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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코 6,45-52)
When they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thought it was a ghost and cried out.
They had all seen him and were terrified.
But at onc e he spoke with them,
“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말씀의 초대
사랑의 삶을 시작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은총으로 함께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신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 된다(제1독서). 누구도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가능한 일이다. 그분은 인간 상식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을 받으면 누구라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다. 신앙의 힘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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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가십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유령이 걸어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힘을 받으면 누구나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의 힘을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야고보 씨는 술을 마시면 자주 필름이 끊어집니다. 그때마다 가족을 괴롭혔고, 이웃에게 창피를 당했습니다. 몇 번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클리닉’을 찾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침내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103위 성인 호칭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내심 끌렸습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정하고 103일을 기도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술을 끊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가족을 괴롭히지 않게 해 달라고 눈물로 청했습니다.
이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마시고 싶을 때는 순교자들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을 ‘은총’은 하게 합니다. 세상은 할 수 없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
아무나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위험 속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던 일, 알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던 일. 이러한 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모두가 기적이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인 줄 착각합니다. 스승의 능력을 망각한 것이지요. 우리 역시 행복할 때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관계가 꼬여 갈 때에는, 하늘에 불평하고 인연을 원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약한 마음을 아셨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화내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의식을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다시 일어서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물 위를 걷는 행위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잡아 주지 않으시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분의 힘을 얻어야만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행복의 근본은 믿음에 있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인데, 이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직후의 일입니다.
먼저 바라볼 것은 빵의 기적이 일어난 후의 사건 현장 모습 내지 분위기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기적 사건의 여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모습, 제자들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 등을 잘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시고 군중도 돌려보내시는 모습을 본 후, 혼자 기도하려고 산에 가신 모습을 뒤쫓아가 봅니다. 예수님 모습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예수님의 심장소리가 들려오는지, 깊은 내면의 고요 속에 머물며 미세한 진동들을 감지해 봤으면 합니다.
그러곤 맞바람에 노를 젓느라 애먹고 있는 제자들 모습 내지 분위기와 호수 위를 걸어 그쪽으로 가시는 예수님 모습을 대조적으로 바라봅니다. 새벽녘 호수 분위기도 더불어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때도 다른 여타 복음관상과 마찬가지입니다만, 그저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 한 장면 보듯 바라봐선 부족합니다. 깊은 관심과 사랑 속에 흠뻑 젖어든 채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고 했는데, 성경에 이처럼 한두 마디로 정리되어 있는 듯해 보인다 해서 너무 거기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기도 중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대로 맡겨둔 채 깨어 있으면서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를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이끄시면서, 신선하면서도 힘에 넘친 물 한 잔 먹여 주실 터입니다.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헤르만 헤세)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류충희 신부-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려고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때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욥기 9장 8절에서는 하느님 한 분만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어가시니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목격하고서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렸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인간의
보편적 생의 상황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이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세상은 어둠에 싸여 있고 풍파는 점점 거세져갑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두려움에 떨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극한 상황을 맞아 하소연해도 아니 계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언제고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 이건복 신부-
어느 날 제가 있는 성지의 발전을 위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는 형제님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친구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밤마다 헛것을 보며 힘들어 한다며 집을 축복해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주 멋있게 잘 지은 집이었고 세속적으로도 좋은 집터라고 합니다. 마음이 넉넉한 집주인이었지만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신자가 아니기에 오해하지 않도록 가톨릭에서 하는 집 축복 예식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 뒤 간략하게 집 축복을 해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함께 사십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후에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안부를 물어보았더니, 이제는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받았습니다. 아직 그분한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이 있다거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 신앙의 힘으로 편안해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제가 자신의 집을 방문해 기도했다는 생각에 용기는 얻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꿈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뛰어넘어 살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보다 더 큰 용기를 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은 우리를 항상 평화롭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정연동신부-
티베트의 어느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헉헉대며 살아갑니다. 뭔가 하나라도 더 갖추기 위해서 참으로 바쁘게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의 입에서마저 바쁘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삶이라는 풍랑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노라 자기가 살 길을 찾기에 바빴지, 차분히 주위를 돌아다볼 여유는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실되이 내 모습도 못 보고, 또한 가감 없이 너의 모습도 못 보고. 더불어 하느님도 못 보고 ……. 그저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만 바빴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상대방의 모습은 잊혀지기 때문입니다.
여럿이 함께 나눌 때, 삶의 가쁜 호흡은 편안하고 잔잔한 긴 호흡으로 바뀝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여유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바쁠수록, 힘들수록 옆을 보고 뒤를 돌아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풍랑 위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유령으로 보입니까?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양승국신부-
<새벽 4시에도 달려오는 사람>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배경을 "바다"라고 썼지만 사실 갈릴래아 호수였습니다. 호수를 횡단하는 여객선을 타고가다 보면 바다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모가 방대한 호수이지요.
예수님 시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될 정도로 다양한 개체의 수자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 다른 강으로부터 물이 계속 유입되는가 하면 요르단 강을 통해 물을 흘려보내다보니 수질 역시 양호했습니다.
이렇게 큰 호수다보니 강풍이라도 불어오면 큰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궂은 날씨에 역풍이라도 만나게 되면 작은 고깃배를 타고 작업하던 어부들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곤 했습니다.
해가 떨어진 상태에서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를 지나가던 제자들은 거센 역풍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려가며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마침 육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배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했습니다.
몇몇 제자들은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두려움마저 생겨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역풍을 만나 우왕좌왕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깜짝 놀라 "유령이다"며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릅니다.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다가오시는 스승 예수님을 보고 기뻐서 소리를 질러야하는데, 정반대로 두려움에 휩싸여 "유령이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던 제자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 행복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비명까지 질러가며 두려워했던 웃기는 상황이 전개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제자들은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구세주, 아버지와의 일치 안에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혹시라도 공포의 대상,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감시하는 두려움의 대상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새벽 4시에도 달려와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세파에 지친 우리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수시로 다가오는 다양한 스트레스, 두려움, 번민, 절박한 상황 앞에서 고통을 느끼실 때 마다 이토록 감미로운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며칠 전 메일함을 열어 보는데, 제 동창 신부가 보낸 메일이 있더군요. 평소에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동창이 왜 저한테 메일을 보냈나하고서 열어보는 순간 ‘아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종 상대방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컴퓨터 안에 있는 메일 주소로 바이러스를 첨부하여 무작위로 발송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도 저는 제 컴퓨터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이럴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여러 겹으로 바이러스에 침투되지 않도록 장치를 해 놓았거든요. 대신 그 동창 신부의 집에 가서 그 컴퓨터에 들어 있는 바이러스를 다 잡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컴퓨터를 켰는데 이상하게도 제 컴퓨터가 많이 느립니다. 맞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들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당장 오늘 새벽에 있을 인터넷 방송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한 새벽 묵상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걱정입니다. 시계를 보니 미사 시작 전 30분. 저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깨끗하게 지우고 윈도우즈부터 다시 깔자.”
전문적인 용어로 포맷(Format)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처음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의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용했던 프로그램들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심각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지요.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성당에 들어가기 전으로,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서 포맷(Format)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화가 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 컴퓨터에는 데이터 파일이 많아서 하드디스크를 몇 개 붙여서 쓰고 있는데, 실수로 중요한 파일들이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를 포맷한 것입니다. 그 결과 새벽 묵상 글에서 성우들이 읽어주는 성경자료를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제까지 찍었던 사진자료들, 그밖에 중요한 데이터 파일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텐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서두르다보니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저처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요.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지요. 그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어제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만해도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이다’를 외칩니다.
성경은 이러한 제자를 향해 이렇게 설명해주지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바로 스승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으며, 이런 일은 유령이나 할 수 있다고 섣부르게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섣부르게 판단하고,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릴 때면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일이 꼬이거나 고통과 시련이 커지면 커질수록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이 커집니다.
어렵고 힘들 때, 조금만 더 주님을 자세히 보려고 해보십시오. 바로 이때는 주님께서 안 계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빨리 오시기 위해서 물 위로 걷고 계신 것이며, 이를 보고서 ‘유령이다’라고 말하며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기.
빠다킹신부
참다운 카리스마
-이중섭 신부-
예수님이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정치적으로 큰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과 카이사리아, 갈릴래아에 주둔한 로마군인은 약 3,500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려 했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권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관행은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팀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즈음 신자들은
권위적인 성직자보다는 친절하고 꾸밈이 없는 성직자를 더 좋아합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마태 20,28 참조) 그 말씀 그대로 사신 분입니다. 내 능력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면 집착이 되고 죄가 됩니다. 내 능력과 재능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카리스마입니다. 그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데 써야 합니다.
완고한 마음
-주영길 신부-
가끔 이런 성찰을 해본다. ‘나는 과연 누구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진지하게 고려하며 사는가?’ 타인의 마음에 대한 고려란 흔히 말하는 타협이 아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를 배려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럴 마음이 없다. 이제껏 혼자만의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무엇을 먹을까?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다. 어떻게 처리할까? 내가 이미 결정한 대로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을 어찌할까? 거룩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된다. 암덩이가 커가듯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완고함’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와 함께 고집만 남는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이미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좋게 표현하면 인생철학이 뚜렷한 것이다. 일생을 살아온 ‘노하우’라 할까? 몸의 노화가 시작되면 눈이 침침해진다.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는 증거다. 또 귀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껏 자신이 생각해 온 바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완고한 마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전한다.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유령이라 생각하고 아우성을 쳤다.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보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6,52)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청소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기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작동이 더디니 설명하다 말고 ‘어찌 이 간단한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세요?’ 하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남 얘기할 때가 아니다. 나도 내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여러 기능을 소화하지 못해 단순히 통화만 하거나 짧은 문자만 보낼 뿐이다. 타인의 완고함은 허물처럼 보이고, 왜 내 완고함은 당연하게 생각할까?
당신과 함께라면...
-오상선신부-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오늘 복음은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누렸던 제자들의 행복과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의 혼란과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할 때면
때론 알아듣기 힘들고 너무도 우리 힘에 벅찬 것을
요구하신다고 여겨지는 버거움은 있지만
그래도 늘 행복하고 안전하였습니다.
오늘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수많은 병자들과 말씀에 주린 사람들을 돌보아주고나서
피로에 지친 듯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먼저 가게 하고
당신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피곤해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통해 일을 해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깊이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일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신바람이 났을 지도 모릅니다.
얼씨구나 좋다고 했는데
사실
주님과 함께 있지 않는 상황은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풍랑의 어려움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이 세상살이는 거친 풍파와도 같이 우리를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고 요청만 하시면
언제나 달려오셔서
<나다, 힘을 내어라, 두려워할 것 없다!>고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가 우리의 낙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수많은 유혹으로 우리를 낚아채려 해도
그것이 화려해 보여도
결국 그 속에는 수많은 올가미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는 주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그리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 풍파가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입니다.
내 삶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
다시 한번 나의 주님을 불러봅시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만 하신다면
이 삶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당신 집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오이다.
당신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낙이로소이다. 아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머리맡에 향기로운 꽃 한 묶음>
-양승국신부-
살다보면 가끔씩 칠흑 같은 첩첩산중의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도 모르는 채, 목적지도 없이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가엾습니다. 스산한 바람마저 불어오면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되지요.
그 안쓰러운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정히 이야기합니다. "애야,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안심하거라. 내가 있잖니?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께."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군" 하며 안심할 것입니다.
홀로 혹독한 병고를 겪으며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옆에 누가 항상 있어줘도 괴로운 판국에 물 한잔 떠다줄 사람조차 한 명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서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마음도 수 백 번 먹어보지요.
그 순간 머리맡에 향기 그윽한 꽃 한 묶음 놓아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위로의 인사를 던집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힘내세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환자는 "이분 성의를 봐서라도 좀 더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파에 지친 제자들을 향해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십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얼마나 다정다감한 말씀인지요.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인지요. 얼마나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인지요.
발표 된지 꽤 오래된 노래 가운데 변진섭이란 가수가 부른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란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대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 힘에 겨워서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질 때
아주 작고 약한 힘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요.
따뜻함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줄 께요.
때론 내가 혼자뿐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죠.
생각하면 그 어느 순간에서도 하늘만은 같이 있죠
아주 작고 약한 힘이라도 내겐 큰 힘 되지요
내가 울 때 그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주님 공현 후 수요일
- 김창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뭍에 계실 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는 동안 겪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어려움의 상황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즉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고 예수님은 육지에 계셨습니다. 즉 이것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끼는 외로움의 상태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데다가 마침 맞바람까지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두 번째 어려움은 맞바람 때문에 주님께 가려고 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는데 제자들이 만난 ‘맞바람’은 성령과 반대되는 바람으로서 악령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맞바람을 만났다는 것은 악령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여러 유혹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제자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후수 저편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악령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방해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혼자 버려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복음은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위험에 처해있는 제자들을 혼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늘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주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라도 그리고 모두가 나를 버렸다고 느낄 때라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제자들을 위해서 나타나시듯이 우리에게도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자들이 맞바람을 맞고 호수 한 가운데에서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손을 내미셨듯이 우리의 삶 안에서도 힘들고 고통을 겪을 때 주님께 기도로써 청하십시오. 우리가 청하지 않아서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할 뿐이지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을 살아가자.
기도와 말씀의 놀라움 -박상대신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 있었다. 한 끼의 식사를 이렇게 성대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가득 찼을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군중은 또 어떠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에 대한 어떤 반응이나 효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예수를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고 한다.(요한 6,14-15) 그런 다음에 요한복음도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요한 6,17-21) 마르코복음은 요한복음과 달리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 다른 어떤 효과가 개입되기 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셨고, 모여 있던 군중을 흩어 돌려보내셨다. 우리가 복음서 전체에서 늘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기적을 입은 사람들을 그 현장에 두지 않고 바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 게다가 자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태 9,22; 15,28; 마르 5,34; 10,52; 루가 7,50; 8,48; 17,19; 18,42 등)고 하시면서 기적의 원인을 예수님 자신보다 사람 편에 두셨다. 이런 점들은 기적의 성취가 예수님 편에서 행하시는 일방적인 행위라기보다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쌍방적인 행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즉,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적(奇蹟)과 일상(日常)의 조화를 의도하고 계신 것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기적을 놓고 이를 체험한 측이나 이를 베푼 측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는 감정은 만족감과 달콤함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쾌감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일상(日常)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의 주도권을 잡은 예수에게도, 기적을 체험하는 인간에게도 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기적(奇蹟)은 상식을 벗어난 일상이탈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흩어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보내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꽤하시는 것이다. 기적과 일상을 특히 잘 조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로 발견된다. 첫째는 기도(祈禱)이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베푼 스스로의 성취감과 달콤함에서 벗어나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기도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곧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풍을 만나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다. "나다"(에고 에이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기계시적 말씀이며(출애 3,14), 하느님 현존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나다"라는 하느님 현존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기적 속에서 일상의 평정을 찾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고 "나다"는 말씀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없이는 아무도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바랄 수 없으며, 이를 체험할 수도 없다.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도록 하실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신앙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행하는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신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될 수 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누구나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3,1-2). 참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함께 계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전혀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은 누구든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지 못하였으며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 아는 대로, 깨닫는 대로, 느낀 대로 살아간다. 알거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살아갈 수는 없다. 앎, 깨달음, 체험은 삶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참선을 하고 면벽수련을 하며 수도를 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통해 깊은 체험을 함으로써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함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실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를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온전히 드러났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며 사셨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셨다(요한 10,38).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셨으며(필립 2,8)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요한 10,37).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느님과 일치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계셨기에 지상에서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을 살아가신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편 23,4)고 노래한 시인처럼 두려움도 걱정도 없다. 그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로 살아간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또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살아가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두려움과 걱정을 벗어던지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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