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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연의 동인지, 시집 평론시조동인 <오늘> 25집
가산바위2013. 11. 11. 21:51
소백산 자락길의 푸른 정기
김우연
회장님, 시조동인 <오늘>의 제25집 『푸른 화석』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1989년 7월에 창립하여 연간집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꾸준히 발간해 오심을 축하드립니다. 안동․영주 지역의 쟁쟁한 등단 시인 7명이 ‘오늘’을 창립하시어 ‘오늘의 문학으로서 시조의 참모습을 구현하다는 뜻’을 모으시고 초심을 잃지 않으시어 한국 시조단에서도 동인으로서 큰 나무가 되어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제25집 『푸른 화석』을 어느 시조집보다 내용이 알차고 느낀 바가 많으며 두고 두고 생각날 작품들이라서 나름대로 그 감상을 적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는 회원 10명의 100편의 작품이 싣고 있습니다. 김학준, 박영교, 조영일, 권혁모, 강인순, 이동백, 정광영, 김명희, 김복희, 김희선, 이상 10명의 회원님들의 모두 이름만 들어도 우리 시조단에서도 좋은 시조를 써 오신 분들임을 알 수 있어 앞으로도 무궁히 발전하리라 기대됩니다.
이번 25집 『푸른 화석』을 살펴보면
1. 시의 원천인 소백산
2. 어버이 사랑
3. 현실 문제
4. 죽음
5. 자연에서의 깨달음
6. 순수 서정
위의 6가지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 소백산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김학준님의 ‘소백산 자락길’ 및 시작 노트, 권혁모님의 ‘소백산에서 만난 산수국꽃’, ‘달밭골을 지나며’ 강인순님의 ‘자락길에서’, 이동백님의 ‘소백산 자락길에서’ 및 시작노트, 정광영님의 ‘산’, 김명희님의 시작노트, 김복희님의 인삼23, 단풍 5, 김희선님의 ‘동행-소백산 기행’ 등 8명의 시인들이 9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오늘>의 동인들의 끝없는 시의 원천이 소백산의 푸른 정기 가슴에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생애 흐르는 물과 나무가 되었으면
나그네에게 푸르른 그늘을 만들어 쉬어 가게 하고, 이름 모를 산새들에게 깃을 접을 수 있는 안식을 내어주고, 맑은 계곡물로 흘러 지친 영혼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어머니 흰 칫맛자락 달밭골 계곡물처럼.
-김학준, ‘소백산 자락길’ 전문
김학준님은 시작 노트에서 “소백산 자락길, 아름다운 달밭골에서 인생을 껴안아 본다.”고 하면서 큰 산에 올라 크고 높고 넓은 산을 닮고자 삶의 의미를 찾고 살고 있음을 위 시를 통해서 더욱 잘 알 수 있다.
산에 오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산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뭇 생명들을 위해 안식처가 되고, 생명수가 되고, 마음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종장에서 끝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키며 승화시키고 있다. 사설시조로서 소백산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오를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오를수록 세상은
있는 듯 없는 듯
첫울음 솟는 물길
아득한 높이에 와서
한 모금
적신 가슴에도
터질 듯한 꽃망울.
쉽게 허락지 않아도
둘만의 푸른 자유
내 쉼터 같은 계곡에는
봄 가고 여름 가고
새 소리
속세를 끊는데
허물없는 사이여.
-권혁모, ‘달밭골을 지나며’ 전문
권혁모님은 약 30년 전에 눈 덮인 달밭[月田]골짜기를 처음 밟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제일 좋아하는 산길이라고 한다. 소백산 자락길이 개발되기 전에는 더욱 조용한 길이라서 권혁모 시인에게는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허락지 않아도/ 둘만의 푸른 자유// 내 쉼터 같은 계곡에는/ 봄 가고 겨울 가고// 새 소리/ 속세를 끊는데/ 허물 없는 사이여.//에서 세속의 먼지를 벗어난 순수 세계가 달밭골이며 그의 유토피아이며, 힐링의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는 속세에 살더라고 그의 가슴은 달밭골의 푸른 기운으로 가득하여 주변을 맑게 하는 산의 일부가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소백산에서 만난 산수국꽃’에서도 “저것들 숨은 눈 웃음 빗자루로 쓸어야지”, “가까이 귀 기울이면 풍금소리 들릴 듯”, “그런 꽃 마지막 한 송이 내 안에서 숨쉰다.”고 하고 있으니 소백산의 나무뿐만 아니라, 꽃이며 바위며, 바람이며, 달빛, 눈빛, 솔빛 등등 어느 하나 애정이 가지 않고, 어느 하나 가슴에 들어와 있지 않으랴.
첫사랑의 눈웃음이 이만큼 이었을까
설레이던 모든 것 그저 신비로운
지상에 때 묻지 않은 또 하나의 민낯
잠시 나를 잃고 물을 따라 흐른다
흐르면서 비워내는 거룩한 물의 몸짓
마침내 말문을 여는 싱그러운 세례(洗禮)
-강인순, ‘자락길에서’ 전문
위 작품은 한 장을 한 연으로 처리하여 여백을 많이 두고 있다. 소백산은 큰 산이라서 그 큰 감동을 말로 다 할 수 없어 여백을 두어 효과를 얻고 있다. 세상에 ‘첫사랑’만큼 순수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백산 자락길을 걸으며 첫사랑의 설렘처럼 무슨 말로 할 수 없을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지상에 때 묻지 않은 또 하나의 민낯”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민낯’은 여자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다. 위장하거나 가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본모습이요 진면목이다. 그래서 어떤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발견했을 때 시인은 “잠시 나를 잃고 물을 따라 흐른다”고 하였으니 자연과 일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겸손하게 물을 물로 보면서 “거룩한 물의 몸짓”이라 하였으니 산은 깨달음을 주는 영원한 스승이요, 영원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로 가슴 속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여름 해 종일
나무 썩은 등걸 위에서
벌레에게 먹히는
버섯이 너무 하얘
내 혼도 그리 하얗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채석강 바닷가에서
노을빛으로 나부끼던
낯선 여인의 머릿결 같은
소백의 자락길이어서
굽이져 오르는 발길
바람보다 가벼웠다.
키 낮은 벼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무심스레 내려다보는
나뭇잎 너무 푸르러
내 혼도 그리 푸르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이동백, ‘소백산 자락길에서’ 전문
소백산 자락길을 걸으며 벌레에게 온 몸을 내어주는 버섯을 보면서 “ 내 혼도 그리 하얗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고 하며 소백산 자락길에서 소유욕이 넘치는 세상에서 불행한 일들이 뉴스에서 끝없이 알리고 있는 세상에서 베푸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그래서 그는 끝내 벼랑의 푸른 나뭇잎처럼 “내 혼도 그리 푸르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고 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결의는 내강외유(內剛外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참 좋겠다 싶었다.”고 친근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산의 순수한 모습을 닮아서 조용한 목소리를 말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것이다.
종일 말도 않고 누워만 있던 산은
우리가 잠이 들면 학처럼 날개를 펴서
먼 우주 끝머리쯤을 갔다가 오곤 했다.
아주 옛날에는 그도 하나 신(神)이었다
우뚝 봉우리를 세워 사람들을 다스리고
가부좌 틀고 앉아서 햇살도 피워 올리는
요즘 세상 꼴에 마음이 상하다가도
기슭으로 번져오는 봄기운을 어쩌지 못해
기지개 쭉 한 번 펴고 도로 묵언에 잠긴다.
-정광영, ‘산’의 전문
위 작품에서 소백산이나 자락골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동인들이 경상북도 북부 안동, 영주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이라 소백산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본다.
김광섭의 ‘산’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도 있지만 새로운 작품이다. 시인은 “요즘 세상 꼴에 마음이 상하가도”라고 하여 산에다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이나 타락에 실망을 한다. 그러나 “봄기운을 어쩌지 못해”라고 하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기지개 쭉 한 번 펴고 도로 묵언에 잠긴다.”고 하며 산은 산의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
‘산’을 통해서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산의 ‘묵언’에 주목하고 싶다. 요즘은 말들이 많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된다면 세상은 큰 일 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관이 아닌 사람이 법관처럼 떠들고, 거짓이 참인 양 행세하는 것들이 많다. 저 큰 소백산에 눈이 쌓여도 끝내 봄이 오면 녹는다. 이 세상도 끝내는 진실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떠들기보다 저 산의 ‘묵언’을 생각할 일이다. 특히 미국산 소기기 반대처럼 거짓으로 잠시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끝내 거짓을 사과하였다. 그러나 거짓으로 인한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도 지금도 선동을 멈추지 않으니 국력만 낭비하고 있다. 아직도 3․15니 유신이니 하고 떠드는데 국민들은 그때 국민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각성할 일이다.
김명희님은 시작 노트에서 “달밭골의 바람 소리-수백 년 묵은 우람한 나무들, 우거진 숲이 나를 불렀다. 나는 벌써 그들의 품에 안겨 있었다”고 하면서 시를 쓰게 하는 원천이 소백산 정기임을 알 수 있다.
오곡이 무르익자
가슴에도
물이
든다
스치는 바람결이
상념을
치고 가자
저녁놀
그 불티가 옮겨
소백산이
활활
탄다.
-김복희, ‘단풍 5’ 전문
단형시조이다.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본다면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시인은 “소백산이/ 활활/ 탄다”며 평범하면서도 아주 실감 있는 표현을 하고 있다. “저녁놀/그 불티가 옮겨/”라고 독창적인 표현이 있어 종장을 살리고 있다. 이미 가슴에도 단풍의 물이 든 상태이니 자연의 경이 앞에 자연과 일체가 된 것이다.
영주 풍기는 인삼의 고장이다. ‘인삼 23’에는 인삼을 노래하고 있지만 인상이 영약이 되기까지는 “소백산 봄기운 뭉쳐 가지마다 이는 함성”이라고 하고 있어 김복희님의 가슴에는 소백산은 기운이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람한 나무들과 신명나는 휘모리장단
길 따라 함께 걷는 계곡물 지기(知己) 삼아
서로가
마주하는 삶
그 향기를 마신다.
당기고 밀어주며 함께 걷는 자락길
흐르는 땀방울도 흥겨움 더하는데
빠름도
느림도 없는
아름다운 이 동행.
-김희선, ‘동행-소백산 기행’ 전문
김희선님의 시들을 살펴보면 서경과 서정을 적절히 짜서 삶의 의미를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위 작품은 소제목처럼 ‘소백산 기행’의 흥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도 “빠름도/ 느림도 없는/ 아름다운 이 동행.//”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요즘 세상은 남과 이기기 위해 경쟁이 지나치다 못해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자살율도 매우 높은 나라인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소백산에 함께 드는 사람들과 나무며 물이며 향기를 마시면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위로하면서 동행하는 산행이야말로 행복한 삶 그 자체가 아니랴.
경쟁이 있어야 사회도 발전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쟁하는 것도 문제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아름다운 동행’을 체험하게 한다면 인성교육은 저절로 되리라 본다.
먼저 ‘소백산’과 관련하여 살펴본 결과 <오늘>의 동인들에게 ‘소백산’은 시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느꼈다. 한 마디로 소백산의 푸른 정기를 품고 사는 시인들이기에 산처럼 순수하여 심성이 곱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영원히 맑은 계곡물같이 <오늘>을 이어갈 것이라 믿는다.
2. 제25집 『푸른 화석』에서는 어버이(할머니 1편 포함)의 사랑에 대하여 8명의 시인들이 12편을 발표하고 있다.
그중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7편이다. 예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이 전해오는데 어머니의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끝없는 강물과 같은 것인데, <오늘>의 회원님들은 한결같이 소백산이 정기를 받은 효성이 지극한 분들임에 틀림없다. 이토록 어버이의 사랑을 애절히 노래하는 동인집을 어디 쉽게 볼 수 있는가.
나를 향해 무너진 탑이라 불러다오
모서리 깨어진 금
떨어져 나간 살점
어머니
온전한 내 몸 앞
부르고 싶은 대명사
숨 쉬고 또 쉬면서 살아온 살 냄새
내 속에 꼭꼭 숨겨운
당신의 그리움들
한겨울
얼음장 속에서 나는
그 숨결 소리 듣는다
아직도 숨이 붙은 주위 생명 앞에
살다가 그냥 가더라도
내 목소릴 간직한 후
모든 문
꼼꼼히 닫아걸고
진한 사람만 만나겠네.
-박영교, ‘물러나 앉으면서’ 전문
‘어머니’란 말보다 성스러운 말은 없을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효(孝)를 강조하고 있어, 도올 김용옥은 “생명의 원초적 충동은 리비도(libido)가 아니라 효(孝)이다. 이것은 자사의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가 이승의 사람이든 저승의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는 존재가 어머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어머니/ 온전한 내 몸 앞/ 부르고 싶은 대명사”라며 어머니를 성스러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것은 1연에서 “나를 향해 무너진 탑이라 불러다오”라고 하며 어머니의 존재를 ‘탑’이며 그것도 모서리가 깨어지고 떨어져 나간 ‘탑’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자식을 돌본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힘들 때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머니이다. 자식이 어머니가 되고나서야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한겨울/ 얼음장 속에서 나는/ 그 숨결소릴 듣는다”고 하고 있다. 어머니의 숨결소리와 살아온 살 냄새와 온갖 그리움들을 떠올리는 시인은 분명 효심이 지극한 효자이리라. 그래서 언젠가는 “모든 문/ 꼼꼼히 닫아걸고/ 진한 사람만 만나겠네.”라고 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성스럽고, 끝없는 사랑을 베푸는 존재인 ‘진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하고 순수함을 알 수 있다.
“대저 생(生)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모든 유기체의 운명이다. 죽게 되면 반드시 흙(土)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귀(鬼)라고 한다. 그러나 혼기(魂氣)는 하늘(天)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신(神)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귀(鬼)와 신(神)을 합하여 꼭 같이 제사지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왕의 가르침의 지극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말로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과거에는 이런 말을 모두 후대의 날조로 보았는데, 지금 간백자료발굴 이후에는 그런 방식으로 치지도외 할 수 없다.
유교에서 잘 쓰지 않는 용어인 귀신(鬼神)이 중용에는 “귀신(鬼神)의 덕(德)이 참으로 성대하도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귀신은 “고스트들이 아니라, 천지의 영험한 힘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생명적 우주의 약동하는 힘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박영교 시인의 어머님에 대한 생각은 시인의 가슴과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외에도 ‘걱정스럽다․2’에서는 옛날에 비해 천지개벽할 정도로 배 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세상인 요즘음에는 흔히 어머니의 옛날 고생을 잊혀버리기 쉬운데 “떨리는/ 그리움이 앉아/ 밤을 보내는/ 어머니 생각.”이라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또 “먼 길을 떠나면서/ 나뭇잎 떠는 소리 들린다// 귀뚜리 은실 푸는 뜰/ 릴케의 기도소리 들린다// 오늘밤/ 보름달 뜨면/ 어머니 기도 모습/ 환하다.”(‘가을 빛 하루․2’ 전문)에서는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 밤에 귀뚜라미 울음을 들으면서 릴케의 기도소리가 연상되고, ‘오늘밤 보름달 뜨면 어머니 기도 모습 환하다.’며 이 세상 천지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밝게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버님 심고 가신 나무에 감이 익는다
푸른 가을 하늘에 붉은 낙관 하나
이승을 마감한 증표 선명하게 남겼다
한 생애 시장끼 짙은 목청 뜨거운 울림
가지 높이 매달고 붉게 익어가는
가을날 노을 타는 감 눈부시게 빛난다.
-조영일, ‘감’ 전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의 정경은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일 것이다. 감은 조율이시(棗栗梨柿)의 하나로 곶감을 만들어서 제상에도 올리던 과일이다. 가장 우리 가까이 있으면서도 소중히 여겨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분가하여 한 가정을 이룰 때 집안에도 감나무를 한 두 그루를 반드시 심었다.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요즘은 배고픔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비만이 걱정이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들이부모님 세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는 소설처럼 웬만큼 나이든 사람들은 어릴 때 ‘끼니’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자랐다. 세대 차이라는 말이 있고, 먹는 이야기하면 유치한 것 같지만 먹는 것만큼 소중한 일도 없을 것이다.
“푸른 가을 하늘에 붉은 낙관 하나”라고 선명한 이미지를 살린 점이 돋보인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선명한 증표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도 “ 한 생애 시장끼 짙은 목청 뜨거운 울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흔히 그것을 잊어버리고 노동자 천국을 외치면서 연봉 1억이 가까운 귀족노조들이 아직도 봉급 인상을 연례적으로 하고 있는 곳도 있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위 시인은 그러한 감정을 다 정제하고 “가지 높이 매달고 붉게 익어가는” 감을 보면서 아버지의 높은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위 작품은 서경과 서정이 잘 직조된 절창으로 우리 시조단의 가을 하늘에도 아름답게 오래 오래 붉은 감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시가 나오기까지는 시인의 평소 원만한 성품이 바탕이 된 것으로 부모님의 사랑이 몸에 배어 있다가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진정한 효란 자식이 일방적으로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기에 감응하여 발하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라고 한다. 위 작품은 진정한 효가 무엇인가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진정한 효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내 마음을 달기 전에 그대 맘 먼저 달았다.
가끔은 흔들리다 옮겨지는 무게 중심
날마다 삶의 가늠대 또 다른 추를 단다.
추 없는 저울 하나 그게 쓸모 있냐고
가을 볕 아래 어머니 손대중이 손때 묻은 노끈에
걸린 무쇠 저울추보다 더없이 고르다는 걸 철든 뒤 알게 되고
한 줌씩 더 집어넣는 무게만큼 사랑이란 걸
아무리 달아보아도 가늠할 수 없는 무엇
-강인순, ‘저울’ 전문
이 작품은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엮어서 한 편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시작 노트에서 사설시조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평시조와 다른 사설시조의 파격의 멋과 맛을 느끼고 싶다고 하였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요즘 세상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수없이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하다. 남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도 심리학을 알아야 한다고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로버트 치알디니)는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4가지 상(相)을 벗어나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이 중에서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인상(人相)이다. 다른 뭇 생명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생각,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부자라는 생각, 병약한 사람들에 비해 건강하다는 생각 등등 비교하는 마음들로 가득하다. 일상 생활에서 비교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왕따’가 생기는 것도 비교하는 마음 때문이다.
세상에는 2중의 잣대로서 남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저울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 강인순 존경받는 교육자로서 이미 비교하는 마음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또 반성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만한 성품은 “한 줌씩 더 집어넣는 무게만큼 사랑이란 걸” 이란 말을 통해 볼 때 어머니의 사랑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넉넉한 인심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널리 퍼져 있었다. 인정이 그리운 세상이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자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잘 형상화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에게 억눌리고 빼앗겼다는 의식 때문에 항상 배고파하는 아귀와 같이 세상을 산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이기도 하다.
우연히 기억의 창이 열리는 날도 있어
옛날의 그 처마 끝에 낮달이 일렁이고
빈 가슴 허망히 내놓은 어머니도 비춰든다.
빈 가슴 기대어 칭얼대는 아기 곁에서
어머니는 얼레빗으로 머리만 빗을 뿐이어서
지나던 바람도 하릴없이 마른 먼지를 일으켰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제삿날에도
낡은 얼레빗으로 머리를 빗다말고
먼 산을 바라보던 눈엔 낮달이 고여 들었다.
시간이 바람에 날려 우주를 동여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레빗은 마음 살에 스몄다가
삭아서 푸른 화석으로 서럽도록 돋아났다.
-이동백, ‘어머니의 얼레빗’ 전문
<오늘> 25집 표제가 “삭아서 푸른 화석으로 서럽도록 돋아났다.”에서 따왔다. 이 작품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1연에서 “우연히 기억이 창이 열리는 날”이라 노래하고 있지만 평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종종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회상 속에서 “처마 끝의 낮달”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밤이 아니라 낮달이며, 회상이라서 희미한 ‘낮달’이 밤에 뜨는 달보다 더 어울린다. 얼레빗을 닮은 ‘낮달’을 통하여 어머니를 떠올린다.
2연에서는 “빈 가슴에 기대어 칭얼대는 아기 곁에서” 칭얼대는 아기는 배고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머리만 빗고 있다. 어머니도 먹어야 젖이 잘 돌 것이다. 그러나 먹은 것이 없는데 젖인들 제대로 나올 것인가. 칭얼대는 아기를 그냥 두는 어머니의 심정을 얼마나 아팠을까. 조선의 여인들 대부분이 이렇게 살아왔고 목숨을 이어왔다.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칭얼대는 아기에게 제대로 젖을 주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 여인들을 종종 소개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들의 모습을이다. 6․25의 폐허 속에서 우리를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른다. 젊은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조금 배불러지니까 딴 소리하는 기성 세대들의 영향이리라.
아기에게도 제대로 줄 것이 없는 그 시절에, 제사는 얼마나 자주 돌아왔을까. 일반인들도 3대 내지는 4대조에 대한 제사를 모시지 않은 집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기에게도 젖을 충분히 먹이지 못하는데 제사상인들 푸짐하게 차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머리를 빗는 어머니의 눈에는 낮달이 고여 들었다. 지나간 이야기는 서러운 이야기지만, 이제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우리 조상들은 가난하던 시절에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조상에 대한 추모를 경건하게 받들었다. 제사를 통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정을 나누고 힘든 일도 함께하는 유대감을 튼튼하게 하였다. 우리네 조상님들은 죽어서는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도우고 있다.
그래서 3연에서는 “시간이 바람에 날려 우주를 동여매는 동안”이라고 하여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어머니를 더욱 간절히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현도 범상치 않고 웅장하다.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크고 싶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가슴에는 끝내 “ 삭아서 푸른 화석으로 서럽도록 돋아났다.”고 하였다.
화석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눈물이 어찌 없을 것인가. 어머니의 고생을 떠올리면 서러운 마음이 어찌 없을 것인가. 그 마음이 극진하여 끝내 “푸른 화석”으로 시인의 가슴에 영원히 남은 것이다.
요즈음 간혹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오늘>25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효성이 지극한 작품들이라서 지극히 평범한 주제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좋은 시는 우선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본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진실해야 한다. 시인이 이름을 얻기 위해서 현학적이거나 난해하거나 독창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거나 형식에서 돋보이게 실험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감동을 주기는 힘든다. 좋은 시가 되기 힘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좋은 시라고 쓰는 것도 시인의 자유이리라.
오늘날의 시조단에서도 <오늘>의 동인들처럼 순수한 마음에 바탕을 두고 쓰는 시들이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일 것이다. 시조의 앞날도 밝을 것이다. 시조의 현주소를 비관적으로 보지 마라. 시조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보지 마라. 80년대 이전을 생각하면 시조단도 천지개벽한 상태가 아니냐. 시조는 얼마나 오래동한 흘러온 강물이더냐. <오늘>의 회원님들이 묵묵히 시조를 쓰고 있어 시조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오늘>의 회원님들처럼 시조를 쓰는 시인들이 있기에 시조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생전 닳고 닳도록 불러대었던 어머니
먼 나라 가신 뒤로는 일자 소식 못 전하고
삼십 년 세월에 묻혀 가물거리는 사랑입니다.
어제 성묫길에 작은 풀꽃으로 피어나
애타는 눈빛 보낼 때도 까맣게 저는 모르고
먼 산만 바라보면서 딴전을 피웠습니다.
지척에 오셨어도 숨결조차 몰랐다니요
당신 혼령이 흘러 가을볕 그리 따스했나 봅니다
홀연히 떠난 자리에 산머루가 익어 갑니다.
-정광영, ‘하늘로 부치는 편지’ 전문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삼십 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일자 소식 못 전하고”라는 애타는 심정은 그 누가 알 것인가. 좀 일찍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더욱 눈물 날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 현실에 바빠서 “가물거리는 사랑”으로 변하기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가물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시인의 속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묫길에 작은 풀꽃도 어머니의 화신이요, 가을 볕 따뜻한 것도 어머니의 혼령 때문임을 자작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가슴뿐만 아니라 이 세상 가득히 어머니의 모습과 사랑이 가득차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있다. 시인의 지극한 효성이 없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쓸 수 있으랴.
“홀연히 떠난 자리에 산머루가 익어 가”는 것도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리라. 그러니 어머니께 편지를 부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편지를 쓰는 동안 시인은 가슴으로 많이 울었으리라. 그 울음이 어머니에게 전파처럼 전달되었을 것이리라. 이제 시인은 수시로 하늘에 편지를 부칠 것이리라. 죽어서도 살아 있는 어머니께 편지를 부칠 것이다.
풀벌레 울음소리에
옷자락을 털어 본다.
서녘 하늘 붉은 노을 황금성 달빛 벌판
초저녁
어머님 목소리 옛이야기처럼 듣고 있다.
- 김복희 , ‘저녁 달빛’ 일부
이 작품은 두 수의 작품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에 초점을 둔 작품은 아니고 늦가을 달밤에 감나무에 달무리를 놓는 배경으로 “밤마다/ 달빛 모두어 가을밤을 익게 하리.”라고 가을의 정경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도 첫째 수 종장에서 “어머님 목소리 옛이야기처럼 듣고 있다.”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시인의 효심이 평소 지극하다고 느껴져 어버이 사랑에 함께 다루었다.
투박한 껍질 속
부드러운 속살에서
죽어서도 선명한
나이테의 생명에서
올곧게
뿌리내리던
한 생을 바라본다.
한겨울
모진 바람
빈 가지로 받아내며
노란꽃 피워 올린
산수유 밑동에서
스스로 뿌리가 되신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직도 너털웃음
귓전을 맴도는데
어둔 밤
소나기 속을 핏빛으로 떠나신 후
남겨진
그루터기엔
내 마음만 무성하다.
-김희선, ‘나무’
이번 호에서 회원 10명 중, 8명이 어버이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데 아버지를 노래한 작품은 이 작품을 포함하여 두 편이었다.
이 작품은 선명한 나이테처럼 아버지의 사랑도 선명하게 잘 처리하였다. 1연에서는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올곧게/ 뿌리 내리던/ 한 생을 바라본다”는 말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이 느껴진다. 자식을 낳은 사람이면 누구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자식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훌륭하게 바라보는 시인 역시 지극한 효성 없이 어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2연에서는 아버지라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나왔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러한 아버지의 헌신이 있었기에 자식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스스로/ 뿌리가 되신/ 아버지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이미지이다. 이러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아버지를 모신 시인도 행복하겠지만, 시인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시인의 인품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르익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3연에서는 “아직도 너털웃음/ 귓전을 맴도는데”라고 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의 아버지도 분명 매사 긍정적이고 호방하며 자상한 분이실 것 같다. 그래서 “남겨진/ 그루터기에/ 내 마음만 무성하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아쉬움도 많이 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모하면서도 감정을 자제하면서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여 시적 효과를 올리고 있다. 나무를 보면서 아버지를 연상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이만한 절창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김희선 시인님은 서경과 서정을 적절히 직조하는 능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김희선님은 시조의 배행법에 대한 조탁을 많이 하는 시인이라 느껴진다.
이 작품은 세 수의 연시조로서 배행법이 다양하다. 종장을 처리하고 있다. “시 형식이 기본 단위는 詩行; Line)이라고 할 것인데, 이는 리듬 충동과 구문(構文) 패턴의 합성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고 하면서 1950년대 이후 간간이 논의가 되었으나 주요 영역으로는 부각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성호경은 시행이 ‘의미의 한 단위’이기보다는 ‘주의(注意;attention)의 한 단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한 편의 시 속에서 시행들은 서로 거의 대등한 주의릐 폭을 지니고, 주의에서는 강도(强度)와 지속시간이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는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하여 시행의 성질과 양상을 설명하였다.”
김희선님 <오늘> 25집에 발표된 8편을 살펴보면 배행법이 다 다르다. 그만큼 배행법에 대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은 김학준의 ‘시위 단상(斷想)’, 조영일의 ‘농촌일기’, ‘이팝나무’, 이동백의 ‘흔적 5’, 권혁모의 ‘독도’, 강인순의 ‘현장’, ‘어떤 봄날’, ‘돌림노래’, 정광영의 ‘마리스타 요셉의 집’, ‘꽃에게’, ‘사자성어로 읽는 시국’ 등 6명의 11편이 있다.
시조(時調)는 시절단가음조(時節短歌音調)의 준말이다. 즉 시조라는 명칭 속에는 그 시대의 노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늘> 25집은 동인회 명칭만 <오늘>이 아니라 작품을 오늘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목 진액과 공사장 토목이 나뒹굴고
영상으로 부서져 나오는 아픈 군상들
저 옛날
토템 의식을
눈 앞에서 보는 듯
하늘도 무거워 영혼은 육신을 떠
살아온 삶의 무게 내 어깨를 짓누르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어린 아이 울음 소리.
-김학준, ‘시위 단상(斷想)’ 전문
산업화와 더불어 우리 사회는 고도성장을 가져왔지만 어두운 역사도 함께 자라났다. 뉴스의 영상에 나오는 약자들의 목숨을 건 생존 투쟁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처럼 소설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 현실의 소식을 영상으로 자주 나온다. 1연은 생존을 위협받는 약자들의 모습을 아득한 옛날에 산 생명을 바치던 토템 의식을 떠올리며 시적 형상화 한 것이 돋보인다.
2연에서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어린 아이 울음 소리”로 끝을 마치며 저 연약한 어린 아이마저 생존에 직면해 울고 있는 소리가 귀에 쟁쟁 들려오는 듯하다.
평생 땅 일구며 사는 김유신 시인
농사를 아느냐며 연신 욕을 퍼낸다
쏟은 땀 묻어 둔 혼이 그 배경의 힘이다
까맣게 속이 타버린 땅을 파 뒤집으며
두 눈 퍼렇게 뜬 풀잎 하나하나
볕살에 내다 말리며 속 잎 쓰다듬는다
도시를 등지고 온 이웃 젊은이에게
땅심을 전해주느라 입에 침을 튕기며
닳아서 흔적만 남은 손금을 펴 보인다.
-조영일, ‘농촌 일기’ 전문
지금 농촌에는 노령층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끔 귀촌이나 귀농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김유신 시인’은 그런 젊은이에게 ‘ 닳아서 흔적만 남은 손금을 펴보이’며 농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들을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 핵심은 말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육체적 노동을 강조하고 있다. 힘든 일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농부들은 그것을 알기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도시는 온갖 요란한 구호들이 외치고 입만 살아있다면 농촌에는 팔을 아무리 높이 들고, 촛불을 들고 떠들어도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입을 열기 전에 몸으로 흙에 다가가서 땀을 흘리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것을 ‘손금을 펴보이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온 젊은이에게 다가서는 농부는 따뜻한 농촌의 정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농부의 가슴은 “까맣게 속이 타버린 땅”처럼 속이 타도록 힘든 세월을 건너온 것임에 틀림없다.
조금만 배추값이 올라도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며 호들갑을 떠는 뉴스들은 도시민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피땀 흘리는 농부들이 까맣게 속이 타도록 노력한 결과 우리가 이토록 먹는 것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음식 앞에 진정으로 고마움을 농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오늘도 ‘김유신 시인’은 말없이 햇볕 아래서 땀을 흘릴 것이다.
조영일 시인은 이 작품 외에도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이팝나무’가 있다. 안동대학교 정문을 동서로 늘어선 ‘이팝나무’를 보며 “배고픔 잊지 말라며/ 꽃피우는 나무다” 우리 사회가 배고프던 시절 흰 쌀밥을 배불리 한 번 먹어본다면 그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었으리라.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통일쌀’을 보급함으로써 절대적 배고픈 시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젊은이들은 고칼로리 인스턴트 식품을 자주 먹고, 육식, 기름에 튀긴 음식을 선호한다. 그러니 건강을 해치고 20, 30대에도 암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특히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면, 그 자식이 엄마 잘못만난 죄 때문에 비만이 되어 고통 받아야 하는 어린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배고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배불리 먹는 것이 문제인 세상이다. 살찌는 것을 자유라고 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 문제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영일 시인은 하얀 이팝나무꽃을 통하여 은은하게 현실의 문제를 호소력 있게 전하고 있다. “누이의 이름처럼 조용히 부르고 싶은” 이팝꽃 곁에 서면 “현기증이 하얗게 깨어난다.”는 말은 젊은 세대들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말이다. 경건하게 밥상 앞에 앉을 일이다.
서정주의 ‘춘궁(春窮)’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山) 한 개로 낯을 가리고/ 바위에 앉아서/ 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 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山) 두 개로 낮을 가리고/ 그 소식을/ 구름 끝 바람에서/ 겸상한 양 듣고 웃고,//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山) 세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 인제는 다 먹고 난 아이처럼/ 부스스 일어서 가며 피식 웃는다.(춘궁(春窮) 전문)
반쯤은 휴가 떠나 텅 빈 도시 변두리
짓다만 공사장에 뙤약볕 주저앉고
흰 깃발 붉게 쓴 구호 핏발 선 눈빛이다.
-강인순, ‘현장’ 전문.
짓다만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곳이 전국에 곳곳에 있다. 부도난 회사들로 인하여 소시민의 꿈이 짓밟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뙈약볕도 주저 앉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생존을 외치는 구호는 “핏발 선 눈빛”이라며 소시민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채널을 돌리면 온통 그 사람 얘기
이제는 끝나겠지 오늘도 역시난데
끝없는 돌림노래는 언제 그치려는지.
-강인순, ‘돌림노래’ 일부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 부르던 놀림 노래를 떠올리면서 그 때의 순수했던 돌림노래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며 오늘의 현실은 좋지 못한 뉴스가 끝없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되고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좀더 순수하고 순리의 세상이 오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솔선수범하지 못하고 당리당략에 의하는 책임이 클 것이다. 언론도 거기에 편승하여 국민을 편 가르고 있다. 국민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거짓말도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진실을 고백할 때까지.
강인순 시인은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서 사설시조인 ‘어떤 봄날’에서는 “벚꽃이 흐드러져서 주체 못한 꽂뱀의 한낮”이라고 종장을 끝맺고 있다. 차를 몰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대낮부터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을 경계할 것을 노래한 것이다.
요즘은 각계각층에서 성과 관련된 사건들이 연일 일어나고 있다. 정말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처럼 그렇게 전국적으로 성의 불이 붙어 있는 것과 같다. 전파매체나 통신매체 등의 발달로 인하여 성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강인순 시인은 현실 문제는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겪는 문제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시조가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따뜻한 밥 한 술이
왜 그리 부끄러운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사내는 밀물져 오는
회한을 자꾸 삼켰다.
-정광영, ‘마리스타 요셉의 집’ 전문
누가 밥을 빌어먹기를 좋아하겠는가? 누가 거지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밥을 얻어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밥 한 술의 소중함을 알기에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마저 사라져버린다면 희망을 잃어버린 자일 것이다. 사내는 회한을 삼키고만 있다. 재기의 용기를 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보태어 재기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거리의 사람들을 개인의 문제로 보기 전에 사회의 문제로 끌어안고 적극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는 길로 가기 때문이다. 저 북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베풀고자 하는 구호 높이 외치는 자들은 가까이 있는 이런 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북쪽의 가난은 독재자를 잘못 만난 이유 때문이다. 독재정권을 무너져야 진정한 희망이 올 것이다. 북쪽에 대해서는 무조건 침묵하면서 세계적인 기적을 이룬 남쪽에 해서는 아직도 독재를 운운하는 자들은 남쪽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분열을 일삼는 암적인 존재일 뿐이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정광영 시인은 오늘날의 시국을 좀더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안하무인 무소불위/양두구육 인면수심
설상가상 동문서답/ 적반하장 마이동풍
오호라/목불인견에/ 망연자실이로다.
부화뇌동 유유상종/ 호가호위 점입가경
후안무치 불문가지/ 비몽사몽 속수무책
통래라/ 유구무언에/ 혼비백산 지경일다.
-정광영, ‘사자성어로 읽는 시국’ 전문
이 작품을 읽어보니 종편 채널을 바라보는 것 같고, 보수 신문과 진보라고 칭하는 신문의 사설을 대조하며 읽는 것 같다.
이념의 문제 앞에는 남남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 무조건 침묵하는 자들이 있는 한 이념의 문제는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처럼 남남갈등이 극심한 것도 이제는 주로 40~50대의 일이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원하고 있다. 노인들은 생존의 문제로 위협받고 있다. 80년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세대들은 아직도 한을 재생산하려고 하고 있다. 법구경에서는 “실로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써 원한을 갚을 수 없는 것. 용서로서만 그것을 풀 수 있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민생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고 있다. 30여년 전의 문제로 한을 재생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의 바람으로 권력의 맛을 보았던 자들은 그런 향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광우병 파동을 일으켰던 촛불 파동도 결국 진실 앞에 거짓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더 이상 바람은 없다. ‘사저성어로 읽는 시국’도 이런 바람의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꽃에게(정광영)’에서는 “ 꺾이고 짓밟혀도 웃기만 했었더냐”, “깨어진 정수리에서 희디힌 피가 솟다”라고 노래하고 있어 약자들의 짓밟히는 아픔을 노래하였다. 정광영 시인의 현실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이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예민한 더듬이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광영 시인은 훌륭한 더듬이를 가진 시인이라고 본다.
4. <오늘> 25집에서는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는 김학준의 ‘만장Ⅰ’, ‘만장Ⅱ-앞서간 친구에게’, 조영일의 ‘만추’, ‘안과 밖’, 권혁모의 ‘영원한 쉼터 마당 앞에서’, ‘폼페이, 정적 앞에서’ 3명의 시인이 6편을 발표하였다. 이밖에도 박영교의 <시작 노트>에서도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든 존재들은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성을 자각하고 있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한다. 그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면 그 슬픔은 더 클 것이다.
김학준의 ‘만장Ⅱ-앞서간 친구에게’는 친구는 죽었지만 “하늘로/ 이어져 내리는/ 다 잊지 못할 푸른 기억들.”이라고 친구는 죽었지만 그 추억은 영원히 남아 있음을 노래하였다.
길의 끝으로 혼자 산에 이르도록
햇살 받아 잔득 휘어진 생애 이끌고
일렬로 늘어선 만장 수 천 수만 나부낀다.
-조영일, ‘만추’ 전문
대체로 사람들은 낙엽이 지는 가을이면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든다. 낙엽이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예부터 낙엽을 죽음에 비유하였다. 조영일 시인은 늦가을에 낙엽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만 만장이 나부끼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죽음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노래하지 않고 감정의 자제하고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란 말이 있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갑자기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문제를 관조하고 있다. 그것은 평소 최선을 다해 삶 살았고, 살고 있으리라. 죽음의 다룬 가작이라 느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부고가 날아든다 할지라도 조영일의 ‘만추’를 생각하면 조금의 위로가 될 것이라 본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는 낙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도 싶다.
우리 몸에 있는 일정한 살점과 뼈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혈액의 양 여기에 합쳐진 무게 머리칼이 전부다. 누구든 손톱 발톱 어쩌나 걱정이지만 그야 살 아니면 뼈니까 별거 아니고 문제는 무게 나가지 않는 심장 박동소리다. 이승 하직하고 나면 몸이 전부인데 버려도 아무데나 둬도 나는 모를 일평생을 지켜 살아온 의식의 가열함이다.
-조영일, ‘안과 밖’ 전문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에 임하더라도 다른 것은 다 별거 아닌 것으로 보고 있는 시인은 죽음에 대해 달관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게 나가지 않는 심장 박동소리다”라고 말하며 그것은 바로 “일평생을 지켜 살아온 의식의 가열함이다”라고 말한다. 일평생을 지켜온 의식의 가열함은 무엇일까.
시인으로서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아닐까.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탑과 같은 시를 쓰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고 싶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구하는 ‘의식이 가열함’에 대해서 공감할 것이다. <25집>에 실려 있는 작품 모두 탑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 시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안과 밖’을 읽을 때 가슴을 스치는 서늘한 일고 있음을 느낀다.
삼복이 얼어붙은 강
슬픔에도 슬픔이 있나
우리들 먼 작별은
거처야 할 숙명이지만
한 여자
알 수 없는 꽃송이
리본 달고 내린다
신화에도 없었거니
아이만 살아남은
아니지 하면서도
사진 속 엄마 미소
통곡은
여름 긴 마당을
소나기로 때린다.
-권혁모, ‘영원한 쉼터 마당 앞에서’ 전문
기막힌 사연의 죽음을 바라보며 시인은 “삼복이 얼어붙은 강”이라고 한다. 삼복에도 얼어붙을 강이라면 얼마나 갑자기 닥친 기상이변의 현실일까. 그만큼 고통이 큰 일이다. 언제가는 죽을 목숨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기막힌 죽음 앞에 어찌 그 애통이 진정될 것인가.
그래서 2연에서는 “신화에도 없었거니/ 아이만 살아남은”라고 노래하고 있다. 신화에도 없었던 사건이 신화보다 더 기막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마구 퍼붓는 소나기처럼 통곡소리가 여름 마당을 철철 흐르고 있다.
권혁모 시인은 혈육의 죽음이 아닌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의 죽음 앞에서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존던의 시처럼 우리의 생명은 육지처럼 한 덩어리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은 결국 뭍이 조금씩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기막힌 죽음의 원인은 교통사고가 제일 클 것이다. 사고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로는 잘못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운전이 남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가가 회사가 사회가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이 불평 불만이 많은 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목소리 높이기 전에 남을 배려하는 운전이 나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했으면 한다.
‘폼페이, 정적 앞에서’(권혁모)는 화산재에 한 순간에 덮혀버린 폼베이의 유적을 목격하고 쓴 시이다. 대자연의 재앙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지금은 가끔씩 있는 자연의 재해뿐만 아니라, 인재로 인하여 재앙을 만났을 때 “어쩌다 노여움이 된, 여긴 신들의 영역”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5. 삶의 의미를 노래한 작품으로는 박영교의 ‘나목(裸木)의 숲들’, 조용일의 ‘봄날의 기록’, ‘갯돌’, 권혁모의 ‘개목사를 지나며’, 정광영의 ‘별사’, 김희선의 ‘할미꽃’, ‘민들레’, ‘내어주는 삶’, ‘두드림’, ‘비움과 채움’, ‘우포늪에서’ 등이 있다.
삶을 의미는 대체로 자연에 빗대어서 그 의미를 발견하거나 깨닫거나 반성하거나 한다. 위에 나타난 작품에서도 자연에 빗대어서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깊은 명상에서 얻은 작품도 있다.
나무는 다투지 않고 겨울을 살아간다.
그리운 곳 가지 뻗어
낮은 곳으로 뿌릴 내려
한마음
꽁꽁 묶어서
땅을 얼지 않게 한다.
때로는 바람 불어
그리움 헝클어 놓고
서로 부딪치게 하여 아픔을 불러오지만
스스로
아픔을 풀어
안개 자욱이 덮는다.
-박영교, ‘나목(裸木)의 숲들’ 전문
낙엽이 다 진 겨울의 숲을 바라보면서 나무들은 “다투지 않고” 가지와 뿌리를 내리며 끝내 한마음이 되어 땅을 얼지 않게 한다고 노래하였다. 나무의 무성한 뿌리들이 엉켜있는 것을 “한마음/ 꽁꽁 묶어서/ 땅을 얼지 않게 한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평소 삶의 자세가 얼마나 이웃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서로 부딪치게 하여 아픔을 불러오지만” 끝내 “스스로/ 아픔을 풀어/ 안개 자욱이 덮는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입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나무들은 “스스로/ 아픔을 풀어”라고 노래한 것은 예사로운 표현이 아니다. 깊은 사랑과 철학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표현이다.
삭막한 시대일수록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다툼이 있더라도 끝내는 갈등을 풀고 함께 웃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작품이다. 겨울이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이지만 이렇게 평이하면서도 깊은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정말 좋은 작품이다. 시조도 소통을 해야 한다. 노래, 암송, 시화, 시극 등등과. 이럴 때 ‘나목의 숲들’은 시조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깨달음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절창으로 손꼽고 싶다.
올해는 유난스레
봄꽃이 아름답다
낮에는 온기가 높고 밤은 차가운 탓
고단한 삶이 숙성해
빛깔 한결 짙어라
살면 깨달아지는
일상이 안과 밖
산천에 물오를수록 자꾸 푸르러지는
꽃과 잎 저 눈부심의
피리소리 듣는다.
-조영일, ‘빛의 기록’ 전문
세상 모든 일에 땀 흘리지 않고 보람 있는 성취감을 얻을 수 없다. 시인은 봄꽃을 바라보면서 저 눈부신 꽃을 피운 이유는 ‘낮에는 온기가 높고 밤은 차가운 탓’이라고 한다. 긴 겨울의 고통을 이겨내고, 꽃샘추위까지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운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꽃을 그냥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꽃과 잎 저 눈부심의/피리소리 듣는다.”라며 시각의 청각화로 공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꽃을 통해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꽃들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저토록 고결한 노래를 들려주는 있는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자들의 귀에만 들려오는 천상의 음악소리를.
우리의 인생, 어찌 고통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통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전에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평범한 속담들은 일상적으로 쓰였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더라도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낸 사람들만이 ‘저 눈부심의 피리소리’를 남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의 기록’은 누구나 읽어도 공감이 가고 재미가 있고 기쁨을 주며 또 깨달음과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이다. 이 같은 작품들이 널리 읽혔으면 한다. 시조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두루 소개하고 싶은 시이다. 조영일 시인의 시는 이 작품을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남들에게 교훈을 주는 작품들도 자신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영향력은 오히려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효과적인 시의 표현법을 터득한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표현법은 ‘갯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식 낳으면 꼭 저리 닮으면 싶다
흐르는 세월에 씻겨 둥근 반짝임이여
조용히 윤이 나는 삶 살았으면 싶다.
-조영일, ‘갯돌’
이 작품은 화자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이다. ‘자식을 낳으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음에 눈여겨 볼 일이다. 사실은 자신의 삶을 ‘갯돌’처럼 살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어버이가 본을 보이지 않고서야 어찌 자식이 닮을 것인가. “흐르는 세월에 씻겨 둥근 반짝임이여”를 통해서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되 그것도 반짝 윤이나는 삶을 희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용히 윤이 나는 삶을 살았으면 싶다.”라고 가정형을 쓰고 있지만 자신이 “조용이 윤이 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조영일 시인하면 ‘갯돌’과 같은 시인임을 떠올릴 수 있다. 큰 키에, 흰 머리 휘날리면서 미소를 짓고 계시는 조용일 선생님이 모습이 이미 ‘갯돌’이 아니고 무엇이랴. 항상 원만하면서도 조용한 선생님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 한편으로도 조영일 시인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작품이라 본다.
김희선 시인은 자연물을 바라볼 때,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치열한 시인이다.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닮고 있는 객관적 상관물로 작용하고 있다.
심지어 ‘우포늪에서’란 작품의 제목을 보면 ‘생태, 환경’을 다룬 작품이 아닌가 싶었지만 ‘우포늪’도 역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객관적 상관물로 작용한다. 이만큼 김희선 시인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음을 느낀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김희선 시인은 좋은 서정시의 본령인 ‘서정과 서경을 적절히 직조하는 능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오늘> 25집에 발표한 ‘할미꽃’, ‘민들레’, ‘천리향’, ‘나무’, ‘내어주는 삶’, ‘인생’, ‘우포늪에서’, ‘바람의 언덕’, ‘내가 낚고 싶은 것’, ‘묵화’ 등의 작품이 한결같이 이런 경향을 띠고 있다.
너를 만난 후
나에게도
늪이 하나 생겼다.
소리가 없이도
수많은 말을 들려주고
드러내 보이지 않고도
생명을 끌어안는
고요하고 드넓은
너의 모습 바라보며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
비우고
채우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김희선, ‘우포늪에서’ 전문
좋은 작품이다. 우포늪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날의 생태, 환경의 문제가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를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우포늪을 다녀온 김희선 시인은 그런 생태, 환경의 문제를 더욱 생각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마음이 없이 행동으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늪이 “드러내 보이지 않고도/ 생명을 끌어안는”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도 ‘늪’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며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온 시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고요하고 드넓은/ 너의 모습 바라보며” 늪처럼 고요하면서도 드넓은 마음을 가지겠다는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나 평소에 말없이 어려운 일을 실천하며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오는 인품을 가졌기에 그것이 보였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듯이.
“비우고/ 채우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이라 말하는 종장은 중장의 “어떤 삶의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와 도치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포늪에서 깨달은 삶이 결국 적절하게 “비우고/ 채우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우고 채우는 것을 적절히 하지 못하기에 이 나라 지도자들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온갖 궤변들이 난무하고 있다. 욕심을 가지고 진실인 양 떠들어대도 국민들은 속지 않는다. 그런데도 철면피처럼 떠들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상에 남들에게 ‘조용히’ 사랑을 베풀고 말없이 실천하여 고운 향기를 사회에 내뿜고 있는 시인임을 느낄 수 있다.
김희선 시인의 시들을 살펴보면 배행법이 다양하다. 그만큼 시조의 현대화를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일이다. 새로운 변화와 실험적인 자세들을 통해서 현대에 적응하는 능력도 생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내 개인적인 생각을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한 장이 4음보일 경우, 2음보씩 한 구가 되어야 시조의 운율이 살아난다’고 본다. 현대화란 이름으로 굳이 정형시인 시조의 운율이 파괴되는 것은 새로운 창조인지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예를 들어, 2연의 중장에서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를 보면 “어떤”이 한 행을 이루고 있다. 의미상으로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로 읽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로 끊어 읽어도 좀 어색한 것 같아서 그렇게 끊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조는 의미상 한 장이 두 구로 끊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파격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알았다.’로 두 구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바람의 언덕’에서 초장에 “언제/ 한번이라도/ 내려온 적 있었던가//”에서는 “언제”가 한 행으로 처리되더라도 자연스럽다. 통사구조가 “언제 한번이라도”에서 두 음보가 한 구로 완벽하게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무(無)가 되어 버린 후/ 그 텅 빈 공간에서/ 존재조차 사라지면// 비로소 차오르는 것. 그곳에 닿고 싶다.//”(김희선, ‘비움과 채 일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는 성인이 도달한 경지일 것이다. ‘존재조차 사라지면/ 비로소 차오르는 것’이라며 도달해야 할 경지가 무엇인지 알 고 있다. “그곳에 닿고 싶다”는 시인의 말을 통해보면 ‘집착’심을 버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경지에 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담장 한 모퉁이 꽃을 피운 먹자두나무// 흐르는 세월 따라 육신은 갈라져도// 달디 단 열매를 위해 제 몸을 내어준다.//”(김희선, ‘내어주는 삶’의 일부)에서는 먹자두나무처럼 “온전히 내어주는 삶 경구로 받아든다.”며 그 깨달음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어여쁜 그 얼굴을 왜 들지 못하는가
흰 털을 베일 삼아 고개 숙인 백두옹
내로라
다 외쳐대도
오직 한 길 묵언 중
수많은 말마디가
돌이키면 허망한테
일찌감치 깨달은 듯
내면 가득 고운 빛
내 얼굴
보고 싶으면
너희도 낮추라고.
-김희선, ‘할미꽃’ 전문
할미꽃은 예쁜 꽃이다. 그런데도 고개 숙이고 있다. 세상에 말들이 너무 난무하여 차라리 ‘묵언’ 중에 있는 것이다. 논어(論語)에서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가장 멀리 하였다. 흰 털을 베일 삼았다는 표현이 독창적인 표현이다. “수많은 말마디가/ 돌이키면 허망한데”라며 말 많은 세상은 결국 욕망의 충족을 위한 말들일 뿐임을 깨닫고 있기에 묵언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얼굴/ 보고 싶으면/ 너희도 낮추라고.//” 조용히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남들보다 위로 올라가려고만 한다. 그래서 끝없는 투쟁만 있을 뿐이다. 불행이 늘어날 뿐이다.
이리하여 김희선 시인은 “너희도 낮추라고” 함을 할미꽃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자연물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경향은 앞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한다.
‘민들레’역시 마찬가지로 흔하게 있는 꽃이라 귀중한 줄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세상의/ 어떤 꽃보다/ 어여쁜 줄을 알았다.//”라고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민들레’는 또한 자신의 아주 가까운 주위 사람들들 뜻하는 객관적 상관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밖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달게 하는 작품들이다. 김희선 시인은 다시한번 말하거니와 서정과 서정을 적절히 짜는 좋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6. <오늘> 25집에서 순수 서정을 노래한 작품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시란 원래 서정 갈래로서 서정이 본령일 것이다. 앞에서 노래한 작품들도 모두 좋은 서정시들이었다. 그런데도 별도로 ‘순수 서정’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홀로 사는 면도 있다. 이념, 교훈, 깨달음 등등 인위적인 냄새가 거의 사라지고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갈 때 나오는 순수 감정이 순수 서정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연과 다른 존재라는 서양의 철학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데고 앞장을 서 왔다.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될 때 긴 겨울이 지나고 어느 날 아침에 핀 목련꽃을 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가 어찌 아니 나올 것인가. 홀로만의 감정인 외로움, 고독, 행복, 사랑 등의 감정을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가장 순수한 상태며 자연에 가장 가까운 상태의 시가 순수 서정일 것이다.
소백산과 낙동강을 가까이 하고 있는 <오늘>의 시조 동인들은 주변 환경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순수하고 속세의 때가 먼 곳이다. 그런 지역이라서 순수 서정이 그 바탕이 되어있는 것 같다. 순수한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현실이다. 우리 인간 개개인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25>집에 발표한 10명의 시인들이 모두 순수 서정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김학준의 ‘가을이 오늘 자리’, 박영교의 ‘경칩 이후’, 조영일의 ‘복날’, 권혁모의 ‘입맞춤’, ‘저녁바다’, 강인순의 ‘초록바다’, 정광영의 ‘구름 노을’, ‘비’, ‘민들레 홀씨’, 정광영의 ‘목격자’ 김명희의 ‘흔든다’, ‘길’, ‘석양의 여자’, 김복희의 ‘섬돌’ 김희선의 ‘천리향’ 등이다.
실바람 몇 가닥
베갯잇에 얹어 놓고
늦가을의 빗소리
사방으로 풀어놓고
새 벽지
구절초 피어
마음 자꾸 흔든다.
- 김명희, ‘흔든다’ 전문
초장에서 ‘실바람 몇 가닥/ 베갯잇에 얹어 놓고’란 표현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바람을 머리카락과 같은 몇 가닥으로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공감각적 표현이다. 중장에서 비오는 날의 늦가을의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봄날의 환희와는 낙엽이 질 때는 쓸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물며 늦가을 비까지 내릴 때의 분위기는 애상적인 정감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종장에서는 벽지의 구절초가 더욱 가을을 가을이게 만들고 있다. “마음 자꾸 흔든다”라고 하였는데 흔들리고 있으니까 살아 있는 인간일 것이다. 봄에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가을이면 오죽하겠는가. 독자들은 이런 작품을 읽으면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시가 생명력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생명력이 긴 것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더욱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등 뒤에 선 수양버들 그 틈서리를 뚫고 와
속눈썹을 간질이는 갈바람을 털어내면
석양 먼 들녘 끝에서 묵주알을 굴린다
입술로 들먹여도 어쩔 수 없는 슬픔에
흐린 눈빛으로 서성이는 중년의 여인
내려 뜬 눈썹 사이로 어둠이 젖어든다.
-김명희, ‘석양의 여자’
“속눈썹을 간질이는 갈바람을 털어내면”에서는 아주 작은 것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김명희 시인의 장점은 아주 작은 것을 세밀히 관찰하되 공감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조의 특징으로 김제현은 ‘공감각적 표현’을 들고 있다. 그만큼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고차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석양의 여자“는 제목에서 쓸쓸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려 든 눈썹 사이로 어둠이 젖어든다.”며 감정을 억제하고 이미지를 살려서 표현한 것은 돋보인다.
김명희 시인은 다른 작품들도 모두 순수 서정의 작품들로써 순수한 심성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시작 노트>에서도 “달밭골의 바람소리- 수백 년 묵은 우람한 나무들, 우거진 숲이 나를 불렀다. 나는 벌써 그들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무도 외롭고 쓸쓸할 때가 있는 것이다.”란 말을 보더라도 자연의 품속에 있는 순수한 존재이다. 그러나 “내가 오래 머물 수 없는 그곳 ‘달밭골’ 물소리처럼 엷게 번지는 바람소리를.”이란 말을 통해서 볼 때 분명 김명희 시인은 자연 속에만 머물고 있는 시인은 아니다. 속세에 묻혀서도 자연의 기운 속에 있는 것이다. 현실은 탁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연꽃이 진흙속에서 꽃을 피우듯이 탁한 현실 속에서도 연꽃을 발견하고, 또 꽃을 피우도록 노력하는 것이 시인이 아닐까 한다.
진달래가 햇살 모아
몸을 지켜낸 겨우내
민들레는 뿌리에다
노랑 물을 들여서
봄 맞아
다른 빛으로
저만치 갈라섰다.
민들레가 고개 들어
진달래를 처다보며
진노란 얼굴빛을
자랑하고 나서자
구름은
그 빛이 탐나서
그 곁에 서성거렸다.
해지는 걸 본 구름이
햇빛 몇 낱 뜯어내어
말갛게 씻긴 몸을
쓱쓱 문질러댔다.
하늘에 쇳물이 든 건
그 사건 후의 일이다.
-이동백, ‘구름 노을’
우선 이 시는 풍부한 상상력이 동원된 시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 서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림이 그냥 그림이 아니라 그 속에는 삶의 의미가 있다. 순수서정시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시가 이런 시일 것이다.
시조는 형식에 제한이 있지만 좋은 시조는 서경을 서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점은 한시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은 한결같이 서정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활 주변의 소재를 다룬 것으로 김복희의 ‘풍기 장날’, ‘병실에서’와 같은 작품이 있다. <오늘> 25집을 읽으면서 소백산의 푸른 정기를 받은 시인들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좋은 시들을 쓰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인삼의 고장 ‘풍기 장날’도 오래 오래 생각날 것이다.
빡빡한 하루 해가
동천에 떠오르면
사람들 체취가 모여
모닥불 피어나고
세 번도 더 달아보는
오늘과 내일의 무게
어림없던 이야기도
술에 끌려 넘어가도
인심도 흥정만 하면
덤으로 얹어 준다
모난 일 원만치 못한 것도
은근슬쩍 묻힌다.
-김복희, ‘풍기 장날> 전문
이 작품은 인간 냄새가 나서 좋다. 인간의 정이 메말라가고, 텔레비전, 스마트폰 등의 현대 사회의 환경 변화로 대화가 줄어든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친구들과의 대화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삭막한 도시 문화로 어른들은 인심은 끊어지고 법적 대응 만능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라면 “모난 일 원만치 못한 것도/ 은근슬쩍 묻힌다”처럼 풍기 장날의 “인심도 흥정말 하면. 덤으로 얹어 준다”는 인심을 가지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마치는 글
회장님으로부터 <오늘> 25집을 받고서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감상문을 써 보았습니다.
시를 잘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 느낀 바를 써다보니 시의 본뜻을 해치거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널리 용서를 빕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소백산 자락길에 대해서도 잘 알았습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도 4개시·군에 걸쳐져 있다. 소백산 자락길은 한강과 낙동강의 두 물줄기가 힘차게 발원하여 소백산의 아름다운 정경을 품에 앉은 길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두 물길은 각각 소백산을 남과 북으로 넘고 돌며 고유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렇게 소백산은 우리 문화의 발원지가 되었고 소백산 자락길은 두 문화를 이은 소통의 길이 되었다.”
<오늘>은 영원히 ‘오늘’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25집 발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소백산의 푸른 바람이 가슴에 꽉 박혀서 ‘푸른 화석’으로 변하여 탁한 곳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오늘>이 있는 한 우리 현대시조의 앞날은 밝으리라 봅니다.
대구에서 김우연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