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경에는 역설적인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 받는 자보다 - 주는 자가 복이 있다
=> 잔치 집 가는 것보다 - 초상 집 가는 자가 지혜롭다
=> 심령이 부자인 사람이 아니라 =>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 웃는 자가 아니라 => 우는 자가 복이 있다
현대 신앙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IQ (지능지수)는 높은데 EQ (감정지수)가 낮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마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는 커지고 커져서 아는 것은 많은데 감정은 매 마르고 매 말라서 아무리 슬픈 일을 듣고 보아도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울어 보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영적인 애통을 말합니다.
영적인 애통은 가난한 마음에서 옵니다.
어느 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심령속을 들여다 본 순간 하나님앞에 내놓을 의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추하고 더러운 욕심과 죄악뿐인 것을 발견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 할 때 이 사람은 심한 충격을 받습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푹 주져 앉아 두 다리를 쭉 펴고는 조용히 속으로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싸매고 가슴을 치며 옷을 찢으며 먼지를 날리며 우는 것입니다.
이 애통은 하나님의 빛나고 높은 거룩한 보좌앞에서 더럽고 추하고 악취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자만이 우는 영적인 애통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너야 말로 인생의 가장 깊은 진짜 문제를 발견한 사람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네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너의 위로가 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7:15이하를 보면 바울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죄는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 죄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죄를 보는 자만이 애통합니다. 이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8:9-14을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면 대조적입니다
첫째 보는 것이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봅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기의 죄를 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둘째 보는 것이 다르니까 기도 내용도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일이 없습니다. 용서받을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기가 지은 죄를 보고 애통해 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둘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보고 자기 의를 자랑하다가 죄를 회개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기 죄를 보고 통회 자복하며 회개함으로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죄인 즉 의인"이 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훈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다가 "아직도 죄인"이 되지 말고 세리처럼 자기 죄를 보며 애통함으로 "용서받은 죄인 즉 의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똑 같습니다.
세상에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의만 보고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사람, 아니 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지적해도 변명하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니 눈물 흘릴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리처럼 날마다 자신의 죄악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무릎만 꿇으면 자신의 죄가 보이고 애통하는 마음과 함께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봅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로 범벅이 되는 것입니다.
애통과 후회는 다릅니다
누구나 자신의 지은 죄를 후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허물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것이 애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애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살하고 말았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뒤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했습니다. 그 때 뒤돌아서 자신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칩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가룟유다와 똑같이 양심에 가책을 받고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 죄를 용서받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애통은 하나님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그 때 흘리는 눈물이 회개의 눈물입니다.
다윗이 범죄합니다. 부하의 아내를 뺏어다 자기 아내를 삼고 충성된 부하인 그 남편을 죽이고 6개월을 지나는데 다윗의 마음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때의 마음의 상태를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32:3-5).
다윗은 밤마다 눈물로 침상의 메트레스를 적십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6:6).
이렇게 애통하며 회개한 다윗은 그 후 평생 이성문제에 깨끗합니다. 애통이 수반되는 회개 다시는 동일한 죄악을 범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서도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은 애통하는 회개, 가슴을 찢는 회개가 아닙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끊어지지 않는 죄악이 있습니까? 통회하며 자복하고 눈물로 회개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그 죄악으로 끊어지는 자유함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