 결코 계획하지 않은 의무를 서로 가지려고 다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도한 책임을 어깨에 짐으로써 과로하게 되어 마음과 정신이 피곤하게 되고 화를 내고 초조하며 잔소리를 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책임만을 감당하고 주를 신뢰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고 아름답고 동정적이 되도록 보전해야 한다.” Messages to the young people,135 고통으로부터 해방 한번은 어린 시절에 함께 자랐던 친구, 마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리는 울면서 말했다. “조금 전에 의사를 만나고 왔는데, 의사는 나에게 유서를 써놓으라고 했어. 가망이 없다면서 …. 내가 당신의 집에 한 달쯤 머물고 싶은데 가도 괜찮을까? 제발 날 좀 도와줘!” 얼마 후, 나는 마리를 마중하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나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심각하였다. 그녀는 출혈성 위궤양, 암으로 발전하기 직전의 종양과 빈혈증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허약해진 사람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46세, 두 손은 겉잡을 수 없이 계속 떨리고 있었고, 시선은 먼 산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그녀를 산에 있는 우리의 소박하고 조그만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안정시켰다. 내 친구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는 한 도시의 같은 거리에서 함께 자란 사이였다. 그녀는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마리는 하루에 14시간, 매주 6~7일을 계속 일했다. 그녀의 꿈은 아름다운 저택을 구입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그 집을 멋진 가구와 장식으로 꾸미는 일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그녀는 일의 노예가 되었고 숨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그녀의 생활은 건강을 점점 망가뜨렸다. 그녀를 깊은 꿈에서 깨운 것은 그녀의 담당 의사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망상이다. 그러나 그 망상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주, 영국, 일본, 남미, 한국 그리고 세계 어디에나 만연하다. 사람들은 그 꿈에 사로잡혀 생명까지 바치고 있다. 나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성경을 펼치고 설교를 할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 방식은 당신과 다르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참여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가정 예배와 다른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아침저녁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산책 나가고 먹고 놀고 난로에 넣을 땔감을 모았다. 저녁에는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겼고 가족이 모여 책을 읽는 독서 시간도 즐겼다. 간호사 출신인 내 아내는 마리의 건강을 돌보는 일을 떠맡았다. 그 결과 그녀의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집에 와서 느낀 점이 무엇인지 말할까요? 조금 덜 갖는 것이 더 행복한 길인 것 같아요.” 우리 집은 그녀의 집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초라하였으며 가구나 자동차를 비교해도 부족하였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우리보다 부자였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더 부자였다. 우리 가정에는 사랑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덜 갖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 가정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연계 속에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사귈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사람이 천연계와 가까워지면 천연계를 지으신 하나님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쉼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산에서 살지만 우리 가정에서 아이들은 결코 심심할 시간이 없다. 우리 부부는 항상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등산, 카누,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하겠다고 아이들이 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이 바위산을 오르고 물놀이를 하고 노루를 쫓아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오냐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함께 가자고 하면, “좋지, 그렇게 하자”라고 대답한다. 도시에서 아이들은“안돼, 안돼!”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서서히 반항심이 자라나게 된다. 시골이나 산과 같이 단순하고 소박한 환경 속에서의 삶이 때때로 힘든 일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가정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신종 율법주의가 아니다. 우리 가정은 단순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보다 깊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경험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아야 한다. 그런 조용함과 신뢰를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매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생생한 연결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이 조용해져야 한다. 단순해져야 한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사 32:18. 누구나 광야로 이주하라는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함께 광야의 경험을 가지라는 부름은 받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 각자가 있는 곳에서 삶을 간소화하고 하나님과 가족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일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돈이 필요없다. 이 경험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원과 결심만 있으면 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피하여 쉼을 얻을 수 있다.
6.죄에 대한 승리는 가능한 것인가?1부-승리하는 사람들
이번 95호의 신앙 기사는 미국에서 오리온 종교 서적 출판사업을 경영하면서 영감적인 종교 서적들을 통하여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John Davis 장로님의 설교를 요약하여 편집하였다. 숙독을 바란다. - 편집실 -
죄를 승리하는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일, 그리고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달린 아주 중요한 것이며, 또한 참 복음을 믿는가 아니면 거짓 복음을 믿는가를 가려낼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연구하는 첫 계단으로, 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의 예를 살펴보며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자. 1). 바디매오의 이야기 1. 바디매오의 경험과 형편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디매오의 경험은 기적, 그 자체이다. 그는 소경이었다가 보게 된 사람이었다. ◈ 막 10:46, 47 -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매오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는가? 그는 소경이었다. 성경에서 소경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멸망당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계 3:17, 벧후 1:9, 요 12:40 참조). 바디매오는 멸망받는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보면, 그를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그 이름의 뜻은 “아주 비싼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전에 광석을 정련하는 곳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정련되기 전의 광석들을 보면, 그것들은 시커먼 흙들이 많이 묻어 있어서, 도무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을 풀무불 속에 집어 넣고 용광로 속에서 정련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센 불에서 한참을 끓인 다음, 용광로의 문을 열면 아주 깨끗한 납이 나온다. 제일 마지막 과정에서 화학물질을 넣으면, 그 찌꺼기같은 데서 납들과 금과 은이 나온다. 그 귀중한 보석들이 시커먼 흙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한 존재로 만드시려고 하시는 과정에 대하여 잘 모르며, 우리 자신들의 가치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여러분들은 혹시 용광로 속에 있는가? 불 같은 시련 속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사람들을 오빌의 금보다 더 귀중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하셨다. 주님을 찬송하자!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 귀중하게 단련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를 다 내보내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여리고 길거리에서 “참 높은, 귀중한 가치있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소경 바디매오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의 조건과 형편이 어떠했는가?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있는 말씀을 보자.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 이것이 바디매오의 형편이었다.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바디매오, 그의 모습은 라오디게아 형편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거지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상태였다. 2. 바디매오가 한 일 ◈ 막 10:47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그는 볼 수 있는 눈은 없었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 “믿음”은 어떻게 온다고 했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였다. 이 바디매오는 기적을 행하는 한 분이 팔레스타인에 왔다갔다하면서 기적을 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분이 나사렛 예수란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가?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고백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선지자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바디매오는 “당신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으므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말하며, 주님께 그의 형편을 인정하고 자기의 필요를 요구했다. ◈ 막 10:48 -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사람들은 “당신, 너무 떠든다. 조용히 해라!”라고 했다. 왜 사람들이 그가 잠잠하기를 원했을까? 거기에는 아마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언급하고 있었던 것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똑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그 능력으로 “죄를 승리할수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잠잠하라는 공격을 받는다. “크게 말하지 말아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용해라”. 만일,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 곧 죄를 승리하는 복음을 설교하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잠잠하라고 핍박할 것이다. 그럴 때 바디매오가 그 말을 들었는가? 그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3. 구원의 역사 ◈ 막 10:49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주님께서는 어떤 영혼이라도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향해서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그 사람의 소리를 들으신다. ◈ 막 10:50 -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0절은 굉장히 중요하다. 성경에서 겉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겉옷은 “성도의 품성”(계 19:8 참조)을 상징한다. 바디매오는 어떤 겉옷을 입고 있었는가? 좋은 옷을 입고 있었는가? 그는 아주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더러운 옷은 “죄”를 상징할 수 있고, 부족한 성품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더러운 누더기 옷을 더 이상 입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께 왔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경험이다. ◈ 막 10:51 -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바디매오는 대답했다. “주님이시여, 나는 보기를 원합니다.”여러분은 무엇을 원하는가? 새로운 마음, 주님의 율법이 적혀진 마음, 딱딱한 마음이 제해진 부드러운 마음을 원하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막 10:52). 바디매오가 눈을 보게 되는 일이 얼마나 걸렸는가? 그는 “곧”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 그에게 완전한 시력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때, 100% 치료하신다. 그것은 창조의 능력이다! 그것은 영원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고, 즉시로 일어나는 경험이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새 마음을 주셔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주신다. 그 때에 우리 생애에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삭개오의 이야기 1. 삭개오의 형편 누가복음 19장에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있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에 거기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다. 삭개오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그 뜻은 “순결한 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삭개오가 순결한 자였는가? 아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로서, 로마 당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으며, 부정직한 도둑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아주 미워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아들에 대한 높은 포부가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순결한 자”라는 뜻을 가진“삭개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세리가 되었는가? 그는 세리가 되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부정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남 모르는 소원, 곧 다시 “순결한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삭개오도 바디메오처럼 예수에 대해서 들었다. 그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 눅 19:3 -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삭개오는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서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보아야만 했다. ◈ 눅 19:4 - “그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보기 원하면 우리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한다. 나무에 올라가야 한다. ◈ 눅 19:5 -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께서 그를 올려다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사 43:1).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이름을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무슨일을 하는지 잘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 우리 생애에 개입해 계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급히 내려와야 한다. 지체하지 말고...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귀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코이노니아”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헬라 언어이다. 이것은 특별한 교제, 아주 가까운 교제를 말한다. 이것은 관계이며, 경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특별한 경험과 관계로 들어오시길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기를 원하신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아주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다. 그때 사람들이 보고 수근거렸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예수님 지금 뭐하시는 거야? 이 사람이 도둑이고 세리인 것을 모르시는가?”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의로운자를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다.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는 의원이 필요하다.”사람들은 겉으로 사람들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 눅 19:8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쭈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또 만일 뉘것을 토색한일이있으면 4배나 값겠나이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즉시로 그것을 값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바디메오나 삭개오는 멸망받은 상태에 있는 자들이었다. 둘 다 눈먼 소경이었고, 벌거벗은 가련하고 곤고한 도둑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의 생애를 어루만지시고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그분께 나오는 사람들을 고쳐주신다.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능력을 주셔서 새로운 생애를 살게 하신다. 그분의 능력으로 다시는 죗된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며, 이런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사람들이다.
2부-어떻게 전쟁에 이길까?
우리가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참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어떻게 하면 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어떻게 하면 실제 생활에서 죄를 승리할 수 있는지 연구해 보기로 하자.
역대하 20장에 있는 이야기는 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1). 전쟁이 시작되다 ◈ 대하 20:1 -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여호사밧 왕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아주 큰 군대가 자기 나라를 쳐들어 온 것이었다. 여호사밧에게는 아주 잘 훈련된 군대가 있었다. 그는 미리 전쟁을 위해서 준비를 해놓았다. 그러나 전쟁이 나자 그는 어떻게 했는가? 군대가 나가서 적군과 함께 싸우도록 했는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문제가 생길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것은 문제를 직면하는 방향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사밧이 자기 문제를 어떻게 직면했는지 보도록 하자. 2). 전쟁을 맞이하는 태도 1. 금식과 기도;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하라 ◈ 대하 20:3 -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그가 어떻게 했는가? 그는 두 가지 일을 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면서 금식하였다. 4절;“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여호사밧은 이 문제를 자기 혼자 감당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과 의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 대하 20:5 -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여호사밧은 아직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과 모든 국가를 주님께서 주관하시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능려과 권세가 있으십니다. 아무도 주님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문제가 있을 때 여러분은 주님께 여러분의 문제를 먼저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하는가? 2. 믿음으로 약속을 주장하라 ◈ 대하 20:7 -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여기서 그는 아직도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자비와 또 하나님의 축복이 과거에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대하 20:8 -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8절에서도 그는 아직 그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믿음과 약속을 말하고 있다. 잠깐, 여기서 다른 성경 말씀, 마태복음 8장 5~9절을 보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 백부장은 누구였는가? 그는 로마 사람이었고 이교도였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면 내 종이 낫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이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그 말은 곧, “내 종에게 이것 하라고 하고 저것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기독교인들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가? 우리도“주님,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주님 말씀 한 마디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3.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아뢰임 다시 역대하로 돌아가자. 제일 처음, 여호사밧은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 자기의 문제를 제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해오신 것에 대해서 말을 했다. 그 다음에도 그는 자기의 문제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품성이 어떤지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표현했다. 그가 그런 모든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문제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셨는가? 물론이다. ◈ 대하 20:10 -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그것은 누구의 기업이었는가? 그것이 누구의 기업이었다고 그가 말하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땅이었는데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와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땅에서 쫓아내려고 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다 망칠 것이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고치려고 했는가? 그는 자식이 없는 문제를 자기 스스로가 고치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내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으십시오.”라고 했고,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하게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야 하실지 다 아시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을 의지함 ◈ 대하 20:12 - “우리 하나님이여...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여호사밧에게 큰 군대가 있었는가? 아주 좋은 군대가 있었다. 또한 그의 도성은 잘 방어된 그런 도시였다. 그러나 그는 “주님! 이 문제의 해결책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시편 44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이것이 여호사밧의 태도였다. 그에게는 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군대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신뢰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눈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해결책을 지금 당장 원하여 이렇게 간구한다. “주님! 제게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다려라!”고 하신다. 우리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조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 원하신다. 왜 그러실까? 사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된다. 그런데, 문제가 악화되어 우리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게 될 때,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는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돌아갈 수가 없었다. 또 앞으로 갈 수도 없었는데,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끔씩 우리를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문제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때에는 모든 찬송과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밖에 없게 하신다. 우리는 어릴 때의 솔로몬이 드리던 것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나는 그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나는 어떻게 나갈 줄도 모르고, 어떻게 들어올 줄도 모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1. 하나님의 응답 ◈ 대하 20:14, 15 -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때, 한 선지자가 일어나 말을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 대하 20:16,17 -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 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우리는 우리가 당한 문제들에 대해서 너무나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좀 하기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저 항오를 이루고 가만히 서있어라”고 하신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를 잘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때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2. 구원을 받아들이는 태도 ◈ 대하 20:18 -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선지자가 기별을 주었을 때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해결책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미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주님께서 이미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대하 20:21 -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때 왕이 말했다. “찬양대를 불러와서 군대 앞에 서서 가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라!”이것은 세상적인 생각으로 볼 때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런데, 22절에 어떤 일이 생겼는가? ;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적군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가? 한 명도 피하지 못하고 다 죽었다. 그들이 나가서 찬송을 불렀을 때 적군들이 혼동을 일으켜서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 여호사밧의 군대는 칼도 한번 안 쓰고 화살 하나 쏘지 않고 이겼으며, 모든 적군이 다 죽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4).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여호사밧의 전쟁의 이야기를 우리의 영적인 전쟁, 곧 죄와의 전쟁으로 비유해 보자. 영적인 모든 투쟁과 전쟁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인도해 오신 사실과 능력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리고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능히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을 이미 믿고 찬양을 드려야 한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이 죄와의 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참 믿음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모든 죄와 문제를 이기도록 넉넉한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여호사밧이 그 무서운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백성들과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기적적으로 해결되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3부-승리에 대한 성경의 약속
앞의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나오는 죄인들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과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에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참된 복음은 죄에 대한 용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를 승리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신 분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며, 다시 같은 죄에 빠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성경에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들이 있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성경에는 우리가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제 3부에서는 죄의 승리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을 찾아서 문답식으로 공부해 보기로 한다. 질문1.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는가? 답; 하나님은 헛되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말씀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신다. 성경 말씀 ◈ 민 23:19 -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 히 6:18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딛 1:2 -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 사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질문 2. 성경은 죄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답; 잘못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참된 복음, 성경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금 이 순간에 이길 수 있고, 또 이길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고 있다. 성경 말씀 ◈ 요일 3:5~9 -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마 1:21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 가운데서가 아니고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 행 3:26 -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 이것이 원래의 복음이다. ◈ 출 20:20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천둥과 번개와 큰 음성으로 예수께서 임하시자 백성들이 두려워 떨 때,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 눅 10:19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권세와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그 뜻은 “다이너마이트”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뱀을 밟게 하시는데, 영적으로 뱀은 사단, 마귀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단 마귀를 이기고 밟을 힘을 주시며, 모든 원수를 이길 모든 능력을 주신다. ◈ 요 1: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질문 3. 성경에 우리가 죄를 승리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망과 명령이 나타나 있는가? 답; 하나님께서는 영감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당신의 능력으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신다는 소망을 밝혀 놓으셨다. 그뿐 아니라 죄를 이기고 정결한 생애를 살 것을 명령해 놓으셨다. 예수님을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의 용서와 능력도 함께 받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한 생애를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루고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나타나 있다. 성경 말씀 ◈ 요 8:1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힘을 주신다. ◈ 고전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 성경에는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기별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오늘 날의 복음 사역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므로 “죄로부터”가 아니고, “죄 가운데서”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 벧전 1: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마 5: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갈라디아서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갈 2:17 -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니고 의를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면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 엡 1:4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갈라디아서 5:22-24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에베소서 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질문 4. 하나님께서 죄를 승리하도록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 성경에 있는가? 답; 하나님께서는 죄의 유혹이 올 때에 우리가 죄를 승리하고 이기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능력과 약속을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약속 ◈ 고린도전서 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빌립보서 4: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벧후 1:4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구하면 넘치도록 주시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상으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셔서 우리가 세상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하신다. 질문 5. 승리하는 백성들이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성경에 있는가? 답; 요한계시록 예언서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죄를 이기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이루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나타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마지막에 나타날 이 세대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될 것이다. 성경 말씀 ◈ 요한계시록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요한계시록 19:8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요한계시록 14:4,5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貞節) 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 요한계시록 22:11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라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둥병자는 영적으로 죄인을 상징한다.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고쳐주시며, 예수께서는“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아무리 죄가 많고 악해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깨끗하게 용서해주신다. 그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죄 없는 생활을 사는 것이 인간적인 개념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그림으로 된 글)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물 위에 걷는 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으시며, 또한 우리도 걸을 수 있게 해 주신다(마 14:25).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려면 죽어야 한다. 요한복음 12장에는 밀알의 비유가 나온다.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다. 그러데 죄를 승리하는 길은 땅 속을 통하여 가능한데,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없어지는 것같이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롬 6:11절 참조).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로마서 6:6,7).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는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 갈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즉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동행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면, 죄를 승리하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의지와 마음을 바칠 때,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사단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며 살게 될 것이다.
4부-죄를 승리하게 하는 비결, 은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한다. 죄를 승리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5,8).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고 죄를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함께 연구해 보자.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하면,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떠올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 혹은 “하나님f의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자비”쯤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는 그보다 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짓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마치 죄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면허증을 받는 것처럼 여긴다.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상관 없다거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짓고, 그리고 은혜로 용서 받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은혜”라는 단어는 “힘”, “파워(power)” 라는 뜻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는 죄를 승리할 수 있는 힘, 능력이다. 곧, 은혜는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4절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디도서 2장 11,12절에는, “모든 사람에게...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이 말씀을 보면, “은혜”라는 것은 그저 신비주의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허공에 뜬 어떤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에 행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생활에 닿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살펴보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 20,21). 이 성경절을 보면, 죄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를 가졌고, 은혜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를 가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절은 은혜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고, 죄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는데,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때에는 옳게 행하는 것이 그릇 행하는 것보다 더욱 쉽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마음에서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은혜가 주권을 잡게 되어, 은혜가 죄를 다스리며 죄의 권세(능력)을 이기게 된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비결인 것이다. 은혜의 역사 회개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늘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준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면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좌정하실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거짓말하실 수 없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그대로 사랑하고 있고 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냥 의롭다고 칭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뿐 아니라 진짜 의롭게 해주신다. 믿음으로 받는 은혜 그런데 이 은혜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은혜를 받는 믿음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정의가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은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아무런 외적인 증거가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친척들과 그의 집을 버렸으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따라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약속을 의지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그것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라”하실때,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천막을 칠까요?”라고도 묻지 않고 그냥 갔다. 그는 그의 모든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실 때, 용서받은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죄악이 너를 주관치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단순하게 믿는 믿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그것이 은혜를 받게 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은혜를 얻기 위하여 주 앞에 있는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가난하고 곤고하고, 헐벗은 상태 그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일한 적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물을 어떻게 받는가?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 갖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하늘과 협력하면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늘과 협력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5부-죄를 승리하는 마지막 단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죄에 대한 투쟁은 우리 마음의 투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통해서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로마서 12장 2절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쓰여 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육신적인 마음을 갖든지(롬8:6), 영적인 마음을(7절) 갖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운데는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알아보자. ♡ 예수님의 마음 ♡ 1. 사랑 ◈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셨다”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 인간들이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되게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로마서 5:8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구에 있는 우리 죄인들의 형편을 보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인간들을 구원하러 땅으로 내려 가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입장과 본성으로 하늘에 남아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성육신하여 내려오셨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은 관계의 수립을 요한다. 요일 4장 8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쓰여 있다. 사랑은 자기가 관계를 맺을 대상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가?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봉사하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사귀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우리는 동료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자아 중심적으로 살지 않는다. 그분들의 관심은 다른 이들에게 있다. 죄는 자아 중심 사상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주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는 사랑의 마음이다. 2. 겸손 ◈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주님께서 이 땅으로 오실 때 자기를 비어 두고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하셨고, “내 뜻은 내 뜻이 아니라”고 하셨고, “내 사업도 내 사업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분은 “나는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비우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 말은 사실은 예수님이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0장 25~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마음은 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의 마음이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무엇으로 정복하셨는가? 수건을 가지고 정복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와서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셨다. 모든 사람은 종이 되기를 싫어하고 우두머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종이 되기를 원하는 겸손한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집사 같은 분이다.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면 주님은 우리를 섬기실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 동료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3. 자신을 비우심 ◈ 빌 2:7~8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인성이 되셨어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의 입장까지 내려오셨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 죄인들과 같은 본성으로 성육신하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 가까이 와 우리들을 섬기셨다. 예수님께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까지 내려 오셔야했던 것이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을 보고 우리를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범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예수님의 은혜를 미리 보고 우리를 용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상태를 보지 않으시고, 앞으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어떻게 변화될 것을 보시고 용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들을 상대할 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상대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올 수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눈을 비워야 한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사랑으로 모든 영혼들을 바라보고 섬겨야 한다. 자아로 가득 찬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승리할 수 없다.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만이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4. 순종 ◈ 빌 2:8“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히 10:7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마음은 순종하는 마음이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우리는 죽기까지 죽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늘에 가기를 원하지만, 순종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경험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너무 어려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뇌의 잔을 옮겨주십시오!”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해 항상 투쟁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을까”하고 투쟁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승리하기 원한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한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법을 배워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5. 용서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와 연관이 있다. 구원의 계획은, 망가져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므로 이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용서하신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너희가 너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5).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빚을 져서 그 빚을 갚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빚을 탕감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동료 인간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었다. ◈ 마치면서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배운 대로, 우리가 우리를 완전하게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을 온전히 의지할 때, 죄에 대한 승리는 가능한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완전히 땅에 묻혀서 죽어 없어지고,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시는 경험을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 일은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함께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하며 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백성, 곧 죄를 승리하는 한 백성이 준비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성품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증인들, 곧 이 세상과 우주에 하나님을 증거할 그런 백성들이 준비될 때, 예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