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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年 마지막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다.
금요일을 시작으로 기습으로 下降하는 영하권 기온이 일요일 까지 기승을 부린단다.
철원지방의 최저기온이 영하 13도라니 부산에선 상상도 할수 없는 강한 추위다.
당감동 우리 아파트를 나서니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부산도 오늘 아침은 영하권이다.
敎大까지 버스로 지하철로 移動을 해서 도착했어도 集結時間인 8시에 여유롭게 到着을 했다.
오늘 동참자는 정수회 회장 김홍배님,총무 이윤홍님.산대장 박우식님,김종근님,김종려님,김정국님,남상환님,박경훈님,손봉락님,
안용진님,오명석님,金美貞씨,진복순씨,白明花씨,한영옥씨등 16명이 동참을 하였다.
이번 企劃展은 지난달 南海 자연휴양림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철원 이야기가 나왔고 안용진님 후배가 아직도 철원 지역에서
現役으로 근무를 한다기에 즉석에서 군숙소 이용이 가능한지를 打診한후 一瀉千里로 계획이 推進되었다.
부산서 출발하면서 걱정했던 道路의 結氷 상태는 杞憂였고 너무 날씨가 맑고 쾌청해서 時計또한 멋졌다.
이번 철원행에는 김홍배 회장님의 애마 카니발과 김정국님의 애마랑 오명석씨의 車가 동원되어 수고를 하게 되어 나는 만약의
경우 대리기사쯤으로 活用度가 아주 낮은 便安한 여행길에 올랐다.
작년도에 우리 정수팀이 이 코스를 한번 다녀온 경험이 있었던 터라 철원지역 코스는 좀 낮익은 길이였지만 이번 코스는 또다른
길로 간다는 기대로 설레기도 했다.
처음 계획했던 명성산 산행을 할려고 열심히 달려가긴 했었지만 산정호수 주차장에 도착이 오후 2시를 넘겨 정상적인 산행은
불가했고 등룡폭포까지 간다고 했는데 그나마도 移動間에 마신 술이 과했던지 회원 몇분은 산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작년도에도 술때문에 명성산 산행을 못해 못내 아쉽고 서운했었는데 올해도 역시 정수팀과의 명성산 산행은 술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처음부터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올라갈때는 술을 적당히 마시고 숙소에 가서 실컨 마시길 바랬는데 술을 보면 도져히 참기 어려운
몇분이 있어 장거리 산행은 다음부터 나는 同參치 않아야 겠다는 마음마져 들었다.
남상환씨랑 등룡폭포로 간다기에 먼저 선두에서 올라가다 전화가 와서 받으니 산정호수 둘렛길을 걷는다기에 부랴부랴 다시 내려
와야 했다.
명성산은 겨울엔 별 볼꺼리는 없지만 그래도 유명한건 1971년도에 서울시립산악연맹에서 약 천여명이 이산에서 雪祭를 올린것이
요즘 많이 지내는 시산제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고,이산은 포천과 철원에서 각각 다른 정상석을 세워놓은 특이한 산이다.
또 이 산은 포천쪽의 가을철 억새로 유명세를 타서 더욱 이름이 알려진 산이기도하다.
포천이 춥긴 추운가 보다. 그맑고 靑淸한 山頂호수가 꽁꽁 얼어서 호수 한가운데로 썰매를 메단 트렉트가 다닐 정도다.
지역민들이 얼음위에서 썰매타기랑 얼음지치기등 돈벌이를 하는 祝祭를 했는지 아직도 板을 펼쳐 놓고 있었다.
호수 둘렛길은 작년도에 한번 걸어 봤으니 올핸 얼음위로 걸어서 江을 가로 질러 걸어 金日成 別莊쪽으로 이동....
나이들은 들었지만 마음은 童心으로 돌아가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듯 표정들이 환해졌다...
산정호수는 1925년 일제 강점기때 영북면 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위하여 築造 되었고 영북면농지개량조합에서 관리해오다
지금은 한국농어촌 공사가 소유해서 관리한다고 한다.
이곳으로 招待를 해준 現役元士인 이승갑씨를 만나기 위해 산정호수에서 철원 西面 와수리로 향했다.
군수사에서 勤務를 하다 이곳으로 轉勤해온 안용진씨 後輩로 숙소및 이곳 觀光 가이드를 해주실 後輩分이시다.
첫 인상은 훤칠한 키에 멋진 용모를 가진 軍人이였다.
경북 청도가 고향으로 整備廠 수집대에서 근무를 했다던데 낮설다.
李元士를 만나서 바로 숙소인 백골會館으로 移動하여 숙소를 배정한후 식당으로 가니 멋진 삼겹살 저녁상이 기다렸다.
우리들의 身分은 이런 곳에 適應을 해봐서 그리 낮설진 않았지만 民間人 身分인 여자분들은 표정들이 이런곳도 다 있나 싶은
모양이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후 배정받은 방에가서 대충 씻고 제일 큰방에서 한데모여 즐거운 여행담을 듣고 내일 일정을 의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첫날을 보냈다.
첫날은 神經安定劑(수면제)를 한알 복용하고 잤더니 깊은 수면에 빠졌다가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새벽 6시경에 기상하여 바깥 공기를 맡으니 부산 공기랑은 質이 다른 달콤함이 뭍어있다.
8시경에 백골회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李元士랑 만나 오늘 本格的인 鐵原 安保觀光 길에 나서게 되었다.
첫번째 訪問地는 勝利展望臺였다.
이 전망대는 6.25동란때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이 지역이 15사단 승리부대가 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전망대를 민간인들도 관람이 가능한데 우리들 처럼 마음대로 막 들어가는게 아니라 승용차로는 하루에 4번 입장을 하락한다고
하니 우리는 이 원사 덕분에 대단한 호사를 누린 셈이다.
우리도 이 전망대를 오르면서 여러번 검문 받는곳을 통과했는데 다른건 별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겨우 관등성명만 물을 뿐이였다.
승용차 블렉박스 전원을 끄고 잠시 비탈진 오르막을 오르니 크다란 바위에 승리전망대라는 이름을 커다랗게 새겨 놓았다.
시야가 탁트여 광활하게 보일 정도의 넓은 군사분계선 지역이 눈에 들어 온다.
"戰卽必勝" 전투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15사단의 굳은 의지를 한쪽켠 바위에 세겨 놓았다...
展望臺에서 바라다 보이는 五星山은 완전히 地下요세화를 시켜 놓은 군사요충지라고 한다.
근데 山을 사랑하는 나로선 이 五星山의 山勢가 너무 멋스러웠다.아마도 가을철이면 이 산의 능선엔 억새가 하늘 거리는 장관을
펼쳐 보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겨 이땅에도 平和가 곧 오리라는 希望이 막 생겨나기도 했다.
이산이 五星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다섯개의 별모양이라고 하니 더 이산을 오르고 싶어졌지만 어쩌라
갈수없는 북녁땅인것을....
전망대에서 바라 보이는것은 오성산 뿐만 아니라 저격능선,아침리마을등 북한지역을 가장 선명하게 바라볼수 있는 지역이였다.
오성산 앞에 벌어졌던 저격능선 전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52,10,14~11,24 까지 6주간에 걸쳐 피아간 42회의 백병전을 치르면서
주인이 12차례나 바뀌었고 花江 강물을 붉게 물들었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지 였다고 한다.
승리전망대를 본후 바로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으로 이동...
이 교량은 1925년도에 세워진 금강산 電機鐵道 橋梁으로 鐵原驛을 始發로 終着驛인 內金剛 까지 총연장 116.6km로 1일8회 運行
하였고 내금강까지는 4시간반이 걸렸으며 料金은 當時 쌀1가마니 값인 7원56전으로 1936년 당시 이용객은 연간 15만4천여명이
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던 기차였던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는 唱導의 풍부한 지하자원인 유화철을 흥암을 經遊하여 日本으로 伴出을 했었고 해방이후 한국 전쟁때에는 북한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철로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으로서 2004년 9월4일 등록문화재 11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金剛山 電機鐵道橋梁을 본후 다시 제2 땅굴로 이동....
移動을 하면서 느낀건데 전에 鐵原 觀光을할때는 鐵原郡 觀光 案內員의 案內로 移動하면서 관광을 했었는데 이번엔 아예 民通線
안쪽에서 이동을 하는 바람에 사실 꼭 봤으면 싶었던 토교저수지 뚝을 볼수 있었다.
전에 한번 볼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시간이 臨迫하여 포기를 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그냥 지나쳐서 또 아쉬움이 컸다.
이 저수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가야겠다.
철원은 제주도 처럼 화산이 폭발하여 생긴 화강암지역으로 물빠짐이 좋아 土質이 肥沃하고 農事에 알맞는 日照量과 기후조건으로
철원지역에서 生産되는 農産物이 인기를 더하고 있다고 하는데,해방후 바로 북한이 占領하여 관리해오다 6,25동란때 修復된 지역
으로 김일성이 이 철원을 빼앗긴 분함에 철원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김일성 高地에서 3일밤낮으로 눈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때의 분함으로 6,25가 終戰이되고 휴전선이 생기자 北韓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 철원이 한 5년간 물때문에 農事를 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철원에서는 공장은 許諾을 잘 안해줘도 貯水池 施設 許可는 쉽게 얻을수 있다는 웃지못할 애피소드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저수지가 이 토교저수지인데 그 規模가 어마어마해서 큰 호수같은 느낌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平和의 展望臺 바로 아래 동승저수지의 약 3배정도의 크기라고 보면 된다고 들었다.
각설하고....
제2땅굴은 73년,11,20 초병이 근무중 爆音을 聽取하여 74,12,16~75,2 試錐工事 중 45개 시추공 중 7개가 貫通을 하여 발견되었고
75,3,1~3,24 逆坑道 工事를 5공병여단과 現代建設이 108m를 파서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이 땅굴이 위치한 곳에서 서울이 108km,MDL 남방800m,길이 총 3.5km,높이2m,폭2.2m로 武裝兵力이 1시간에 만육천명이 이동
가능하다고 한다. 얼마나 天人共怒할 施設物인가....(2땅굴 입간판에서 발췌)
나는 여러번 다녀본 땅굴이라 역갱도 끝까지만 들어가고 바로 지상으로 올라와서 기다렸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땅굴에서 평화의 전망대로 이동하여 관람후 月井里驛으로 이동했다.
이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元山으로 달리던 경원선 기차가 잠시 쉬어가던 驛이였는데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가장 近接
한 驛으로 그 흔적만 남아 있다.
6.25동란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랑 유엔군의 爆擊으로 부서진 인민군 화물 열차가 앙상한 骨格으로
참담한 아픔을 견디고 서 있다.
월례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 1914,8 강원도에서 제일
먼저 附設되었는데 서울~원산간 229km로 산업철도로서 첫 기적을 울렸던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월정리역앞에 있는 두루미관으로 가고 복순씨,명화씨,미정씨랑 영옥씨랑은 허물어져가는 폐철이된 화물객차로
가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으니 두루미관 관람을 마친 정수회원들과 合流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또 다른 관광지로 이동....
이번엔 白馬高地 展望臺다.
白馬高地도 勝利展望臺랑 平和展望臺 처럼 치열한 激戰地 중에 한곳이였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이 交着 상태에 빠져들고 1952,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中共軍의 攻勢로 시작된
戰鬪이다. 이전투는 1952,10,6부터 15일까지 鐵原 北方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韓國軍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으로
거의 열흘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곳이다.
백마고지 북쪽 5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水門을 폭파시켜 아군의 後方을 貫通하는 역곡천을 汎濫시켜 아군의 增兵이나 軍需
物資 共給路를 차단후에 끈질기게 공격을 하니 우리軍도 죽기살기로 防禦를 하고 빼앗기기를 무려 12차례의 공격으로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난타전이였고 이때 아군 843명이 산하하였고 중공군 1만4천여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고, 제9사단
도 3천4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激戰地 중의 격전지로 이때 제9사단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바람에 上乘白馬란 愛稱도 받게 되었
다고 한다.
그래서 전망대 주차장에 白馬像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 咆號하는 像이 서있는 것이다..
치열했던 격전지 백마고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아픔을 가슴에 담아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짠해 온다...
이 백마고지를 빼앗겼으면 아마도 鐵原은 지금도 北韓땅이 되었을지 모르는데 다행히 목숨을 바쳐서 탈환한 백마고지를 우리는
철저한 방어태세로 잘 지켜주길 바래보았다.
돌아나오는 길에 앙상한 폐허의 骨格으로 겨우 버티고 서있는 勞動黨舍 建物 殘害를 보았다.. 수없는 총탄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노동당사는 철골도 없이 벽돌로만 組積된 建物인데도 얼마나 견고하게 지었던지 그
많은 총탄을 맞고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당시의 건축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나 싶다.
이 건물은 1945년8월15일 해방후 북한이 共産政權强化와 주민 統制를 目的으로 建立하고 6.25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惡名을 떨치던 곳이였다.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때 誠金이란 名分으로 各里마다 白米를 무려 200가마씩이나 搾取하였
으며 人力과 裝備를 强制 動員하는 한편 특히 건물의 內部 공사때엔 秘密을 유지하기 위해서 共産 黨員만 동원했다고 한다.
당시엔 이 일대가 鐵原市街地 였다고 하는데 이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있어 이 건물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共産治下 5년동안 北韓은 이곳에서 철원,김화,평강,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良民收奪과 애국인사들의 逮捕,虐殺,拷問등을 무자
비하게 自行하였고,이곳으로 끌러온 사람들은 죽거나 반송장이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惡辣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건물 뒤 방공호에선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됐음직한 실탄과 철사줄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2002,5,23 근대화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돌아 나오는 길에 철원 마지막 관광지인 孤石亭에도 들렸다.
고석정은 철원 지역을 관통하여 흐르는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 8경중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강폭은 그리 넓지않은데 그 강 한켠에 약 10m 높이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이 孤石이다.
이 거대한 바위절벽 중간에 3칸 정도의 石窟이 있는데 이곳에서 義賊 임꺽정이가 起居했다고 전한다.
일찍이 新羅 진평왕과 高麗 충숙왕이 遊覽을 다녀갈만큼 빼어난 絶景이라고 전해온다.
지금도 朝鮮時代 明宗때의 임꺽정이와의 關聯說이 있는 임꺽정(林巨正) 石城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도 박경훈씨랑 김미정씨는 아래 江까지 내려가질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관광을 마쳤고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내려
가서 거대한 氷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으면서 인증을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백명화씨의 조카가 근무한다는 部隊까지 가서 조카를 면회해서 데리고 승리회관까지 가서 食事도
시킨후 이원사가 歸隊를 시켜주고 우리 일행들은 숙소로 귀대해서 둘째날을 마감했다...
부산으로 귀가하는 도중에 춘천 의암호도 구경하고 평창으로 가서 횡계에서 지역 축제인 눈꽃축제 마지막날을 구경키로 하고
갔었는데 횡계를 가로질러 흐르는 송천에서 얼음을 지치거나 팽이치기등으로 행사를 진행시켜 고생해서 찿아간것 만큼 실망
스러웠지만 횡계리에서 맛본 황태회관에서의 점심은 맛깔나게 먹었던것 같다.
송천 눈꽃 축제가 시원찮아 근처에 있는 삼양목장으로 갔었는데 그곳도 구제역의 창궐로 입장하지 않고 오후 3시경 바로
귀가를 서두루긴 했는데 영동고속도로 서울 방향의 지체로 고속도로는 거북이 걸음으로 움직이다 속사근처에서 국도로 접근
해서 제천을 경유 북단양에서 고속도로로 올려 대구까지는 무난히 내려오다 대구에서 신대구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그만
창녕쪽으로 접어들어 할수없이 긴여정에다 또 구마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부산으로 귀가를 했었다.
이번 여행은 여러가지 이상징후를 남기긴 했지만 서로간의 不協和音없이 잘 마무리는 되었다.
회장님과 술을 좋아하는 회원님들이 너무 지나치게 과음을 하여 계획되로 일정을 소화하질 못했고 처음부터 적은 회비책정
으로 車輛을 지원한 회원님들에게 충분한 支援을 해드리지 못한점을 들수 있겠다.
또 휴일을 가족들과 오붓하게 쉬어야 했을 李元士랑 최재영상사랑 마지막 저녁 식사때 잠시 얼굴을 보여준 장달순상사등에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고 갔던게 옥에 티같은 찜찜함이라 하겠다.
다행한건 모두 무사하고 건강하게 잘 다녀온점이였고 2박3일동안 쉼없이 운전을 하여 피곤했을 박경훈씨랑 김정국씨,오명석
씨께 다시한번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번 철원행을 推進하신 總務任과 안용진님께도 진심으로 수고 하였다고 感謝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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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담 정 호 권
첫댓글 그래요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철원지방에 무사히 잘단녀 왔습다 그간 모든분야 열심히 뛰어주신
회장 산대장 총무님 고생많아습니다 무엇보다도 차량을 3일간이나 운전하느라 무척 고생하신 김정국 박경훈 오명석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회원님들이 수고하여주신 덕분에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좋은추억만들어서 ,,,,,,,
돌아왔습니다 다시한번 수고하여주신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