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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러시아 바이칼호수
러시아인들의 성격을 한마디로 묶어서 말하기는 힘들다.
130 ~ 180 여 다인종이 모여 살기에 도시나 지역마다 특징이 다르고 성격이 다양하다.
내가 경험한 도시 사람들의 성격을 나열하고자 한다.
러시아인들의 성격중 공통적인 것부터 나열하면
1. 통치자에 순종적이다.
러시아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이 너무 무뢰하고 거칠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논리에 맞게 차근차근 설명하여 이해가 되면 수긍하는 사람들이다.
잘못을 했으면 자아비판을 받는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사과하지 않고 강하게 보이는
러시아 사람들은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도 단순한 사람들이다.
러시아 남자들을 마피아처럼 보는데 세계에서 가장 순둥이가 러시아남자다.
황제에 순종하면서 살아온 러시아 사람들은 상대가 확실이 상관이면 고개를 숙인다.
1) 2016년 러시아 중부도시 옴스크 도시설립 300주년 기념축제의 총감독을 맡았다.
축제때 매일 3번가량 공연을 했기에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챔버오케스트라가 필요했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는 예술총감독인 지휘자가 있고 필하모니 총감독이 있다.
또 챔버 오케스트라역시 감독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많은 만남을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100명의 오케스트라에는 지휘자가 있고 또 자존심이 있을텐데도 나에게 결정권을 맡겼다.
한국같으면 당연히 오케스트라의 책임자인 지휘자나 문화예술회관 관장이 프로그램이나
솔리스트를 결정하려고 할텐데 그들은 게으르다고 느낄만큼 답을 주지않고
어떤 프로그램을 할 것이며 어떤 솔리스트를 초청할 것인지 자꾸 나에게 떠넘겼다.
나는 이사람들이 나에게 협조를 않는 줄 오해하기도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총 책임자인 내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는데 그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진행이 늦어진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한국 솔리스트를 개막연주에 초대했고
점심과 오후에 이루어지는 공연에도 내가 원하는 솔리스트와 프로그램으로 완성했다.
여름에 관객이 올까 걱정했지만 나는 확신있게 밀어부쳤고 축제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2) 축제때는 음악회외에도
마스터클래스와 음악콩쿨을 진행하기위하여 많은 연습실과 강당등이 필요했다.
예술대학교와 전문대학 또 제1, 제2 음악학교 교장을 불러모아서 회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예슬들어서 내가 뭘 물어보면 "당신이 결정하면 될 일을 왜? 우리에게 물어보냐는 식으로
나를 처다 보았다.
국제 콩쿨이기에 많은 심사위원을 모셨는데 러시아 심사위원이 많다보니 지나친 결과도 나왔다.
어떤 파트에는 한국입상자는 없고 러시아쪽 입상자가 많아서 한국 참가자들의 불만이 나왔기에
모든 참가자를 2차대회로 올려서 2차대회에서 결선을 하여 한국 입상자가 생기도록 배려하는
것 까지 가능했다.
러시아는 겉으로는 불평하지만 심사위원장이나 총감독 등 책임자의 말에 순종하는 경향이 있다.
3) 2005년 타타르스탄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한국순회공연때의 일이다.
당시 러시아어가 부족했던 나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첼로단원) 올가를 통역으로 지목했다.
그러자 총감독 카딤은 "한국에서 모든 문제를 올가를 통하여 지휘자께 보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이가 많거나 실력이 좋은 첼로 수석도 아닌 올가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바로 실권자로 바뀌었다. 평상시에는 4번째 자리에서 조용히 지내던 올가에게 모두가 순종하는 것이었다.
총감독 카딤이 한국에서는 올가에게 물어보라는 한 마디만 했는데도 바로 바뀌는 곳이 러시아다.
4) 러시아인들은 융통성은 없지만 자기가 맡은 일은 머리 굴리지 않고 열심히 책임을 완수한다.
우리학교 수위실을 관리하는 사람은 나의 지시를 받고 또 일을 돕은 소피아나 드미트리다.
코로나 바이러서 때문에 소피아는 수위실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라고 통보했다.
나으 지인이 물건을 전달하기위하여 수위실에 도착했지만 수위는 그들을 학교내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소피아가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라고 지시했기에 그들은 죽어라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사장이 출근할때도 담배를 꼬라물고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직업의 귀천은 없지만 자기가 맡은 일은 우직하고 충실히 실행한다.
내가 그들보다 직급이 높지만 수위는 나의 말을 듣기보다는 지시를 받은 소피아말을 듣는다.
5) 러시아는 직장이나 학교의 모든 결정권은 한사람에 집중되어있다.
우리학교의 총장은 종일 결제에 사인하느라 바쁘다.
학교의 잔잔한 돈을 사용하는 것이나 일을 결정하는 것은 총장만이 결정한다.
아무리 직원들이 안된다는 것도 총장 한 마디면 바로 실행한다.
야쿠티아 국립 오페라극장 단원들의 월급은 천차만별이다.
이들의 월급을 올리거나 보너스를 결정하는 것은 오페라극장장이다.
그렇다고 러시아 사람들은 극장장에게 숙이지 않으며 잘못된 것은 조목조목 따진다.
공산주의 하에서 교육받은 세대는 노동자들이 뭉쳐서 잘못된 것을 따지는데는 선수다.
오래전 일이다.
러시아에서는 비자를 받기전에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외국인은 결과가 늦게 나온다.
그래서 나는 미리 병원장을 잘아는 사람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마치자 담당의사는 3일뒤에 오라고 하였다.
내가 극장 지휘자기에 3일뒤에 또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힘드니 지금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의사는 완강하게 규정을 들먹이면서 안된다고 하였다.
하는수 없이 뱡원장의 지인이 병원장을 찾아갔고 나는 문앞에 앉아 있었다.
병원장을 만나고 온 지인과 다시 들어가서 얘기했더니 규정을 들먹이면서 망설였다.
병원장께 전화하더니 언제 그랬나는 듯이 잠시후에 바로 결과서류를 만들어주었다.
6) 러시아는 한국처럼 시간이 지나면 진급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한번 입사하면 거의
그 자리에서 평생 같은 일을 한다.
만일 진급을 하려면 실력을 인정받아서 발탁되거나 다른 직급의 자리로 직장을 옮겨야한다.
그러다보면 예전 자신의 상급자가 하급자로 자리가 바뀌기도 하는 일은 흔하다.
예를 들어서 문화부 장관하던 사람이 잘린후에 교육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에서 노는 것 보다는 차관이라도 해서 월급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내친구중 한명은 군수를 하다가 공화국 의원까지 했는데 지금은 의원 보좌관을 하고있다.
7) 푸틴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할 수있는 배경은 황제에 순종하는 민족성 때문이다.
8) 러시아를 대표하는 마린스키 극장은 4개다.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극장과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추진한 현대식의 극장과 음악회장
또 블라디보스톡에 세워진 마린스키극장이 있다.
영국과 독일은 물론이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일정은 정말 살인적이다.
2019년 11월10일 경 대구콘서트하우스와 서울 예술의 전당 에서 두번의 공연을 연이어서 했는데
그는 이전에 중국과 일본에서 매일같이 공연을 소화했다.
일본 도쿄에서만 거의 10번의 공연을 소화했다.
여름에는 하루에 3번의 공연을 지휘하기도 하고 어떤때는 도시를 옮겨다니면서 두번의 공연을
지휘하기도 한다.
이렇게 바쁜 발레리 게르기에프지만 그는 4개 공연장의 모든 프로그램과 솔리스트를 컨트롤 하고있다. 물론 블라디보스톡에는 성악가 출신의 감독이 있지만 중요한것은 그녀가 결정하지 못한다.
예술 총감독이라고 음악만 하지않고 중요한 돈의 결정까지도 그의 싸인을 거쳐야 집행된다.
워낙 사인할 것들이 많아서 새벽4까지 사무를 보기도 한다.
가끔 오케스트라 연습이 새벽2시까지 이어지자 일부 단원들이 차가 없다고 불평했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다른 단체보다 월급을 많이 주겠냐? 자동차를 사라고 ...
러시아 사람들은 한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황제시스템에 순종하는 순한 사람들이다.
9) 러시아는 손님이 아니고 주인이 왕이다.
약20년 전 한국사람들이 모피가계에 들어가서 비싼 모피를 만지고 또 입으보려고 했더니
"나가라고" 밀어내었다.
왜 비싼 남의 옷을 허락도 없이 입어보냐는 것이다.
물건이 귀했던 공산주의 시대때 가계주인은 어렵게 구한 물건을 생색을 내면서 팔았다.
돈이 있다고 물건을 살 수 없는 시대였기에 손님은 주인에게 물건이 들어오면 나에게 팔아달라고 사정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에 식당문이 닫혀있기에 두드렸더니 "직원들 밥먹고 영업하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10) 러시아는 서비스정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서비스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공산주의 시대 때는 다수가 국영이기에 일을 많이 한다고 특별히 월급을 많이 주지 않았다.
오래전의 일이다.
늦은 밤 호텔 카운트에서 이것 저것 물어보았더니 직원은 방이 없으니 나가라고 하였다.
나는 불쾌해서 "금방 있다던 방이 왜 없냐고 따졌더니" 왜 귀찮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업원들은 기본적인 일만 하지 굳이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모스크바 한국기업을 가보면 한국인들은 밤늦도록 근무를 하지만
러시아 직원들은 퇴근 10분전에 퇴근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땡하면 문을 나선다.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자본주의 물이 들지않은 러시아 사람들은 시간만 때우면 끝이다.
그래서 푸틴 대통령은 취임하자 마자 기업을 압수한 후에 인터넷에 밝고 세상물정을 아는
젊은 기업인에게 맡겼다. 그래도 이정도 인데 옛날에는 오죽 했겠는가 ...
11) 직업에 귀천이 없다.
총장이나 시장이 출근하는데도 수위는 경례를 하거나 조금도 굽신 거리지 않는다.
공산주의 시대때는 길에서 공사하는 사람이 / 의사나 교수와 월급이 똑 같았다.
아니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수위들이 교수들에게 굽신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 적응된 나는 처음에는 수위를 건방지게 보았는데
러시아에 적응이 되고보니 건방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편해졌다.
우리학교 학생들도 교수들께 존대는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전혀 굽신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계급에 의해 지시가 떨어지면 맡은 일은 충길히 실행한다.
융통성 없이 시키는 그것만 ...
12)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교양이다.
밥먹을때나 일상생활에서 돈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요즘 돈을 추구하는 문화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물건값을 깍지 않는다. - 이것을 자존심이라 생각한다.
저축을 하지 않는다. - 공산주의 시대때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15년 이상만 일하면 연금이 나왔고 여자들은 50살이 되면 연금이 나왔다.
항공료와 교통비가 저렴했고 기업에서 가족의 여행경비를 부담하기에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물결이 닥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돈이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공상주의 시대때는 월급이 거의 평준화 되었으나 요즘 푸틴 대통령의 친구들 중에는
푸틴대통령의 공식적인 연봉을 하루에 벌어들이는 사장들이 많이 있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국회의원 월급의 몇십배에 해당하는 부수입을 버는 사람이 많이있다.
그런데도 부정을 눈감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러시아 사람들이 다수다.
13) 공산주의 시스템의 잔재.
공산주의 시대때에는 기업이 어려우면 정부가 알아서 지원해주었다.
그러니 굳이 튀면서까지 열심히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휴가는 엄청많다.
러시아에서는
직원이 10명이면 휴가나 병가로 쉬는 사람이 많으니까 5명만 일한다고 생각하면 맞다.
야쿠티아 공화국에서 운영하는 "야쿠티아 항공"은 항공료가 비싸다.
4시간20분 거리인(필리핀30만원) 야쿠츠크 -인천 구간 항공료가 약70만원이다.
지방구간의 경우 고작 1시간 30분 거리인 순타르 구간이 왕복 50만원이다.
이렇게 항공료가 비싼대도 적자인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하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이다.
항공사에 전화하면 자주 듣는 말이 "담당자가 휴가" 란다.
그럼 그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가야하는데 휴가가면 끝이다.
나처럼 매년 티켓을 100장 이상 구입하면 VIP 고객이지만 전혀 특별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도리어 "너네들이 우리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식이다.
항공기 앞좌석이 4줄이나 비어있기에 누가 앉는지 보았더니 교대 승무원이 편하게 가려고 비워두었다. 승객들을 편하게 배려할 생각은 아예없고 직원이 한줄에 1명씩 발뻣고 편히 가려고한다.
식사가 나오면 교대할 승무원을 먼저 주고 한참후에 승객에게 배달한다.
가끔 뒷줄이 비어서 앉으려고 하면 안된다고 제지한다.
나중에 보면 승무원이 누워서 자고있었다.
더 황당한것은 항공기가 곧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메라는 멘트가 나오는데도
교대 승무원은 두다리 쭉뻣고 자고있었다.
다행히 요즘은 그래도 조금 나아졌지만 공산주의 사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비수기때는 이벤트를 하거나 단체할인을 하여서 승객을 채워야하지만 ...
항공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장이나 고위직은 휴가나 모스크바출장(?) 으로 얼굴보기 힘들다.
아시아나나 대한항공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장면이지만 적자 항공사에서는 흔히 보는 풍경이다.
2. 모스크바 사람들
파크롭스키극장(지금은 볼쇼이극장에 속함) 수석객원지휘자로 여러해 근무했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스크바 사람들은 건방져보이고 돈밖에 모른다.
그러나 내가 힘만 있으면 가장 다루기가 쉬운 사람들이다.
모스크바 노인들은 거의가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많다.
그러나 서방의 물질문명이 들어오면서 젊은 층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조차도 "모스코비치"라고 무시할 정도로 인간성이 부족하다.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모랄(도덕성)이 무너짐으로 말로하는 것은 잘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정식으로 문서로 공문화 된 약속은 지킨다.
모스크바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쉽다.
내가 힘있고 돈이 있으면 주위에 사람을 모을 수 있고 일을 진행 하기가 쉽다.
특히 모스크바 사람들은 힘이나 돈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니까.
3. 상트 페테르 부르그
2005년부터 매년 순회공연을 다녔던 도시다.
모스크바 보다는 눈치가 없지만 마음에 여유가 있고
아름다운 건물들 만큼이나 예술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푸쉬킨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작가들의 발자취를 긍지로 삼으면서 교양을 중시하고있다.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인 푸틴의 도움으로 건물들은 수리되었고 예술가들의 삶도 나아졌다.
엘친 대통령이 돈이 없어서 중단했던 예술지원을 푸틴은 세계최고로 만들라고 적극 지원했다.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남부 카프카즈 출신으로 인간적인 면을 풍긴다.
그의 메니저먼트 능력을 통하여 마린스키 극장은 세게적으로 성장했다.
예산은(1200억) 모스크바 볼쇼이극장(1.800억)에 밀리지만 연 1.000회 이상의 공연을 만들어서
볼쇼이극장의 명성을 넘어서려고 하고있다.
4. 니즈니 노브고로드(고리키)
융통성이 없고 의심이 많으며 정말 순수하지만 마음이 닫혀있었다.
2001년부터 3년간 오페라.발레극장에서 근무했고
다시 학교로 들어가서 러시아음악을 배웠던 곳이다.
공산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레닌의 친구 막심고리키의 고향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시대때는 고리키라고 불렀다.
(레닌이 죽자 "상트.페테르부르그"를 혁명의 아버지 레닌에게 바치자고 하여
도시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바꾸었듯이 러시아 많은 도시는 공산혁명에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공산혁명 이전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리키의 생가였던 건물(문화원)에서 시립챔버 오케스트라와 연습했고
또 오페라극장에서 지휘하고 콘스바토리에서 살았기에 많은 경험을 했다.
당시는 미국에서 6개월 러시아와 유럽에서 6개월을 살았기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모든 것이 풍족한 미국에 살다가 러시아로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힐듯이 갑갑했다.
그러나 음악이 좋아서 버텼는데 3년이 지나자 러시아가 편안해 지기 시작했다.
역시 행복은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한 것이구나 체험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가서 밤기차로 12시간을(고작450km) 이동했는데
고리키 사람들은 무뚝뚝하게 웃지않았고 도시는 색깔이 우중충 하였다.
학교 건물도 금이가고 낡았었는데 중국 유학생들이 몰리면서 그들의 돈으로 단장이 되었고
지금은 5시간이면 도착하는 빠른 기차도 다닌다.
공산주의 시대때 고리키는 군사도시였기에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특히 외국인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내가 공항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누가 급히 달려오더니 제지하는 것을 보면서 우스웠다.
공산주의 망령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지만 의식은 쉽게 바뀌지가 않았다.
군사도시였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었던 잔재가 남아있었다.
경찰들은 먹고살기가 힘든지 수시로 지갑검사를 하고 돈을 뜯어가려고 설쳤다.
하루는 택시를 탓는데 기사가 나를 힐끔 보더니 자기를 모르겠냐고 하였다.
자세히 보니 오페라극장 트럼펫주자 였는데, 극장 월급으로는 살수 없기에 근무후에는
바순 단원과 2교대로 택시 영업을 한다고 하였다.
2000년 경 많은 음악선생들이 먹고살기 위하여
학교를 떠나 돈이되는 시장으로가서 장사를 하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은 아름다운 볼가강과 아카강도 그때는 정말 슬플만큼 우중충하고 회색적이었다.
막심 고리키가 어떻게 가난을 절절하게 잘 표현해 놨는지는 이곳을 보면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는 한때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볼가 강가에서 비에젖은 빵을 먹으면서 어렵게 살았었다.
그러나 15년 후에 찾아간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자본주의 물로 덮여있었고 확 밝아져 있었다.
이런 우중충하고 닫혀있는 도시에도 음악적으로는 장점은 있었다.
모스크바나 개방된 도시의 음악들은 많이 서구화 되었는데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음악은
옛날 러시아적인 느낌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5. 카잔
카잔은 징기스칸이 러시아를 지배할때 사령부로 중심이되는 도시였다.
터키와 언어가 비슷하고 또 형제처럼 교류하는 러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이슬람공화국이며
동양적인 성품에 그런대로 약속을 잘 지켰다.
음식이 나오는데 남자를 먼저 챙겼고(러시아는 모계사회)
오랫동안 서양인과 섞이면서 외모가 많이 변했지만 여자들의 성품이 동양적이었다.
미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매일 비교되는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왠지 정이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누가 타타르스탄공화국의 수도 카잔으로 가면 조건이 좋을 것이라면서 추천하였다.
밤기차를 타고 새벽5시경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필하모니 총감독과 지휘자 등
여러사람이 플랫폼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잠시라도 쉬라면서 당시로서는 괜찮았던 타타르스탄 호텔까지 잡아주었다.
호텔에서 잠시 쉬고 차량을 보내주어서 필하모니 홀로 갔다.
100여명의 단원들이 나 혼자 앉혀놓고 1시간 동안 연주를 해준후에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단원들은 밝았고 또 젊은 단원이 많았으며 특히 현악기가 생기가 있었다.
당연히 마음을 열고 함께 하자고 손을 잡았다.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페라.발레극장에서 3년을 일했지만 나는 단원들 이름을 거의 모른다.
그런데 카잔단원들은 거의 많은 단원들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맘에 들었다.
여름에는 단원들의 별장에서 함께 지냈고 심지어는 단원의 자녀가 결혼할때 초대받아서
밤늦도록 파티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CD를 만들었고 순회공연도 많이 했으며 약 150회 이상의 공연을 지휘하였다.
그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고 상대를 배려하는 동양적인 성품이 남아있었다.
하루는 피아노교수인 플로라가 집으로 나를 초대하였다.
당시에 교수들의 월급이 100$ 였는대 플로라는 150$의 상을 차려서 나를 대접했다.
나중에는 단원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친하게 되었다.
6.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고랴인들이 2만5천명이나 살고있는 러시아 남부의 따스하고 여유로운 도시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처가 많은 도시다.
카잔에서 알고지내는 영감(지휘자)이 볼고그라드 음악극장 예술총감독으로 갈것 같은데
그럼 나를 지휘자로 초대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2006년 나는 카잔과 병행하면서 기차로 25시간이 걸리는
카잔에서 볼고그라드를 오가면서 지휘를 하였다.
거기에서 솔리스트 볼고그라드를 맡게되고 2008년에는 전설적인 지휘자 에두아르드 세로프의
초청으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도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볼고그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단원들이 보통 거친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불만이 있나 생각했는데 어떤 지휘자는 지휘도 못해보고 쫓겨 나기도 했단다.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는 2차대전때 러시아가 독일 히틀러와 전쟁을 할때 당시 스탈린그라드
인구보다 많은 200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의 도시다.
그래서 매년 2월이나 5월에는 러시아 명사들이 몰려와서 전쟁의 승리를 자축한다.
공산주의시대가 끝났지만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고 개성이 강한 도시다.
특히 데모를 하거나 불만을 표시할때는 그냥 일방통행으로 거친말을 쏟아낸다.
특히 여자들이 고집이 세고 가정에서도 결정권를 주도하고 있다.
7. 크라스노 다르와 로스톱 나돈. 사라토프 등 남부도시
로스톱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후에 세벽2시 기차를 타고 찾은 남부는 푸근했다.
날씨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친절했다.
푸쉬킨과 톨스토이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불휴의 명작들을 집필한 남부 도시의 사람들은
무엇에 좆기지 않고 느긋하다.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렀더니
남부에서는 정시에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것은 실례고 조금 늦게 가는 것이 예의란다.
모스크바 볼쇼이 오페라.발레극장 연출자인 올가의 추천으로
크라스노다르 오페라극장 지휘를 가게 되었다.
돈이 없어서 수리를 못한 낡은 건물들을 보면서 도시의 첫인상은 가난해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 남부 사람들 답게 개방적이고 사람들의 성품이 순하다.
날씨가 따스하니까 고려인들도 많이 살고있고 중.북쪽 사람들보다 경제적인 수준은 낮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삶이 여유롭다.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기에 상대의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있었다.
시간관염이 부족한데 반대로 생각하면 관대하고 여유로웠다.
8. 부리야트족(울란우데)
세계에서 한국인과 가장 DNA가 비슷한 민족이 부리야트족이란다.
맞다.
옛날 한국 60 ~70년 대처럼 미신을 많이 믿고 불교공화국인 것만 봐도 수긍이간다.
러시아 인들은 잔머리를 잘 쓸줄 모르는데 부리야트인들은 한국처럼 잔머리를 사용한다.
음식도 타타르스탄처럼 남자부터 챙겨주고 얼굴생김이 비슷하니까 살다보면 한국같았다.
그런데 뒤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심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꼴보기 싫고 정남이가 떨어질 정도로 무뢰하게 상대를 대할때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은 앞에서 쏘아붙인 것이 전부요 뒤끝이 없다.
심지어 러시아인들은 동료가 바람을 피워도 주변에 고자질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리야트인들은 뒤끝이 있고 가끔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편가르기도 한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느끼기 힘든 정을 느낄만큼 챙겨주기도 하지만 머리를 굴려야한다.
돈양계인 부리야트인들이 러시아에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서양인이 가지지 못한 눈치때문인것 같다.
9. 야쿠티아(사하)
내가 만났던 세계인들중 가장 순수한 민족인것 같다.
부리야트인들처럼 바이칼호수쪽에서 살던 야쿠티아인들은 징기스칸의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해서
레나강을 타고 정착한 사람들이다.
배가 다닐때는 따스했겠지만 이들은 영하50도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래전 야쿠티아인들은 호수를 끼고 가족들이 모여 살았다.
호수에서 물을 길러사용하고 고기가 필요하면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야쿠티아 언어에는 고맙다거나 남을 흘뜯는 욕이 없다.
날씨가 춥다보니까 표현에 서툴고 신앞에 한 없이 작아지면서 겸손하게 살았다.
야쿠티아인들은 잘난척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하지 않는다.
산에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은 신에게 건방지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일 거칠게 큰소리로 설치다가는 신이 "이놈은 건강이 넘치네" 라고 생각하여 건강을 뺏어간다고
생각한다.
남한의 30배인 넓은 땅에 고작 100만명이 살고있는 삭막한 곳이다.
어떤 곳은 몇백 km를 가도 집한채 볼수없는 곳이 많다.
좋게 생각하면 청정하고 조용하고
인터넷이나 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으니까 세상 걱정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수도시설이 없고 또 도로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야쿠티아인들은 서로 도운다.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싸우면 모두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야쿠티아인들은 조금 부족하고 불만이 있어도 자신을 죽이고 참는다.
심지어는 원수가 찾아와도 3일은 재워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순리를 받아들이고 자연에 순종하면서 큰 욕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첫댓글 좋은환경에서 살아야 정서도 안정되고 행복한데 지금 생활하고 계신 야쿠티아란 도시가 좋은환경인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에 대해 조금 알게 되고 그곳을 오래동안 여행을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