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촌교회는 3.13 용정만세 시위, 15만원 탈취사건, 간도국민회 북부지부 본부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1907년에 이화춘과 남공선이 중심이 되어 와룡동교회를 세웠습니다. 와룡동은 연길 서쪽에 위치하며 연변대학 뒷산 넘어에 있습니다. 와룡동교회는 우리에게 알려진 명동교회 보다 2년 먼저 세워졌습니다.
와룡동교회 터입니다. 와룡동 끝 지점에 노인아파트가 있고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정원 좌측에 창고 같은 두 개의 건물이 있는 자리가 바로 교회 터입니다.
2019년에 창동중학교 출신 그 마을 어르신의 안내로 교회터와 처음 창동학교터 그리고 경신대학살에 소실된 이후에 다시 지어진 새 학교 터를 확인하였습니다.
안테나 앞으로 작은 숲이 우거진 곳이 처음 학교 터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다음 해에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학생 전체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무료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15만원 탈취사건으로 유명한 최봉설과 한상호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1919년 3.13만세 시위 때 순국한 최익선도 당시 창동학교 교사였습니다.
와룡교회 뜰이었던 자리에 세워진 아파트.
청녹색 지붕이 있는 집 뒤에서 부터 앞으로 이어지는 빈터 100미터 정도가 1920년 경신대학살 후에 새로 지은 창동학교 자리입니다. 노인아파트 정문을 바라보며 좌측에 있습니다.
경신대학살에 대한 간략한 기록입니다. 교회 10개, 학교 59개소라고 했지만 김춘선의 기록에 보면 불에 탄 교회가 26개로 나옵니다. 그러나 제가 조사한 바로는 불에탄 교회가 50개에 가깝습니다. 당시 10인 이하의 교회는 기도처라고 불렀고 대부분 초옥이었기에 계수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경신대학살 이후 간도에 불어닥친 공산주의 열풍으로 교회가 나뉩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진보사회주의 교회와 보수민족주의 교회로 나뉘어 갈등대립을 하느라 일본군에게 당한 피해사례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최봉설의 생가 터. 지금은 밭이 되었습니다.
최봉설 생가 터 뒤로 보이는 산이 와룡산 입니다. 낮은 산이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서 와룡산이라고 지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와룡동 입니다.
90년대 이전까지 만해도 순수한 조선인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다 이사를 나갔습니다.
15만원 탈취 직후, 임국정, 한상호, 윤준희, 최봉설이 이틀 정도 숨어 지냈던 최봉설의 생가 터입니다.
2018년 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집의 파운데이션이 분명하였고 돌과 타일 더미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터는 와룡동 최초의 주민이자 개척자이며 선구자인 최봉설의 할아버지가 닦은 터입니다.
창동학교 졸업생들이 자신들을 지도해준 은사를 길이 기억하고자 세운 은사기념비 전면입니다.
은사기념비 우측면.
은사기념비 후면.
은사기념비 좌측면
은사기념비에 대한 설명문.
창동학교 유지를 지나서 와룡산으로 올라가면 낮은 언덕에 창동학교 은사기념비가 있습니다.
은사기념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비록
창동학교와 와룡교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시작된 함경도 조선인들의 도강과 개척으로 시작된 북간도 독립운동의 역사는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간도 최고의 조직으로 조선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캐나다선교부 산하의 교회와 생명 걸고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웠던 무명의 크리스천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