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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무모함이 낳은 하루.
때로는 눈이 부시고 찬란한 길을
때로는 어둡고 칙칙한 길을 꽤 여러 번 오고 갔다.
그러나 그 때는 그 길이 눈이 부신 길인 줄도 몰랐고
어두운 길인 줄도 몰랐고
찬란한 길인 줄도 모르고 칙칙한 길인 줄도 모른 채 그저
앞만 바라보고 걸어 갔었다.
그저 길이 앞에 놓여 있기에 놓여 있는 길만 따라 갔던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길조차 사실 어떤 길인지 모르고 걷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채 여전히 길따라 걷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여지껏 걸어오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길을 걸어 가고 싶다.
아니 예전에 가다가 멈췄던 그 길을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
그 가던 길을 마저 다 가면 어디로 갈 지 그 길이 참 궁금 하다.
그러나 옛날에 걸었던 그 길을 이제 와 다시 걷는다 한들
그 길이 예전의 길과 같지도 않을 것 같고
그 길을 찾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차라리 아주 새로운 길을 찾아서 떠나보자.
사실 예전에 걸었던 그 길은 잡초만 무성하고 아름다운 꽃은 커녕
들꽃조차 변변히 찾기 어려웠던 길이 아니었던가.
예전에 걷던 그 길에 비하면 지금 걷는 길은 어떤가.
내 몸에 너무나 익숙한 길.
그래서 그 편안함에 푹 젖어들어 언제까지나
걷고 싶은 길이기도 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때때로 지루함이 묻어나오기도 하는 길.
그래서 한 번씩 새로운 길을 가고 싶게 하는 길.
아니 어쩌면 내 안 저 깊숙한 곳에는
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목민의 DNA가 깊숙히 뿌리박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떠돌이, 방랑자. 바가봉드, 보헤미안, 돈데보이, 장가라,
집시, 유랑자,
그러한 역마살로 인하여 젊은 시절 얼마나 방황하고 헤메었던가.
나라 안과 밖을 동네 마실을 다니듯이 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왠지 모를 허무함으로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고싶은 마음에
자신을 놓아 버리고 싶은 때가 또 얼마나 많았었던가.
칠십 해를 살면서 돌아보니 덕분에 세상 구경을 참 많이도 했다.
되돌아 볼 추억거리도 많아 참 좋다.
그런데 요즘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아니면 앞으로는 다시 그렇게 할 기회는 커녕 그리 할 힘조차 없어서 그럴까.
자꾸만 젊은 시절 온 산을 내집처럼 날아 다니던 시절이 그립게 다가 온다.
그렇게 주마등처럼 흐르던 기억 속에서 문득 멈춘 기억 한 자락.
30대 초반 이었을까.
중반 이었을까.
아니 또렷이 기억 난다.
내 나이 서른 셋.
1985년 4월.
식목일이 들어 있던 토요일.
전 날 밤샘 업무를 하고 대신 아침 아홉시에 퇴근을 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그 전 날 미리 베낭 등 간단한 등산 장비를 챙겨 출근을 했다.
퇴근을 하자마자 버스 터미널로 달려가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바로 진주 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진주에서 지리산 입구 중산리 행 버스를 탔다.
다행히 중산리 행 버스가 바로 있어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당시에는 그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혼자 하는 산행이라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 하기 전 잠시 남는 시간에
산행 하면서 먹을 두어 끼니의 김밥과 초컬릿 등
간식도 몇 개 구입을 했다.
물로 간단한 음료수도 함께 구입을 했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생수가 없어 군용 수통을
따로 챙겨야 했다.
중산리에 도착을 하자마자 숙소를 구했고 저녁도 일찌감치 함께 먹었다.
간단하게 술도 한 잔 하면서.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홀연히 혼자 그 험한 산을 타려고 무리를 하며
감행을 했을까.
내 심경에 무슨 변화가 그 때 있었을까.
결혼을 한 지 5년.
큰 애는 4살.
작은 애는 당시에 한창 귀엽고 재롱을 떨 나이인 두 살에 불과 했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왜 홀로 산행을 택했을까.
그 건 지금도 자세히 모른다.
그저 떠나고 싶었고
떠나면서 무슨 일이 일어 나든 지
될대로 되라는 심경이었다는 건 확실 하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하필 그날 밤에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다음 날 산행에 지장이 있거나 아예 산행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일 정도로 비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날이 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활짝 개였다.
아침 노을이 불그스럼하게 동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둘러 장비를 챙겨 숙소를 나왔다.
그런데 마침 내가 나오는 시간에 산행을 하기 위해 함께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 아가씨 두명 이었다.
아무리 많게 보아도 20대 중반 이었다.
서로를 보는 순간 눈인사부터 나누었다.
인사를 나눈 후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아무래도 그들은 둘이고 난 혼자라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오는 것이
수월 했을 게다.
'혼자 오셨느냐.'
'오늘의 산행 목적지는 어디 까지냐' 는 등.
당연히 혼자 왔고 목적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천왕봉까지 가서 그 다음을 생각 할 것이라고 했다.
젊은 여성들이라 쾌활했고 말 수도 많았고 웃음도 많았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음에도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신상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 명은 아직 대학원생이고 다른 한 명은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직장에 다닌다는 여성이 공교롭게도 한 부처에 근무하는 여성 이었다.
한 부처에 근무한다고는 하지만 그녀와 나는 직렬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속을 얘기 해 주자
'같은 식구네요.'하며 다시 한 번 반가운 제스츄어를 해 왔다.
사실 식구라기 보다는 한 집안이라고 하면 그나마 맞을 것도 같다.
부속실에 근무를 한다고 했다.
비록 부서실에 근무하기는 하지만 정직원 이었다.
그녀들은 대구에서 왔다고 했고
난 부산에서 왔다고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게 가끔씩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산행을 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칼바위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 했다.
그녀들의 걸음도 의외로 빨랐다.
칼바위에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 덕분인 지
순식간에 우리는 천왕샘을 지나 천왕봉에 닿았다.
아직 열 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정상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 와 있었다.
우리는 세찬 바람이 불어 오지 않는 바위 틈새를 찾아 비닐 돗자리를 깔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산에서 먹는 간단한 식사.
김밥과 빵, 그리고 시원한 탄산 음료는 그야말로 산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진수성찬 이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들은 바로 하산을 하겠다고 했고
난 장터목 산장을 지나 일단 세석 산장까지는 가 보겠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그녀들은 남은 먹을거리를 내게 주었다.
혹시 모르니 챙겨 넣어 두라면서.
그녀들과 헤어진 후 곧바로 산행을 시작 했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산행이고 외로운 여정이다.
오고가며 꽤 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쳤지만 의례히 하는 인사만 건네고는
서로 서로 무심히 지나칠 뿐이었다.
배가 부른 덕이었을까
빠른 걸음 때문이었을까.
장터목 산장까지는 순식간에 도착 했다.
장터목에서는 아예 쉬지도 않고 다음 목적지인 세석 산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천왕봉에서 장터목을 거쳐 세석에 도착하니 꽤 다리가 묵직해 왔다.
그 때가 되어서야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다.
산장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등산팀이 여럿 있었다.
나처럼 천왕봉애서 출발한 팀, 뱀사골에서 출발한 팀, 그리고
쌍계사에서 출발을 한 팀 등.
그들 속에서 홀로 김밥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으려니
몇 몇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하면서.
부산서 왔고 천왕봉에서 출발을 했으며
쌍계사로 내려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 중 누군가가 오늘 중으로는 쌍계사에 도착하기 어려우니
이 곳 세석산장에서 하루 묵고 가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들 대부분은 산장에서 하룻밤 묵고 갈 예정이라고 한다.
산장에서 모포도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의 컨디션으로는 나도 그들과 함께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갈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혼자서 긴 시간을 산장에서 보내기 보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쌍계사까지 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오늘 밤까지는 갈 수 있겠지 하는
작은 오기심을 품고.
세석에서 한동안 아무 생각없이 앞만 향해 걷고 있노라니 어느 듯
어느 작은 이정표 앞에 발길이 닿았다.
아주 작고 오래된 나무 이정표는 청학동과 쌍계사 방향을 가르키고 있었다.
이정표를 보니 쌍계사보다 청학동이 조금 더 가까웠다.
별로 생각을 하지도 않고 길이 가까운 청학동 방향을 택했다.
쌍계사 방향보다 한 눈에 봐도 길이 좁고 험하게 보였지만
길이 가깝다는 핑게로 택했다.
그렇게 청학동 가는 길을 택해 이~삼십분 가량 내려 갔을 때 쯤
갑자기 길이 끊겼다.
어딜 돌아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나고 초조해졌다.
내려오는 동안도 길이 보일 듯 말 듯 하여 겨우
헤치고 온 길이었다.
별 수 없이 온 길을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은 초조하고 걱정은 한가득 안고 거의 뛰다시피 하며
처음의 이정표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이정표 앞 까지 올 수 있었다.
그 사이 어느새 날은 어둑해 지고 있었다.
아직 내려 갈 방향은 제대로 잡지도 못했는데.
사실 쌍계사로 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난 밤 비가 온 탓인 지 아니면 내 마음이 지나치게 초조한 때문인 지
길이 자꾸 헷갈렸다.
중간 중간 작은 개울물이 흘렀고
안내 이정표나 리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점점 더 아파 오고 날은 거의 완전히 어두워져
후래쉬를 켜도 거의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바른 길로 가고 있는 지 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오금 쪽 인대도 아파왔고 복숭뼈 쪽 인대의 통증도 차츰 더 심해졌다.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산 속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 4월 초라 찬공기에 얼어 죽을 수도 있고
산짐승을 만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공포감은 더욱 더 조여 왔다.
그렇다고 이렇게 산속에서 비명 횡사는 할 수없다는 생각에
발길은 더욱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다리의 통증도 잊은 채.
다행히 시간이 지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 점 더 길이
등산로다워 졌다.
날은 더욱 더 어두워지고 한 치 앞도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안도감은 점 점 더 커졌다.
그렇게 깊고 어두운 산길을 헤매며 얼마나 몇 시간이나 내려 왔을까.
저 멀리 불빛이 보이자 비로소 저도 몰래 안도감에
깊은 한숨이 새어져 나왔다.
드디어 대성리마을에 도착을 한 것이었다.
세이암 앞에 다다르자 저녁 7시가 좀 넘었다.
세이암.
아마도 속세에서 출발을 해 산속으로 가는 사람은 이 곳
세이암이 있는 냇물에서 귀를 씻고 가라는 의미이리라.
속세의 모든 찌던 때를 깨끗이 씻고 또 잊으라는 의미이겠지.
그러나 막상 대성리에 도착을 했지만 잠을 잘만한 숙소는 없었다.
민가만 겨우 몇 채 있을 뿐.
만약 지금이라면 아무 민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워낙 숫기가 없는 탓에 그럴만한 용기가 전혀 없었다.
대신 주민에게 물어 보니 좀 더 내려가면 절이 나오니 그 곳에서 잘 수 있다고 한다.
나중 안 일이었지만 그 분이 말한 절이란 다름아닌 쌍계사였던 것이다.
대성리를 떠나 다시 어둡고 캄캄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의외로 길고 지루했다.
다리는 다시 통증이 오기 시작 했다.
아픈 다리와 함께 밤길을 걷고 또 걸어도 인적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성리 마을이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다시 덜컥 걱정이 올라왔다.
얼마나 더 길을 가야할 지 몰라 어쩌면 아픈 다리로 길 중간에서
밤을 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제는 산짐승을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어졌고
산속에서 비명횡사 할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 되고
마음이 평온해 졌다.
산길을 얼마나 걷고 또 걸었을까.
걷다보니 다시 저 멀리 불빛이 하나 새어 나왔다.
가까이 가 보니 가페겸 작은 식당이었다.
다행히 주인의 호의로 식사도 할 수 있었고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대신에 한 반 시간 가량 걸으면 쌍계사가 나오고 주변에 숙소가
많다고 얘기를 해 주었다.
그 말을 듣자 안도감과 함께 온 몸의 맥이 쭉 풀리는 느낌이 한 번에 몰려 왔다.
이제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