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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잘 모르고 일본인은 잘 아는 서해안의 섬 풍도(豊島)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동해에서는 독도, 서해에서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했다.
풍도가 근대사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인데 풍도 해안은 다른 섬들과 달리 갯벌과 해수욕장이 없고 항시 수심이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천혜의 항만조건을 갖춘 이유로 일본이 탐을 냈었다고한다.
삼국시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러 오던 항로도 풍도를 지났으며, 고종실록에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직전 풍도 해상에 이양선이 출몰했다.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국왕과 왕후를 겁박하던 날인 23일 오전 11시에 일본 해군의 선발대로서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 나니와(浪速)의 3척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대가 사세보항을 나서서 군산으로 향했다.
한편, 대일전 구상을 북경에 보고한 이홍장은 7월 16일 2,0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독(오늘날의 사단장에 해당) 엽지초(葉志超)에게 전문을 띄워 해로(海路)로 철수하여 평양에 있는 우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8,000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엽지초는 해로철수를 거부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미 황해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이대로 성환에 주둔하여 부산과 경성 사이의 일본군 연락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현지 사령관의 의견은 무시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과 2,000명의 부대를 적지 한복판에 남겨 둔다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이홍장은 아산에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수송선은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 쟈딘 메디슨 상회)으로부터 빌린 애인호(愛仁號)와 비경호(飛鯨號)의 2척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예로부터 해상을 통한 보급과 수송이 승패의 관건이었다.
이점은 이홍장이나 이토나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증원군 제1진 1천3백 명이 천진의 대고(大沽)항을 떠나던 7월 21일, 원세개를 실은 평원호가 천진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일본 함대의 제1유격대가 황해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7월 24일 오전이었다.
요시노를 선두로 3척의 순양함이 일렬 종진을 지어 북상했다.
군산을 지나 아산만 입구에 이르자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하여 두 줄기 군함의 연기가 보였다. 섬은 아산만 입구의 풍도라는 작은 섬이었고, 두 척의 군함은 청국의 제원(濟遠)과 광을(廣乙)이었다.
바로 전날 아산에 증원군 1천3백 명을 양륙시킨 비경호와 애인호를 호위하기 위하여 파견된 군함이었다.
증원군은 무사히 상륙을 마쳤고, 2척의 군함은 아산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원과 광을에서도 오후 5시 못 미쳐 일본의 순양함대를 보았다.
당시에 인천과 아산 주변에는 세계 각국의 군함들이 왕래하고 있었고, 일본과 청국의 군함들도 수시로 마주치고는 하였기 때문에 청국 군함은 별다른 경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청국과 일본은 전쟁 상태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원과 광을의 함장들은 일본 함대와의 교전에 대한 지침을 하달 받지도 못하였다. 비경과 애인호의 호위 임무는 평화시에도 늘 해군에 부과되던 통상적인 임무 중 하나였다.
7월 23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 소식은 바다 위에 떠있는 2척의 군함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산만의 통과를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버티고 선 청국의 군함들 때문인지 일본의 순양함 3척이 정지하고 닻을 내렸다.
일본의 군함들이 정지한 것은 그날 밤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사세보를 출항할 때 그들은 25일을 기하여 청국 함대와 조우하면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아직은 24일이었으므로 그들은 조용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곧 여름 해가 졌고 어둠이 다섯 척의 군함을
검은 심연의 커튼으로 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