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18/170420]선배, ‘75세 고아’라니요?
얼마 전 아버지를 여읜 친구가 문상을 와준 데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짤막한 형식적인 글 맨밑에 ‘고애자(孤哀子) 000 올림’이라고 쓰여 있어 경악을 했다. 고애자라니? 아무리 한문과 예법을 몰라도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살아계신 모친을 죽은 사람으로 치부했으니, 이 노릇을 어쩌랴. 그렇다고 곧바로 전화를 해 ‘망발’임을 말해주기도 거시기했다. 그것을 알면 얼마나 민망해할 것인가. 아무 생각없이 인쇄업자한테 맡기고 검토도 안했기 십상일 터.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지만, 도리어 내 입맛이 씁쓸했다. 차라리 그냥 이름만 쓴 것만 못했으니. 아버지만을 여의였을 때는 고자(孤子), 어머니만을 여의였을 때는 애자(哀子), 두 분 모두 여의어 ‘진짜 고아’가 되었을 때에는 고애자(孤哀子)라 쓰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상주(喪主)들은 삼베상복(喪服)을 입었거늘, 까마득한 풍습이 되고만 게 무릇 기하이던가? 맏상주 상복을 보기만 해도 어느 분이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부친상에는 상복을 입을 때 오른팔을 끼지 않았고, 모친상에는 왼팔을 끼지 않았다. 하나마나한 소리.
각설하고, 며칠 전 언론사의 고참선배(1943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5세이다)가 모친상을 당했는데, ‘위로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는 제목으로 A4 2장에 빽빽이 뭉클한 사연을 보내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92세로 돌아가신 모친은 파킨스병으로 15년을 누워계셨다 한다. 부친은 95세로 3년 전인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75세 고아’가 된 것이다. ‘70대에 고아가 됐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복 받았다’는 농반 진반 친구들의 말에 희미하게 웃음으로 답했지만, 가슴속은 허전하고 슬펐다면서 ‘비바람 불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드넓은 광야에 홀로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부여잡을 나뭇가지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함에 외롭고 두려웠다고 했다. 10살난 증손녀가 빈소에 엎드려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증조할머니, 하늘나라는 편하신가요? 이제 아프지도 않으시고 좋은 나날 보내세요.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천국에서는 저의 모습이 보이나요? 보이신다면 제가 쓴 편지를 보아주세요. 안그러면 제 꿈에라도 나타나주세요. 보고 싶어요’)와 함께 제 머리핀을 선물로 영정 앞에 바쳤다는 사연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장문의 편지는 선배가 모친과 함께 겪은 한국전쟁 때의 가슴 아픈 사연으로 얼룩져 나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했다. 19세에 시집와 20세에 선배를 낳았다는 모친은 그 밑으로 아들 셋을 더 낳았는데, 전쟁이 터지자 피란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8살인 선배는 젖먹이 막내동생을 업고, 모친은 아픈 시어머니를 업었는데, 피란길 몇 달 사이에 선배만 살아남고 할머니와 동생 셋이 차례차례 죽었다고 한다. 6살 4살 젖먹이 세 아들과 시어머니를 거적떼기에 둘둘 말아 평택근처 이삭이 패기 시작한 남의 보리밭과 어느 산기슭에 묻은 모친은 지난해 가을 평택 서정리의 생활고를 겪는 자녀 많은 한 가정을 찾아 끼니와 약값에 보태라고 작은 봉투 하나를 전했다고 한다. 평생을 그쯤에서 아들들을 잃은 한(恨)을 갖고 살았으니, 그것으로라도 아들들의 넋을 달래는 심정이었을 터. 그런 기막히고 믿기 어려운 참상을 모친과 함께 겪은 선배이기에 막상 노모를 묻고 돌아오는 길, 더욱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사모곡(思母曲) 한 구절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니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됐던 추억일랑 훌훌 털어버리시고 편안히 주무세요. 아버지 곁에서“
에세이에 다름 아닌 감사의 글은 마지막으로 맑은 시심(詩心)까지 들어내셨다. “흙 채워 잔디 덮고 꼭꼭 밝아가며 봉분을 쌓고 되돌아오는 산모퉁이 그늘에서는 남의 심정도 모르는 어린 벚꽃들이방긋방긋 하얀 이를 드러내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공허한 마음에 한결 위로가 됐습니다. (중략) 조문해주신 여러 분들의 위로와 격려 잊지 않겠습니다. 기쁠 때나 슬픈 일 당하셨을 때 달려가마음의 빚을 덜 수 있도록 기별해 주십시오. ‘75세 고아’가 엎드려 인사드립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정이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아픈 감사의 글을 접하고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또한 최근에 서예가로부터 받은 ‘애일당(愛日堂)’이라는 편액도 떠올랐다. 이 시대, 효(孝)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조선시대 농암 이현보라는 선비는 칠순의 나이에도 오직 부모님을 위하여 부친의 친구 9명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고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드렸다던가. 애일당의 뜻도 농암의 ‘애일지성(愛日之誠)’에서 온 것. ‘날이 가는 것을 아끼며 효도하는 정성’을 멈출 수 없었다는 ‘조선 제일 가는 애일효자’ 농암의 뜻을 본받고자, 나같은 불효자도 편액을 만들었거늘. 나도 두 분이 돌아가시면 선배처럼 ‘감동적인’ 감사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돌아가시면 모든 게 다 부질없거늘, 살아서 잘 섬기는 게 ‘참효도’라고 옛 사람들은 시조로도 남겼거늘. 이 초저녁,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선배님, 진짜 복 많은 것 아시죠? 솔직히 호상(好喪)이잖아요? 얼른 마음 추스르시고 조만간 광화문에서 약주 한 잔 하시죠. 쐬주 각1병!
첫댓글 우천, 4월 광명동굴 산행도 좀 쓰지
시인이 시적으로 운문하시압. 나야 출발지에서부터 지각으로 잘 모르지 않남.
역시 알록달록의 글은 우리의 정이 뭉씬 풍겨서 좋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