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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 노벨문학상 특집)_현대문학
루이스 그릭, 왜 당신인가?
양 균 원 (시인, 대진대 영문과 교수)
1.
202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루이스 그릭(Louis Glück)이다. 미국인, 여성, 시인이라는 세 가지 특이점이 있다. 노벨상은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행사를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유럽에 자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가깝고도 멀다. 미국적인 가치와 유럽적인 가치는 한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 듯해도 상치하고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문화적 성장은 유럽적인 것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심미적 기준을 찾아가는 노정이랄 수 있다. 그 과정은 순수와 경험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순수는 선입견 없이 대상을 대하고 현실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힘일 수 있지만 무지와 연결될 수 있다. 경험은 축적된 지혜와 세련된 형식을 드러낼 수 있지만 허식과 권위 그리고 위계적 질서를 강압할 수 있다. 문학세계의 중심이 여전히 유럽이어야한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미국적 가치에 노벨상을 통해 세계적 권위를 인정해주는 일이 탐탁찮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쟁쟁한 미국시인들 사이에서 그릭이 선정된 것은 아마 그녀의 시가 상대적으로 보편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지난 결정들에 대한 균형과 보정의 자세에서 나온 듯하다. 유럽과 아시아 및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미국의 작가를, 남성에 대하여 여성을, 소설이나 드라마에 대하여 시를 선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로 소설가들에게 그리고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을 고려하면 오랜만이고 이례적이다. 경제, 정치, 문화 등에서 미국은 세계의 구심점일 수 있다. 그런 국가의 여성 시인에게 27년만에 노벨문학상이 주어지고 있다.
수상자 선정은 완벽하게 객관적인 기준을 상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에 의존하게 된다. 한 해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핍과 배제는 다른 해의 선택에 의해 보완되면서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시인들만 인정하지 않는) 죽어가는 시의 세상에 잠깐 푸른 하늘이 열린 듯하다. 차제에 그릭의 시를 통해 시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싶은, 가을 초입이다.
루이스 그릭이라는 선택이 무엇에 대한 균형으로서 이뤄졌는가를 살피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선택의 정치적 맥락보다 그것이 열어주는 가능성을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선정위원회에서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그릭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개별적 존재를 보편적으로 만들어주는 명백한 시적 목소리”(for her unmistakable poetic voice that with austere beauty makes individual existence universal)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노벨상의 위엄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평가는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왜 노벨상이 그릭에게 돌아갔는가? 그릭은 미국 내에서는 상당히 잘 알려진 편에 속한다. 1993년에 시집 『야생 붓꽃』(The Wild Iris)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 『충직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으로 전미도서상을 획득했다. 이외 여러 저명한 상을 수상했고 시집이 12권, 평론집이 2권, 그리고 그녀에 관한 평론 및 논문 모음집이 1권 나와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독자와 출판계의 주목을 받아온 게 사실이지만 오늘날 미국 내 생존 시인들 중에서 그녀가 단연 월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릭은 노벨상을 탈만 하지만 그만한 수준의 시인들이 미국 내에 그리고 세계 곳곳에 다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199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퓰리처상 수상 시인들 그리고 일부 동시대 전미도서상 시인들을 그들의 수상 시집을 중심으로 시를 서너 편씩이나마 완역하고 평설하여 국내에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그렇게 다룬 40여명의 시인들 가운데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시인들이 그릭 외에 여럿 있었다. 그릭에 대하여는 2009년의 논문 「자아의 부재에서 목소리를 내다」를 통해 다소의 갈증을 해소한 적이 있다. 다수의 시인들에 대하여 누가 우위냐고 물을 수도, 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메이저인가 마이너인가 대강의 판가름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메이저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시인들을 함께 모아두고 우열을 가르는 일은 필요악일지언정 시의 정신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우위 대신에 차이의 지점에 집중하는 일이 더 가치 있다. 필자가 그릭에게서 발견하는 강점은 그 차이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
2.
그릭은 “명백한 시적 목소리”를 낸다. 그녀의 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못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투명해 보인다. 구문이 간결하고 단어가 평이하여 쉽게 해석되는 듯하다. 그 목소리는 “개별적 존재”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고백적 방식에서 “명백한” 느낌이 더욱 강화된다. 퓰리처상 수상시집의 표제시 「야생 붓꽃」(“The Wild Iris”)은 개인적 목소리가 명백한 언어를 통해 투명하게 제시되는 특징적 화법을 잘 보여준다.
고통의 끝에
문이 있었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이 죽음이라 부는 것을
기억해요.
머리 위, 소음들, 소나무 가지들이 움직이는 소리들.
그 후의 정적. 연약한 햇살이
마른 표면 위에서 깜박였어요.
어둔 땅속에 묻힌
의식으로
생존한다는 것,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그때 끝이 났어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으로 존재하면서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땅이
약간 휘었어요. 그러자 내게 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낮은 관목들 속으로 돌진했어요.
저 세상에서 돌아오는 통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당신에게 말하지요, 내가 다시 말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망각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되돌아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내 삶의 중심에서
담청색 바닷물에 얹힌 심청색 그림자들,
커다란 샘물이 솟았지요.
At the end of my suffering
there was a door.
Hear me out: that which you call death
I remember.
Overhead, noises, branches of the pine shifting.
Then nothing. The weak sun
flickered over the dry surface.
It is terrible to survive
as consciousness
buried in the dark earth.
Then it was over: that which you fear, being
a soul and unable
to speak, ending abruptly, the stiff earth
bending a little. And what I took to be
birds darting in low shrubs.
You who do not remember
passage from the other world
I tell you I could speak again: whatever
returns from oblivion returns
to find a voice:
from the center of my life came
a great fountain, deep blue
shadows on azure seawater. (Wild Iris)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명백한 언어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에 필수적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다. 서정시는 흔히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야생 붓꽃」은 고통, 죽음, 기억과 망각, 삶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시적 제재를 다루고 있다. 화자의 목소리 또한 숱한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독자를 향하여 마음을 터놓는 고백적 어투여서 익숙하다 못해 친근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이고 그래서 좋은 시라고 말해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가지고 평가하자면 주변의 모든 시인들이 다 그렇다고 말해도 그만일 것 같다.
「야생 붓꽃」의 목소리는 친숙하게 다가와 독자의 정서를 흔들다 지나가는 듯하지만 섬뜩 돌아서게 만들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낯선 울림을 끌고 있다. 첫 읽기에서 화자는 고통을 통과해가는 우리 중의 하나쯤으로 여겨진다. 땅을 간신히 뚫고 나오는 행위는 성숙 혹은 극복의 적절한 은유로 다가온다. 거듭 읽기에서 목소리는 “야생 붓꽃”의 것임이 드러난다. 이것을 다시 감정이입의 방식에서 꽃은 그저 시인을 대체, 대변, 상징할 뿐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도 그만일 것 같은데 꽃이 꽃으로서 다뤄지는 의식적 거리가 감지된다.
섣부른 감정이입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색칠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깊숙이 들어서고 있는 문화적 전개에서 시는 정서적인 것이지만 지적 산물이기도 하다. 우선 시와 시인의 분리가 있다. 시의 화자는 꽃이다. 시집 『야생 붓꽃』에는 여러 꽃들이 등장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대상의 자리에 옮겨 앉는 환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시인이 배경으로 사라지고 대상이 전면화 되는 방식에 대한 의식적 고려에서 서정시는 개인의 독백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세상에 대한 연구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역시 서정적일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그릭의 매력일 것이다.
주제 또한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고통의 원인이 꽃이든 시인 화자든 개체의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그 개체에 제한적이거나 일회적이지 않다. “어둔 땅속에 묻힌 / 의식으로 / 생존한다는 것”은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엘리엇(T. S. E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상기시킨다. 시인에게 주어지는 삶은 이중적이다. 그는 현실의 삶 속에서 그에 억압당하지 않는 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내적 삶이 생을 추구할수록 외적 삶이 죽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경계에서 글쓰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요구되는 자세이다.
“망각에서 되돌아오는 ... 목소리”는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모티프와 연결될 수 있다. 신곡의 단테는 지옥, 연옥, 천국을 거쳐 지상으로 돌아온다. 지하세계에서 돌아온 자에게는 어떤 지혜가 주어질 수 있을까? 그 지혜를 말로 옮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지혜는 마냥 득이 되고 기쁨을 주는 걸까? 야생 붓꽃의 목소리는 숱한 주제를 끌고 올 수 있는 여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문제의식은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서구문학 전체를 배경에 두고 은은히 배어나오고 있다. 이 시 외에 「신뢰할 수 없는 화자」(“The Untrustworthy Speaker”)나 「정원」(“The Garden”) 같은 시들에서도 그릭은 목소리를 내는 일의 어려움을 핵심적 주제로 다루고 있다(필자의 논문 「자아의 부재에서 목소리를 내다―루이스 그릭」 참고 바람).
목소리를 되찾는 문제는 시인의 주체성 확립에 대한 추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야생 붓꽃」에 대하여 성급한 독자는 화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찾으려 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고 읽게 될 듯하다. 문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가 일으키는 낭만주의적 환상에 있다. 그릭에게 그것은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 간주된다. 주체성이 없는, 동일성이 배제된, 내가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그런 자아에 대한 추구에서 그릭은 매우 색다르다. 대다수 서정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시인이지만 그 자아는 대다수 서정 시인들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흥미롭다. 매우 개인적이지만 지적으로 거리가 유지되어 관찰되고 있다. 자아를 표출, 분출하는 데 관심이 주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자아가 부재하는 방식을 탐문하고 확인하는 데서 큰 고통과 희열을 만끽한다. 시인 혹은 화자의 자아의 중심에서 목소리가 발화된다는 환상 혹은 가정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흥미롭게도 그릭의 시에서는 그런 목소리가 대다수 혁신적 시인들이 전개하고 있는 분열, 지그재그, 파편의 나열, 침묵과 공백의 개입 등이 없이 차분하고 정연하게 들려온다.
3.
아래에 놓이는 시는 2019년 봄 “포지션 문학회”가 주관하여 16주에 걸쳐 진행되었던 미국 시 읽기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잡지에 인쇄되어 국내 독자에게 소개되는 것은 이곳 『현대문학』이 처음일 것 같다. 그때 그릭은 독회 참가자들에게 중량감 있는 당대 미국시인들 가운데 한 명에 그쳤는데 오늘은 어쩐지 지상의 모든 시인들을 대변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릭은 지상의 시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아래에 오는 시 또한 지상의 뛰어난 시들 가운데 한 편일 것이다.
빈잔
원하는 게 많았는데 얻은 것도 많았던 때가 있었어요.
원하는 게 많았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때가 있었어요.
그 사이에는? 우산 몇 개가 실내에 펼쳐져 있지요.
신발 한 켤레가 실수로 식탁에 놓여 있어요.
아 잘못됐어요, 틀려먹었어요—그게 제 본성이었던 거죠. 무정하고
쌀쌀맞았어요. 이기적인데다
포악스러울 정도로 완고했고요.
하지만 난 항상 그런 인간이었던 거죠, 유년시절조차 그랬으니까.
검은 머리, 왜소한 체격, 다른 애들이 무서워했어요.
변함없이 늘 그랬어요. 유리잔 안쪽에서, 밤사이에
운명의 추상적 물결이
만조에서 간조로 바뀌었지요.
그것은 바다였을까요? 어쩌면, 천상의 힘에 대한
응답이었을지도 모르죠. 안전을 위해,
기도했어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공포로 시작해서
도덕적 자기도취로 성숙했던 어떤 것이 사실은
실제적 인간 성장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거라, 여겨졌어요. 아마도
이게 친구들이 의미했던 것이겠지요,
내 손을 잡으면서, 그들은 말했죠, 내가 받아들였던
그 믿어지지 않는 개지랄, 그 학대에 대해 이해한다고, 그들의 말이
풍기는 속뜻은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약간 환자라는 거였죠,
그토록 적은 걸 위해 그토록 많은 걸 줘 버리다니, 판단한 거죠.
그런데 그들이 (내 손을 꽉 쥐면서) 의도했던 뜻은 내가 선하다는 것—
연민에 휩싸인 괴물이 아니라 좋은 친구요, 인간이라는 것, 그런 거였죠.
난 불쌍하지 않았거든요! 내 존재는 뚜렷했어요,
여왕이나 성인 같았지요.
뭐, 전적으로 그 일 덕택에 흥미로운 추측을 하게 되지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결정적인 것은 노력의 가치를 믿는 것,
어떤 좋은 일이 그저 시도하는 데서 일어나리라 믿는 것,
설득하거나 유혹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 타락한 자들,
그들에 의해 전혀 오염되지 않은 어떤 좋은 일이—
이게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요?
홀로, 두려움에 싸여, 운명을 어쩌지 못하고
깜깜한 우주에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우리가 가진 것이란 사실상 뭔가요?
사다리와 신발을 갖춘 슬픈 속임수들,
소금으로 행하는 속임수들,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덕성 함양의 시도들.
그 위대한 세력들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이란 뭔가요?
결국 드는 생각은 바로 이 질문 탓에
거기 해안가에서, 아가멤논이, 채비를 갖춘 희랍 선단이,
고요한 항구 너머 불가시(不可視)의 바다가,
치명적이고 불안정한 미래가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거예요. 그걸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다니
그는 바보였지요.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을 거예요,
저에겐 아무 것도 없사오니, 당신의 자비를 구하나이다.
The Empty Glass
I asked for much; I received much.
I asked for much; I received little, I received
next to nothing.
And between? A few umbrellas opened indoors.
A pair of shoes by mistake on the kitchen table.
O wrong, wrong—it was my nature. I was
hard-hearted, remote. I was
selfish, rigid to the point of tyranny.
But I was always that person, even in early childhood.
Small, dark-haired, dreaded by the other children.
I never changed. Inside the glass, the abstract
tide of fortune turned
from high to low overnight.
Was it the sea? Responding, maybe,
to celestial force? To be safe,
I prayed. I tried to be a better person.
Soon it seemed to me that what began as terror
and matured into moral narcissism
might have become in fact
actual human growth. Maybe
this is what my friends meant, taking my hand,
telling me they understood
the abuse, the incredible shit I accepted,
implying (so I once thought) I was a little sick
to give so much for so little.
Whereas they meant I was good (clasping my hand intensely)—
a good friend and person, not a creature of pathos.
I was not pathetic! I was writ large,
like a queen or a saint.
Well, it all makes for interesting conjecture.
And it occurs to me that what is crucial is to believe
in effort, to believe some good will come of simply trying,
a good completely untainted by the corrupt initiating impulse
to persuade or seduce— What are we without this?
Whirling in the dark universe,
alone, afraid, unable to influence fate— What do we have really?
Sad tricks with ladders and shoes,
tricks with salt, impurely motivated recurring
attempts to build character.
What do we have to appease the great forces?
And I think in the end this was the question
that destroyed Agamemnon, there on the beach,
the Greek ships at the ready, the sea
invisible beyond the serene harbor, the future
lethal, unstable: he was a fool, thinking
it could be controlled. He should have said
I have nothing, I am at your mercy. (Seven Ages)
화자가 인생을 회고한다. 자전적 내용이 바탕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화자가 시인이라면 그릭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의 전체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구어 투로 내던지듯 하면서 평형 구문의 전개가 화자가 취해온 두 입지를 대조, 요약한다. “원하는 게 많았는데 얻은 것도 많았던 때”는 세상의 요구에 탁월하게 반응하여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부상을 받았던 시절을 뜻한다. 이에 대조적으로 “원하는 게 많았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때는 뒤에 오는 시행들에서 화자가 새롭게 택한 입지의 결과인 듯하다. 세상에 저항하고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방식에서, 그 방식의 무기로서 선택한 시의 길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이 순응의 대가로 주는 것과 무관할 것이다. 시의 길에서 추구하는 것은 세상의 길에서 추구하는 것과 어긋날 것이다. 일단 방향이 새로 잡히고 새롭게 원하게 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시가, 진리가, 잡히지 않는 자의 정체가, 그럴 것이다. 두 개의 입지 사이에는 긴 혼돈이 존재한다.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는 “식탁”에 실수로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다. 고통을 직접 토로하지 않아도, 에둘러 무심히 말하는 듯해도, “우산 몇 개가 실내에” 펼쳐진 자리가 정돈의 부재에 처한 억압의 느낌을 여실히 전한다.
세상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선택 탓인 듯하고 또한 운명의 결과인 듯하다. 첫 입지에서 다른 입지로 옮겨가는 선택은 오롯이 화자의 것이다. 그렇지만“항상 그런 인간”으로 살아온 화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욕망이 작동하였으리라. 자신에게 진실한 목소리를 찾아 세상의 보수와 칭찬을 거부하는 것은 “본성”이었고 “포악스러울 정도로 완고”한 것이었다. 그러다 “유리잔 안쪽에서, 밤사이에 / 운명의 추상적 물결이 / 만조에서 간조로”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운명의 추상적 물결”에 휩쓸린 적이 있는가요?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물결에 실려 가면서 오히려 해방되는 느낌을 만끽한 적이 있는가요? 화자는 세상의 실패자가 되어 가는 고통과 운명의 대행자가 되어 가는 희열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운명을 바꿔놓는 물결은 “바다”이고 그에 따르는 일이 어쩌면 “천상의 힘에 대한 / 응답”이었을 거라고 회상한다. 한때 “안전”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제 그 입지를 버리게 되자 “공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화자는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저항의 정신에 몰입하면서 “도덕적 자기도취”에 빠졌다. 그런 과정이 그를 “실제적 인간 성장”으로 이끌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화자는 “환자”였다. 누군가에게 병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약이 될 수 있다. 친구들에게 그리고 간혹 자신에게도 정상적이 못했던 자는 그 병을 앓음으로써 건강을 찾고 있다. “난 불쌍하지 않았거든요! 내 존재는 뚜렷했어요,” 이 외침이 화자가 자신의 일생에 긋는 밑줄이다. 극복의 과정에서 화자는 “흥미로운 추측”을 추출해 낸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은 노력의 가치를 믿는 것”이라는 짐작은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조용한 결의를 품고 있다.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설득하거나 유혹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 타락한 자들”에게 오염되지 않는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기대하게 된다. 화자가 “오염”이라고 칭하면서 거부하는 대상들에는 “사다리와 신발을 갖춘 슬픈 속임수들, / 소금으로 행하는 속임수들,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 덕성 함양의 시도들”이 포함되어 있다. 세상에는 자신을 대의나 명분을 내세워 설득하려드는 숱한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소금”을 말하고 “덕성 함양”을 내세우며 “사다리와 신발”을 갖추고 있다. “그 위대한 세력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강요한다.
하지만 화자는 “그 위대한 세력들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이란 뭔가요?”라고 묻고 있다. “위대한 세력들”은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세상의 규범들을 지칭할 수 있다. 또한 뒤따라오는 신화의 비유에서 지상의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희랍의 신들을 뜻할 수 있다. 화자의 관점에서 지상의 “덕성 함양의 시도들”이나 천상의 세력들은 우리에게 불빛이 되어줄 수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의 한계 내에서 우리는 “홀로, 두려움에 싸여, 운명을 어쩌지 못하고 / 깜깜한 우주에 소용돌이치고” 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좋은 일이 그저 시도하는 데서 일어나리라 믿는 것”일 뿐이다. 구원의 전망을 심어주고 그것으로써 유혹하는 모든 시도는 불순하다. 세상의 목적 또는 신의 뜻을 헤아리고 그로써 뭔가를 획책하는 인간의 시도는 모두 덧없다. 아가멤논은 10년을 끈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에 돌아온 직후 암살당한다. “치명적이고 불안정한 미래”가 앞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화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에겐 아무 것도 없사오니, 당신의 자비를 구하나이다.” ‘아무 것도 없음’(nothing)이 뜻하는 바는 무소유, 지적 오만의 철저한 배제, 신에 대한 인간의 자율성, 자아의 중심 등 여러 가지로 확대해 고려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염세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세계 인식이 작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절망에 허덕이고 있다고 보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고통의 통과와 모종의 성숙을 말하고 있다. 그 성숙이 세계의 요구와 기준에 부합하여 정상적 범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기존의 세상이 의존하고 약속하는 것들을 철저히 불신하는 가운데 그 ‘아무 것도 없음’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뭔가를 일궈내고 있다. 그 철저하게 파괴된 기저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무엇이 있다.
4.
왜 노벨상을 수상했는가? 어떤 매력이 있어 쟁쟁한 다른 시인들 사이에서 꼭 그릭이어야 하는가? 아주 유효한 질문이지만 어디에도 정답은 없을 듯하고 그래도 답해야하는 처지에서 이 글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릭은 서정성과 투명성이 뛰어나 대중적 호응을 끄는 힘이 있다. 이것만 가지고는 지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의 요건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릭의 시는 서정적이지만 반(反)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이 주류 서정시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들을 핵심적 제재로서 다루고 있다. 사실주의는 모종의 사실이 전제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 집단, 계급, 종족, 성별 등이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면 그 사실주의를 미덕으로 보편화 하는 게 옳은 것일까? 주체성의 환상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될 수 있다. 나의 정신은 통일되어 있고 그 동일성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일까? 편견과 주관은 물론이고 합리적 추론, 심미적 태도, 선택적 행동에까지 부지불식간에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숱한 안팎의 세력들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옳고 마땅하게 정한 듯해도 사실은 그렇게 하도록 이미 조종되고 있다면, 그런 주체성의 환상을 어떻게 다뤄야할까? 그릭의 시에 이러한 문제들이 의식적으로 다뤄지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지만 자아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부인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명의 동력을, 부재의 자아에서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주제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인은 심리적 불안을 오랫동안 치료받는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자의 접근법으로 자아를 대하고 다루는 법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자아를 취급하는 방식은 심리학적 성찰들에 토대를 두고 있고 특징적으로 고통, 고독, 부재와 연결된다. 그렇지만 비틀린 자아의 양상만을 떠올리는 것은 금물이다. 그 부재는 어떤 것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공간으로서 시인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에너지가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자아를 탐색하는 방식에서 개인적이고 딱히 이론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언어시인들처럼 실험적 시를 쓰는 이들이 전개하는 언어와는 전혀 다르지만, 여전히 세상과 자아를,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일으키는 역할에 관여하고 있다. 이것이 최근에 일어나는 저널리즘의 의문들, 그릭은 누구인가, 어떤 면에서 노벨상 수상자에 값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내가 고려해보는 답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인용문헌
Louise Glück. The Wild Iris. New York: Ecco, 1993.
_______. The Seven Ages. New York: Ecco, 2001.
작품 연보
그릭은 1943년 뉴욕 태생으로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했고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스탠포드 대학과 보스턴 대학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예일 대학 체류 작가(writer-in-residence)로서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 거주하고 있다. 퓰리처상 외에 2008년의 월리스 스티븐스 상, 2014년의 전미도서상 등 다수의 시문학상과 장려금을 받았고 2003년 의회도서관이 선정하는 계관시인이 되었으며 1999년 미국시인협회 의장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 선집 2권을 제외하고 총 12권의 시집과 2권의 산문집이 있다.
[시집]
1968: 『첫째로 태어나』(Firstborn)
1975: 『습지의 집』(The House on Marshland)
1980: 『하강 형상』(Descending Figure)
1985: 『아킬레스의 승리』(The Triumph of Achilles)
1990: 『아라라트 산』(Ararat)
1992: 『야생 붓꽃』(The Wild Iris)
1997: 『목초지』(Meadowlands)
1999: 『신생』(Vita Nova)
2001: 『일곱 시기』(The Seven Ages)
2006: 『아베르노』(Averno)
2009: 『마을 생활』(A Village Life)
2014: 『충직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
[산문집]
1994: 『증거와 이론: 시에 관한 에세이』(Proofs and Theories: Essays on Poetry)
2017: 『미국의 독창성: 시에 관한 에세이』(American Originality: Essays on Poetry)
시인의 성 “Glück”은 그뤽으로 소리 날 듯하지만 본인이 [glick]으로 발음한다. “글릭”보다 “그릭”이실제 음에 가깝다고 여겨 그렇게 적는다.
첫댓글 포문회의 브레인 양교수님의 그릭 이야기을 읽으며 낡아가는 뇌의 한부분을 수선할 수 있을까 기대합니당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