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겉 사람의 눈에는 계시 되지 않고 속사람의 눈에만 계시 된다.
나. 십일조(아들)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로서 문이 열리는 곳에서 아들이 되어 드려짐이다.
다. 물은 바리새인들의 정신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불은 바리새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이다.
2. 본론
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겉 사람의 눈에는 계시 되지 않고 속사람의 눈에만 계시 된다.
내 안의 하나님은 결코 나의 육신의 눈(眼耳鼻舌身意)에는 계시 되지 않는다. 나의 눈에 안약을 바르고 한쪽 눈(범죄 한 눈)을 빼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바꿔야 똑바로 볼 수 있다. 범죄한 손발(내면)을 잘라내고 새로운 손발이 생길 때만 만질 수 있다. 오른손이 하는 짓을 왼손이 모를 때만 찾아지는 원리다. 그래야 오른손과 왼손이 하나 된다.
겉 사람의 옷을 벗고 속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을 때만 내면의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내가 내면의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일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몸이 된다. 하나님께 나를 드림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생명의 십일조의 원리다.
나. 십일조(아들)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로서 문이 열리는 곳에서 아들이 되어 드려짐이다.
십일조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임과 동시에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에서 아들로서 십일조가 드려진다. 그런데 이 거룩한 아들 십일조가 돈(물질)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모두 돈에 미쳐서 모든 정신이 세상 술(맘모나)에 취해 있다. 술 취해 있는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생각한 그림자인 행위만 남고 핵심은 온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말라기를 기록한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악해져 있다. 그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받는다고 외친다.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다. 갈수록 변질되어 갈뿐 생명의 빛으로 변화될 조짐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모두 정신이 나갔다. 자신들이 문둥병자가 되어 있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생명의 빛(진리)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결과다. 겉 사람으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외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눈에 안약을 먼저 발라야 할 것이다. 범죄 하는 손발을 잘라내야 하며, 겉옷을 벗고 온몸에 퍼져 있는 문둥병을 생수(생명의 빛)로 씻어내야 한다.
다. 물은 바리새인들의 정신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불은 바리새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이다.
“우리는(1인칭 복수)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게올기온,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릴 수 있는 밭)이요, 하나님의 집(몸된 성전)이니라(고전 3:9)
그 날에(헤메라, 빛이 임하는 때)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2인칭 복수)가 내 안에, 내가 너희(2인칭 복수)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미치다)로 심히 고생하며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5)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마 17:18).”
여기에 등장하는 물은 바리새인들의 정신 상태를 비유한 말이며, 불은 바리새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결과를 비유한 말이다. 아이(초등학문)를 고치려고 바리새인들(회칠한 무덤)에게 찾아다녔으나 더욱 심하여졌을 뿐이다.
공간 세상의 불과 물에 들어간다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비사와 연결된 비유다. 예수께서 생명의 빛(진리)으로 고치신다.
‘간질’로 번역된 ‘셀레니아조마이’는 ‘미치다’라는 뜻으로서 세상의 이론, 논리, 개념, 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리가 아닌 술에 취한 이론이다.
세상 질병이라면 그 당시의 의사에게 찾아가야지, 왜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서 고치려 했겠는가? ‘아이’라고 번역한 ‘파이스’는 파라볼레(비유)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이 어린 아이가 아니라 초등학문에 머물러 있는 자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