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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은혜 받는 저녁 됩시다.
아멘
은혜 받는 저녁 됩시다.
아멘 어제 봄나들이 너무 잘 다녀온 것 같죠? 못 가신 분들은 좀 서운하시겠지만 날씨가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르네요. 그렇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다녀왔습니다. 또 기회가 될 때 아마 이번 주말이 꽃이 피크이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춘천은 어디 멀리 안 나가도 꽃 구경을 할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번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100명을 대상으로 지금 우리나라가 지키고 있는 국경일 기념일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애들이 어느 정도 국경일에 대한 개념이 있는가를 알아보려고요.
여러분들 4대 국경일이 혹시 뭔지 아시나요? 여러분들도 가물가물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네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제천절 그다음에 제헌절 다음에 그다음에 개천절 다시 이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는 3.1절 광복절 제헌절 개천절. 네 이렇게 네 가지가 나라의 큰 4대 그러한 국경일입니다. 네네네네. 그렇죠 그렇죠 절자 절자가 들어가는 정리를 딱 해 주셨습니다.
네 그거는 우리 국경일로 만들어야 할 성탄절도 부활절도 절이고 그렇게 지혜롭게 만드셨군요. 네 그렇죠 네 아무튼 기독교 선배님들이 잘 만드셨어요. 그렇죠 네
근데 이거를 아이들 100명 중에 몇 명 정도가 맞췄을 것 같아요 맞췄을 거 아니 4개를 다 맞춘 사람이 몇 명 정도 될 것 같아요 한 명보다는 조금 더 있었는데요. 4명 딱 4%만 요 네 가지를 알고 있었는데 이제 네 가지를 마친 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그 네 가지가 무슨 의미냐라는 걸 이제 물어보는 거예요.
3.1절이 뭐야 광복절이 뭐야? 근데 애들이 대부분 이 국경일에 대한 개념이 무슨 날로 알고 있을까요? 노는 날 또 태극기 다는 날 이 정도 수준으로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러면 뭔 날이냐 노는 날인데 왜 노는 날이냐 그걸 따져봤더니 개천절을 애들이 뭘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한번 여러분들 머릿속에 생각해 보세요. 이제 노는 날인데 태극기 다는 날인데 그날 어떤 날로 기억하고 있을까?
애들의 이미지 속에 6학년 아이들 개천절 개천절 이미지 애들은요. 사람하고 곰하고 결혼한 날 이렇게 애들이 알더라는 거예요.
또 제헌절 그렇죠 헌법을 만드는 날인데 아이들은 이날이 군인의 명복을 비는 날로 의외로 알고 있더라는 거예요. 군인들의 명복을 비는 날로 알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개념이 굉장히 지금 흔들리고 있죠. 그러니까 심각한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의 지금 초등학교 6학년 지금 1학년짜리한테 물어본 게 아니에요. 6학년짜리 아이들이 4% 정도만 우리나라의 국가의 중요한 4대 국경일을 알고 있는데 그 의미조차도 헷갈리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왜 이런 절기를 만들어놓고 우리가 쉬고 또 그날을 기념할까요? 나라적으로도 이날은 기억하자는 날이잖아요. 그쵸 이 나라라고 하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라고 하는 걸 기억하는 날이고 또 이제 이 기념을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를 나아가자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렇죠 근데 의외로 아이들이요. 이 국경일보다 잘 알고 있는 날이 있습니다. 어린이날 어린이날은 당연히 알겠죠 네 아이들이 80% 이상이 알고 있는 날들이 있었어요. 광복절 그런 쪽이 아니고요. 아이들의 의미에 아주 이유 있는 날 14 데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어요? 14 데이. 네 맞습니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블랙데이 링데이 로즈데이 뭔지도 잘 모르는 저도 잘 모르는 저도 몇 가지만 알고 있는데 그런 거는 오히려 애들이 뭐 하는 날로 알고 있더라는 거예요.
근데 그 숫자가 80% 그러니까 이게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걱정스럽죠. 우리나라의 존재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어떤 역사가 있는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그 존재의 의미가 이러다가는 정말 점점 희미해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우리 기독교인들도요. 기독교의 절기가 있습니다. 그렇죠 네 우리 기독교의 절기 큰 절기는 뭘까요? 부활절, 성탄절, 추수 감사절, 맥주 감사절 절자가 들어가네요. 그렇죠? 네 그래요. 크게 따지면 뭐 이런 성령 강림절도 있을 거고요. 다양한 절기들이 있는데 그러한 절기들이 있는 이유가 뭔지 지금 또 앞에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명확해지죠. 우리는 얼마 전에 부활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일부러 저 현수막을 안 띄었어요. 게을러서 안 뜬 게 아닙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좀 한 번 더 점검해 보려고 해요. 우리는 부활 주일 예배를 1년에 한 번씩 드려요. 근데 특히 부활주일은 사순절이라고 하는 절기를 통해서 준비하고 또 특히 마지막 고난주간을 통해서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근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게 그냥 어떤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절기 정도 수준으로 그냥 이렇게 쑥 지나가버리는 그런 모습들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인들이 대하는 이 부활절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가 있어요. 첫 번째 태도 먼저는 어제의 사건으로 부활절을 기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건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해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부활하신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어제의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의 나하고는 별로 연관성이 없어요. 그러니까 기념은 하는데 과거의 사건으로 기념은 하는데 현재의 나와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나의 삶에는 영향력을 별로 주지 못해요. 그냥 그저 어제의 부활절입니다.
두 번째 부활절을 대하는 사람의 부류 중에 한 부류는 미래 내일의 부활절로 그래서 내일의 사건 소망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장차 죽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이 부활 주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다가 주님처럼 부활해서 계속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근데 이것도 역시 내일의 부활절이기 때문에 오늘의 삶과는 연결점이 좀 희미합니다. 내일의 부활절로 그쳐요.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어떤 부활절일까요? 어제 내일이 더 낫습니다. 오늘 그렇죠 오늘 현재 오늘의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의 삶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합니다.그 주님이 나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고 그리고 그 주님을 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삶의 변화를 겪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어떤 부활절이 되어야 할까요? 건강한 부활절은 오늘의 부활절이 건강한 절기입니다. 우리가 주일 학교 때부터 열심히 듣고 배워온 그냥 과거형으로 부활을 기념하는 정도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냥 단지 이 땅에서는 고통 가운데 견디고 버티다가 나중에 죽은 이후에 부활하는 그런 소망만 가지고 부활절을 부활을 믿는 그 믿음 안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활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 본문의 주인공은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인물이죠. 이 사도바울이 어떻게 부활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갔는지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16절에 보니까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이 배경이 어떻게 되냐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는 중에 베레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이 이 바울이 베레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을 쫓아와서 죽이려고 막 추격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식을 들은 믿음의 형제들이 이 바울을 이제 아덴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피신시켜요.
아직 신라와 디모데 그러니까 동행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베레아에 있는 상태이고 바울이 먼저 아덴으로 왔기 때문에 아덴에서 이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참 선교여행이 전도 여행이 진행 중인 상황이고요. 여러 가지 박해가 지금 막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추적하는 추격하는 그런 상황이에요.
근데 원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원래 바울은 박해하던 사람이었어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교회를 괴롭히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심지어 지금은 외국까지 돌아다니면서 사방 군데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180도 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 사건을 아주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 장면 바울은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박해자였던 사람이 이제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요.
근데 여러분 여기서 퀘스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여러분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우리가 이렇게 전체적으로 맥락으로 볼 때 예수님이 신약 성경에 등장하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3년의 공생애를 하고 있는 동안인가요? 아니죠?
그렇죠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 가운데 머무셨는데 그때 혹시 바울을 만나셨나요? 아니에요 그렇죠 지금 바울을 만난 그 시점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이후입니다. 그렇죠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해요.
맨 나중 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부활의 증인이다. 자기가 그래서 부활의 증인이고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바울이.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만났는데 그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명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이 그냥 승천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거예요.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시죠.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시죠? 그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세요. 바울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사도 바울을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버렸어요.
오늘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있는 거 혹시 들어보셨나요? 네 대만 주제 네 제가 딱 20일 전에 있었던 장소가 딱 그 화롄이거든. 화롄 지진이 난 데가 화롄인데 선교사님이 오늘 아침에 긴급히 기도 좀 하고 올리더라고요. 화렌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지진이 났는데 저희가 딱 비전트립을 갔다 온 장소가 딱 그 화롄이라는 지역이었어요. 그 선교사님이 사진을 몇 장 보냈는데 이렇게 건물이 이렇게 기울어진 사진. 근데 그 건물이 우리가 야시장 구경하고 우리 어떤 목사님이 성경책 대만 성경책을 사려고 갔던 서점이 있던 건물이래요. 그리고 우리가 이제 그 화롄에 굉장히 계곡이 유명하거든요. 타이루거라고 하는 그 계곡이 유명한데 그 계곡도 우리가 차 타고 이렇게 구경을 1시간 정도 했던 계곡이거든요. 얼마나 큰지 막 정말 이렇게 화려해가지고 그 장엄한 모습에 이렇게 눌릴 정도로 그 산이 이게 7.4의 지진이 나니까 흔들리면서 이게 산사태가 막 나고 다리가 끊기고 막 그랬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갔을 때도 이게 겨울 추웠다가 더웠다가 할 때 이렇게 낙석이 떨어져가지고 낙석 때문에 차가 한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낙석을 치우고 가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지금 20일 전에 우리가 거기를 갔다 왔는데 우리가 만약에 지금 이 시간 거기 있었으면 어땠을까라고 하는 아찔한 마음이 막 들더라고요.
또 한편으로는 이제 지금 그곳에 계시는 선교사님과 또 그곳에 있는 열악한 환경 가운데 지금 여진이 아침에 8시 정도에 7.4의 지진이 있고 난 이후에 여진이 계속 있대요. 지금 근데 여진도 조그만 게 아니에요. 제일 큰 거는 6.5인가 6.5는 엄청난 겁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5 4 막 이 정도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건물이 움직이는 지진이 지금 계속 일어나고 있대요. 근데 이게 최소 2~3일 정도 간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금 저희가 갔던 교회에는 피해가 없다고 일단 소식은 들었고요.
또 성도들도 아직은 크게 그리고 보니까 이게 이 화롄 지역만 그런 게 아니라 이게 대만이라는 땅덩이가 아주 우리나라 정도도 안 돼 경상도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 큰 지진에 전체가 다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기차 타고 2시간 반을 간 타이베이라고 하는 수도도 움직였는데 막 휘청휘청 그랬더라고요.
근데 거기는 정말 준비가 잘 돼 있었어요. 제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만약에 그런 지진이 일어났으면 어땠을까라고 아찔하더라고요. 근데 왜 그렇게 잘 대비가 됐을까라고 하는 걸 제가 이렇게 오늘 찾아봤는데 1999년 25년 전에 대만의 이 정도의 지진이 있었대요. 그때 2천 명 이상 사람들이 죽고 또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답니다. 물론 이번에도 지금 피해가 계속 지금 늘어나고 있다고 이야기는 듣게 되는데 아무튼 여러분들 기도해 주실 내용인 것 같아요.
근데 여러분 저도 이 사실을 이렇게 생각하면서 야 생과 사는 한 차이밖에 없잖아요. 만약에 20일 전에 제가 거기 있을 때 그런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가 그 타이르고 계곡을 차 타고 가고 있는데 만약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춘천의 8개 교회는 이제 담임 목사님을 다시 청빙해야 되는 상황이 됐을 것 같아요. 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끔찍하더라. 저도 제가 깜짝 놀랐어요. 왜 그러냐면 제가 그 곳을 너무 자세히 보고 제가 돌아다녔던 장소였는데 갑자기 근데 25년 동안 이런 큰 시즌이 없었는데 이게 그러니까 이례적인 일이긴 하죠.
근데 평상시에도 잘 자란 지진은 자주 나는 곳이라 선교사님이 그러더라고요. 혹시 지진이 조금 나면 그냥 여기 사람들은 지진이 났구나 이 정도지 별로 이렇게 요동도 안 한대요.자기도 처음에는 선교 와가지고 지진 나면 막 겁나가지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고 막 뭐 이렇게 했는데 지금 지진 나면 1분 딱 이러면 딱 지나가고 이렇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지금 불과 20일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겠어요? 그렇죠. 우리는 그래서 연약한 존재임을 늘 기억하고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래서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또 삶의 어떤 불안함을 느끼고 또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연약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요. 부활의 능력으로 이 공포 두려움 좌절,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 줄 믿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미 있기에 우리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임을 우리는 믿고 나아가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미 그 영생을 맛보고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어요. 이 땅 가운데 그냥 불행하게 살아가다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우리는 이 땅 가운데 부활하신 하나님을 만난 그 하나님의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십시오. 온 성의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아덴이라고 하는 성이요. 도시 곳곳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막 화가 치인 거예요. 아덴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 본산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리스 신화는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을 비롯해서 12신이 또 그 외에 수많은 신들이 인간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은 이야기들 아닙니까?
그곳에는 온갖 재단들이 있었고요. 또 셀 수 없는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혹시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는데 그 신에 대한 숭배가 제외될까 봐 빠질까 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재단까지도 만들어 놨다는 거예요. 얼마나 종교성들이 강한 사람들입니까? 이 모습을 지켜본 사도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신명기에 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이 마음속에서 막 강하게 붙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그 분노가 그 마음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왜 이 사도바울이 이렇게 됐어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을 우리도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바뀌어지는 겁니다. 세상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의 눈으로 바라봤던 나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부활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톨스토이가 자신이 어떻게 세 사람이 됐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제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제가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으며 제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들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의 눈에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으며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오늘의 부활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화된 삶이 작지만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주님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함으로 인함이라
당시에 에피크로스 학자들, 또 스토학파의 사람들, 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과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분들이 아마 학교 다니면서도 배웠을 법한 그 철학자로 유명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막 조롱하잖아요. 웃음거리로 여기고 미친 소리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3절 14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오,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 사도 바울은요.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부일듯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제 산수유, 또 요즘 진달래, 개나리, 이제 요즘 이제 춘천에 피고 있는 꽃들이죠.
아마 이번 주말에는 그 꽃들이 가득해지고 벚꽃, 목련, 철쭉 다양한 봄의 꽃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겁니다. 근데 여러분 봄철에 피는 꽃들의 특징이 뭔지 아시나요? 봄철에 피는 꽃 식물을 잘하시는 분들 먼저 제일 먼저 꽃이 먼저 펴요.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꽃이 먼저 피고 그리고 잎이 나와요. 그래서 그 화사함이 또 더한 것 같아요. 마른 가지 같았던 그 나무에서 갑자기 꽃이 확 피는 그 모습이 여러분 봄꽃을 보면서 우리는 아 봄이 오는구나 봄바람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요. 성령의 바람을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우리의 심령이 사도바울과 같이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 옆에는요 결코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어요. 우상이 가득한 땅이었고 그가 말하는 말에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이었고, 또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었던 그런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일평생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부활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어제의 부활 주일로 또 그냥 끝내지 않기를 원합니다. 먼 미래에 우리가 이루게 될 완전한 부활을 생각하며 끝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삶의 변화 가운데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우리 이 코로나를 뚫어버리고 요즘 사람들의 그 강퍅해진 마음을 뚫어버리고 정말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