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원반(太陽 圓盤,Winged Solar Disk)에서 장미 창(Rose Window)까지
“나 주(主)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우상(偶像)들을 멸(滅)하며 신상(神像)들을 놉(Noph-Memphis) 가운데서 끊으며 애굽 땅에서 왕(王)이 다시 나지 못하게 하고 그 땅에 두려움이 있게 하리라 내가 바드로스{Pathros-Cairo에서 Aswan 사이의 Nile강 유역-‘남방의 땅’(Southland)}를 황무케 하며 소안(Zoan-Tanis)에 불을 일으키며 노(No-Thebes)를 국문하며 내 분노를 애굽의 견고한 성(城) 신(Sin-Swn, Pelusium, a frontier city of lower Egypt)에 쏟고 또 노(No-Thebes)의 무리를 끊을 것이라 내가 애굽에 불을 일으키리니 신(Sin)이 심히 근심할 것이며 노(No)는 찢어 나뉠 것이며 놉(Noph-Memphis)은 날로 대적이 있을 것이며 아웬(Awen-On-Heliopolis)과 비베셋(Pibeseth-Tell-Basteh-下Egypt 18王朝의 수도)의 소년들은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그 성읍 거민들은 포로될 것이라 내가 애굽 멍에를 꺾으며 그 교만한 권세를 그 가운데서 그치게 할 때에 드합느헤스(Tahpanhes-Tell Defneh)에서는 날이 어둡겠고 그 성읍에는 구름이 덮일 것이며 그 딸들은 포로될 것이라 이와 같이 내가 애굽을 국문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0:13-19).
개요
Nile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기자(Giza)를 필두로 해서 사카라(Saqqara), 멤피스(Memphis), 다슈르(Dahshur), 파이윰(Fayyum), 마이둠(Maydum), 베니 하삼(Beni Hasam), 텔-엘-아마르나(Tell el-Amarna), 아비도스(Abydos), 덴데라(Dendera 또는 Dandara) 테베(Thebe-Luxor), 엘 카브(El Kab), 에스나(Esna), 에드푸(Edfu), 콤 옴보(Kom Ombo), 섬 필라에(Philae), 칼라브샤아(Kalabshah) 그리고 아부 심벨(Abu Simbel)에 이르기까지 계곡과 그 연변에 피라밋과 각종 태양신 신전들의 유적들(ruins)이 즐비해 있다.
이 중 14곳에서 70여개의 피라밋 유적이 확인되어 “太陽과 피라밋의 왕국”(the Kingdom of the Sun and Pyramid)이라 불리우게 된 Egypt는 古王國時代부터 Julius Caessar에 의해 Roma에 정복될 때까지 거의 3,000여연 동안 太陽을 主神으로 하고 영혼불멸설을 강력히 신봉하는 宗敎 형태의 多神敎國이었다.
그러한 Egypt가 비록 무력에 의해 Roma에 정복되었을지라도 오히려 Roma는 “太陽과 피라밋”의 宗敎에 의해 Egypt에 정복당해 버렸다. 환언하면 태양 숭배의 유물인 “일요일 신성설”과 영혼불멸설의 종교 사상은 근원적으로 “태양과 피라밋”에서 기원된 것이다.
몇몇 서양의 사가들은 서양 문화의 뿌리를 Egypt에서 그 근원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분명한 것은 그 문화의 일부를 Egypt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Roma가 서유럽을 무력으로 정복하여 통일하였을 때 “태양과 피라밋”의 종교사상이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될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Egypt 神의 복수였을까! Egypt를 멸망시킨 Roma는 어쩌면 그 보복으로 “양날개가 펼쳐지고 독사 코브라에 의해 보호된 태양 원반”(Winged Solar disk with cobra)을 “메달리온”(medallion)으로 하는 그 神에 의하여 독사 코브라의 치명적인 공격을 면치 못한 결과였을까!
Roma 共和政時代에 Babylonia의 神話를 등에 업고 Hella를 거쳐 먼저 흘러들어 오기 시작한 Mesopotamia 文化의 물결과 그 후 Julius Caesar 時代에 Egypt의 文明과 宗敎, 그리고 그들의 神話를 등에 업고 Alexandria에서부터 흘러들어 온 Nile강 文化의 물결이 Roma에서 合流되어 帝政時代 Roma 정신 문화계에 격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나서 그것들이 한참 고조될 무렵, 즉 Roma의 종교적 사회적인 정신 문화의 가장 험악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그리스도敎의 복음이 Roma 도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때가 Egypt의 바로들처럼 “태양의 살아있는 그 아들”로 자처한 네로(Nero, 재위 54-68 A.D.) 황제 시대 전후였다.
그리스도교 복음을 접하게 된 Roma의 첫 반응은 저항과 박해였다. 그야말로 적지(敵地)였다. 그러나 그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리스도敎의 복음 진리는 그 순결성이 더욱 빛나고 강했으며, 敎勢가 더욱 신장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Roma의 원형극장인 Colosseum에서 순교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Bishop of Carthago, 160-240 A.D.)의 증언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의 피는 씨앗”이었다. 100명이 순교하는 곳에서 1,000여명의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Roma의 위정자들도 그리스도교를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인 태양신교와 동화 또는 결합을 통해서 진멸하는 길밖에 없었다.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꾸며낼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었다. 그 계략은 슬프게도 적중하였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교를 “태양신교화”(Solarization) 하는 것이었다.
太陽 圓盤(Winged Solar Disk)의 기원
Egypt의 神話에 의하면, 오시리스(Osiris)는 大地 게브(Geb)와 天空 누트(Nut)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Egypt 最初의 王이었다. 그의 아내 이시스(Isis)는 누이 동생으로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호루스(Horus)이다.
그런데 Osiris의 남동생인 세트(Seth)는 Osiris를 살해하여 그 시신을 찢어서 Nile강물과 사방에 버렸다. Osiris의 아내 Isis는 신고만난 끝에 여러 곳에 흩어진 유해를 거두어 모아놓고 자신의 끈질긴 노력과 아들 Horus의 주술로 Osiris를 환생시켰다.
“그는 이집트 땅에 있는 ②태양 신전의 돌기둥들을 부수고, 이집트의 신전들을 불살라 버릴 것이다.'" / ②또는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돌기둥들을'”(렘 43:13, 새번역)
이리하여 Osiris는 죽음과 부활을 거쳤기에 死界의 王으로서 명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후 Horus는 Seth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Horus는 매의 神으로서 Egypt 古王國 時代부터 王의 守護神이며, 王權의 상징이었다. 사막의 뜨거운 太陽볕 아래서 양 날개를 곧게 펴고 하늘을 나는 송골 매는 古代 Heliopolis 王朝 時代의 Egypt인들에게 있어서는 太陽神 라(Ra, 또는 Re)를 운반하는 신성한 새로 여겨졌다. Memphis 王朝 時代부터는 동쪽의 地平線에서 솟아 오른 太陽은 이제 死界에서 막 부활한 太陽神 Osiris이며, 다시 부활하기 위해 死界의 서편에 내려가기 위해 아들 송골매인 Horus가 운송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양 날개를 펴고 太陽 Osiris를 운반하는 모습을 담은 “메달리온”(medallion-圓形의 양각) “솔라 디스크”(Winged Solar disk-太陽 圓盤)는 Egypt의 어느 神殿을 막론하고, 그 神殿의 “파사드”(Façáde-건축물의 정면) 출입문 윗부분에 반듯이 양각되어 있으며, 또 神殿의 內殿에 들어가는 문들과 그 천장에 이 太陽 圓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심지어는 모든 탑문에까지도 그 “솔라 디스크”가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다. 그리고 Egypt의 모든 神殿들은 백성들이 솟아오르는 太陽을 경배할 수 있도록 그 “파사드” 출입문이 서편에 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神殿들이 Nile江 동편에 있는데 반하여 Pyramid들은 Nile江 서편에 있다.
Thebes에서도 Nile江 東쪽에 위치한 Luxor와 Karnak 神殿들이 살아있는 者들의 신앙심과 강력한 王權을 상징하는 증거라면, 江 西쪽은 來世의 영원한 삶에 대한 죽은 자들의 강렬한 염원을 나타내는 땅임을 암시한다. 이 지역을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이라 하는데 그 중 女王 핫셉수트(Hat-šepsut, c. 1501-1480 B.C.)의 神殿을 비롯하여 세티 1세(Seti Ⅰ, 1317-1301 B.C.), 람세스 2세(Ra-messu Ⅱ, 1301-1234 B.C.), 그리고 람세스 3세(Ra-messu Ⅲ, 1197-1165 B.C.)의 神殿들은 장엄하다.
그리고 역대 파라오들의 무덤들과 왕비들의 무덤들이 있는 왕비들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이 모두 江 西쪽에 들어서 있다. 대부분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었으나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Howard Carter, 1873-1939 A.D.)에 의해 A.D. 1922-3년에 발굴된 투탄카멘(Tut-anKh-Amen, 1358-1349 B.C.)의 무덤은 유명하다.
카터가 왕의 무덤에서 20,000여점의 유물을 발견했으나 그 중에서도 그에게 충격적으로 감동을 준 것은 어린 왕 투탄카멘의 옥좌였다. 그가 사용했던 보좌 등받이의 화려한 그림은 太陽神 아텐(Aten)의 축복을 받고있는 왕과 왕비의 다정한 모습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단적으로 Egypt의 宗敎가 한결같이 太陽을 最高의 主神으로 信奉하고 死後의 世界 곧 영혼불멸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음을 강하게 나타낸 것이다.
아마르나의 “태양 원반”
Egypt의 神話에 의하면 太陽神 “아텐”(Aten 또는 Aton)은 地平線上에서 “中天으로 떠오르는 神”(the ascendent deity)으로서, “아텐”이라는 그 이름 자체가 바로 “태양의 원반”(the disk of the Sun) 곧 “둥근 태양”을 뜻한다.
“아텐”의 彫像(iconography)은 손 끝에서 빛-光線(rays)-이 발산하는 둥근 태양의 모양(the form of the Solar disk)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손들이 왕과 왕비의 상들(figures of roylty)에 접근하는 모습은 “생명의 표식”(signs of life)을 잡으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텐”이 동녘 지평선상에서 중천으로 떠오르는 神으로 각광받아 숭배되기 시작한 것을 파라오(바로) 투트모세 4세(Tuthmoses Ⅳ, c. 1401-1391 B.C.) 재임 기간이었으며, 그 신앙의 상승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 절정에 오른 시기는 아멘호텝 4세(Amen hotep Ⅳ, c. 1337-1358 B.C.) 재임 기간이었다. 그는 太陽 “아텐”을 唯一神으로 섬기는 열렬한 광신적 숭배자였다. Egypt 宗敎史上 一神敎 신앙을 도입한 파라오는 아멘호텝 4세뿐일 것이다.
그는 재위 제6년째 되던 해에 이르러서는 Egypt 中王國 제12王朝(c. 1991-1786 B.C.) 이래, 줄곧 Egypt 王國의 수도였던 데베(Thebes)를 버리고 현제 텔 엘 아마르나(Tell-el-Amarna)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천도하고, 그 새 수도를 “아케타텐”(Akhet Aten-아텐의 영광스러운 땅)이라 명명하고, 그 太陽神 “아텐”을 위하여 大神殿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도 아케나톤(Akhen Aton 또는 Ikhen Aton-Aton을 섬기는 者)으로 개명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一神敎의 강력한 종교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아무튼 그는 古代로부터 그때까지 Egypt인들이 숭배해오던 太陽神 “아문-레”(Amun-Re 또는 Amon-Ra, Amen-Re)와 그밖의 모든 잡신들을 숭배하는 多神敎 신앙을 철폐하고, 일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데베(Thebes)에 있는 카르낰(Karnak) 神殿과 룩소르(Ruxor)에 세워진 “아문-레” 神殿에 안치된 모든 神像들을 파괴하고 神殿 벽에 새겨진 Egypt 최고신의 이름도 지워버렸다. 이것은 “Amarna 대혁명”이었다.
그러나 王이 막대한 국고비를 동원해서 太陽神 Aten의 大神殿 建築에 몰두하면서 宗敎改革 事業에만 열중하여 軍事를 소홀히 하게 되자, 그 틈새에 북방에서도 히타이트(Hittite-헷족속)가 시리아(Syria)를, 모세가 이끄는 하비루(Habiru-히브리족)는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침공하였다. 아마르나 문서(Amarnan documents)에 의하면, 다급해진 가나안 족속들이 사신을 보내와 군사원조를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王은 출병할 수가 없었다. 40여년 전에 Egypt가 자랑했던 그 막강한 전차부대들이 홍해에서 전멸해버렸기 때문인가?
이로 인하여, Syria와 Palestine에 대한 Egypt의 통치권도 상실되어버렸다. 이렇게 외치에 실패하고, Aten 대신전 건축에 재정이 고갈되고 세수도 차질이 생기자 내정도 어렵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Amun-Re 사제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애당초 王이 수도 Thebes를 버리고 Amarna로 천도하게 된 동기는 면세 특권을 누리면서 축재하여 세력이 막강해진 Amun-Re 사제들과 권력 쟁탈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王이 죽은 후 보좌는 나이 어린 그의 동생이자 사위였던 투탄카멘(Tut-ankh-Amen, c. 1358-1349 B.C.)이 계승하게 되었다.
어린 파라오는 Amun-Re 사제들의 반란을 진압할 능력이 없어서 타협을 통해 평화를 추구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도를 다시 Thebes로 환도하니 Amun-Re 신앙이 회복되면서 다시 다신교국이 되었다. 동시에 Akhet-Aton은 급속히 쇠망하여 오늘날의 Tell-el-Amarna가 되어버렸다. 나이 어린 파라오 투탄카멘은 종교 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일까?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 Egypt 최고 권좌에서 채 꽃봉오리도 펴보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해 버렸다. 비록 Amarna 宗敎와 文化의 歷史는 매우 짧았지만 Roma의 宗敎와 文化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Egypt學 學者들은 Computer의 도움에 힘입어, 3,300여년 전에 파괴된 Aten 신전의 원래 모습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신전 유적의 주변 사방에 흐트러져 있는 수십만개의 파괴된 신전 건축 자재의 유물들을 수집하여 하나하나 Computer에 입력시켰다가 다시 그 새겨진 벽 부조를 따라 신전을 재구성한 것이다.
학자들이 여기서 발견한 것은 오직 太陽 Aten만이 Egypt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행정, 군사, 교육, 산업, 농사 그리고 가사에 이르기까지 오직 Aten神이었다.
학자들이 재구성한 神殿 파사드(façáde-건축물의 정면)의 대출입구 상단에는 太陽 Aten을 묘사한 “태양 원반”이 내려 발산하는 광선으로 전체 신전을 압도하고 있으며 신전 내외 벽 전체가 광선들이 발산하고 있는 太陽 Aten神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Italia에 건축된 “제3의 새종교”의 각종 성당들이 Aten 神殿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것은 “서쪽 파사드”(west façáde)에 반드시 “태양 원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남쪽 파사드”에도 그 “태양 원반”을 “장미창”(Rose Window)으로 설치한 것은 Egypt 건축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