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이 무너진 위기의 조선을 위한 개혁안 ⌜의삼정구폐책⌟
조선은 1~3%의 양반사대부, 선비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말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니, 도학정치니, 요순의 교화정치를 말하였지만 실상 조선 500년 동안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서얼차별, 남녀차별을 비롯해서 노비를 양산하는 종모법과 종부법 등 악법을 만들었다. 지식인의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조선사회는 차별의 악법과 농자지천하대자본을 부르짖으며 상업과 공업을 억제하면서 1~3%에 해당하는 양반사대부의 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천국 아래에는 그 천국을 떠바치기 위해서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하는 농민, 천민과 노비가 있었다. 그들은 18세기 초 홍경래난을 이후로 대담하게 봉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철종의 말년에 해당하는 1862년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한 해 동안 조선은 끊이지 않는 백성들의 봉기로 소란하였다. 경상도에서 18개 마을, 전라도는 54개 마을, 충청도는 43개 마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함경도 함흥에서, 경기도 광주에서도, 황해도 황주에서도 연이어 봉기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3일 마다 한번 씩 봉기가 일어났으니 조선은 날마다 가마솥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누가 봐도 위태하였다.
봉기의 가장 큰 원인은 삼정의 문란에 있었다. 삼정은 국가 세금제도로 토지에 매기는 조세인 전정(田政), 군사 경비로 거두는 군포(軍布), 지방재정을 보충하는 환곡(還穀)이다. 조세를 규정보다 많이 거두어들이거나 군 대상자가 아닌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군포를 거두거나 환곡을 대여할 때는 불량한 쌀을 조금 주고 회수할 때는 규정보다 더 많이 받는 불법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파탄 난 가정과 파탄 난 사람들이 고향과 친척을 등지고 팔도 유민이 되어 떠돌았다.
마침내 쌓이고 쌓인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1861녀뉴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 단성에서 일이 터졌다. 단성의 수령과 아전들이 1861년에 환곡 10만여 섬의 절반을 착복했다. 암행어사 이인명이 이를 적발해 2만 7천 섬을 물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아전들은 곡식이 아닌 솔가지, 짚, 풀, 겨 따위로 나락 섬을 채웠다. 이인명은 이를 발견했지만 가벼운 처벌만하고 그냥 떠났다.
양반인 김인섭이 경상감사와 단성현감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모르는 척 했다. 김인섭과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현감과 아전들은 그들을 마구 구타하였다. 성난 주민들은 아전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장터로 나와 횃불을 든 채 함성을 질렀다. 현감이 새로 부임해 왔지만 주민들이 기성의 아전들을 쫓아내고 새로 임명하는 등 고을 행정을 마비시켰다.
단성의 소식이 진주로 전해졌다. 진주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진주에서는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 목사 홍병원이 가렴주구를 일삼고 있었다. 이들은 인징(도피한 군역자의 군포를 연대책임으로 이웃에게 받아내는 수탈) 따위의 방법을 써서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 미수금을 이웃 부잣집에 가서 뜯어냈다.
단성의 초군(樵軍) 유계춘이 통문을 돌리고 우두머리가 되어 지리산 초군을 비롯해 종과 주민 수만 명을 이끌고 1월 28일에 진주성을 포위했다. 이미 아전들과 토호들은 도망을 가고 없었다. 봉기군들은 길가에서 양반을 보면 짓밟고 옷을 찢었다.
그들은 정터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을 설득하러 나온 백낙신을 잡아 땅에 꿇리고 죄상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아전 2명을 불속에 던졌다. 그리고 아전의 아들이 아버지를 구하려 하자 짓밟아 죽였다. 악질 지주 집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마음껏 분풀이를 한 후에 백낙신과 홍병원에게 앞으로 부정 착취를 하지 않고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겠다는 증명서를 받고 2월 23일에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안핵사로 진주에 내려가서 사건을 조사한 박규수는 아래와 같이 보고를 하였다.
병영에서 환곡을 들어먹고 나서 때를 틈타 한 고을의 두민(나이가 많고 식견이 뛰어난 사람)을 불러 모아 술과 밥을 먹이며 유인하거나 가옥에 가두어 협박하면서 6만냥 가량의 돈을 집집에 배당해 백징(이유가 없는 세금을 강제로 거두는 일)하려 했다. 이에 민심이 끓어오르고 사람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임술록>
단성에서 시작된 민란이 진주를 거쳐 영남 일대로. 호남지방으로, 호서지방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가을 추수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삼남의 봉기자들은 삼정에 따른 폐단의 시정을 요구했고, 폐단을 저지른 수령과 아전들을 죽이거나 내쫓았고, 관련 문서를 불태우고 곡식을 꺼내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무고한 죄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수령을 죽이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되므로 삼갔고 불량한 아전들과 토호 양반들을 많이 죽였다.
조선 조정은 군사를 동원해 봉기군을 토벌할 힘도 없었으나 관례에 따라 안핵사나 선무사를 보내 경과를 조사하기도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도 하며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봉기군들의 기세가 숙어지면 포졸을 보내서 주모자급을 효수하고 공모자급은 호되게 매를 때려 유배를 보냈다. 진주에서 유계춘 등 10여 명, 익산에서도 주모자 1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넘게 효수되었다.
박규수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철종은 왕실 내탕금을 구휼비로 기부하였으며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엄명하였다. 당시 세도가문인 안동 김 씨들은 어쩔 수 없이 <삼정이정청>의 설치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서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고 부분적인 개혁방안도 추수기에는 지키지 않았다.
당시 조정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구폐책>를 널리 구하고 있었다.
강위는 당시 전라도 무주에서 일어난 봉기군들의 격문 요청을 거부하였는바 그들의 방화로 집을 잃게 되어 전국을 떠돌았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민심을 느끼며 봉기의 조짐을 피부로 느꼈다. 그는 친구 정성조의 강제로 삼정의 개혁안인 <의삼정구폐책>을 써서 삼정이정청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후에 마음이 바꾸어 저술을 불태웠다.
2부로 계속됨.
2023.3.10.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1)이이화저, 민란의 시대 조선의 마지막 100년, 한겨레출판, 2017
2)고성훈 외 7인, 민란의 시대 조선시대의 민란과 변란들, 가람기획,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