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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으로 향한 노르만족
노르만족 중 류리크란 인물이 이끄는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러시아에서 발원해 우크라이나를 남서로 흘러 흑해에 이르는 드네프르강을 따라 항해를 이어가면서 유럽 내륙 지금의 러시아 땅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슬라브족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전쟁을 통한 접수냐, 아니면 물러나 다른 터전을 향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다. 862년 류리크는 착하게도 평화를 택해 그들과 사이좋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물론 속내는 알 수 없으나, 잉여의 땅이 있을 수 있었고, 반 협박 비슷한 말로 타일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유럽의 북서부에 원주민 슬라브족과 힘을 모아 ‘노브고로드공국’을 세운다. 그리고 대를 이어 왕의 자리를 세습하면서 그 후손들은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기 까지 현재 러시아 땅의 여러 공국의 지배가자 된다. 그리고 류리크는 러시아의 류리크왕조를 개창한 지도자로 역사에 기리 남는다. 정교회 수도승들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러시아 역사서 《러시아 원초연대기》에는 추드족, 슬라브족, 크리비치족들 대표가 바다를 건너 ‘루시인’이라고 부르는 노르만족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땅은 넓고 사계절 풍요로워 먹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없어 큰 나라로 거듭날 수 습니다. 부디 오셔서 우리를 지도하고 질서를 잡아 잘 다스려주세요.”
그들은 루시인 지도자 삼형제를 초대했다. 그 중 큰형이 바로 류리크다.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바이킹을 물리치며 나라를 지켜낸 슬라브족의 지도자가 죽자 그의 딸이 바이킹족과 결혼했다. 훗날 슬라브족이 딸을 찾아가 남편과 그 형제들을 초대해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다. 어떤 것이 정답이건 이민족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 합쳐져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며, 이로써 러시아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에게 같은 뿌리라고 정치적 동질감을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 류리크의 친척들도 합세했다는 것은 슬라브족이 나라를 부탁하기 위해 세 형제만이 초대한 것이 아니라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정설로 굳어진다. 류리크의 동생들은 어떤 연유에서건 일찍 죽고 그의 친척인 올리그가 드네프르강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점령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을 지배하면서 키예프공국을 세운다. 그리고 훗날 이곳 키예프공국 역시 류리크의 후손이 다스리게 된다. 더 동쪽으로 진군한 류리크의 후손들은 12세기 초 모스크바공국과 블라디미르공국까지 지배하면서 러시아의 류리크왕조를 이어간다. 그렇지만 이들 노르만족에 동화되지 않은 슬라브족도 있었다. 노르만과의 융합을 반대한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오늘날 폴란드를 세우는데 일조했다.
문물은 탄생과 동시에 이동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류리크와 함께 온 노르만족 일부는 드레프르강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 비잔티움제국과 교역하기도 했다. 이 과정 역시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이들 상인들로부터 몸을 피해 터전을 버린 슬라브족은 더 남쪽으로 쫓겨나야 했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발칸반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바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이다. 이들 역시 비잔틴제국의 문화와 종교, 즉 가톨릭(로마 기독교 혹은 비잔티움 정교)을 받아들이면서 동유럽의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이 외에도 노르만족은 아이슬란드를 지나 그린란드 바닷길을 항해해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디기도 했다. 콜럼부스보다 무려 500년 앞서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셈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첫 도착지 북아메리카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그 원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쟁 혹은 풍토병이나, 전염병에 의한 것으로 본다. 종교를 받아들이고 문화를 흡수하면서 유럽 내 정착했던 무리들과 달리 생김생김이 영판 딴판인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노르만족으로선 원주민과 동질감을 느끼기에 이질감이 워낙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반목과 갈등, 그리고 생판 다른 삶의 생활방식 등이 갈등을 부추겼고, 결국 북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으로 추측한다.
또 하나의 이동 마자르족과 신성로마제국
10세기 동·서프랑크왕국은 노르만족의 침략에 온전히 노출되었다. 특히 지리적 여건상 동프랑크는 노르만족뿐만 아니라 마자르족과 심지어 슬라브족의 침략에도 시달려야 했다.
9세기에 불쑥 나타난 마자르족은 중앙아시아 유목기마민족으로 훈족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들은 9세기 말 지금의 헝가리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동프랑크왕국을 위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훈족의 아틸라가 그랬던 것처럼 도이칠란트 전역은 물론, 이탈리아와 멀리 이베리아반도까지 약탈을 이어갔다. 당시 서유럽 사회는 조각보처럼 분열의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힘을 합쳐 적절하게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907년 마자르족은 도이칠란트 남동부 게르만족 일파인 바이에른족의 군대를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3년 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또 한 번 대승을 거둔다. 이를 지켜본 슬라브족은 프랑크왕국보다 마자르족과의 연대가 미래를 위해 더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외교적 관계를 끈끈하게 맺은 후 프랑크를 상대로 연합전선을 펼친다.
동프랑크는 치열한 왕위쟁탈전에 이어 내부 반란에 잠잠할 날이 없었다.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아인리히 1세의 등장으로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마자르족의 파상공세를 근근이 막아내며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인리히는 마자르족과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매년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년이란 기간동안 노력을 기울인다. 아인리히 1세는 백성을 독려해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드는 데 열정을 바치면서 군사를 강군으로 탈바꿈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다 아인리히 1세가 죽었다. 하지만 동프랑크왕국에는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르는 아인리히의 아들 작센공 오토 1세가 있었다. 그 역시 초기 왕권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동생마저도 반란에 합류해 괴롭혔다. 이 모두를 잠재운 오토 1세는 이제 그들의 천적 마자르를 향했다.
동프랑크왕국의 오토 1세가 도나우강 하류에서 마자르족과 대치했다. 작센공의 병력은 고작 1만 명에 불과했고, 마자르족은 5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마자르족은 주로 말을 탄 기병들이어서 군기도 막강했다. 반대로 오토 1세가 이끄는 가톨릭군사는 중무장한 상태라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이 전투에서 오토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대승을 거둔다. 이들 마자르족은 기동력은 막강했지만 대신 군율이 엉망이었다. 마자르족 기병들은 가톨릭군대의 물자수송 병참마차를 보자 약탈본능이 발동하면서 화급하게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앞서 말에서 내린 것이다. 오토 1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프랑크왕국 기병들은 이들을 몰살시키고, 마자르족 주력부대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참 어이없는 전쟁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마자르족의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욕심이 자초한 결정적인 패배였다. 이는 오토 1세의 아버지 아인리히가 잘 짜놓은 전략일 수도 있다. 마자르족 일련의 목적은 부족은 물론 나라가 아니라 개개인의 약탈이 먼저였다. 오토 1세는 일부러 군수물자 수송이 더 잘 보이게 한 후 마자르족을 유인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직, 더 나아가 나라의 안위마저도 팔아넘기는 역사적 인물들이 부지기수다. 짧게 보태자면 이들의 공통점은 기억의 힘을 가장 두려워한다. 민중은 나라를 위해, 혹은 나라가 지키지 못해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한다. 권력과 명예를 헌신처럼 여기며 살아간 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의연하다. 그들의 자부심은 풍족한 삶보다 올바르게 기억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친일부역자 후손들은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고 애쓴다. 기억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그들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진보하는 역사의 흐름 속 적나라한 민낯,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가 흐려지지 않게 살아간 사람들의 얼은 영원하다. 그 어떤 말과 형태로도 지울 수 없는 역사다. 작금의 정치행태를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해 지껄이고 말았다.
“그토록 포악한 적을 상대로 쟁취한 이토록 잔혹한 승리는 일찍이 없었다.”
이 전쟁을 주제로 한 10세기 역사가이자 동프랑크왕국 왕비의 친척 코르바이 비두킨트가 955년경에 쓴 《작센의 연대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머저리 마자르족을 오토 1세가 완전히 퇴패시킨 후 그 기세를 몰아 슬라브족까지 물리치면서 동유럽 일부를 평정한다. 그리고 프랑스 일부, 북부 이탈리아까지 영토를 넓힌다. 962년 이로써 도이칠란트의 동프랑크왕국 오토 1세(오토 대제)는 로마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받는다.
갑자기 신성로마제국을 이야기 한 것은 오토 1세에 의해 정복된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땅이 세르비아와 그리스, 즉 동방정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된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훗날 민족갈등과 더불어 이질적 종교분쟁으로 촉발되는 살육의 씨가 발칸반도의 땅에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민족이동을 마치며
앞서 보았듯이 일찍이 유럽이라 하는 지역 개념은 아시아라는 타자화를 만들면서, 유럽과의 대비를 통해서 형성되었으며, 그 기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인 면에서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유럽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개념에 입각하여 그 안의 많은 다양성을 은폐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유럽 내에도 다양한 갈등의 씨앗이 존재한다. 서유럽으로 일컫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적인 남부, 게르만적인 북서부, 노르만적인 북유럽, 이베리아의 지중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유럽, 유럽 내 늘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등 다양성을 용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와 터키 등 비유럽적인 요소를 내포한 국가들과의 융화되고 풀어야할 과제도 안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길고 지루한 글 읽지 마셔요^^*..
알고 나도 살아가는 데 하등에 상관없는 이따위 글을 써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늘 반가운거 아시죠?
우리 민족은 뭐여? 적어주삼... ㅎㅎㅎ
시간이 읍쓰서~~^^*.. 자네가 쓰게나!!!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