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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귀문과 덕수이씨 귀문인 ====東麟閣(동린각) 춘 향사에 참여하다==== 언 제 ;갑오(2014)년 사월 상정일(음,초팔일)<양,5월6일> 있는곳 ;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산6(281-1) (바들뫼)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는터에 항상 듣기만해오던 경주김씨 사성당 김완장군에 대하여 좀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파서 영천 임고에 있는 동린각 춘향제에 참석하여 향사의 이모 저모를 담아 카페에도 올리고 공부도 거듭 거듭해 보고자 합니다. ****사성당 김완장군에 대하여****
김완(金浣;1546~1607) 장군 : 경주김씨 . 명종1(1546)년3월 4일에 경 북 영천 자양면 노항동에서 출생. 임란후 선조가 내려준 시호는 해동소무(海東蘇武)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로전라좌수영 소속(5포: 사도,방답,녹도,여도,발포)의 서열2위(첨사)인 장수이다. 동린각 주위 건물~~~ 임진년초기 난중일기에서의 등장부터, 충무공은 김완장군을 신뢰하지않았다. 충무공은 과거 전라도 순찰사인 이광의 조방장으로 근무한적이 있었다.충무공이 발포만호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광의 수군보좌역할로 조언도 해주고 공무로 해당 부대장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동린각 설명문도~~~ 임진년초기 전라순찰사(이광)는 사도첨사 김완을 관내 수령평점(오늘날의의 개인고과인사제도)에서 최고등급을 매겨 품계가 오르게 된다.충무공은 이때 전라수군절도사로써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평시 자기관할구역(5포)에 대한 마지막 군기시찰을 나가게된다. 자양서당 건물도 담고~~~ 1592년2.19~27여도=>녹도=>발포=>사도=>방답 순으로 검열하였는데 꼼꼼한 충무공성격을 알고있는 다른 부대장은 어느정도 대비하고 있었는데 관찰사의 표창을 받은 사도군은 이를 믿고 엉성하게 대처한거같다. 자양서당 뒷쪽에 있는 소음사도 담고~~~ 2월 25일 [양력 4월 7일]<병진> 흐렸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에 탈난 곳이 많다.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줬다. 첨사(김완)를 잡아들이고 교수(고을 수령 아랫 벼슬아치)를 내어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최하인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조차 하지 못했으니 우습다.맞바람이 세게 불어 출항할 수가 없어서 그 대로 잤다.충무공은 김완장군이 못 미더운거 같다.
소음사 전면도 담고~~~ 여기에 그치지않고, 3월 20일 [양력 5월 1일]<경진> 비가 몹시 쏟아지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관방의 회계를 밝혔다. 순천 관내를 수색하는 일이 제 날짜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대 장·색리·도훈도 등 을 문책했다.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 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고흥군 봉래면)와 대평두·소평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엉터리 거 짓이다. 자양서당 설명안내문도 담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일로 흥양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기록만 보면 김완장군은 어딘지 모르게 좀 허술하고 부하들에게 고생 안시키는 인간성이 좋은, 좋게말하면 덕장의 이미지다. 명산선생 행적비도 담고~~~ 비석 가까이에서 담아 보고~~~ 몇 해전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 (개인적으로 필자는 한번도 제데로 안봤다. 아니,보고 싶지않았다.)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이웃집 아저씨정도로 묘사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대하드라마나 역사소설은 어느정도 픽션은 허용되나 큰흐름는 사실과 부합해야하거늘...... 동린각 사적비도~~~ 가까이에서도 담고~~~ 개인적으로 김0의 “칼의노래”는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이분은 난중일기를 한번이라고 읽어보고 썼는지 의심까지 든다.....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의 나라였다.요즘 광화문 충무공 동상이 오래되서 보수해야된다는 말이많은데 그 동상도 맘에 안든다. 동린각 전체 건물을~~~ 충무공을 조금 이나마 아는 사람이라면 전통에 흑각궁을 맨 모습이 진정한 충무공의 모습이리라. ) 우선 김완장군이 나서 자란곳은 경북 영천 사대부 출신이다. 사투리를 썻다면 경상도 북부지방 사투리를 썻겠지(했니껴? 안했니더!..) 임란초기 충무공은 좌우 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을 임명한다. 앞쪽 동린각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 필적이란다~~ 여러분도 아시타시피 충무공은 경계(척후)순찰을 단단히 중요시 하였다. 필자도 장교출신이지만 군대를 같다온 사람들은 경계의 중요성을 잘알것이다. 뒷쪽 동린각 현판은 영가후인권병기(선비) 글씨인데 이곳으로 옮기기전에 사용했단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수없다”
---맥아더(갠적으로으로 좋아하진 않지만)혹자는 김완장군이 충무공의 신임을 못받아서 척후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경계의 중요성을 잘아는 충무공이 허술한사람으로 척후장으로 삶을리는 만무한 것이다. 여기부터는 동린각에 있는 현판들을 담고~~~ 그리고 사실 김완장군은 그당시 엘리트들만 임명되는 선전관(국왕친위부대)출신으로, 정여립의 난때 선조를 호위했다.(육사나와도 고문관들도 간혹 있다마는..)하지만 방답첨사 이순신(입부)만큼 충무공의 신임을 얻지못하였다.(충무공의 전공장계에 번번히 차등으로 보고) 思誠堂(사성당)은 김완장군의 호란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해전까지 전라좌수영의 5포소속의 이두 첨사들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품계도 오르게 된다.그 러나 다음해(1594) 방답첨사 이순신(입부)은 충청수사로 영전하지만 김완 장군은 그대로 사도첨사에서 품계만 오른다.나이로 보면 자기보다 여덟살이나 어린데다 같은 첨사로 있다가 누구는 수군절도사까지 영전했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 좋은 김완장군은 충무공밑에서 사도첨사로써 그리고 조방장으로써 맏은바 임무를 충실히 해내는 우직함도 보인다. 이런원만한 성격때문인지 충무공 실각후 원균휘하에서 조방장으로 기용된다. 아이러니하다. 이 때문에 칠천량해전에서 일때 일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된후 통솔력부제로 원균은 완전 고립무원에 빠졌다.부하장수들이 따르질 않으니 술만 마실 수 밖에 .. 설상가상으로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때리다니..상상할수없는 일이다)억지로 출진하여 칠천량에서 참담한 패배를 맞본다.. 이때 주사조방장 김완 장군은 한후장(후퇴시 전선붕괴를 막기위해 후미를 맡아 끝까지 저항하는 임무)으로 참전 하였는데그 휘하장수는 다음과 같다.강진대장, 조라포만호(정공청),회령포만호(민정붕),남도포만호(강응표),해남대장 그러나 ..... 칠천도에서 분전한 전함은 삼도수군을 통털어 김완장군의 판옥선 단한척뿐이었다. 분전과정은 모질고도 처절했다. 다음은 김완장군이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서 기적적 생환후 보 고서를 올렸는데 그중 일부이다.400년전 김완장군의 육성을 생생하게 듣는듯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같은 달 15일에 풍세(風勢)가 불리하여 온천도(溫川島 칠천도)로 진을 옮겼는데, 16일 5경 초【경(更)은 시각의 단위로 밤을 5등분한 단위이다. 5경 초면 새벽 4시쯤 된다】에 적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포를 쏘며, 사당 이구 삼문 유정문도 담고~~~ 야경 夜驚 밤에 기습을 할 것처럼 시끄럽게 하여 상대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하니, 아군은 창황(蒼黃)하여 닻을 올리고 재빠른 자는 먼저 온천도를 나오고, 둔한 자는 아직 나오지 못하였는데, 적은 이미 주위를 둘러싸 포위하였습니다. 전라좌수영의 군량선(軍糧船)을 이미 먼저 빼앗겼는데, 주장(主將)은 조치를 잘못하여 여러 전선이 붕괴되어 절반은 북으로 진해(鎭海)로, 절반은 거제(巨濟)로 달아났습니다. 충의사를 밖았에서 담아 보고~~~ 저는 홀로 한후선(후퇴할 때에 후미를 맡아 지키는 전선)이 되어 고각(鼓角 북과 피리)을 울리고 깃발을 재촉하였는데, 제 관하(管下)의 남도포 만호(南渡浦萬戶 → 南桃浦萬戶) 강응표(姜應彪), 회령포 만호(會寧浦萬戶) 민정붕(閔廷鵬),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 정공청(鄭公淸), 해남 대장(海南代將), 강진 대장(江津代將 → 康津代將) 등이 각기 수사(水使)를 따라 이미 먼바다로 도주하여 같이 힘을 합칠 수가 없었습니다. 충의사 건물을 담고~~~ 저는 홀로 군관(軍官), 사부(射夫) 및 노자(奴子 사내종) 등과 더불어 포를 쏘고 일제히 활을 쏘아 서로 죽이며 힘을 다하여 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나갔습니다. 주장(主將)이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아! 영공(令公)께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죽을 각오를 하였으니, 가히 임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왼쪽이 충무공 이순신 영정이고 오른쪽이 사성당 김완장군 영정이다 제가 말하기를, 「적세가 이와 같이 급한데, 여러 진의 장수들은 소문만 듣고 여전히 어물쩍하며 달아나기를 임무로 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곧바로 장수 한 명을 참하여 군대에 위엄을 보이도록 하시오!」라고 하니, 주장은 이억기(李億祺)·최호(崔湖) 등을 지칭하며 말하기를, 「도주한 자들이 이미 있는데도 유독 제공(諸公)이 죽을힘을 다하여 그 공이 크니 가상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듣기를 마치고 돌아보니 적선의 선봉 2척이 100무【무(武)는 보(步)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 따라서 50보】내로 치달려 오기에 제가 배설(裵楔)과 같이 적중으로 달려들었는데, 설(楔)은 이미 배를 돌려 달아났습니다. 동린각 도유사(원장) 정종환아재의 모습도~~~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입하였으나 좌우의 제군은 와서 구원하는 자가 없이 적과 서로 부딪쳐 포를 쏘고 화살을 쏘아대던 차에, 군관 유영호(劉英豪)가 탄환에 맞아 즉사하고, 노자(奴子) 필연(必連)도 또한 탄환을 맞았으며, 군관 이춘연(李春連)도 차례로 탄환에 맞았으나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원장님 인사말씀과 집사분정을 의논하고~~~ 저도 또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하여 사졸(士卒)들이 빈주먹만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팔을 흔들어 말하기를, 「주장(主將)! 주장! 어째서 구하러 오지 않는가!」(눈물이 다 날려고하네,충무공은 1598년 "약속군중사"에서 전투시 아군의 위급합을 보고도 못본체 구원해 주지 않는 장수는 반드시 즉결처분 하겠다것을 예하부대장에게 공문으로 내려보내고 또 일일이 싸인까지 받았다) 하고 외치던 때에, 주장 원균(元均)은 술에 취하여 베개를 높이고 있어 기강(紀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단지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片箭) 10여 개를 쏘고 나서 노를 재촉하여 점차 물러갈 뿐이었습니다. 수사 배설(裵楔)은 역시 배멀미에 지쳐 선방(船房 선실)에 들어가 누워서 인사불성이 되어 한결같이 군관의 지휘를 따를 뿐이니 어찌 위급한 어려움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군관·사부 등은 나란히 서서 관망만 할 뿐으로 전혀 화살을 쏠 뜻이 없었고, 사도 첨사(蛇島僉使 → 蛇渡僉使) 김익귀(金益貴)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집사분정표 작성하고~~~ 저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왜적 한 놈을 베고서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노자 필연(必連)이 칼을 짚고 방패에 기대어 서 있는 안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왜적 하나가 배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차에, 가슴으로 부딪쳐 물에 떨어뜨리고 필연은 그가 다시 올라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마를 칼로 찔렀으며, 포수(砲手) 박곤(朴昆) 등은 창을 쥐고서 선미(船尾)에 엎드렸다가 그 목구멍을 공격하여 세 명의 왜적이 모두 죽었습니다. 작성된 분정표를 벽에 걸고~~~ 바닷가에서부터 왜적의 무리들이 일시에 일제히 올라와 칼을 들고 돌입하던 차에, 저는 창졸간에 물에 뛰어들던 때에 빽빽이 늘어선 적의 칼날이 왼쪽 귀밑을 스쳤습니다. 저는 혹은 잠기기도 하고 혹은 뜨기도 하며 떠내려가서 죽을 뻔했는데, 마침 뜸【초둔(草芚) 띠나 부들 따위의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하나가 큰 뗏목처럼 바다에 떠내려오니, 제가 드디어 손으로 잡아당겨 몸을 의지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간신히 한 절도(絶島)에 닿았습니다. 축문도 작성하고~~~ 섬의 이름은 내서기도(乃胥?島) 혹은 어리도(於里島)라고 하였습니다. 상인(商人)이 사령(使令) 간손(艮孫)과 포수 박곤(朴昆) 등이 이미 먼저 그 곳에 도착하여 있다고 하기에 같이 수풀 속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바라보니 주사(舟師)의 전선들이 일제히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으니 보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하였습니다. 먼저 동린각에 대한 역사를 유사가 낭독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서로를 베개삼아 칡넝쿨 아래 누웠는데 종놈은 탄환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불시에 바로 죽으니 심히 모질고 모질었습니다. 다음은 칠천량 패전직후 체찰사 이원익의 칠천량전투 경과보고서중 일부이다.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치계하기를,임진난 이후 분궤(奔潰)한 장관(將官)들을 한 사람도 군법에 의해 치죄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 와서는 관습이 되어 보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주사들은 처음부터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뿐이었습니다(전사한것으로 잘못알고있다). 많은 장수들에게 모두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실제로 원균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임란후 김완장군은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고향 근처 요해처로 발령내 줄것을 요청하지만 함안군수로 발령나 근무하다, 칠천량해전에서의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1607년 향년 62세로 고향에서 한편의 드라마같은 생을 마감하셨다. 김달헌씨 예비 창홀하시고~~~ 집례 김회번씨 창홀하시고~~~ 동린각 홀기문도~~~ 홀기문 내용도~~~ 제집사 재배하시고~~~ 창홀에 맞추어 서립하시고~~~ 축관 이익순씨 독축 하시고~~~ 연정과 진설도 담아 보고~~~ 헌관 재배하시고~~~ 전체 기념촬영도~~~ 신임 유사 이익순씨 모습을~~~ 신임 도유사 조영호씨 모습도~~~ 유사 망지를~~~ 도유사(원장) 망지도~~~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꼭 임난에 참전한 느낌입니다.
행사가 김씨만 하는게 아니었군요.
사실은 경주김씨 문중에서



전체를 주도하는데 덕수이씨 문중에선
아는지 모르는지 한분도 안보이길래 집안 어른분께
여쭈어 보았드니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주벽으로 모시긴
했으나 사성당 김완장군을 추모하는데 들러리로 모신형태라
설명하는분도 계셨다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