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갱생을 실현한 민북마을 대마리
대마리는 철원군의 서북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최근 경원선의 최북단역인 백마고지역이 마을입구까지 연장 개통되어 철원군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대마리는 남북한 간 체제 경쟁이 극에 달했던 1968년 8월 30일 민통선 북방지역 농지 개간과 정부의 재건촌 건립 계획에 의거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군인과 지역 주민 위주로 선발해 150세대가 입주한 경우이다. 낮에는 농지개간에 힘썼고 밤에는 안보일선에서 총을 들고 적의 동태를 감시했다. 농지를 개간할 때 지뢰와 폭발물로 인해 팔다리를 잃고 불구자가 된 이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지거나 도와주지 않아 그들끼리 피땀 흘리며 똘똘 뭉쳐 난관을 이겨냈다. 목숨 걸고 개간한 농지의 원소유자들이 나타나 토지소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마을은 격랑에 휘말렸다. 마을공원 개척비에는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라고 적혀있고, 마을회관에는 자립갱생(自立更生)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우리가 언제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느냐는 마을주민들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앞으로도 외로이 싸우고 개척해 나가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대마리 마을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개척비
대마리는 현재 민북마을이 아니고, 주변의 농지가 넓어 철원군 민북마을 중 비교적 윤택한 마을로 소문났고 대마리에서 생산되는 철원오대쌀은 전국 최고로 손꼽힌다. 최근 소이산 개발과 백마고지역 개통으로 외지 관광객이 많이 붐빈다. 백마고지는 대마리 북쪽 DMZ에 있는 해발 395m의 야트막한 산으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의 주력부대가 12차례에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아군 3,146명과 중공군 14,389명이 희생되었다. 국군 9사단은 백마고지전투 대승으로 백마사단이라 명명되었다. 포탄이 30만발 이상 퍼부어져 산등성이 높이가 1m정도 낮아졌으며 황폐된 산의 능선이 백마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백마고지라 이름 붙여졌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 영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