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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51)천생연분
땀범벅이 된 둘은 날숨을 토하고 어둠 속에 앉아 자리끼로 윗목에 놓아둔 물을 벌컥벌컥 번갈아가며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불속에 들어 서로를 끌어안고 누웠다.
“서방님은 어디서 사시는 분이기에 이제야 나타나신 건가요?”
소백주가 김선비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부인, 내 고향은 경상도 상주지요.”
“그래요. 그런데 이 먼 수원 땅을 어떻게 해서 오시게 되었나요?”
하룻밤 수많은 격정의 순간이 지나가고 이제야 비로소 김선비의 신상이 궁금하였던지 소백주는 지나온 내력을 묻는 것이었다.
“으음!... 내 본시 글 읽는 서생으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세월을 공부에만 전념하였지요. 그런데 과거를 보는 족족 낙방하여 더 이상 세월을 보낼 수도 없고 하여 먼 친척인 지체 높은 이정승에게 부탁하여 벼슬을 사보려고 집안의 가산을 다 팔아 삼천 냥을 갖다 바치고 삼 년을 기다렸지요. 그러나 삼년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벼슬자리 하나 주지를 않고 급기야 상주 고향땅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식이 굶어 죽는다하기에 더 이상 그 집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몇 냥 노자라도 얻어 고향에 가려했으나 노자 한 푼 주지 않아 걸어서 점심도 굶고 오다가 수원에 당도하여 그대의 방을 보고 너무나 배가 고파서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허기나 면하고 가려다가 이렇게 된 것이지요.”
김선비는 지나온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했다.
“서방님, 그러셨군요. 그러시다면 아무 걱정 마시고 이곳에서 지내셔요.”
그렇게 말하며 소백주는 다시 김선비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젊은 여인의 부드럽고 뜨거운 손길이 닿자 김선비는 다시 불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김선비는 소백주를 살그머니 꼭 끌어안아주었다.
“서방님과 저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인가 봅니다. 서방님의 손길 닿는 곳마다 내 몸 구석구석 마구 꽃이 피어나고 봄 불이 번집니다.”
“어허! 그러신가요. 부인! 나도 그대를 만나 이렇게 허기를 면하고 조선에서도 최고로 소문난 여인을 내 품에 안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이 없군요.”
김선비는 소백주의 몸을 어루만지며 몸 위로 또 다시 나는 듯이 벌떡 오르는 것이었다. 남녀 관계란 것이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그 벽을 넘어 한번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면 쉬이 넘나들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김선비와 소백주는 그 궁합이라는 것이 딱 맞는 천생연분이라서 그랬을까? 절구와 절굿공이처럼 서로의 마음과 몸이 마치 한 몸처럼 서로 잘 융합되고 화음이 교묘하게 딱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52)고향생각
둘 사이에는 늘 아름다운 봄바람 같은 따뜻한 바람이 흐르고 있었고 그 바람은 서로에게 환희를 낳았다. 환희의 나무 밑에서는 금슬이라는 탐스러운 열매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김선비는 그날 이후로 소백주에게 흠씬 빠져 고향 집으로 내려갈 마음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백주는 매일 김선비를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술과 고기로 융숭히 대접해 주면서 들로 산으로 유람을 나다니는 것이었다.
연일 꽃피는 봄날만 같은 시름없는 날들이었다. 소백주 옆에만 있으면 향기 그칠 일 없었고 근심일랑 있을 수 없었다. 남녀 간에 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마음 편하게 근심걱정 없이만 살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더 이상 욕심 부려 공부해 과거 따윈 볼 필요도 없었고, 힘써 재물을 늘려 부귀영화를 누리려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돈 많은 어여쁜 부인 소백주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으니 누구는 새로 얻은 마누라 덕에 호강한다고 할지 몰라도 그 세월이 참으로 김선비에게는 춘삼월 호시절(好時節)이었던 것이다.
김선비는 고향의 노모와 처자식이 다 굶어 죽게 생겼다는 것은 딱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소백주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만 있었다.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으며 밤마다 아름다운 여인 소백주를 끌어안고 자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꿀같이 달콤한 망각의 세월 삼년이 거짓말같이 번쩍 흘러가 버린 어느 가을 날, 문득 멀리 북녘으로부터 찬바람이 몰려오고 산비탈에 심은 밤나무에서 밤알이 툭툭 벌어지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오자 김선비는 고향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었다.
“어허! 간밤에 단꿈을 꾸고 막 일어난 것만 같은데 그새 삼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단 말인가!”
김선비는 혼잣말을 하며 소백주에게 홀랑 빠져 지낸 세월을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지금쯤 그 고향집에도 가을을 맡느라 분주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고 잊고 살았던 노모며 처자식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견딜 수 없이 그들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식구들이 죄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집에 가다가 소백주를 만나 이렇게 그들을 다 잊어버리고 혼자만 호강하고 살아온 것을 그제야 깊이 되새겨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아이쿠! 이거, 내 고향땅에 살아있을 노모며 처자식은 어찌되었단 말인가? 필시 굶어 죽었을 것이야! 내가 이거 사람이 아니었구나!’
김선비는 속으로 깊이 뉘우치면서 소백주의 집을 떠나 하루빨리 고향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 소백주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부인, 내 그대 덕분에 이곳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호강하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고향집에 두고 온 노모며 처자식은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해 마음이 몹시 불편하군요.”
기생 소백주 (53)이별주
“서방님, 그렇다면 고향으로 떠나시겠다는 것입니까?”
소백주는 화들짝 놀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놀란 토끼눈을 뜨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나만 좋자고 있었던 것이 그새 삼년이나 되어버렸군요. 사람이라면 이렇게 혼자만 좋자고 식구들을 내팽개치는 짓은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김선비는 작정한 듯 소백주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서방님, 다시 오시는 것입니까?”
소백주가 물었다.
“고향에 처자식이 있는 몸이니 가면 어찌 쉬이 올 수 있겠습니까! 다음에 혹여 한양이라도 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 다시 들리겠습니다.”
김선비가 말했다.
“서방님, 그럼 이 밤이 서방님과 이별의 밤이 아닙니까? 오늘밤 이별주라도 한잔 해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백주가 밖으로 나갔다. 정말 이 밤이 소백주와 이별의 밤이란 말인가? 꽃피는 봄날 기약 없이 만나 꿈결 같은 나날을 보냈건만 그 세월도 이제 끝이 나야한단 말인가!
길을 떠나야만 하는 김선비의 마음도 차가운 가을바람처럼 쓸쓸했다. 그러나 어쩌랴! 밖으로 나간 소백주가 걸게 주안상을 차려왔다. 김선비와 소백주는 이별의 술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아늑한 등잔불 발간 방안에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김선비와 소백주는 서로 마주하고 앉았다. 3년을 마주하며 살아온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건만 늘 새로운 사람과 살아온 것 같은 풋풋한 싱싱함이 묻어나는 소백주였다.
차가운 칼바람 아래서도 다가올 봄을 예견한 듯 꿋꿋하게 피어나는 매화꽃 같은 상큼하고 굳센 정신이 깃든 듯 그러나 진한 향기가 먼저 코끝에 다가와 여인네의 포근한 살 향기로 늘 자신을 덮쳐버리고 말던 소백주! 김선비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학이 나래를 펴고 비상하는 그림이 그려진 말간 청주가 담긴 술잔을 손에 잡았다. 차가운 술잔의 온도가 손끝에 느끼어 왔다.
불을 지핀 방바닥은 따뜻했지만 바깥은 무서리가 내리는 차가운 늦가을 밤이었다.
북녘 멀리서 기러기가 날아올 이 차가운 밤에 고향에 두고 온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밥이나 굶지 않고 몸이나 따뜻하게 있을까 생각하니 또 숨은 눈물이 가슴 밑바닥에 솟구치려 했다.
조선 천하의 미색 소백주와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글공부를 한 죄로 과거시험에 낙방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어 급기야 벼슬을 사러 올라왔다가 3년 동안 가산을 모조리 탕진해 버리고 굶어 죽게 되었다는 식구들 편지를 받고 내려가다가 아름다운 젊은 여인 소백주의 향내 나는 품에 퐁당 빠져 장장 3년을 지내버렸으니 돌이켜보면 이건 도무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만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54)홍수개
김선비는 정말 생각할수록 자신이 쓸개 빠진 타락한 인종임을 생각하고는 가슴깊이 한숨을 삼켜 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가산을 탕진해 뇌물을 바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는 전갈을 받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한 끼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저 소백주를 만나 젊은 여인의 향기에 도취되어 일체를 망각하고 3년을 지내버렸으니 이는 도무지 상식 밖의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산을 탕진해 버린 것도 고사하고 여인에게 미쳐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버렸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늙은 어머니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마누라와 자식들은 소식도 전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며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식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될 대로 되라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빠져 희희낙락 온갖 호사를 다 누렸으니 정말로 타락한 인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책임도 다 내버리고 지나쳐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김선비는 멀리 달아나버린 제 정신이 이제야 돌아온 듯 한잔 술을 급히 들이켜고는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정승의 사랑방에서 어느 선비에게 들었던 수캐골의 난봉꾼 홍수개보다도 못한 자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자괴감에 김선비는 순간 빠져 드는 것이었다.
남도의 어느 심심산골에 홍수개(洪修開)라는 자가 살고 있었다. 홍수개의 아버지 홍진사가 한 겨울에 첫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지을 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첫 글자인 닦을 수(修)자를 따고 홍가 가문의 항렬자인 열 개(開)자를 써서 성씨가 넓을 홍(洪)이니 닦아서 넓게 펼치라는 심오한 뜻으로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수개가 수캐가 되어버렸으니, 그것도 하필 발정한 수캐가 되었으니 그 또한 기이한 하늘의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홍수개의 아버지 홍진사는 비록 학문을 닦아 향시인 진사시에 합격하고는 크게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자그마한 산골에서 문자속량이라도 깨우친 자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비록 높은 산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들어가야 할 아담한 마을에 터 잡고 살고는 있었으나 그 산골짜기 산이며 논밭이 거개가 다 홍진사 땅이었다. 못해도 백석지기가 되는 집안에 서책을 두루 섭렵한 지식인이었다. 그러기에 홍진사는 아들 수개에게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홍수개는 아버지 홍진사의 기대를 항상 저버렸다. 어려서부터 서책은 멀리하고 밖으로만 나다니며 남의 집 아이 때려놓고 울리기, 남의 집 채소 밭 망쳐 놓기, 남의 집 과일 따먹기, 남의 집 닭 토끼 잡아먹기 등 온갖 짓궂은 장난질을 일삼았다.
그때마다 홍진사는 홍수개를 붙잡아 타일렀다. 그래도 그 버릇은 더해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 철없는 강아지처럼 읽던 서책을 내팽개치고 잠시의 틈만 생기면 밖으로 줄행랑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55)혼인식
점잖은 체면에 홍진사는 아들을 잘못 둔 죄로 이웃들에게 사과를 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들 홍수개를 붙잡아 놓고 타이르고 훈계를 했다. 홍수개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으나 말짱 그때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개가 이웃집 아이를 때려 코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의 농사 짓는 가난한 부모는 홍진사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때 홍진사는 아들 홍수개를 붙들어 와서는 자기 집 커다란 기와집 기둥을 품에 안게 하고는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질을 했다.
“이놈아! 너는 이 집의 기둥이거늘 그리 못된 짓만 일삼으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냐!”
아들 홍수개를 타이르기만 하던 홍진사도 더 이상은 안 되겠던지 집 기둥을 붙들어 안게 하고는 매를 때리며 그 버릇을 고쳐보려 했던 것이다.
홍수개는 아픔에 못 이겨 징징 울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맹세 하였으나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또 일통을 내고 말았다.
서책도 읽지 않고 동네 강아지처럼 밖으로 나가 짓궂은 짓이나 좋아하더니 여자를 알 사춘기가 되자 이제는 참으로 큰일을 내는 것이었다.
동네 처녀들에게 짓궂은 농을 걸기도하고 심지어는 산 너머 다른 동네에까지 또래 아이들과 몰려가 그 동네 처녀들에게 짓궂게 말을 걸어 그 동네 사내들과 싸움질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홍수개의 나이 열여섯 도무지 공부를 하여 좋은 결과를 보기는 이미 틀렸고, 이러다가는 이 동네 저 동네 나다니며 무슨 못된 짓을 저지를까 두려워 홍진사는 홍수개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고는 부인을 시켜 혼처를 알아보게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산 너머 문벌 좋은 정씨 집안의 규수를 얻어 혼인식을 올려 주었다.
혼인식을 올려주어 부인을 보면 마음을 다 잡고 집안일에나 충실하며 조용히 잘 지내겠거니 기대 했는데 혼인식 바로 다음날부터 생트집을 잡고는 시집 온 부인 방에 들려하지를 않았다.
이유인 즉 신부가 너무 못생겼다는 것이었다.
새로 얻은 며느리 용모가 출중한 미인은 아니고 작은 키에 몸이 좀 뚱뚱 하기는 했어도 어려부터 사서삼경을 배우고 예법을 익힌 총명한 여인으로 복 있는 인상이었던 것이다.
아들 홍수개의 꼴을 본 홍진사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정씨 집안하면 이 지방에서는 권세를 누리고 있는데 올린 혼사를 깨뜨리고 절대로 신부를 물릴 수는 없었다.
홍진사는 아들 홍수개의 하는 꼴을 보고는 가슴을 쳤다.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어쩌다가 저런 못된 자식을 낳았단 말인가? 홍진사는 부인 더러 아들 홍수개를 잘 달래보라고 하고는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몸져 눕고 말았다. 아들 홍수개에 대한 상심이 컸던 것이 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기생 소백주 (56)수캐골
아버지 홍진사가 몸져 누워버렸는데도 홍수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인 방에는 들려하지 않고 이제는 대담하게 저자거리로 나가 주막집을 전전하며 거기에서 만난 온갖 여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흘에 한번은 들어왔으나 점점 닷새에 한번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집안의 돈냥이나 후려 달아나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대대로 내려온 홍진사 댁의 전답이며 재물을 모조리 주막집 여인의 그 요술 같은 밑구멍으로 다 말아 삼켜 버리려 하는 것일까!
홍수개의 어머니가 아무리 타이르고 만류를 해도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이랬다간 나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겠소!’ 하고 엄포를 딱 놓고는 전답 문서를 용케 빼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 꼴을 병석에 드러누워 겪는 홍진사는 아무래도 살고 있는 이 산골짜기 수캐골이라는 그 이름부터 본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필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수캐가 한 다리를 들고 혀를 쑥 빼고 헐떡이며 오줌을 누는 형세라 먼 옛날 전해져 내려온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언젠가 이 마을에 왔던 수염이 허연 도사가 ‘허허! 이 마을 형상이 이 암컷 저 암컷 문전이나 전전하며 그 집 문 앞에다가 한 다리를 들고 찔끔 찔끔 뜨건 오줌을 누는 천하의 난봉꾼 수캐가 나올 형상이로구만! 허허!’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끝에 마을 어른 하나가 ‘그럼 어떻게 해야 그것을 막을 수 있겠소?’ 하고 물으니 ‘저놈의 수캐 두 다리를 딱 부러뜨리면 기어서라도 가서 그 짓 할 것인데 무슨 재주로 그것을 막겠소! 으음!......... 혹여 안개라면 모를까?’ 하고 도사가 말끝을 흐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어른이 그 도사의 말을 듣고는 ‘그 안개라는 것이 무엇이오?’ 하고 다시 물으니 ‘다 헛소리외다!’ 하고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아마 암캐를 안개라고 잘못들은 것이었을까? 도대체 그 도사가 안개라고 했다는데 그 안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홍진사는 그냥 그 이야기를 어려서 듣고는 그냥 우스갯소리거니 했는데 아들 홍수개가 정말로 발정 난 수캐처럼 저리 난동을 부리고 다니니 참으로 세상사 모를 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 앓던 아버지 홍진사가 이듬해 겨울에 세상을 등져 버리자 이제 홍수개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홍수개는 마음대로 집안의 전답 문서를 가지고 이 고을 저 고을 유람을 나다니며 기생집을 전전하는 것이었다. 어디 어여쁜 여자가 있다고 소문이 난 곳이면 어떻게든 돈냥을 장만하여 들고는 열일 마다하고 쫓아가 어울려 몇날며칠이고 거기 퍼질러 앉아 즐기며 모조리 그 돈을 탕진하고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늙은 어머니는 홍수개의 불효에 기가 막혀 말이 없었고 홍수개의 아내 정씨 부인은 눈을 부라리고 덤비는 홍수개의 서슬에 말 한마디 못하고 지켜볼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생 소백주 (57)옹기장수
세월은 흘러 그새 십여 년, 그럼에도 다행히 못생겼다는 그 정씨 부인에게 간간이 잠자리는 하였던지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아 기르고 있었다.
수캐골이라 해서 그랬을까? 개들이 새끼들을 많이 낳아 기르기도 하는 것인데 참 홍수개가 자녀복은 있는가 보았다.
아버지 홍진사가 죽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고 이제 홍수개도 마흔 줄에 들어섰다. 그 많던 재산을 거의 다 그 짓으로 탕진해 버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슨 수를 내서라도 반드시 품에 안고야 말던 홍수개도 바깥출입이 현저하게 잦아들었다. 못생겼다고 대놓고 악다구니를 쓰고 포악을 하던 터라 시집 온 후로 속을 끓이며 살던 정씨 부인은 이제 남편 홍수개가 마음을 다 잡고 속이 좀 들었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터였다.
그해 겨울 아버지 홍진사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수캐골로 웬 소달구지가 하나 들어오고 있었다.
해마다 추수 끝난 이맘때면 들어오는 옹기장수 달구지였다. 가지고 온 옹기와 농부들이 추수한 곡식을 바꿔 가는 것이었다.
항상 늙은 옹기장수 부부가 소달구지에 갓 구워낸 빛나는 항아리들을 지푸라기 더미로 괴고 새끼줄로 묶어 싣고 와서 마을 어느 집 사랑방에 유숙하며 서너 날 물건을 팔고 가던 터였는데 이번에 소달구지를 끌고 수캐골로 들어온 옹기장수는 스물을 갓 넘긴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눈썹이 짙고 각진 턱을 가진 파릇한 젊은이였다.
더구나 그 옹기장수가 데리고 같이 온 아낙은 그 젊은 옹기장수의 아내인 듯 했는데 큰 키에 허리가 야들야들 버드나무 늘어진 듯 한대다가 볼에 홍조가 피어 마치 춘삼월에 복숭아꽃이 발갛게 물오른 듯 고왔다. 찬바람이 불어서 추운 날씨라 솜옷을 걸쳐 입었는데 풍만한 젖가슴 깨며 치마를 두른 엉덩이가 풍만해 보였다.
그 젊은 옹기장수 달구지를 마침 아버지 홍진사 제사 지낼 돼지를 잡을 요량으로 골목에 나온 홍수개와 맞닥뜨렸다. 홍수개는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항아리 달구지를 끌고 오는 황소 고삐를 잡은 젊은 옹기장수에게 눈이 가서 박혔다.
“허 허흠!”
홍수개는 사납게 헛기침을 했다. 좁은 골목길에 황소를 몰고 들어오는 옹기달구지가 길을 막은 것에 순간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솜옷에 짚신을 신은 젊은 옹기장수는 황소 고삐를 붙들어 잡고 피하려하였으나 피할 곳이 없었다. 그 길을 지나가야 홍진사 집 뒤에 자리한 너른 당산 느티나무 아래에다 옹기달구지를 쉬어놓고 물건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어르신 길을 막아 미안하구만요!”
그때 야들야들한 물젖은 젊은 여인네의 목소리가 달구지 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반상의 차이가 분명한 세상에서 한갓 옹기장수 따위가 감히 수캐골의 대장 홍수개 나리의 행차를 막으려 하다니 기분이 팍 상해 ‘이놈아! 어서 썩 길 비켜라!’ 하고 성질 내키는 대로 사납게 악다구니를 쓰고 찢어 발겨버리려 했는데 그만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홍수개는 순간 ‘이게 뭐야!“ 하고 두 눈이 번쩍 틔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홍수개의 눈에 들어온 그 여인은 홍수개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버렸던 것이다.
기생 소백주 (58)옹기장수 아내
홍수개는 그 여인의 얼굴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말 봄바람에 피어나는 붉은 기운 올라 발갛게 자태를 나타내는 한 송이 복숭아꽃이었다. 고요한 호수에 맑은 여울을 차고 날아올라가는 청둥오리처럼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 진달래 꽃잎처럼 부끄러운 뽀얗게 물든 뺨에서 마치 건강한 젊은 여인네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홍수개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저 형편없는 옹기장수 주제에 제법 근사한 각시를 달고 다니는구나! 절대로 그래서는 아니 되겠지! 아암! 그럼 그렇지!’
홍수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불꽃처럼 타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며 재빠르게 계책을 궁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하릴없이 못생긴 꽃잎 져가는 마누라나 쳐다보고 지내기가 짜증이 났고 그렇다고 멀리 사람들 많은 거리로 나가 만판 즐기며 지낼 엽전도 이제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런 어여쁜 꽃이 제 발로 굴러 들어왔으니 수캐골의 천하 난봉꾼 홍수개가 가만 둘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면 조선의 양녕이라던가 누구라던가 하는 왕자가 그랬다고 하던데 유부녀든 처녀든 혈족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갖은 수작을 다해 제 품에 안고야 말았다고 하는데 한갓 옹기장수 아내쯤이야 홍수개에게는 식은 죽 먹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허! 허흠! 옹기가 아주 좋네 그려! 이 옹기 다해서 얼마인가?”
홍수개는 속으로 저 옹기장수 각시를 빼앗아 차지할 갖은 수작을 재빠르게 셈하며 얼른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런 생활고에 시달리는 푼돈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의 환심을 사려면 우선 돈냥부터 던져주고 볼일이었던 것이다. 아니다. 돈냥이 많음을 과시하며 틈을 내보이며 찰싹 달라붙게 수작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아이구! 어르신! 그 말씀 지지......... 진 진짜입니까?”
홍수개의 말에 반색을 하고 비명을 지르듯 말하는 것은 오히려 젊은 옹기장수였다.
“이놈아! 너는 속고만 살아왔느냐! 너 지금 감히 누굴 의심하려 드는 것이냐!”
홍수개는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젊은 옹기장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의심의 뭉치를 절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애초에 싹을 확 분질러 잡아 꺾어 대번에 짓밟아버려야 했던 것이다.
“아이구! 어르신 아닙니다요! 아이구 잘못했습니다요!”
달구지 황소 고삐를 잡은 젊은 옹기장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수그리고 말했다.
“좋다! 그럼 나를 따라오너라!”
홍수개는 아버지 제사에 쓸 돼지를 알아보려고 아랫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자기 집 마당으로 그 옹기달구지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일단 사냥을 해서 맛나게 시식을 할양이라면 집안으로 깊숙이 끌어 들여놓고 그 다음 수를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59)유인작전(誘引作戰)
홍수개가 자기 집 마당을 향해 가자 젊은 옹기장수가 옹기달구지를 끌고 그 달구지 뒤를 젊은 여인이 뒤따랐다. 뜬금없이 집 마당으로 옹기장수 소달구지가 들어오자 홍수개의 아내 정씨 부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얼굴이 곱게 생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그 달구지 뒤로 나타나자 사태를 직감했다. 분명 남편 홍수개는 저 옹기장수의 아내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씨 부인은 앞일이 눈에 번히 보이는 듯 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저 야수 같은 남편 홍수개에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정씨 부인은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아이구!’하고 마루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 쉬며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홍수개가 마당 가운데 옹기소달구지를 멎게 하더니 옹기장수를 보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묵으면서 우선 마을 사람들에게 옹기를 팔아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다른 마을로 지게 짐을 지고 가서 팔아라! 만약 팔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다 내가 살 것이야!”
홍수개가 옹기장수를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달구지가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종착역이 수캐골이어서 이 마을로 들어오는 장사꾼들은 여기까지 달구지를 끌고 와서는 누구 집에 묵으면서 산 너머 마을로는 지게 짐을 지고 가서 여러 날 장사를 하는 것을 홍수개는 잘 알고 있었다.
“예예! 나으리!”
옹기장수가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런데 오늘과 내일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다!”
“아니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내일이 우리 선친 기일이야. 오늘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돼지를 잡을 것이야! 그 일을 좀 거들고 거기 아낙은 부엌으로 가서 음식 마련하는 일을 좀 거들게!”
홍수개는 마치 옹기장수 부부가 자기 집 하인이라도 되는 양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간교한 계략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작자들은 앞뒤 볼 것 없이 마구 대하며 사납게 소 부리듯 해야 한다는 것을 홍수개는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소는 풀어 저 우리 집 빈 외양간에 묶어 두고 짚여물을 먹여라!”
“예! 나으리!”
젊은 옹기장수는 홍수개의 말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하기야 옹기를 다 팔아준다고 하니 옹기장수에게는 그 이상 고마울 게 없을 것이었다. 홍수개의 유인작전(誘引作戰)은 간단하게 성공한 셈이었다. 도대체 홍수개는 저 꿍꿍이속으로 그 불같은 욕심을 채울 무슨 남모를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기생 소백주 (60)분리작전(分離作戰)
홍수개의 망나니짓으로 비록 망한 집안이라고는 해도 홍진사 집의 내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홍수개는 그 덕으로 여전히 이 일대에서는 행세깨나 하고 살았는데 실상은 망한 양반이라고는 하더라도 반상(班常)의 차이가 분명한 세상에서 그 양반 허울이 어디 가겠는가 말이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마을 일가친척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돼지를 잡고 마당가에 큰 무쇠 솥을 걸고 고기를 삶고 내장을 씻어 시래기를 넣어 끓였다. 장날 사온 생선 고기반찬을 찌고 각종 전을 지지고 나물을 장만하느라 사람들이 분주했다. 옹기장수도 홍수개의 아버지 기일에 맞춰 옹기 짐을 마당에 그대로 두고 부부간에 일을 거들었다.
홍수개는 옹기장수 아내를 눈 여겨 보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일을 시켰다. 호랑이가 먹이를 사냥할 때 자신의 존재를 상대가 전혀 알아보지 못하도록 거센 바람을 맞서 안고 조심스럽게 먹이를 노리듯이 홍수개도 소리 없이 그 부산하고 분주한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적을 우선 공략하기 쉬운 장소로 눈치 채지 못하게 유인을 해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무장해제 즉 분리작전(分離作戰)일 것이었다. 가시를 떼 내고 발톱을 뽑고 날카로운 이빨을 빼내고 먹기 좋게 다듬어야 했다. 그렇다면 저 옹기장수 아내의 가시와 발톱과 이빨은 무엇일까? 바로 옹기장수 남편이었다. 홍수개가 일을 성사 시키려면 그를 분리시켜내야 했다.
그러나 그 작전을 너무 쉬이 내보였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우선 안심 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어야 했다. 홍수개는 그날 돼지를 잡아 삶고 내장은 끓여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물론 옹기장수 부부도 배불리 먹도록 배려를 했다. 밤이 되어 옹기장수는 사랑방에 들어 자도록 하고 그 아내는 집안에서 일하는 집 뒤 조그마한 별채에 사는 할머니와 함께 묵게 했다. 다음날 아버지 홍진사 제삿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홍수개는 옹기장수를 불렀다. 마당가에서 고기 삶는 솥에 불을 지피고 있던 옹기장수가 홍수개 앞으로 왔다.
“지금 옹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저 산 고개 너머 호산마을 김씨 집에 좀 다녀와야겠어”
“아 예! 그 집에서 옹기가 급히 필요 한가 봅니다요”
옹기장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렇지! 방금 전갈이 왔는데 내일 장을 쑤는데 마침 항아리가 없다는구나!”
홍수개는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히고 힘주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지요”
“아참! 그리고 그 집에 가면 그 집 주인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거라! 잊어서는 안 된다!”
홍수개는 밤에 썼던 편지를 옹기장수에게 들려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삼 십리 험준한 산길 무거운 옹기 짐을 짊어지고 가면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버릴게고 오늘 밤에는 절대로 돌아오기 힘든 거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