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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복음01 김상래
또 오늘 하루도 평안하셨습니까? 저녁 시간은 가능하면 짧게 아침은 아침 드실 때까지 어차피 함께 말씀 나누셔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아침 시간까지 1시간 동안 충분히 말씀을 드리고 저녁은 가능하면 짧게 해서 빨리 마치고 가서 주무실 수 있도록 저는 평생 선생을 해봐서 알거든요.
세상 좋은 명강보다 더 좋은 건 종강이거든요.
저녁 시간은 제가 창조의 복음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5번에 걸쳐 말씀을 드릴 텐데요.
성경이 두껍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결국 창세기 1장 2장이 없으면 인간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요.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만을 가지고 저녁 시간에 다섯 번에 걸쳐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정말 힘들게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종 이 양반 한번 골탕 먹여야지 이제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죠.
이 사람들이 한 번은 이혼 규정을 놓고 예수님을 골탕 먹여야 되겠다고 작심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이 문답을 이해하려면 2개의 성경절을 읽어야 됩니다.
하나는 창세기 2장 22절로 24절, 하나는 신명기 24장 1절인데요.
창세기 2장 22절로 24절 범죄가 시작되는 창세기 3장 전 2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에 살리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에서도 공부해야 할 게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갈빗대냐 머리뼈도 아니고 발뼈도 아니고 손가락 뼈도 아니고 왜 갈빗대냐 또 더 나아가 아담을 만드신 것처럼 하와도 따로 만들지 않으시고 왜 갈빗대를 뺐느냐 여기서 또 제가 물어보면 어느 쪽 갈빗대냐고 물어보면 1백 명 중에 99명이 오른쪽 갈빗대라고 대답을 해요.
또 그것도 어디서 봤냐 그러면 성경에서 봤대요. 성경에는 오른쪽이고 왼쪽이고 없어요.
그냥 갈빗대라고 돼 있습니다. 또 왜 여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냐 원래 성경은 시집 가는 게 아니고 장가 가는 거냐 뭐 다 별 질문이 다 있어요.
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뜻을 깨달으면 다 이해가 돼요.
오늘 그거 다 생략하고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지라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는 말씀인데, 신명기 24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이런 말 규정을 줘요.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취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보내라.
이렇게 이런 하나님은 원래 이렇게 이렇게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데 후에 성경에 같은 성경에 이혼 규정이 나와 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이거 가지고 예수님 골탕 먹여야 되겠다 생각하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답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본래 같은 성경인데 창세기 1장과 1 2장과 신명기를 해석해 나가시는 예수님의 기준이 언급되어
신명기에 그런 말씀이 있는 거 주님은 당연히 아시겠죠.
근데 그 말씀하시기 전에 사람을 지으시니가 볼래 이런 말을 쓰세요.
헬라어 아포케이이라는 말은 창세기로부터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런 뜻입니다.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창세기 2장 못 읽어봤소.
그런 즉 이제 둘이 아니오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이거 바리새인들이 잘 아는 내용이거든요.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막 기다렸다는 듯이 묻습니다.
여자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셨나이까?
신명기 24장 1절에 보면 이혼증서 써서 보내라 그러지 않았느냐 또 이렇게 성경 가지고 딱 들이대니까 주님이 다시 하시는 대답.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의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다시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똑같이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볼래라는 말로 주님이 대답하고 계신 거죠.
본래 허용되고 있고 가르치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케이스를 따라 말해주는 것이 있는데,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 본레가 근거하고 있는 게 창세기 1장 2장입니다.
의 완악함 때문에 죄 때문에 부부의 인연도, 만남과 헤어짐도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본래는 그렇지 않은데 어디 뭐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는 것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생 노 병사가 다 고통이 되었는데 주님의 대답에 근감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종교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나요?
모든 게 평안하고 모든 게 다 복되고 모든 게 다 자유롭고 모든 게 다 충만한 사람들은 종교를 잘 찾지 않아요.
사는 게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렵고 하면 인간의 곤경은 신에게 기회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 튜니티 유명한 격언이에요. 인간의 곤경이 신에게 기회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들을 살펴보면서 여러 종교들이 그 고통을 어떻게 풀어줄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여기 저보다 더 연세 드신 어른들 계셔서 장로님 안 오셨네요.
연세대분들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영원히 영원히 대학생일 줄 알았어요. 제가 대학원 제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25살이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하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야 그 교수님 올해 몇 살 연세가 어떻게 되셨냐 그 교수님이 굉장히 우리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우리보다 15살 위였어요.
그러니까 그럼 우리가 25이니까 40이시네 그랬어 야 그럼 그 교수님보다 선배이신 그 교수님은 몇 살이냐 그러 10살 되시니까 50이시겠네.
그 말 듣고 제가 야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면 50이 되냐 그래서 여러분 제가 그 50보다 지금 15년 더 더 넘게 살았습니다.
그렇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다 고통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게 다 일체가 다 고통이다.
일체 개고 보니까 어느 누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모든 게 다 항상 있지를 않아. 이 세상에 모든 게 다 항상 있지 않아.
무상
어떤 것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어. 제 아 어떤 종교에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기본적인 세 가지 핵심 그래서 일체 계고를 사실상 살아있는 게 없어.
무생 생명이 없어. 모든 게 다 일정한 게 없어. 누가 그 사람 다 변하고 나무 다 변하고 꽃 다 변하고 이 세상 만사가 다 변해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
그 변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욕심과 기대에서부터 마음의 고통이 와 어차피 다 변하니까 변하는구나.
어리석음을 버려. 무상 어떠한 것도 실체가 없어.
무아 굉장히 깊은 도가 있죠. 인간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 모든 걸 다 고통을 겪으니까 이것의 실체 실체를 알자고 하는 거죠.
고통이죠. 어릴 때 우리 부모님들이 부르는 희망가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가 참 재밌어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기와 영화 벌써 벌써 부르시는 분들이 계시네.
저절로 멜로디가 나와야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조카까.
푸른 하늘 맑은 달 아래 누워서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제목이 희망가인데 참 허망해요. 희망스럽습니까?
이 풍진 세상을 아마 그 정도 아시죠? 제가 제목을 바꿨어요.
허망가 희망가가 아니에요. 허망해요.
성경에 보면 헤아려서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참 많다고 그랬는데 이게 다 허망하다고 그럽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돈 좀 벌어보겠다고 열심히 살고, 한번 이름 떨쳐보겠다고 열심히 살고, 한번 힘 써보겠다고 열심히 살아요.
참 열심히 살아요. 다들 전쟁하듯이 살잖아요. 근데 힘들어요.
우리가 한 사람의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가볍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만, 권력의 최정점에 이르렀던 분도, 재물의 최절정에 이르렀던 분도, 인기의 최절정에 이르렀던 분도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우리가 다 충격을 받고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깨닫지 권력도 재물도 인기도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만큼은 우리 모두가 다 조용히 깨닫는 거지요.
다 허망해요. 아무것도 아닌 거죠. 고통이에 그래서 그걸 뭐라고 말하지 아 이걸 없애 이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생의 생노병사가 다 고통이에요. 그 고통이 결국 다 어디서 와요 이건 변하지 말아야 돼 라고 생각하고, 너는 끝까지 내 친구이어야만 돼라고 생각하고 근데 무상 다 항상 없어 항상 변해 무아 실체가 없어.
누구나 다 그걸 깨닫고 그걸 욕심하는 걸 내려놓고 그 어리석음을 벗어버릴 때 고 집 고통이 다칩 욕심에서 오고 멸 그걸 멸해야 되는데, 이 멸하는 게 팔 정도 여덟까지 바른 길을 따라가면 그게 열반에 이르고 고요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열반적정에 이르고 그렇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해탈이라 한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노래로 지은 게 있습니다.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사는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다 버려 무상하고 다 무아니까 제행무상이고 제법 무하니까 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홀홀, 미움도 홀홀 버려라. 홀홀 부어라.
홀홀 탐욕도 홀홀 성냄도 홀홀홀.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사는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훨 훨 버려라.
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여러분 그런데 이 노래 부르면 가슴이 희망이 턱 차오르세요.
아이고 그냥 힘 다 빠지세요. 힘이 안 나.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이라고 하는 지혜의 왕이 있었습니다. 부귀와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사람도 누리기 어려운 그 모든 걸 다 누렸던 사람이지요.
이분이 그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자기 인생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헤아려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저 끝에 가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 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 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의 개고 어찌 보면 통하는 표현이잖아요.
인간이 살면서 추구하는 그 모든 것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결국은 그걸 추구하다가 정신이 아파지고 몸이 아파지고, 우리는 나이 들고 세월은 가고 그래서 인생은 끝나고 능 뭐냐 이게.
근데 누려보지도 못한 사람도 그런 고통을 누리는데 다 누려본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제 이렇게 되는 거야. 또 뭐라고 말합니까? 해는 뜨고 해는 치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나무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실체가 없어요.
형상이 없어요.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고 인간의 욕심에 한없음을 강물이 바다로 흐른다고 바다가 넘치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 비유로 이야기한 거죠.
다 일정하지 않아요. 어차피 다 흘러가요. 재행 무산 실체가 없어요.
제 본부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 다음 뭐라고 말합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는도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근본적인 욕망 욕심 이게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고요한 평정심을 얻지 못하는 열반의 적정에 이르지 못한다.
이걸 이 어리석음을 다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온다 뭐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전도서의 이야기와 물같이 바람같이 살자고 하는 것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인생이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어둡죠.
한번 부정적인 이야기만 다 뉴스를 모아봅시다. 2천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던 이 사건.
2001년 나인 레븐 2008년 5월 2일 사이클론 이때 사진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진.
그 태풍의 아이들이 살아보겠다고 자기 몸을 묶고 그대로 지진 딸을 끌어안고 저녁 먹다가 젓가락을 든 채 함께 숨진 엄마와 딸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27만 명이 이렇게 멀쩡히 하루 한순간에 세상이 고통스러워요.
멀쩡히 살아가도 다 이루어도 고통스럽고 우리가 머물러 있는 세상 자체가 고통스러 유명한 사진이죠.
오늘 우리 저녁 잘 먹었습니다만 물이 없어서 낙타 오주머에다 엉덩이에다 대고 물을 빨아먹고,
낙태가 눈을 오줌에다가 머리라도 감아보겠다고 하는 저 고통 이상하죠.
여러분 조금만 관심 있게 뉴스 보세요. 계속 말하잖아요.
지구가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공포를 우리들에게 계속 전달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게 다 정상적으로 주어져도 인생 자체가 고통스럽고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지구 자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 즉 이는 괴롭다라고 전도서 1장에서 시작합니다.
자기 인생 이야기를 다 그렇게 시작했던 이 사람이 놀랍게도 그 이야기의 끝에 마지막 장입니다.
1장 1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생 나고 노 늙고 병들고 사 죽는 게 다 헛되다 고통이다.
그렇게 말한 이 사람이 그러니 벗어라 훨훨 버려라 훨훨 하고 다 벗어버리고 욕심을 이렇게 하지 않고 끝에 가서 또다시 한 번 헛되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러분 이 헛되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베가 그래요.
이걸 사람 이름으로 만든 게 아벨입니다. 그래서 여기 전도서 12장 8절에 헤어 헤어 헤어 그래요.
1장에서는 다섯 번 나옵니다. 헤벨 헤벨 헤벨 헤벨 헤벨 그렇게 다 말한다면 끝에 가서 뭐라고 결론을 내리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아침에 제가 본능의 사랑과 본분의 사랑 말씀을 드렸죠.
그렇죠.
뭘 하고 이루어도 생각해보면 그게 인생에서 궁극적인 의미가 있을 수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깨우침인 거죠.
다 가져보고 다 누려본 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과 짐승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아침에 내림 사랑은 본능의 사랑이지만 울림 사랑만이 본분의 사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게 되어 있는 인생도, 우리가 살게 돼 있는 세상도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지 우리가 원래 살게 되어 있던 인생과 우리가 살게 되던 세상을 원래는 어떠했는지를 다 압축적으로 한 단어로 표현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에덴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어로 에덴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에덴이라는 말은 보시는 대로 3개의 철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는 각 철자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형상에서 왔습니다.
그 뜻이 어떤 뜻인가 하면 아인 첫 번째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씁니다.
아인이라는 단어는 보시는 대로 눈에서 왔습니다.
본다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나리트라고 하는 두 번째 가운데 있는 철자는 눈에서 왔습니다.
그다음에 눈 눈 새싹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본다.
문을 생명 이 세 철자의 합성어의 문자적 의미는 나는 안다.
뭐를 생명에 이르는 문을 혹은 생명의 문을 안다. 여러분 그러므로 에덴이라는 에덴이라는 글자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생명의 문을 본다 혹은 생명에 이르는 문을 본다 그런 뜻입니다.
원래 인생은 원래는 이런 뜻이었고, 인간이 원래 살게 돼 있던 세상도 이런 세상이었다는 거죠.
이 글자가 다 합쳐져서 에덴이라고 하면 이 말이 문자적 의미가 뭔가 하면 기쁨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인간이 원래 살게 되어 있던 환경과 주소의 주소는 이름 그 자체가 기쁨이에요.
행복이에요. 저는
강릉에서 태어나 40년 동안 태릉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주소는 참 나빠요. 태어난 곳도 능이 있고 살아온 곳도 능이 있어요.
강릉에서 태어나 태릉에서 지금까지 평생 살았어요.
여러분 그런데 인간의 원래 주소는 그 주소 자체가 삶의 양상도 삶의 주소도 기쁨이에요.
어떤 사람이 주소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하나님 떠나 사는 주소는 뭔가 하나님 없이 사는 주소는 뭔가 살기 도 괴롭군.
죽으면 조리 44번지라고 그래요. 그래서 주소를 바꿨어요.
십자가를 통해 건너가면 오늘도 즐겁군. 믿으면 깃불이 77번지.
여러분 어디서 사시겠습니까?
믿으면 기쁘리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고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 내려놓자고 할 때 우리는 희망가가 아니라 험한가를 부르게 됩니다.
벗어라. 훨훨 버려라. 홀홀 부른 다음에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다시 허전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인간이 원래 살게 돼 있던 본래의 삶의 내용도 본래 원래 살게 됐던 삶의 환경도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게 소망의 종교입니다.
이게 소망의 기별인 거지요. 병들었어요. 내려놔야죠.
아니에요. 우리는 본래 병들지 않게 돼 있었어요.
병들다가 생명이 다했어요. 목숨 끊어지는 거 받아들여야죠.
가야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닌 거지.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곳이 다른 병원과 다르고 이곳이 흔히 말하는 대로 어떤 곳에서 영 안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추모관이라고 이름을 짓고 끊임없이 소망을 확인하게 되는 이유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는 약속을 붙잡고 있기 때문인 거지요.
여러분 사시다가 힘들어서 고통스러워서 찾아온 이곳에서 단지 우리가 다 함께 추구하는 회복만 마무리, 회복만 얻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본래는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그 약속.
본래는 그렇지 아니 아니라 예수께서 해주신 이 약속의 말씀 본래는 본래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 약속이 우리 모두의 약속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무한 인생입니다. 잘 살아봐야 어차피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허무한 세상입니다. 어리석음을 깨닫고 훨훨훨 다 내버려도 또다시 돌아갈 돌아간다 하더라도 또다시 허무한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아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한 에덴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덴으로 에덴으로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그렇게 주님을 힘들게 하기 위해 따져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간의 본질을 다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고통과 세상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그걸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다 수용하는 것으로 끝나고 나면 허망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깨우쳐 주시며 다시 소망을 갖게 해주시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바로 가르쳐 주셨사오니 주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래 있어야 했던 곳, 원래 그런 모습이 되어야 했던 것 그 모습, 에덴 기쁨, 행복, 생명의 문을 바라보는 그곳이 오늘 이 저녁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마음들을 가난케 해 주시고 진실하게 해 주옵소서 에덴으로 건너갈 다리가 되어 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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