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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羅大用) 연보
나대용(羅大用, 1556년 조선 명종(明宗) 11년 7월 25일 생~1612년 조선 광해군 4년 1월 29일 몰; 향년 57세)
우리나라 조선(造船)의 아버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조선 기술자(造船技術者)
조선의 선박왕
조선군 군함의 선구자
조선군 수군의 선조 나유 대장군의 후예
세계 최초의 철갑선•세계 해군 7대 명품 거북선 개발자
해추선(海鰌船, 쾌속선)과 창선(鎗船) 개발자
조선 시대 중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무신
과거 병과 급제•훈련원봉사•전라좌수영 군관•유군장•강진현감•금구현감•능성현감•고성현감•곤양군수•남해현령•제 경기수군 교동수사•수군장•장군
선조조 종4품 조봉대부 능성현령•광해군조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 승급•광해군조 종2품 가선대부 경기도수사 제수
청백리 목민관으로 일곱 고을의 수령 역임
나주 출신 조선의 장군(將軍)
조선군 수군 장군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혁혁한 공훈의 수군장(水軍將)
고려 개국 일등 공신•금성태수•나주성주 금성 나 씨 시조 나총례(羅聰禮)의 후손
원나라 원정의 선봉장 나유(羅裕, 출생 연도 미상~1292년 고려 충렬왕 18년) 대장군의 11대조 후손
고려 수군 원수 나세(羅世, 1320년 생~1397년 몰) 장군의 후예(원나라에서 화약 무기 도입, 원나라 조선족 2세(재원 교포 2세)라는 설, 세계 최초의 해상 원거리 포격전 군산 진포 대첩의 수군장 원수; 나주 나 씨 5대조 선조로서, 고려 공민왕조 문신으로 과거 급제 후 한림상원사•판도판서•연안군•장군•원수 역임)
나주 호족의 후예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옥포 해전•사천 해전•한산도 해전•명량 해전•노량 해전 등 참전
본관 금성(錦城) 금성(錦城) 나(羅) 씨
자 시망(時望)
호 체암(遞菴)
고려 후기 관군상만호•신호위호군•검교상호군•상의평리•첨의참리•계림윤 금성군 양절(良節) 나익희(羅益禧, 출생 연도 미상~1344년 몰; 나유(羅裕) 대장군의 아들, 형부상서 나득황(羅得璜)의 손자)의 후손
조부 참봉 나공석(羅公奭)
부 첨추 나항(羅亢)
모 광산 김(金) 씨
자녀 2남
1남 본인 나대용
2남 남동생 나경용(羅景用)
종제(從弟, 사촌 아우) 나치용(羅致用, 임진왜란 노량 해전에서 전사)
조카 합천군수 나척(또는 나적, 소사평 전투에서 전사)
조카 나척의 아우 진사 나선 장군(소사평 전투에서 전사)
합천군수 나척의 아들 나달생(『선조실록』에는 나익회라고 기록, 합천 전투에서 전사)
처 정부인 이천 서 씨
자녀 8남(서자 2남 포함)
적자 6남
서자 1남 흑산별장 나우득
서자 2남 나우문
1556년 1세 조선 명종(明宗) 11년 7월 25일 조선국 전라도 나주목 제봉산 아래 오륜동(현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동 472번지)에서 첨추 나항(羅亢)의 2남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출생일이 7월 29일이라는 설도 있다)
1561년~1574년 6세~19세 명종 16년~조선 선조(宣祖) 7년 고향 마을 신동재(新洞齋) 사숙에서 학문 연마(향교 교생)
1575년~1582년 20세~27세 선조 8년~선조 15년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 수련. 왜구 침략에 거북선 연구 시작
1575년 20세 선조 8년 영산강에 출몰하는 왜구에 위협을 느끼고 무예 수련
1583년~1612년 28세~57세 29년간 나대용 장군 수군(해군) 복무 기간
1583년 28세 조선 선조(宣祖) 16년 8월 28일 훈련원 별시 병과(무과) 급제(65위), 종8품 훈련원봉사(군사 훈련 교관) 6년 역임.
1589년 34세 선조 22년 훈련원봉사를 사임하고 낙향해서 고향 나주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10여년간 거북선 설계 및 제작 연구. 낮에는 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 배의 건조를 위한 목재를 다듬었고, 밤에는 나대용 장군의 생가 뒤뜰에 있던 초당(草堂)에서 초당의 벽에 거북선 설계도를 그려서 걸어두고 거북선 제작. 8월 4일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조총을 바치고 통신사 파견 요청(우리나라 조총의 기원, 우리나라 최초의 조총)
1590년 35세 선조 23년 고향 오륜마을 앞 방죽골에서 거북선 첫 시험 성공
1591년 36세 선조 24년 훈련원주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년 생~1598년 몰)을 만나 거북선 제작 합의(종제 나치용 동행). 이순신 장군 휘하 군관(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으로 거북선 제작 책임자가 되어 거북선 건조 개시. 임진왜란 때 거북선 3척(隻) 최초 진수. 임진왜란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공훈
1592년~1598년 37세~43세 선조 25년~선조 31년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제외한 전 7도가 왜군에 함락되었으며, 이순신과 나대용의 세계 7대 전함인 돌격선 거북선이 전라도를 방어하고 남해에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1592년 37세 선조 25년 유군장 역임. 3월 29일 거북선 건조 및 첫 발포, 4월 12일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 진수 및 발포 성공. 발포가장(鉢浦假將, 만호) 임명.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총사령관, 19세의 우키다 히데이에 왜군 10만 명 전 9군의 조선 침략 총사령관). 4월 14일 왜군이 부산포 침투, 4월 15일 부산 동래성 함락, 4월 18일 나대용 임시 지휘관 발포가장(발포에서 거북선 건조 임무) 임명,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자결, 4월 30일 새벽 선조가 폭우를 맞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란하자,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방화, 이순신이 나대용을 유군장(기습 공격 담당 유격부대장; 당시 임시지휘관 발포가장 영군관 훈련봉사) 임명, 5월 3일 침략 20일 만에 왜군 한양 입성, 5월 7일 나대용 장군이 유군장으로 제1차 옥포 해전에 참전해서 거북선을 띄우고 왜군 대선 2척 격파, 5월 11일 나대용의 사촌 아우 나치용이 고향 나주로 특별 휴가, 5월 29일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 참가. 나대용 장군이 사천 해전에 참전해서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부상(이순신 왼쪽 어깨 철환 부상과 나대용 허벅지 화살 부상), 6월 7일 율포 해전(이순신 참전),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지나 의주행, 6월 14일 왜군 평양성 점령, 6월 21일 선조가 압록강 부근 의주에 도착해 요동 망명을 시도했고,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 7도가 왜군에 의해 함락, 나대용과 이순신이 사천 해전의 부상을 치료, 7월 8일 나대용 장군이 제3차 한산도 해전에 참전해서 부상, 8월 1일 부산포 해전을 앞두고 나대용 거북선 건조 책임관의 덕택으로 군함 166척(거북선 2척 포함)을 확보, 왜선 100여 척 섬멸하는 성과, 10월 8일 김시민의 진주 대첩, 사천•당포•선창•당항포•명량•노량 해전 등 15회 해전에 참전해서 공훈. 각종 전함과 무기를 스스로 개발했으며, 전투 지휘 능력도 탁월했다고 한다. 12월 25일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사 4만 3천 명이 압록강 도하, 12월 28일경 이여송이 의주에서 선조 접견
1593년 38세 선조 26년 1월 8일 이여송의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수복, 1월 10일 이여송의 명군이 개성 도착, 1월 26일 이여송이 임진강을 건너 파주 도착, 1월 27일 이여송이 경기 벽제에서 대패해서 평양으로 퇴주, 2월 12일 권율의 행주 대첩, 3월 8일 웅포 해전(이순신 참전) 후에 이순신과 나대용이 한산도 본영으로 귀환, 4월 18일 왜군이 한양 철수, 5월 22일 나대용이 전라좌수영 여수에서 명나라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도착(나대용 전령 임무), 6월 1일 삼도수군 연합함대 도착, 나대용이 탐후선을 타고 도착, 6월 8일 나대용 장군 발병으로 전라좌수영 여수 본영으로 이동(이순신이 약을 주며 쾌유를 기원), 6월 29일 진주성 함락, 10월 1일 선조 한양 수복, 윤11월 3일 종6품 주부 나대용 복병장 임명. 나대용 장군이 왜장 정탐병 25세 망고질지(亡古叱之)를 생포해서 심문. 소사평 전투에서 나대용의 조카 합천군수 나척과 그의 아우 진사 나선 장군이 전사했다는 비보. 합천군수 나척의 아들 나달생(나익회)이 합천 전투에서 전사
1594년 39세 선조 27년 4월 3일 나대용이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1540년 생~1597년 몰) 방문, 8월 5일 나대용의 왜군 생포를 포함한 공로에 대한 이순신의 포장 추천으로 종6품 강진현감 제수(이전 직위 종6품 주부)
1595년~1596년 40세~41세 선조 28년~선조 29년 금구현감, 능성현감, 고성현감 역임. 정유재란 후 창선(鎗船) 발명 및 건조
1595년 40세 선조 28년 임진왜란 강화 교섭 기간(임시 휴전)
1596년 41세 선조 29년 9월 2일 명나라-일본 강화 교섭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재침공을 명령했고, 이순신을 제거하고 조선 수군을 섬멸할 것을 지시, 10월 11일 장령 윤형이 강진현감 나대용의 파직을 청함. 강진현감 2년 2개월 역임.
1597년 42세 선조 30년 나대용을 종5품 금구현령에 임명. 1월 중순 정유재란 발발(이순신 제거가 제1 목적), 2월 26일 모함으로 투옥된 이순신의 무고함을 동료들과 함께 상소, 4월 1일 이순신 백의종군(6월 4일 경남 합천 도착까지 62일간), 6월 4일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의 원수진 소속 자문관 역할, 7월 16일 새벽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이 대패하고 출전 거북선이 모두 침몰했으며 일본 수군이 한산도 점령, 7월 22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8월 3일 이순신 복귀, 8월 16일 왜군이 남원성을 함락하고 잔인하게 남원성 백성들을 죽여 1만 명의 의인들의 무덤인 만인의총(萬人義塚) 안장, 임진왜란의 일본식 별칭 ‘도자기 전쟁’으로 조선의 남원 도공 80여 명을 일본으로 강제 이송, 8월 18일 왜군 전주 입성, 9월 1일 왜군 순천 점령, 9월 3일 왜군 충남 공주 입성, 선조가 평양 주둔 명군의 출동 요청, 9월 6일 명군 천안 지역 출동, 9월 7일 명군 직산 전투 승리, 왜군이 목천과 청주 방향으로 퇴주, 9월 16일 나대용이 정유재란 당시 명량 해전에서 거북선으로 참전해 대승, 이순신이 세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승, 왜군이 정읍을 점령하고 나주, 장성, 영암, 해남 등 전라도 초토화, 9월 27일~10월 13일 왜군 해남 점령, 순창과 남원 점령, 10월 25일 왜군 구례 점령(왜군이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고 약탈해서 촘촘히 주둔, 곡성에 왜장 요시라(要時羅) 주둔,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베기를 지시해서 1만 5천여 개의 사람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통에 담아 일본으로 이송), 10월 14일 왜군이 명량해전 대패의 보복으로 충남 아산 이순신 고향 마을과 가족들을 공격해서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해서 초토화하고, 이순신의 막내아들 20세 이면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 10월 29일 왜군 경남 사천 점령
1598년 43세 선조 31년 7월 16일 명수군 5천 명 고금도 도착, 8월 나대용 금구현령 역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지체없이 조선에서 철병하라.”는 말을 남김), 9월 나대용 종4품 조봉대부 능성현령 역임, 명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왜군에 대해 11월 노량 해전까지 2개월간 총공세 감행, 11월 18일 나대용이 노량 해전에 참전해서 일등 공로, 음력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전사(적탄을 맞고 순국, 향년 54세). 이순신 장군이 적탄을 맞고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가린 후에 해전 전투를 마쳤다고 한다. 같은 날 노량해전 관음포 전투에서 나대용의 사촌 아우 나치용 전사(사인. 적탄 부상), 이순신 장군의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도 적탄 부상, 19일 전투에서 조명수군 승리, 11월 25일 저녁 왜군이 모두 부산을 탈출하고 6년 7개월 12일간의 임진왜란 종료. 임진란으로 나대용 장군의 사촌 아우 나치용 외에도 장수 나득룡, 장수 나덕립, 나대용의 조카 합천군수 나척과 그의 아우 진사 나선 장군, 나척의 아들 나달생(나익회) 등이 전사했다.
1599년 44세 선조 32년 3월 나대용이 이순신의 종사관 반곡 정경달을 만남, 윤4월 1일 정언 임수정이 능성현령 나대용의 파직을 청함. 나대용 남해현령 제수. 7월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관(감조)으로 배를 만들면서 창선(창을 촘촘히 꽂은 군함) 건조
1600년 45세 선조 33년 창선 25척 건조. 9월~1601년 11월 종3품 통훈대부 고성현령 임명
1601년 46세 선조 34년 11월 모친상으로 3년 거상(居喪)
1604년 49세 선조 37년 부친상으로 3년 거상
1606년 51세 선조 39년 11월 부친상 거상 종료, 12월 24일 선조(宣祖)에게 창선 개발을 보고하는 상소를 올려 조선차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사실로 나대용이 거북선 건조 기술 책임관임을 증명했다(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 주장). 나대용은 조선차관이 되어 통제영에서 근무한 것으로 추정
1607년 52세 선조 40년 종4품 경상도 곤양군수 임명
1608년 53세 조선 광해군(光海君) 원년 12월 18일 사간원이 곤양군수 나대용의 파직을 청함.
1610년 55세 광해군 2년 10월 종5품 남해현령 임명, 해추선(海鰌船, 쾌속선) 발명 및 3척 건조. “바다의 미꾸라지”라는 뜻의 해추선은 이후 일반 목선의 모형이 되었으며, 나대용의 해추선이 “가장 작고 가벼우며 날렵하다”는 경상감영의 평가. 10월 26일 사헌부가 남해현령 나대용의 교체를 청함.
1611년 56세 광해군 3년 6월 비변사 낭청 최현의 장계로 쾌속 해추선 개발의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 가자(加資), 6월 8일~6월 20일 사헌부가 비변사 낭청 최현(崔晛)의 장계로 나대용이 상가를 받은 것을 지적하고 나대용의 당상관 가자를 취소하는 상가 개정을 여러 차례 간했으나 불허, 11월 종2품 가선대부 경기도군통어사(경기수사) 제수, 해전 당시 부상으로 부임 포기
1612년 57세 광해군 4년 1월 29일 서거, 향년 57세. 고향 전남 나주시 문평면(구 거평면) 마전동 선영 예장(禮葬)
묘역
나대용 장군 묘소
―전남 시도기념물 제26호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마전동 삼밭골 저수지 우측 선산
묘비명
“가선대부 경기도수군통어사 나대용지묘”
사당
소충사(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
동상
나대용장군상(소재지. 소충사 앞)
생가
나대용 장군 생가 경모당(敬慕堂)
―전남기념물 제26호 지정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길 28-5
―구조. 정면 4칸, 측면 1칸 남향집으로 현재 본채만 보존. 앞뒤의 뜰에 별채가 있었고, 뒤뜰에 죽림이 둘러싸고 있어 맞담과 생울타리 경계
거리
나대용 장군 거리(나대용 장군 생가 부근)
초상화
체암나대용장군상(遞庵羅大用將軍像)
기적비
나대용장군기적비(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건립)
방죽골 거북선 건조장
―고향 오륜마을 앞 방죽골에서 배를 건조해 물에 띄워 실험했다고 한다.
―현재는 방죽(둑)이 없어지고 논밭으로 남아 있다.
기타 유물
적색 철릭, 삼지창, 청룡도(선조의 하사품, 전란으로 소실)
1795년 『이충무공전서』에서 현령 나대용이 임진란을 당하자 이순신을 따라 거북선 3척을 건조했다고 기록(『나주목지』(羅州牧誌) 인용)
1799년 나주 송재사에 배향
1800년 5월 금성 임병원이 경신년에 나대용 “행장”을 찬술하고, 나대용이 사촌 아우 나치용과 이순신을 찾아가 거북선 3척을 같이 건조하고, 사천 해전에 참전해 적탄에 부상했으며, 노량 해전에도 참전했고, 해추선 3척을 건조했다고 기술. 8월 금성 나 씨 6세손 나찬현이 경신년에 행록을 썼고, 후손 나찬현의 “행록”에서 거북선이 이순신과 나대용의 지혜로 창안되었다고 기록. 9월 후손 나찬현이 행적 기록
1859년 조선 철종(哲宗) 10년 배향(配享). 9월 금성 나 씨 9세손 후손 나병상의 기미년 “기행”에서 이순신과 나대용이 함께 계획하고 결정했다고 기록
1860년 완산 이승욱이 경신년에 묘비명 기록
1872년 홍순형이 “행적,” 이병수가 “묘갈명”을 기록
1912년 5월 5일 양성 이병수가 임자년에 묘갈명 기록. 금성 나 씨 종중에서 “체암공 행적”(초간본) 간
1932년 9월 “체암공 행적”(중간본) 간
1958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희가 선박 기술자 나대용이 거북선의 실제 설계자이고 건조자라고 주장
1975년 1월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발족(회장 이은상), 4월 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서 생가, 사당 소충사, 체암 나 장군 기적비 건립(이은상 비문)
1976년 『체암나대용장군실기』 간
1977년 나대용 장군 사당 소충사(昭忠祠)를 건립하고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나대용 장군 추모제” 거행. 10월 20일 나대용 장군 생가와 묘소가 전남기념물 제26호로 지정(관리자 나갑운)
1978년 소충사 완공
1983년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체암 나대용 장군 추모제 거행
1984년 소충사 묘정비 건립
1999년 6월 9일 대우옥포조선소에서 한국군 해군 잠수함 나대용함 건조
2000년 12월 한국군 해군 잠수함 나대용함 취역(우리나라 8번째 잠수함). 한국 해군 보유 장보고급 잠수함으로서 인접국을 상대로 한국군이 보유한 전략 무기 하푼미사일을 장착했다. 대우조선해양이 제작했으며, 잠수 깊이 500m이다. 승조원 33명이 승선하며, 기뢰와 어뢰발사관 및 어뢰가 탑재되어 있다. 유사 잠수함에는 이순신함과 이억기함이 있다.
2001년 우리나라 8번째 잠수함 나대용함과 나주시가 자매결연으로 연례 나대용 장군 추모제에 참석하고 자매결연 장학생들에게 격려금 지원 사업
2002년 림팩 2002에 잠수함 나대용함 참가. 한국 해군 최초로 잠대함 하푼미사일을 발사해 60km 거리 목표물을 명중시킴.
2007년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발족
2010년 4월 21일 전남 나주 소충사에서 나대용 장군 398주기 추모제 거행
2012년 4월 21일 나대용 장군 서거 400주년의 해를 기념해 전남 나주 소충사에서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주최(이사장 나무석) 추모제를 거행하고, 소충사 앞 기념공원에 나대용 장군 동상과 거북선 모형을 설치했으며, 4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금성 나 씨 후손들과 나대용함 승조원 및 군악대 등 300여 명 참가)
2015년 1월 11일 한국 해군 해군학술상 나대용상 시상, 4월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세창문화사) 간
2016년 나대용 장군 순국 404주년의 해. 미국 해군연구소(USNI)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세계 7대 군함’의 하나로 거북선 선정(7대 전함 가운데 최고(最古)의 군함)
2019년 10월 퇴계 이황 저 『역주 고경중마방』(퇴계선생이 엮은 옛사람들의 마음 닦기―이광호, 강경현, 강희복, 나대용, 박지현, 이영자, 이치억)(학자원) 간
2020년 12월 이희주 저 『떴다! 지식 탐험대: 태양계―나대용, 태양계 탐사선에 납치되다!』(백두리 그림, 박병곤 감수, 시공주니어) 간
2022년 임진왜란 발발 430주년의 해. 7월 1일~12월 1일 사이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이 거북선 개발자 나대용 장군 전기를 저술하고 나주시청 홈페이지에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을 5개월간 74회 연재. 4월~9월 6일까지 5개월여 동안 나주 문평 오륜마을에서 나대용 장군 벽화그리기 사업으로 나대용 장군 일대기를 담은 벽화 조성, 11월 18일 전남 나주 나주시민회관에서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와 호남사학회 공동 주최로 나대용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 개최(기조 강연―제장명, 「나대용의 임란 시기 활동과 역사적 의미」, 주제 발표―나선하, 「나대용 장군의 가계와 성장배경」, 김병륜, 「나대용과 임란 시기 거북선」, 이수경, 「나주 체암 나대용 유적의 현황과 활용 방안」, 김대중, 「나대용의 과학기술 사상과 호국정신의 선양」), 12월 김세곤 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평전』 간
2023년 12월 1일 김세곤 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평전」 연재 완료, 12월 26일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전남 여수 선소유적지에서 ‘선소테마정원 조성사업 기공식’ 개최(2025년 개관 예정)
<거북선>
1591년~1593년 세계 최초의 철갑선 돌격용 거북선(龜船) 3척 건조(임진왜란 당시 세계 7대 전함), 거북선 건조 책임관
1592년 거북선 2척(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선소 건조 1척, 여수 돌산읍 군내면 서외리 선소 건조 방답귀선 1척)
1593년 순천도호부 여수 시전동 순천 선소 건조 순천귀선 1척(현 여수 선소 유적지)
1595년 한산도 거북선 5척 보유, 10월 27일 비변사가 거북선 추가 건조를 소청해서 윤허, 거북선 7~8척 보유 추정
1597년 2월 7일 선조가 판옥선과 거북선 건조 전교,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 120여 척과 거북선 전소
1599년 특수 전함 창선 25척 건조
1606년 선조 39년 12월 24일 거북선 5척 보유 보고 상소(충청 1척, 전라좌우수영 2척, 경상좌우수영 2척, 총 5척)
1610년~1611년 해추선 3척 건조(쾌속선, 연근해 어선의 모형)
1716년 숙종 42년 8월 24일 거북선 5척(『숙종실록』)
1744년 거북선 14척(『속대전』)
1795년 『이충무공전서』에 1795년식 거북선 기록(1592년식 원형 거북선과 상이한 모형)
1808년 거북선 30척(『만기요람』)
1895년 고종 32년 이전 삼도수군통제영 삼도수군 거북선 40여 척, 삼도수군 해체로 거북선을 더 이상 보유하지 않게 됨.
* 나대용(羅大用) 장군의 거북선 발명: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조선 기술자(造船技術者)로서, 거북선의 개발자이자 해추선(海鰌船, 쾌속선)과 창선(鎗船)의 개발자이기도 하다. 1583년 조선 선조(宣祖) 16년 무과 훈련원 별시 병과에 급제해서 군사 교관인 훈련원봉사를 6년간 역임하다가 사임하고, 낙향해서 고향 나주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10여년간 거북선 설계 및 제작을 연구했다. 조선 태종 적 서적에서 소개된 거북선을 참고했다고도 한다. 1413년 조선 태종 13년 2월 5일 『태종실록』에서 태종이 임진강 나루를 지날 때 거북선(龜船)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1415년 태종 15년 7월 16일 『태종실록』에서 좌대언 탁신(卓愼)이 거북선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이 있다. 이순신도 귀선(龜船)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왜군과의 해전을 대비해 미리 거북선을 나대용과 함께 건조했다. 왜구의 끊임없는 해상 침략은 조선군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고, 나대용 역시 이를 막을 방안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군 수군의 배는 출몰하는 왜군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군의 직접적인 해상 침투와 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배의 지붕을 덮는 거북선을 만들게 되었다.
거북선의 특징은 돌격선으로서 적진으로 돌격해서 적을 격파하고 대장선을 공격할 목적이었다. 전함 위에 바늘 달린 철갑 덮개를 씌운 거북이 형상을 띠며, 철갑 덮개로 왜군의 조총 공격을 방어하고 철갑 덮개에 바늘을 달아 왜군이 배 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거북선의 뱃머리는 용의 형상을 했고, 선미 꼬리는 거북꼬리 형상을 했다. 거북선의 좌우로 노가 16~24개 있고, 전후좌우로는 포가 포진해 있다.
나대용 장군은 1590년 고향 오륜마을 앞 방죽골에서 거북선을 처음 시험했고,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년 생~1598년 몰)을 만나 거북선 제작에 합의했다.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 군관(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 제작 책임자가 되어 거북선 건조를 개시했으며, 임진왜란 때 거북선 3쌍을 최초로 진수하고 임진왜란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다. 1592년 나대용은 유군장을 맡아 4월 12일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진수하고 발포 실험에 성공했다. 사천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참가했다. 옥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띄우고 발포가장(鉢浦假將)으로 참전해서 왜군 대선 2척을 격파했고, 사천 해전에 참전해서 왼쪽 허벅지에 화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때 이순신과 나대용 둘 다 부상을 당했는데, 이순신은 적탄에 부상을 당했고, 나대용은 왼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다. 나대용은 한산도 해전에 참전해서도 부상을 당했다. 사천 해전•당포 해전•선창 해전•당항포 해전•명량 해전•노량 해전 등 15회의 해전에 참전해서 공훈을 세웠고, 각종 전함과 무기를 스스로 개발했으며, 전투 지휘 능력도 탁월했다고 한다.
사천 해전에서 나대용과 이순신이 둘 다 부상을 당했다. 어떤 기록에서는 나대용이 왼쪽 허벅지에 화살 부상을 입었고, 이순신은 어깨에 탈환 부상을 입었다고 하며(「사천해전」, 『민족백과』), 어떤 기록에서는 나대용과 이순신이 각기 허벅지와 어깨에 적탄 부상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나대용이 거북선을 건조한 곳은 전남 여수 선소마을 조선소에서였다. 이 조선소는 고려 적부터 배를 건조했으며, 선소유적지에는 거북선을 만들던 시설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배를 수리하고 정박하는 군사 시설 굴강, 거북선을 정박시켜 묶어두던 계선주, 수군의 무기인 창칼을 주조하고 관리하던 풀뭇간과 세검정 등이 있다.
거북선의 등장은 임진왜란 등 각종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거북선의 성과가 높아짐에 따라 거북선의 건조 숫자가 증가하고 거북선의 크기도 날로 커졌다. 그러나 거북선의 기본 기능은 적군의 화살을 방어하는 수준으로 대포 포격을 막지는 못했으며, 빠르고 가볍게 돌진하는 돌격선으로 고안된 철갑 목선이었다. 후에는 비대해지는 거북선을 대신해 다시 돌격과 쾌속 능력을 갖춘 중형급 군함 창선(鎗船)이 나대용 장군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현재 거북선은 세계 해군 역사상 7대 명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목선인 동시에 철갑을 두른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도 불리고 있다.
최초의 거북선은 1592년 3월 27일 첫 발포 당시였으며, 임진왜란 초기 전라좌수영에서 건조한 첫 3척은 여수 망마산 선소 건조 본영 거북선, 고흥 방답진 건조 방답 거북선, 순천 건조 순천 거북선이다. 1595년 거북선은 5척이 있었고,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거북선이 7~8척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원형 거북선 설계도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1795년 정조 19년 『이충무공 전서』에 거북선 설계도가 수록되었지만,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원형 거북선 설계도와는 다르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 나대용 발명론과 나대용-이순신 공동 발명론이 있으며, 학자들에 따라 나대용 독자 개발이 아닌 이순신과의 협업에 의한 건조라는 설도 있다. 김영원의 주장에 따르면, 나대용이 무과 급제 후 훈련원봉사 6년을 마치고 낙향해서 10여년을 거북선 연구에 착수해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목재를 다듬고, 밤에는 사랑에서 거북선 설계도를 그리는 오랜 작업으로 나대용 생가 마을 앞 방죽골에서 거북선 시험선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1591년 나대용과 나치용이 이순신에게 거북선 설계도를 제시하고 거북선 건조에 대해 협의했으며, 1592년 4월 11일 거북선 3척을 진수해서 발포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 전후로 거북선 건조 책임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나대용의 금성 나 씨 선조 나유 대장군이 1274년 고려 충렬왕조 1월 일본 정벌 당시 전함 300척을 직접 건조했던 부부사였으며, 일본 정벌에 직접 참가했다는 이력으로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 나대용 장군의 창선(鎗船) 발명: 1599년 선조 32년 나대용 장군이 건조한 조선군 중형 군선으로서, 배의 사면에 창검을 촘촘히 꽂은 특수 군함이다. 이 군함은 조선 후기 중형 군함 방선(防船)이나 방패선(防牌船)의 모형이 되었다. 1600년 나대용 장군은 창선(鎗船) 25척을 건조했고, 1606년 선조 39년 12월 24일 선조(宣祖)에게 창선 개발을 상소로 보고했다. 1610년 광해군 2년 남해현령으로 있으면서 쾌속선의 일종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해서 건조했다.
* 나대용 장군 사당 소충사: 나대용 장군 사당 소충사에는 사당과 소충사 묘정비 그리고 나대용장군기념사업계획조감총도가 있다. 조감도에는 나대용장군상, 방죽골, 소충사, 과학관, 생가, 영산강변, 한옥관광마을 조성단지 등이 안내되어 있다.
* 나대용 장군 생가: 나대용 장군 생가는 전남 나주 문평면 오룡리 472번지에 소재한다. 원래 나대용 장군의 후손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나대용 장군 생가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앞면 4칸 옆면 1칸 본채와 별채로 되어 있으나, 별채는 소실되고, 본채도 무너지고 후에 초가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나대용 생가 부근에는 사당 소충사,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방죽골, 한옥마을 관광단지, 나대용 묘역, 나대용 장군 전적비, 나대용 거리 등 다양한 나대용 장군 유적들이 있고, 또한 인근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나대용 장군 생가가 있는 오룡리는 금성 나 씨 집성촌의 하나이며, 그 외에도 부근의 대도리 등 여러 마을들이 금성 나 씨 집성촌이다.
* 나주 방죽골 「물방개노래」: 나대용 장군의 생가 부근에 있던 방죽골에서는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시험 운행을 했다. 이 방죽골을 중심으로 구전되어 온 나주 방죽골의 「물방개노래」가 전해진다. 이 노래는 사실상 나대용 장군의 11대조 선조 고려 대장군 나유의 문중에서 시문으로 전해지는 구전 노래라고 한다. 금성 나 씨 13대손 나갑주가 제공한 가사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에 수록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일랑 하지 마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 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시고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끝>
* 사국(死國)의 군인 정신: 나대용 장군은 편지를 쓸 때 항시 “사국”(死國)이라고 적어 “국가를 위한 죽음”의 각오로 국가 안보에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 나대용과 이순신(李舜臣):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봉사를 수년간 마친 나대용은 종6품 주부로 있으면서 고향에서 거북선 건조의 꿈을 꾸고,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밤에는 초당의 벽에 거북선 그림을 그려 붙이며 거북선을 제작해 집 앞 방죽골에서 거북선을 띄우는 시험에 성공했다. 사촌 아우 나치용과 함께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에 합의하고 여수 조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해 1591년 완성했다. 1592년 3월 27일 첫 발포 및 4월 12일 진수 및 대포 발사에 성공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대용과 이순신의 만남이 계속되어, 나대용은 거북선 및 각종 전함과 무기의 제작 책임자가 되었다. 이순신과 나대용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군 수군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 7도를 순식간에 점령했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치는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행주 대첩으로 유명한 당시 도원수 권율(權慄)은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장군의 관계를 이순신은 나대용이 없었으면, 그런 무공을 세울 수 없었고, 나대용은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큰 이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실제로, 이순신은 나대용이 없었더라면, 그와 같이 왜란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고, 나대용도 이순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거북선을 건조해서 실전에 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대용은 이순신이 적탄에 전사할 때까지 거의 그의 유일한 동료 부관으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자 세계 해군 역사상 7대 명품으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나대용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조선 기술자가 되었다.
* 나대용과 나유(羅裕): 나대용 장군의 선조들은 금성 나 씨 가운데 고려 개국 일등 공신이자 금성태수였던 나총례 금성 나 씨 시조가 있고, 제주를 평정한 형부상서 나득황의 아들로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원나라를 원정한 나유 대장군이 있다. 금성태수 나총례는 나주의 해상왕으로서 나주 호족이자 나주 해상 세력으로 세력을 떨쳤고, 고려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형부상서 나득황의 아들 나유 장군은 삼별초의 난을 진압 토벌하고, 일본 정벌과 원나라 원정을 수행한 고려의 대장군이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군사학으로 화약 무기 전술을 습득한 고려 원수 나주 나 씨 5세손 나세(羅世) 장군은 고려말 수군 원수로 임명되어 왜군 방어에 크게 공헌했다. 재중(재원) 교포 2세라는 설도 있다. 나유 장군이 우리나라 조선(造船)의 선구자요 선조라면, 군함을 자체 설계하고 건조 제작하는 능력을 갖춘 나대용 장군은 우리나라 조선(造船)의 아버지이다.
* 나주학(羅州學)의 연구 대상: 나대용 장군의 거북선 발명과 건조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에서의 각종 해전 참전과 공훈은 역사적 연구 대상이자 나주학의 연구 대상이다. 거북선이 어떻게 발명되어 쓰였고,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나대용 장군의 해전 참전사가 우리나라 전란사에 끼친 영향과 기여에 대한 연구 등이 나주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나대용 장군 유적지를 한옥관광마을과 거북선 시험 터 그리고 과학박물관, 거북선 건조 조선소 등과 함께 나주 지역 문화 관광 자원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특히, 나대용 생가 마을 주변의 나세찬 유적지와 나계종 유적지를 한데 모아 역사 유적 관광화하는 프로그램도 가능하다. 현재는 2026년 나대용 탄신 470주년 기념 나대용 과학관 건립과 2025년 여수 조선소 선소 유적지 공원화 프로젝트가 시행 중이다.
* 전라도의 명칭: 995년 고려 성종 14년 현 전라북도의 전주 지역은 강남도(江南道)라고 불렸고, 현 전라남도의 나주 지역은 해양도(海陽道)라고 했다. 1018년 고려 현종 때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해 강남도의 전주와 해양도의 나주의 머리글자를 합해 전라도(全羅道)라고 했다.
나주(羅州)는 본래 백제 발라군 또는 발라현이었으며, 757년 신라 경덕왕 때 금산군 또는 금성군이라고 개칭되었다. 사실상, 현재의 충남 금산군이 당시에는 전라도 금산군이었다. 903년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에 나주라고 개칭했다. 999년 고려 성종 18년 진해군이라고 했고, 1018년 현종 9년 전라도 나주목으로 승격했다. 1981년 7월 1일~1985년 12월 31일 금성시로 개칭하다가, 1986년 1월 1일부로 나주시로 개칭되었다(김세곤 참조).
*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나대용 연구 성과: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나대용에 대해 검색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상식, 「임진왜란과 나대용 장군의 활약」, 『향토문화』 제32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13년. 3~19; 김희태, 「체암 나대용 장군 관련 자료와 고문서 해제―계미무과방목(1583), 포장가자교서(1611), 체암집 출판불허문서(1932)」, 『향토문화』 제42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23년. 114~154 등의 학술 연구 논문. 실록청, 「[고문서] 광해 2년(1610) 사헌부가 이욱의 체차를 청하고 청주목사와 남해현령의 교체를 청하니 들어주다」, 한국연구재단(NRF), 1610년; 윤평현, 「[이미지] 송재사」, 전남대, 한국연구재단(NRF), 2003년 등의 연구 보고서.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국역) 체암나대용장군실기』,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사무소, 1976년;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년; 나대용, 『국역체암나대용장군실기』,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1976년;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체암 나선생 행적』, 광주일보사, 1983년; 나찬현, 『체암공행적』, 발행자 미상, 1932년; 이황, 『(퇴계 선생이 엮은) 옛사람들의 마음 닦기: 고경중마방』, 학자원, 2019년; 나경식, 『체암 나선생 행적』,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1983년 등의 단행본이 있다. <끝> <1차 2024년 1월 15일; 수정 2024년 1월 27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김세곤,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나주시청 홈페이지, 7월 1일~12월 1일, 74회 연재; 「나대용」, 『민족백과』; 「나대용」, 『위키백과』;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김현우, 「나대용 장군 생가•소충사」, 『임진왜란의 흔적』; 「나대용 생가 및 묘소」, 『민족백과』; 「거북선」, 『과목별 학습백과 사회탐구 초등』; 「SS-069 나대용」, 『위키백과』; 「창선」, 『민족백과』; 염철현, 「조선 제일의 선박 건조(建造) 엔지니어, 나대용」, brunchstory; 참마음, 「나대용,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건조하다」, 『충무공 이순신 발자취』, 네이버 블로그; 인문학콘텐츠연구소, 「우리가 기억했어야 할 이름들 9. 나대용」, brunchstory; 도라이바, [스크랩] 「거북선 만든 나대용 장군」, 『모형 범선 제작기/1592 창제 귀선-거북선』, tistory 블로그; 정도혁 기자, 「‘임진란 영웅’ 나대용 장군 추모제」, 『남도일보』, 2012-04-20; 「사천해전」, 『민족백과』;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