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시대의 여행
1. 머리말
2. 실학시대 문인지식인의 여행 양태
(1) 상식적 모럴 의식과의 결별
(2) 단독자의 결단으로서의 여행
(3) 젊은 선비의 몽환 여행과 무목적 여행
(4) 아집(雅集)의 환희 추구
3. 실학시대의 또 다른 여행 양태 : 실사구시의 답사여행
4. 여행지의 공간적 특성 재발견과 세계인식의 변모
(1) 금강산 여행의 열기
(2) 중국으로의 대여행 체험
(3) 일본으로의 대여행 체험
5. 유기(遊記)・유록(遊錄)과 기행가사, 그리고 기행화첩의 발달
6. 조선후기 여행 방식의 한계
7. 작은 마무리
1. 머리말
현대적 의미의 여행은 ‘떠남’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익숙했던 것이 아닌 낯선 것에 몸을 내맡기는 행위다. 그 행위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두 감정은 긴장 속에 지속된다. 미지의 시간과 공간 속을 나아가면서 여행자는 자신의 잠재된 모습을 발현하고 또 발견한다. 여행의 과정에 낯선 것들은 차츰 친숙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 친숙함이 아니다. 새롭게 발현된 자아와 새롭게 관계를 맺기 시작한 대상이 품어내는 친숙함이다. 곧, 여행은 낯설음과 친숙함의 긴장 관계를 지속시킨다.
일상의 삶이라고 하여도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들은 예상 가능한 일상 속에 잠깐 끼어들 따름이다. 따라서 돌발 상황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여행과는 다르다. 여행에서 삶과 경험은 일회성의 의미가 증폭된다.
실학 시대의 ‘여행’은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여행과 유사한 것일까? 아니면 전 시대와는 달리 새로운 양태가 분화되어 나왔는가? 단, 여기서는 ‘실학자의 여행’을 대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실학시대의 여행’을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대체로 보아, 조선중기에는 산수의 유람이 기(氣)의 확충을 추구한 도학자 성향의 사대부들이나 재야 학자들에 의해 선호하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인-지식인들은 국토의 자연미와 역사미를 탐색하고 국토 이용의 실제 문제를 자각하게 되었다. 《군현지》나 《여지전도(輿地全圖)》에서도 문사(文辭)보다 실용적․경제적 요건을 더 중요하게 목록화하였다. 따라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여행은 종전과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더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여행은 더 이상 상층 지식인의 전유물이지 않게 되었다. ‘장사꾼, 품팔이, 시골 노파들’까지도 마치 금강산을 다녀오지 않으면 사람 축에 끼지나 못하는 듯이 여겨 그곳을 찾았다. 18세기의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은 “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지만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도 결국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 감동을 글(〈遊金剛山記〉)과 화첩(《楓嶽壯遊帖》)에 담았다.
2. 실학시대 문인지식인의 여행 양태
(1) 상식적 모럴 의식과의 결별
조선전기의 산수 유람은, 퇴계와 남명의 예에서 잘 드러나듯이, 구도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문인들은 산수의 발견 그 자체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 사회의 우불우(遇不遇:시대현실에서 받아들여짐과 그렇지 못함) 사실을 가탁하였다. 이를테면 임형수(林亨秀)는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에서, 칠보산의 이름 없는 바위와 봉우리를 명명함으로써 칠보산의 승경을 온 나라 안에 알리겠다고 하였다. 자신보다 앞서 이곳에 귀양 와서 칠보산을 유람하였으나 칠보산의 이름을 나라 안에 알리지 못한 이항(李沆)과는 달리 하겠다는 것이다. 이항은 중종조에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안로(金安老), 찬성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사류를 억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삼흉(三凶)이라고 지탄하였다. 재주가 있었지만 심술(心術)이 부정해서였는지, 그는 북관에서 죽고 말았고, 칠보산의 이름을 나라 안에 알리지 못하였다고 임형수는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산수의 발견을 우불우 사실과 연계시키는 도식적 견해를 벗어던졌다. 이광려(李匡呂, 1720∼1783)의 〈뇌옹사리찬(瀨翁舍利贊)〉은 정말로 기문이다. 1776년, 큰형 광윤(匡尹)과 함께 묘향산 구경을 떠날 때 선천(宣川) 사람 전택량(田宅良, 1705~1771)이 함께 갔다. 보현사에 묵은 첫날 저녁 밤을 먹다가, 평소 술을 즐기고 여색을 밝히던 인물인 전택량에게서 치사리가 나왔다. 보현사 승려는 “공께서 어떤 수행을 하셨기에 이런 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전세의 인연인가 봅니다.”라고 추었다. 전택량은 절간 밥이라 푸성귀가 고작인데 생선 뼈 같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우물거렸다. 이광려는 보현사 승려를 넌지시 눌러, 이렇게 말하였다. “깊은 산 속에서 수행을 쌓아도 꼭 사리가 나오라는 법은 없소. 오히려 천성대로 활달하게 사는 사람 가운데 더러 이런 기특한 일이 나타난다오.”스님의 난처한 낯빛을 흘끗 보고 이광려는 덧붙였다. “옹의 집안 어른 한 분은 눈에서 사리가 나왔는데, 그러고도 십 수 년 뒤에야 돌아가셨다오. 사리가 나온 눈자위 위에는 자국이 있어서 남들이 늘 보곤 했었소.” 독룡(毒龍)[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을 제압한다고 참선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뜻이다.
전택량이 이광려를 따라 갔지만, 이광려는 묘향산 유람이 전택량 때문이라고 하였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겠지 모른다. “내가 천리 길을 온 것은 규백을 보려고 한 것인데, 이런 일까지 보게 되니, 이번 걸음은 헛걸음이 아닐 것이다.” 묘향산 유람의 의미를 이 한마디로 묘파하였다. 곧, 묘향산 유람은 임성자재(任性自在)・탄이무심(坦夷無心)의 행위였다. ‘자질구레한 일에만 조심하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부작의(不作意)의 참다운 삶을 추구하려는 일탈이었다. 산놀이하러 가서 노정이나 견문을 적지 않고, 산 어구의 절에 묵으면서 겪었던 치사리 이야기를 적은 것 자체가 기이하다면 기이하고, 천진하다면 천진하다. 한편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묘향산 소기(妙香山小記)〉에서 매우 감각적인 인상기를 남겼다.
바지를 걷어 정강마루까지 추겨 붙이고, 소매는 걷어 팔꿈치 위에 올려 밀고, 수건과 버선을 벗어서 모래판에 내던진 후 둥글넓적한 돌로 엉덩이를 고이고 잔잔한 물 가운데 발을 딛고 걸터앉았다. 잠길락 뜰락 하는 작은 나뭇잎 재는 자주 빛인데, 등은 노라며, 돌을 싸고 엉킨 이끼는 곱기가 미역과 같다. 발로 물을 베었더니 폭포가 발톱 사이에서 일어나고 입으로 물을 물어 양치질 했더니 빗줄기가 이빨에서 쏟아졌으며, 두 손으로 물을 휘저으니 물빛만 번득일 뿐 내 그림자가 없다. 눈곱을 씻고 얼굴의 술기운도 가시게 했다. 때마침 가을 구름 한 덩이가 물에 비치며 나의 정수리를 어루만진다. 갖가지 나무들이 한 가닥 계곡 길을 끼고 섰는데 멀리 보이는 하늘은 바로 폭포 위에 있어 목만 늘인다하면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위 형세가 펀펀하게 넓어진다. 어지러이 흐르는 물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여러 사람들은 아래서 내가 떨어질까 걱정하였으나 말리지 못하고, 다만 나를 바라볼 뿐 올라오지는 못한다. 내가 한걸음 더 올라가 머리를 돌려보니 손짓하며 부르는 손과 입들을 역력히 셀 수 있었고, 다섯 걸음 뒤에 머리를 돌려내려다 볼 때엔 아직도 나를 향해 쳐든 얼굴의 눈썹 언저리까지만 보였으나, 몇 걸음 뒤에 돌아 볼 때엔 다만 갓의 평면만이 가물거릴 뿐이다. 백 걸음 쯤 더 올라가서 다시 돌아보았더니 멀리 떨어진 동구의 사람들이 폭포 밑에 와 앉은 듯이 보이고 나를 보낸 폭포 밑의 사람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남보다 더 걸은 십리 길은 남보다 더 맛본 등산의 즐거움이요, 더 나아가 삶의 가치다. 여행자로서의 박제가는 계곡의 물을 발로 차고 입에 머금어 본다. 폭포 위의 바위로 올라가면서는 멀리 인물들의 모습과 주변 광경이 차츰 작아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하였다. 우리나라 한문의 서사에서 이렇게 원근법에 따라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순조 즉위년인 1800년에 박제가는 철옹(영변)에 객이 되어 있었다. 유득공과 이덕무가 묘향산 유람을 부추기자, 박제가는 9월 13일(임진), 초록 도포 차림에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자줏빛 나귀 안장에 책을 싣고 떠났다, 50세 때다. 박제가의 이 유람에는 매제 이한주(李漢柱)가 동행하였다. 이한주는 본관이 덕수로 충무공의 후예인데, 남산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잘못 날아든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박지원이 〈이몽직애사(李夢直哀辭)〉를 지었던 그 인물이다.
이 글은 하도 감각적이라서 젊은 시절의 작으로 오해되고는 한다. 이 여행 뒤 박제가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 화태(禍胎)의 육박이 이토록 감각을 섬세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묘향산을 유람하고 돌아온 이듬해 1801년(순조 원년), 박제가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네 번째 연행 길에 올랐다가,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었다는 이유로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2) 단독자의 결단으로서의 여행
조선전기, 중기의 사대부 여행은, 대부분 집단 행위였다. 예외로는 김시습의 탕유(宕遊)가 있었을 따름이다. ‘우리 집 산’인 청량산을 주행한 주세붕(周世鵬)이나 역시 고향의 산인 지리산을 종주한 조식(曺植)은, 한 사람은 기흥(奇興)을 추구하였고 한 사람은 도심(道心)을 양성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집단의 산행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를테면 주세붕은 인근 현감, 속관, 재지사족들과 함께, 늙은 기생, 피리장이, 노래하는 어린 재인, 거문고 타는 어른 여종, 아쟁 켜는 어린 여종까지 이끌고 가서 ‘탕유(宕遊)’를 즐겼다. 주세붕은 기흥(奇興)을 즐기면서 세상 욕심을 잊으려고[망기(忘機)] 하였다. 이현보가 조카 이국량(李國樑)을 통해 노래를 보내오자 젓대 소리에 맞추어 이국량에게 노래하게 시키고는, 이것이 곧 산중의 기이한 흥이라고도 하였다. 주세붕은 만월암에서 새와 다람쥐의 미세한 동작에 눈을 주었다. 새와 다람쥐의 미세한 동작에 눈을 주는 것은 곧 ‘기심을 잊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만월암의 달밤에 경험한 청량한 경계는 단독자로서 경험한 것은 아니다. 동행하는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는 체험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여행은 단독자로서의 결연한 일탈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란(鄭瀾, 1725∼1791)과 신광하(申光河, 1732~1796)라는 여행가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鄭瀾, 1725∼1791)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돌아다니고 그 체험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산의 풍치를 글로 묘사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산맥과 수맥을 표시해서 '유산기(遊山記)'를 엮었고, 화가와 문인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아 '불후첩(不朽帖)'으로 묶었다. 1780년 묘향산을 거쳐 의주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또 남쪽으로 내려와 금강산을 두루 돌아본 뒤 1781년에 서울로 와서 김홍도의 집을 방문했다.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술을 권하였다. 그들은 매일 것 없는 기분을 만끽한 그 모임을 진솔회(眞率會)라 일컬었다. 진솔회란 원래 당나라 중엽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달관으로서의 만족감을 즐기는 모임을 그렇게 이름 하였던 것이다. 정란 등은 달관도 아니면서 세상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정신의 경계를 즐겼다. 4년 뒤 1784년 12월에 정란은 경상도 안기역 찰방으로 있는 김홍도를 찾아갔는데, 60의 나이에도 기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며, 다음 해에는 한라산을 등반하겠다고 하였다. 김홍도는 닷새를 그와 함께 지낸 뒤, 4년 전 진솔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김홍도가 그린 진솔회 그림에는 정란을 동무하던 벙거지 쓴 아이와 청노새 한 마리가 나온다. 또한 정란의 금강산 여행 모습을 최북(崔北)이 그린 '산행도(山行圖)'에도 청노새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이 나온다. 정란의 여행은 곧 단독자로서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정란은 만년에 성대중(成大中)에게 '불후첩'의 서문을 받았다. 성대중은 정란을 마테오리치에게 견주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박고(博古 : 골동품에 밝음)의 사람이 있어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 마테오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 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었지만 창해의 관상을 보기를 이렇게 했다. 창해옹은 더욱 흔쾌해 하며 좋아했다. 이마두는 천하를 두루 구경했고 창해옹은 해좌(海左, 우리나라)를 두루 구경했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편관(徧觀)을 희망하였다. 편관이란 말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대인부(大人賦)〉에서 “徧覽八紘而觀四海兮, 朅度(걸도)九江越五河”라고 한 말에서 나왔으니, 편관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대인(大人)이기를 추구한 것이다. 사마상여의 〈대인부〉는, 《사기》의 단서 조항에 의하면, 한무제가 신선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제왕의 신선은 산림에 사는 바싹 마른 신선과는 다르다고 간(諫)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완적(阮籍)의 〈대인선생전〉이 말하듯이, 대인이란 《장자》에서 말하였듯이 광대한 공간을 자유자재로 운동하는 초월자를 뜻한다. 그러한 초월의 의지를 경내의 편관이란 개념으로 환치시킨 것이 조선후기 지식인의 여행 의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신광하는 시를 창포김치보다 더 좋아했다고 정약용(丁若鏞)이 말한 바로 그 시인이다. 그는 백두산 등람 이후에 백택(白澤)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묘향산(妙香山)․기달산(怾怛山, 곧 금강산)․오대산(五臺山)․속리산(俗離山)의 절정에 올라보았고 그 행로와 감흥을 시문으로 남겼다. 1778년(정조 2) 8월에 금강산 유람에 나설 때는 목만중(睦萬中)과 이용휴(李用休)․가환(家煥) 부자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가운데 이용휴의〈신문초가 금강산으로 유람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준 글(送申文初遊金剛山序)〉( 《탄만집》)은 범속한 선비들이 과거 시험 보러 서울로 몰려드는 때, 큰 비 끝에 본상(本相)을 드러낸 금강산으로 표표연하게 떠나는 신광하의 탈속한 모습을 정말 맛깔스럽게 적었다.
금강산은 이름이 높아서 유람하러 오는 거마가 답지(遝至)하여, 티끌과 먼지가 나날이 쌓여간다. 정유년(정조 즉위년, 1777년) 가을 8월에 하늘이 크게 비를 내려 한바탕 씻어내어 버리자, 본상(本相, 본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선비 가운데 문학도 있고 기이함을 좋아하는 사람인 신문초(申文初)가 그 말을 듣고 그리로 갔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비에 씻기기 전에 본 모습은 병들고 때에 찌든 얼굴이고, 지금은 세수하고 목욕하여 모습을 바꾼 것이다. 손님을 끌어들이는 시기에 문초(文初)가 가는 것이므로, 마땅하고도 다행스럽다. 문초(文初)의 동유(東遊)는 마침 국내의 과거 고시에 합격한 거기(擧人)들이 대과에 응시하러 가는 날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선인(仙人)과 범인(凡人)의 분락처(分路處, 分岐處)이기도 하다.
신광하의 동유(東遊)는 금강산의 본상, 곧 자신의 본상을 마중하러가는 행위이다. 그것도 또한 현실 초월의 한 방편으로서 단독자의 고독한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3) 젊은 선비의 몽환 여행과 무목적 여행
《옥수기(玉樹記)》의 작가로 잘 알려진 심능숙(沈能淑, 1782~1840년)은 1800년 3월 25일에 친구들과 함께 인산(仁山) 앞 작도(鵲島)로 신기루를 보러 가서, 〈유작도일기(遊鵲島日記)〉․〈신루기(蜃樓記)〉․〈신루기후서(蜃樓記後序)〉․〈신루기소전(蜃樓記小傳)〉을 지었다.
심능숙은 이백(李栢:西溪丈)․성양묵(成養黙:浩汝氏)과 함께 인산으로 가다가 인산의 서계(西溪)에서 신백현(申百顯:世之甫)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작도에서는 임위장(林衛將)이 마중하였다. 신기루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심능숙은 이백(李栢)과 홍의(洪漪)가 정한 ‘한서(漢書) 규식’을 강(講)하면서 벌주 내기를 하였다. 신백현은 대신 시를 지었고 성양묵은 이반룡(李攀龍)의 시 20수를 낭송하였다. 성양묵은 왕세정(王世貞)의 시를 섞고는 하였으므로 벌주를 많이 마셨다.
그들은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먼 바다로 나가보았다. 상선이 밤새 풍랑에 파손되어 뱃사람들이 모두 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석우(石隅)에 들러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왔다. 이백(李栢)은 병이 났다. 그래도 심능숙은 다른 이들과 함께 포구에 나가 제선(祭船)을 구경하였다. 그 다음날은 산들바람이 불고 아침 햇살이 너무 맑았다. 그러다가 정오에 이르러 바람이 멎고 해는 빛을 잃었으며 바다 기운이 눈을 어지럽혔다. 섬 가운데 작은 봉우리에 신기루가 나왔다. 마치 파릉(灞陵)에 올라 서경(西京:장안)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많은 문과 건물들이 아름답고 현란하였으며, 무기 창고나 보물 창고도 있음 직 하였다. 또 마치 신선이 산다는 십주(十洲)를 돌아보고 선계(仙界)를 엿보는 것 같았다. 황홀경을 경험한 심능숙은 술판을 벌이고 〈신루기〉를 썼다.
심능숙이 지은 〈신루기〉 계열의 이 글들은 젊은이들의 몽환적 행태를 잘 그려 보였다. 경험적 세계 자체가 신기루임을 감지한 작가는, 정통 교학이나 특정 이념을 해체하고 무목적․무지향의 의식을 글 속에 그대로 담았다. 〈신루기후서(蜃樓記後序)〉는 ‘세계)’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가질 수 없는 안타까움을 많은 감탄문과 의문문으로 표현하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념은 현실계의 일체를 부정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물(物)과 물(物), 사(事)와 사(事)는 서로 인과의 논리로 이어지지 못하고, 의식의 찰나 찰나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사유체계를 구축할 아무런 단서도 거기에는 없다.
내가 신루를 보고 나니, 신루가 진정한 세계인지, 아니면 이 세계가 하나의 신루인지 알지 못하겠다. 신루와 내가 서로를 망각한지 오래되었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망령스럽구나. 저 신루는 기(氣)다. 기로 만들어지는 것은 화주(畵廚)가 사물을 형상하는 것과 같다. 만들어 놓고서는 사라지게 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빠른가!” 하였다. 기가 이르면 형성되고 기가 소멸되면 사라지는 것은 사물의 이치다. 신(蜃)은 이 세상에서 진실로 먼저 깨달은 자와 같다. 기이하도다! 어찌하여 조화의 자루를 훔쳐서 하늘 바깥에다 한 세상을 단장해내는가! 아니면, 세상에 성시(城市)와 누대(樓臺)가 있으므로 그것을 배워서 그려놓은 것인 줄 어찌 알랴! 배워서 만들었다면 상고 시대에도 신(蜃)은 존재하였을 것이니, 어찌 요(堯)임금의 띠풀로 엮고 흙섬돌을 한 궁궐을 배우지 않고 걸(桀)의 요대(瑤臺)와 경궁(瓊宮)을 배워 만들었단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신(蜃)이 본래 선도한 것이니, 어찌 하나라의 걸(桀)만 죄가 있겠는가? 세상의 도리가 쇠퇴한 이래로 모두 궁실과 누대를 구슬로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니, 그렇다면 교활한 인간에게 반드시 그런 일이 있을 줄 알고서 신(蜃) 역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예견하여 경계토록 한 것인가? 기를 뿜어 형성하고 거두어 흩어버려서 마치 작자의 수고를 매우 애통해하고 뒷사람의 탄식을 일으키는 듯하니, 신(蜃)이 진실로 이 세상을 경계하는 것이 크도다. 슬프다! 옛부터 현성(賢聖)과 영웅으로서 이미 스러진(죽은) 자가 몇이며,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으로서 스러진 자가 몇이더냐? 성시(城市)와 누대로서 이미 사라진 것은 또 얼마인가? 그것이 올 때에 기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것이 사라질 때에 기는 어찌 그렇게 소멸해버리는가?
은혜에 눈물을 흘리고 의리에 흐느끼며, 헤어짐을 상심하고 스러져 가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 몸이 장차 완전히 이별해야 할 것은 알지 못한다. 하늘이 거칠어지고 땅이 노쇠해질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나 정이 끊어지고 혼은 사그라들고, 바다가 육지가 되고 돌이 재가 되어 이름만 남고 그림자는 사라지며, 높은 누대가 기울고 저녁 시장이 텅 비게 되는 것 같은 경우는 옛부터 그러하였으니, 한번 그림으로 그려 상상해보려고 하여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인물이나 누대는 어찌 신(蜃)이 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열아홉 해를 살면서 천고의 세월을 알았으니 무엇이 오래가고 무엇이 짧은 것인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할 것인가? 더욱이 초가 속에 거처하고 누항(陋巷)에 칩거하면서 아웅다웅 살고 죽음을 슬퍼하는 자로서 일찍이 들의 대합[신루를 만들어낸다고 전해져 온 조개]보다 못한 존재임에야 말할 게 무엇이겠는가? 나는 신(蜃)에게서 이 세계를 배우고 깨달았다. 이어 술통을 두드리며 노래하였다. “하늘 가 어느 곳인들 방초가 없으리!” 소리가 끝나기 전에 서계 어른이 왈칵 울음을 터트려 눈물을 흘렸다. 세지보는 멍청히 눈을 부비며 한참 있다가 바다 남쪽 초목 사이의 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루다!”라고.
장자와 불교에서는 세상을 몽환의 신기루로 파악함으로써, 실재의 모든 차별상을 버리고 제물(齊物)의 고차적 관념이나 만물일여(萬物一如)의 진체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심능숙은 신기루의 허환의 특성에 더욱 주목하고, 현실 감각을 부정하는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심능숙은 수 년 동안 청라동(靑蘿洞)․팔현동(八賢洞)에 은거하면서 선술(仙術)에 침잠한 일이 있다. 〈이은전(李嶾傳)〉에서는 당대의 방외인이었던 이패랭이를 입전하였다. 그는 현실계를 권태롭게 여기고 현실을 초월한 낭만적․신비적 이상향을 동경하였다.
마침내 심능숙은 〈신루기소전(蜃樓記小傳)〉까지 지었다. 그러나 입전(立傳)할 주체는 실재하지 않는다. 허환은 규정과 정의를 통하여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환으로 남는다. 정의하려 하면 할수록 그것은 허환일 따름이다. 그런데, 나를 현혹하는 신기루는 비실재일 수 있으나, 그것에 현혹당하여 그것을 뒤쫓는 나의 행위는 실재적이라는 것이 또렷이 확인된다. 신기루의 일생을 전의 형태로 기록하려는 순간에 신기루가 허환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며, 신기루가 허환임을 의식하는 자아의 존재가 직관적으로 나에게 알려진다. 이것은 ‘개별적인 나’를 자각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는 열려져 있지 않다.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로 이르러가기 위하여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야 하는가, 나의 앎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여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 신기루에 관한 심능숙의 일련의 글들에는 삶의 무상함에 대한 우수가 짙게 배어 있다. 심능숙의 신루 계열 산문은 당시 경화세족의 의식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19세기 초의 산문작가 이옥(李鈺)은 〈중흥유기총론(重興遊記總論)〉에서 유람의 이유를 ‘멋지기(佳)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 게야.”라는 말로 뭉뚱그렸다.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한 느낌을 주고 이슬이 깨끗하여 투명하게 하는 것은 8월의 멋진 절기다. 물은 힘차게 운동하고 산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북한산의 멋진 경치다. 개결하고 운치 있으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두세 사람이 모두 멋진 선비다. 이런 사람들과 여기에서 노니니, 그 노니는 것이 멋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그윽해서 멋진 것도 있고, 상쾌하여 멋진 것도 있고, 활달해서 멋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여 멋진 것도 있고, 담박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하여 멋진 것도 있다. 시끌시끌하여 멋진 것도 있고, 적막하여 멋진 것도 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 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 게야.”
경관을 대하여 느낀 감흥을 그저 ‘멋지다’라는 말로 만 표현하였다. 마치 고려시대 경기체가에서 물명(物名)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멋들어진 광경을 연상시킬 수 있었던 방법을 끌어온 듯하다. ‘멋지다’라는 말의 반목은 독자를 점점 멋진 광경 속으로 인도하는 주술(呪術)의 힘을 지녔다. 이옥은 이 글에서 언어의 주술성을 추구한 것이다.
〈관해(觀海)〉라는 산문에서는 문인과 바다의 대화를 적어두었다. 바다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내가 흐르지 않으면 산천과 강택은 썩을 것이고, 내가 부드럽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는 집을 삼지 않을 것이며, 내가 유효하지 않다면 배를 이용한 이로움은 널리 미칠 수가 없을 것이고, 내가 그윽하지 않다면 신룡과 큰 고기가 어부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의 덕은 작고 대인의 덕은 크나니, 그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다.” 바다의 흐름과 부드러움과 유효함과 그윽함은 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는 인간이 닮고자 하는 전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일상의 삶에서 그저 매일을 반복하다보면 개성은 훼손되고 감정은 억눌리기 마련이다. 이옥은 여행을 통해서, 권위나 예교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내면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4) 아집(雅集)의 환희 추구
성호 이익의 손자뻘 되는 이철환(李철煥, 1722~1779, 자 吉甫․獻吉, 호 例軒․蕓圃)은 1753년 10월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4차례나 가야산을 구경하고, 《象山三昧》(1754년 작, 33세 때)를 엮었다. 그는 가야산을 성과 속이 어우러진 승지로 재발견하고, 아집(雅集)의 환희를 산문으로 기록하였다. 이철환은 인천의 소호(蘇湖, 소래 포구)에서 배를 띄워, 1753년 10월 23일 영사암, 정수암(淨修菴), 슬치를 구경하고 11월 5일 장천(長川: 지금 예산군 고덕면)으로 돌아왔다. 11월7일 다시 여행에 나서서 12월 29일 장천으로 귀가하였으며, 1754년 1월 11일 출발했다가 병을 조섭하러 22일 장천으로 귀가하였다. 그러고도 다시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이 산이 승지인 것은 노을 우듬지, 비단 장막[채색 구름], 부용[산 모양의 형용], 옥순[산 모양의 형용] 같은 기이함에 있지 않고, 등정한 자에게 전망이 툭 트여 막힘이 없는 데 있다(夫玆山之所以勝, 非有霞標錦障芙蓉玉筍之奇, 徒爲登假者, 通望無礙焉).”고 하였으나, 수정봉에 올랐을 때는 안개 때문에 조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12월 4일 밤 가야산 승려들의 구기(口技)와 풀잎 연주를 구경하고 그 기예의 세계에 한껏 탐닉하였다.
회잠(會岑)과 여옥(呂玉)이라는 두 사미승이 있는데 나이는 각각 17세이다. 용모가 단아하게 잘 생겼으며 두 눈은 빛이 났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맑고 고운 것이 그 사람됨과 같았다. 회잠이란 자는 또한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어 나각(螺角)과 비슷한 소리를 잘 내었는데 천연스레 교묘(巧妙)하여 당에 가득 시끌시끌하였다. 예전 석가모니가 능가선음(陵迦仙音)으로 무루법회(無漏法會)를 창설(唱說)하니 사방의 대중들이 미증유(未曾有)의 것을 얻은지라 크게 환희(歡喜)하였다. 잠(岑)은 석가씨의 유풍(遺風)을 듣고 흥기(興起)한 자가 아니겠는가! 일찍이 아무개 선비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잘 내서 궁상(宮商)이 조화를 이루고 그 튕김이 옥 소리 같아 내가 마음속으로 사모하였으나 만나 볼 길이 없어 오래도록 시원하지 않았다. 또 들으니 정수암(淨修庵) 승려 여견(呂堅)이란 자가 이 빠진 나무빗에 마른 풀잎을 끼고 음악을 연주하는데 유유하고 부드러워 호드기 소리도 아니고 퉁소 소리도 아닌 것이 듣는 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고 한다. 내가 또한 빨리 알아 한번 시켜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이철환은 서양의 아코디온(혹은 풍금)과 비교하여 회잠 승려의 기예가 기술의 면에서 하잘 것 없다고도 하고, 손등(孫登)의 소(嘯)와 약산(藥山, 당나라 승려 惟儼)의 소(笑)와 비교하여 회잠 승려의 기예는 단순히 예(藝)에 그친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황한 서술을 한 것을 보면 그 기예에 얼마간 감동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구라파주(歐邏巴州) 에스파니아 왕의 편소(編簫)를 언급하고, 더 나아가 이탈리아 로마성의 유상곡수(流觴曲水) 정원에 있는 수중 편소(編簫)까지 언급하여 이국적 취향을 드러내기까지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1월 12일 밤에는 꼭두각시놀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껏 그 기교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기예는 (한나라의) 진평(陳平)이 흉노(匈奴) 알씨(閼氏)를 속이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周) 목왕(穆王) 때 언사(偃師)가 바친 비단으로 만든 인형[帛人]이 더욱 정밀하고 빼어났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진평이) 평성(平城) 전투에서 안개를 타고 이를 거느리고 희롱하여 적을 속였는데 근세의 일체의 희장(戱場) 또한 대부분 밤에 횃불을 켠 채 공연을 한다. 대개 횃불 그림자 속에서는 그 빛으로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쉬워 기교를 더욱 세상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군자(君子)들은 반드시 저 거짓이 참을 어지럽히고, 밝음을 등지고 어둠으로 나가는 것을 혐오할 것이니, 이것이 단지 이익되는 것 없이 정신만 소모되는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기이한 기예에 대한 취향을 숨길 수가 없다. 일찍이 가야산을 노래한 신라 지식인 최치원은 〈題伽倻山讀書堂〉에서 “狂噴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이라고 하여, 물외(物外)의 경계에 소요하는 감개를 담은 바 있다. 그러한 경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야산 승지는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산삼매》의 끝에는 후지(後識)가 붙어 있다.
대웅씨(大雄氏: 석가모니)가 말하기를, “일체(一切) 건아(健兒)여, 여러 연(緣)을 짓지 말라.”라 하였으니 참으로 이 말대로라면 천하의 인성(人性)들을 들어 귀머거리 장님으로 만들고서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내가 말법비구(末法比丘)의 종종악연(種種惡緣)들을 보건대, 고선생(古先生 : 석가모니)의 그 연(緣)을 짓지 말라는 경계에 다름이 없다. 절에서의 아집(雅集)은 우리들의 맑은 연(緣)이자 빼어난 과(果)이니 그 아(雅)되는 까닭을 미루어 파고들면 그것은 사람에 있는 것이지 모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그 아(雅)됨을 확충하여 맑은 인(因)을 앞으로 도래할 곳에 심어둔즉 각황(覺皇 : 석가모니)의 법은 근심할 것 없이 스스로 그칠 것이요, 일신(日新)의 공(功)은 거의 이를 이어 더욱 나아갈 것이다. 그 모였는데 아(雅)하지 않은 경우는 내 감히 알 바 아니다. 또 내가 듣건대 부처는 연(緣)이 없는 사람은 제도(濟度)해주지 않는다하니 그도 종근(種根)의 같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삼교주인(三敎主人)은 적조암(寂照菴)에서 장난삼아 제(題)한다.
이철환은 가야산에서 세속을 벗어난 모임을 가진 것을 아집(雅集)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아집은 그 자신이 비판한 구기나 꼭두각시 연희의 감상을 포함하는 모임이었다. 사찰 공간은 그에게는 고풍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공간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3. 실학시대의 또 다른 여행 양태 : 실사구시의 답사여행
정약용은 59세 되던 1820년(순조 20) 3월 24일(음력) 마재[馬峴] 앞에서 배를 내어 한강을 거슬러 올라 춘천 일대를 유람하였고, 62세 때인 1823년(순조 23) 4월 15일(음력)에도 역시 배로 춘천에 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오르고 곡운(谷雲)의 구곡(九曲)을 돌아보았다. 한번은 조카의 혼사에, 또 한 번은 손자의 혼사에 동행한다는 명목이었다. 두 번째 춘천 여행에서 정약용은 《산행일기(汕行日記)》를 남겼고, 북한강 수로지인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집필하였다.
정약용이 춘천을 중시한 것은 조선 숙종 때 청남의 인물 이옥(李沃, 1641~1698년)이 춘천에 행도(行都)를 두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주장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익은 소(疏)를 올려, 관동 일원을 남한산성, 강화도와 함께 요새화하여 국가 제2의 도읍지로 정하고 춘천에 행도를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익(李瀷)도 그 설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은 고조선 지역을 관류하였다고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열수(洌水)가 어디인지를 추정하고 춘천과 맥국․낙랑과의 관계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춘천을 찾았다. 이미 다산은 1811년(순조 11) 봄에 초고를 완성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문헌고증학의 방법을 통하여 위의 두 문제에 관해 일정한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실사구시의 학문적 욕구는 기어코 그로 하여금 춘천 여행을 결행하게 하였다.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고조선과 낙랑의 강역을 한반도 내에서 찾으려고 하여, 열수를 한강이나 대동강으로 보았다.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에서 한강이 열수라고 추정하였고,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한강을 대수, 대동강을 열수로 보았다. 안정복(安鼎福)도 한강이 열수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한반도 중심의 상고사 체계를 주장한 것은 한반도는 우리 민족의 삶이 간단없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약용도 《아방강역고》에서 우리 고대사의 중심 무대를 반도에 두었다. 정약용은 산(汕)이라는 글자의 짜임이 산악과 관련이 있으니, 산수는 산맥 사이를 경유하는 북한강을 가리키고, 습수는 남쪽의 저습한 지역을 경유하는 남한강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춘천 여행에서 다산은 그 심증을 더욱 굳혀, 산수란 곧 산골에서 나오는 춘천의 물과 낭천(狼川 현 강원도 화천)의 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정약용은 춘천이 곧 낙랑의 남부도위가 있었던 지역이라고 비정(比定)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의 낙랑군 속현 기록에 ‘소명(昭明)은 남부도위 치소(治所)’라는 구절이 있다. 정약용은 소명의 뜻이 소양(昭陽)과 같고 소양은 춘천을 가리킨다고 보아, 춘천에 낙랑의 남부도위 치소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소명현에 남부도위가 설치되었던 기간은 한나라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서 후한 건무(建武) 6년(기원후 30)까지 112년간이다. 그 이후 소명현의 지역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후한 건안(建安) 9년(204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하에 대방군을 설치할 때 대방군에 흡수되었으리라고 정약용은 추정하였다.
정약용은 춘천 일대가 맥국(貊國)이었다고 보는 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초기 백제의 동계에 위치하여 백제와 대립하던 말갈 세력이 춘천 일대를 거점으로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였다. 그는 《아방강역고》의 〈예맥고(濊貊考)〉에서 “예맥의 근본은 부여에 있었다. 강릉과 춘천을 예맥이라 부른 것은 잘못된 말이다”라고 결론지은 바 있다. 춘천 맥국설에 대한 반증으로, 《맹자》 고자(告子) 하편에서 “맥 땅에는 곡식이 나지 않고 기장만 난다”고 한 기록이나, 《한서》 〈조조전(鼂錯傳)〉에서 “호맥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여섯 치나 된다”고 한 기록이 춘천의 실제 기후와 다르다는 점을 들었다.
정약용은 여행 중에 북한강 및 춘천 지역의 유적과 생활문화, 인문지리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두었고, 지명의 어원을 분석하고 역사학적으로 고증하였다. 안보대촌(安保大村)에서 10여리를 내려와 윗마을은 춘천줄길(春川茁吉), 아랫마을은 가평줄길(加平茁吉)이라고 하는데, 정약용은 줄(茁)이란 한문으로 방(錺)이라 보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방(錺)을 천(遷)이라 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하였다. 정약용의 지명 고증은 한자식 지명과 고유어 지명의 대응관계를 논하였으므로, 오늘날 한자식 지명을 고유지명으로 복원하는 전범을 마련하여 주었다. 청평 부근의 사금(沙金) 채취 사실에도 관심을 두어, 병벽탄(洴澼灘) 근처에서는 이 아무개가 40여 명을 써서 대규모로 사금 채취를 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정약용은 귀로에서 수로와 지리사항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여‘수경(水經)의 고(故)에 대비’하였다. 치산치수의 경세책을 마련하려고 하였던 실용적 사고를 잘 반영한다. 정약용은 청의 제소남(齊召南)이 지은 《수도제강(水道提綱)》에 한수(漢水)에 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고 그것을 정정하였다. 이미 1814년 겨울에 우리나라의 강물에 대해 검토하여 이청(李)으로 하여금 《대동수경》을 편찬하게 한 바 있으나, 한강 이하에 관하여는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약용이 1823년의 춘천 여행 뒤에 작성한 《산수심원기》는 《대동수경》의 보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여행지의 공간적 특성 재발견과 세계인식의 변모
(1) 금강산 여행의 열기
18세기의 여행 코스로서 서민들도 모두 선호한 것은 곧 금강산 유람로이다. 앞서 말했듯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장사꾼, 품팔이, 시골 노파들까지도, 마치 금강산을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 축에 끼지나 못하는 듯이 여겨 그곳을 찾는 것을 보고서“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1795년(정조 19)에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곡식을 덜어 구호한 만덕(萬德)이란 여인은, 정조가 소원을 묻자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일반의 여자들은 바다를 지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정조는 만덕에게 여의(女醫)의 직을 주어 약원(藥院)에 속하게 한 뒤, 역마를 내주어 금강산을 유람케 하였다.
조선후기의 금강산은 누구나 다 유람을 바라던 명산이었다. 이용휴(李用休)는 최칠칠(崔七七)이 그린 풍악도에 화제(畵題)인 〈제풍악도(題楓嶽圖)〉를 적어, “우리나라에 태어나 풍악을 보지 못하였다면 사주(泗州)를 가보고도 공자묘를 배알하지 않는 것과 같다(生左海, 不見楓嶽, 如過泗州, 不謁大聖)”고 하였다. 금강산을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지고(至高)한 경지에 빗대어 찬미한 것이다. 그는 〈제풍악도(題楓嶽圖)〉 제3편에서는 “옛날 사람이, 아무 산은 조화옹이 어린 시절에 만든 것이어서 허술하다고 한 말이 있다. 내가 생각건대, 이 산은 조화옹이 노성해지고 솜씨가 익숙하게 된 뒤에 별도로 신의(新意)를 내어 창조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에 어찌 이 산과 방불할 만한 산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昔人云, 某山是造化幼少時所作故草草. 余謂, 此山乃其老成手熟後, 又別出新意刱造者. 不然, 天下何無一山與之彷彿也)”라고 하였다. 금강산의 절승을 상상케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명산으로는 묘향산․금강산․두류산을 꼽는다. 묘향산은 웅(雄), 금강산은 수(秀), 두류산은 비요(肥饒)를 친다. 광해군․인조 연간의 시인 임숙영(任叔英)이 쓴〈증임술지서(贈任述之序)〉의 허두에 이런 평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은 진작부터‘수(秀)’의 미(美) 때문에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고려 말 문인들은 금강산을 실제로 유람하고 시와 유기(遊記)를 남겼다. 조선 전기에도 금강산 유록이 많이 나왔다. 조선후기에는 문인들의 금강산록(金剛山錄)이나 동유기(東遊記)가 단행(單行)되어 두루 읽히고, 금강산을 화폭에 담은 그림과 그 제화시문(題畵詩文) 많이 나왔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한글기록물도 서넛 존재한다.
조선후기 문인들은 금강산 유람을 통하여 천유(天遊)를 시도하였다. 금강산은 곧 대림구산(大林丘山)으로서, 기왕의 누정이나 서실이 위치한 소경(小景)의 안온한 공간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김정희(金正喜)는 권돈인(權敦仁)의 동유(東遊) 소식을 묻는 서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해악(海嶽)이 솟아나오고 영록(신령한 물굽이)이 모습을 드러낸 곳에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은 앞에서 인도하고 영랑과 술랑(신라 때 삼일포에서 놀았던 四仙의 두 사람)은 뒤를 맡아서, 안으로는 만폭동(萬瀑洞)이 있고 밖으로는 구룡연(九龍淵)이 있으리니, 지팡이와 견여(肩輿)로 일행이 단란한 가운데 갖가지 신령한 동굴과 갖가지 신우(神宇, 佛寺)는 필경 어떠하던가요? 대인상(大人相)을 보이고 재관신(宰官身)을 드러내시면서 연로하신 몸으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성취하셨으니, 그것이 어찌 작은 인연이겠습니까?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의 혼탁한 시대에는 일찍이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매양 이 산에서 노닐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 혹은‘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고도 하는데, 이 말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옛날 무후(武侯, 제갈공명)의 밑에 있었던 한 늙은 군졸이 진(晉)나라 때까지 생존하여 있었는데, 혹자가 무후에 대하여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무후가 살았을 때에는 보기에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후가 죽은 뒤에는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옮겨다가 이 산의 공안(公案)으로 삼고자 합니다.
신화와 전설, 불법의 세계가 혼효되어 있는 금강 세계의 유람이 지닌 의미를 곱씹어 본 말이다. 실제 유산 때보다도 체험 뒤에 남는 감동과 그 의미의 확대를 더욱 중요시한 해석이다. 18세기 중엽에는 한사(寒士)나 여항인들도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금강록을 역었다. 또 그것에 대한 제후(題後)도 여럿 명문이 나왔다. 이용휴(李用休)의〈허성보의 동유록 뒤에 쓰다(題許成甫東遊錄後)〉( 《탄만집》)는 단형의 기문(奇文)이다. 그는 그 글에서 그림이나 유록으로는 부족하여, 금강산은 적면대오(覿面對晤)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휴는 또〈심대사 풍악록(沈大士楓嶽錄)〉( 《탄만집》)에서, 동유(東遊)는 연화지취(燕貨之聚)로 향하는 서유(西遊)나, 곡속지부(穀粟之府)에 마음을 쏟는 남유(南遊)나, 기야자(佳冶者)를 쫓는 북유(北遊)와 다르다고 하였다. 서유․남유․북유가 화장(火藏,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여행이라면, 풍악을 찾는 동유는 청유(淸遊)이라고 규정하였다.
나는 늘, 조물주가 내성(耐性)이 없어서 괴기(瑰奇)하고 걸특(傑特)한 광경을 해좌(海左)의 조선국 관동 지역에 시설하고 그 능력을 다하고 그 기교를 전부 펼쳐서 자긍하고 뽐내는 것을 두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더구나 나라에서 유산(遊山)을 금지하는 令도 없다. 그래서 겨우 걸음마만 할 줄 알면 모두 먹을 것을 싸매고 신발을 준비하여 동쪽으로 향하여 간다. 그런데 늙고 병든 사람은 늘 동쪽으로 가려는 꿈을 꾸거늘, 조정이든 저자든 가릴 것 없이, 사람들 발걸음은 나날이 꾸역꾸역 서쪽으로 향하면서 “연화(燕貨, 중국의 물화)가 모이는 곳이라서”라고 말하고, 남쪽으로 향하면서는 “곡속(穀粟)의 곳간이라서”라고 말하며, 북쪽으로 향하면서는 “예쁜 계집들이 꽃처럼 아름다워서”라고 말한다. 오직 동쪽 한 길만은 풀이 신발을 안보이게 뒤덮고, 종일토록 산새가 슬피 울면서 왕래한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마음은 화장(火藏)이므로 열처(熱處)에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 풍악은 비록 좋기는 하지만 청유(淸遊)이기 때문에, 그곳은 버려두고 열처로 내달려가는 것이다.
도서(道書)에 “동천영경(洞天靈境, 명산승경)에 발길을 옮겨 가본 사람은 선적(仙籍)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조금도 그 점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이 산을 유람할 수 있겠는가? 청송(靑松) 심대사(沈大士)는 보통의 일만 사람 속에 끼지 않고서 표연히 옷자락을 떨치며 동쪽으로 향하였으니, 나갈 때에 마치 길 안내하여 이끌어주는 자가 있듯이 하였다. 이 산과 숙연(宿緣)이 있어서 단대(丹臺)에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가 유람을 기록한 여러 작품들이 청광(淸曠)하여 티끌이 없으리란 사실은 꼭 보고 난 뒤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또 듣건대, 심대사가 동유할 때 그 아들이 따라간다고 한다. 이 유람의 일은 한 성(姓) 내에 한 사람이라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부자가 함께 한다니 얼마나 성사(盛事)인가! 그를 위해 연적을 갈고 전지(牋紙)를 잘 펴고 이렇게 쓴다.
18세기 소북의 시인 임희성(任希聖)은〈마하연(摩訶衍)〉시( 《在澗集》)에서, 속진(俗塵)의 세계에만 아니라 신궁(神宮, 사찰)에도 성쇠가 있음을 깨닫고 느낀 애상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추이(推移)하는 인간만물의 왜소성을 실감하여 느낀 격정을 일운도저(一韻到底)의 장편 시로 풀어내었다.
八潭游始窮 팔담(八潭)의 노님을 비로소 다 하니
羣勝歷幾徧 뭇 경승들을 몇 번이나 편력하였던가.
輕輿逐趾高 편여는 인부들 발을 따라 높이 오르고
峭壁隨眼轉 아스라한 바위 벽은 시선 따라 빙빙 돈다.
稍近衆香城 중향성(衆香城)이 차츰 가까워지더니
更得摩訶衍 다시 마하연(摩訶衍) 승지를 얻었도다.
寶地境自別 보지(寶地, 사찰)의 경지(境地)가 절로 유별나매
靈宅名仍擅 영택(靈宅)의 명성을 견줄 데 없구나.
雲臺乍露頂 운대(雲臺)는 잠깐 정수리를 드러내고
曇竭全披面 담갈(曇竭, 담무갈봉)은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澄明桂陰合 명징한 빛이 계수(桂樹) 수풀과 암합하고
照爛楓色絢 햇빛 비친 단풍색이 현란도 하다.
冥心坐超忽 아스라하게 먼 경지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眞興溢顧眄 이리저리 돌아보며 참 흥취를 만끽한다.
所惜塵龕閉 애석한 것은 먼지 덮인 채 감실(龕室)이 닫혀 있어서
久關齋香薦 재향(齋香) 못 올린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
禪宮有衰盛 선궁(禪宮)에도 성쇠가 있는 법
世界尤幻變 세계는 정말로 변환이 심하도다.
將去復回首 떠나려다 다시 고개 돌려 바라보매
此來猶過電 여기에 온 것도 번개가 지나가듯 한순간.
한편 실학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앞서 들었던 정란(鄭瀾)과 신광하(申光河)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한편, 서명응(徐命膺)도 백두산을 유람하고 산문을 남겼다. 그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는 갑산(甲山)에서 운총진(雲寵鎭)까지, 운총진에서 심포(深浦)까지, 심포에서 임어수(林魚水)까지, 임어수에서 연지봉(締贍峯)까지, 연지봉 아래에서 백두산 꼭대기까지, 천수에서 자포까지의 6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2) 중국으로의 대여행 체험
조선후기에는 청나라와의 무역이 정상화되면서 이국의 사정을 전하는 산문 연행록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되면서 산문으로 된 동사록(東槎錄)이 나왔다. 대여행(grand tour)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장편 여행기가 나왔다. 병자호란 이후에 산문의 심양록과 사행록이 한꺼번에 많이 나오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행원에게 ‘심세(審勢)’의 임무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행원들은 노정기를 지참하고 선행 행록을 참고로 하면서 인문지리와 자연지리의 변동사항을 치밀하게 적었고, 중국과 주변 민족의 정세를 기록으로 남겼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심세편’이라는 제목을 둔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1780년 음력 7월, 중국의 동북부를 여행하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머리 장식물을 파는 상인과 전당포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휘호를 써주었다가 작은 낭패를 겪었다. 그는 길에서 자주 보아 왔던 ‘기상새설(欺霜賽雪, 서리와도 같고 눈보다 더 흼)’이란 글자를 여러 필법을 고려하여 멋지게 썼으나, 정작 두 상점의 주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원은 “장사치들이 자기네들 마음이 깨끗하여 마치 가을 서릿발과 같을 뿐만 아니라, 땅에 내린 희디흰 눈의 빛깔보다도 훨씬 더 희다고 스스로 과시하려고 그런 말을 문에 걸었을 게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네 글자는 국수 파는 집에서 거는 편액이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박지원은 머쓱해 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그 일을 그대로 적어 두었다. 자신의 실패담까지도 적을 만큼 <열하일기>는 자기 비판적이고 또 사실적이다. 이 <열하일기>는 문학작품이자, 철학적 수필이요, 또 역사 기록이다.
중국으로 들어서면서 박지원은, 자객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을 위하여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역수(易水)를 건너려다가 머뭇거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태자 단은 형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 의심하였다. 그러자 형가는 노하여, “내가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손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떠나려 함이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박지원은 “형가가 기다린 사람이란 이름을 지닌 어떤 실재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형가가 기다린 사람이란, 의지를 발동하는 형가 그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이렇게 인간의 행동에서 의지의 중요성을 읽었고,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는 갈등하는 존재요, 스스로 행위를 선택하는 존재다. 그의 중국 여행은 곧 그러한 결단의 행위였다.
박지원은 중국인이나 만주인들과 면대(面對, 얼굴을 맞대고 담론함)하였다. 통금 시간 이후에도 몰래 빠져나가 밤새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의 예부와의 공식 교섭이나 정세 탐문 등 일체의 외교 업무를 역관들에게 일임하고,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였다. 곧, 조선인들은 자신의 문벌을 내세워 중국의 가문까지 능멸하고, 중국인이 만주 복색을 한 것을 욕하며, 중국인 관원들을 오랑캐 조정의 신하라고 업신여기고, 중국에는 볼 만한 문장이 없다고 속단하며, 중국에는 춘추의리가 쇠퇴해서 올바른 선비를 보기 어렵다고 단정하기 일쑤였다. 박지원은 그러한 태도를 오망(五妄, 다섯 가지 망령)으로 열거하고, 그것이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숭상에서 연유한다고 지적하였다.
박지원은 짧은 여행에서 외국의 실정을 살핀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게다가 중국인 가운데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필첩식이나 서반 따위의 하급 관리들은, 정치상의 잘못이나 변방의 작은 난리, 괴상망측한 이야기 등을 과장하거나 꾸며내어 우리 역관에게 고급 정보라고 속여 팔았다. 박지원은 외국 정세를 올바로 파악하는 올바른 방법을 ‘심세편(審勢編)’에서 제시하였고, 그 스스로 만리장성 부근에서 입수한 정보들을 ‘구외이문(口外異門)’이란 제목으로 묶었다. 그리고 《열하일기》의 후반부는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에 관한 기록과, 중국인 및 만주족 학자들과 자연과학의 지식, 정통사상과 이단의 문제, 민족문화의 특수성에 대해 담론한 내용, 민족문화와 중국문화의 접점에 대해 논증한 논문들을 실어두었다. 라마교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분량을 할당하였다. 공간인식과 역사인식이 통념과 무척 달랐기 때문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박지원의 시선은 이미 중국을 넘어섰다. 그리고 미몽 속에 헤매는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을 계도하고자 하였다. 옥전(玉田)에서 동행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옥갑야화’에는 저 유명한 ‘허생’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허생이 이완을 꾸짖는 어조를 빌려, 박지원은 자존자대(自尊自大)에 빠진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였다. “소위 사대부란 것이 무엇들이냐? 오랑캐인 맥족의 땅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사대부라 자칭하니 이 어찌 어리석지 않으랴 ! 바지저고리는 순전히 흰색이니 이는 초상이 났을 때 입는 옷이요, 머리털은 한데 모아 송곳처럼 만든 것은 남만의 상투와 다름없는데, 무엇을 일러 예법이라는 거냐?” 조선인들이 중화문화의 유풍이라고 믿었던 것이 주변 이민족의 풍속과 다를 바 없다고 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선 것이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 꿈에, 관청 건물 같은 곳에서 화병에 꽂힌 길고 푸른 새의 깃털을 보았다고 한다. 뒷날 그는 그 기억을 회상하고, 또 중국 여행 중에 공작새를 직접 보고서, 공작새 깃털 색깔의 변화를 세밀하게 서술하였다. 객관 사물은 인식 주체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인식 대상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 박지원은 주목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빛깔을 논하면서 마음에 먼저 색깔을 정해 놓는 것은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박지원은 여행 중에 그러한 인식태도로 사물과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았다. 소중화 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전회가 일어났다.
(3) 일본으로의 대여행 체험
한편 통신사 일행은 일본으로의 대여행을 통하여 종전과는 다른 시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통신사는 외교사절단이었으나, 그 일행의 일본 왕래는 곧 대여행의 의미를 지녔다. 모두 12차에 걸친 통신사 사행 가운데 3차까지는 포로쇄환이 주목적이었으나, 4차부터는 외교와 문화적 교류가 주목적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문학인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문학인들은 정세와 인문․자연지리의 사실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일본 문사 및 승려와의 창화시를 삽입하였다. 1763년의 계미 사행에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元重擧)는 통신의 목적에 대해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변방을 편안하고 조용하게 하는 것. 둘째, 저 나라의 산천과 지세를 살피고 그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는 것. 셋째, 대마도인의 약탈 행위를 억제하는 것. 넷째, 바다의 형상을 아는 것. 다섯째, 우리나라의 문화를 전파하여 저들의 나라에 인이예지와 예의염치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 등이다.
조선통신사의 최초 목적은 포로쇄환이었다. 거기에 더해져서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었던 일본에 대해 앞서 있는 문화를 전달하면서 ‘문화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다. 제8차 신묘사행(1711년) 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문화교류의 열망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많은 창화집이 간행되었다. 1719년에는 《해유록》을 쓴 신유한이 제술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748년에는 일본과 조선의 사상적 대립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신들이 에도(江戶)까지 갔던 마지막 사행인 계미사행(1763년)은 정사 조엄(趙曮) 삼사 서명응(徐命膺), 제술관 원중거・남옥(南玉), 종사관서기 김인겸(金仁謙) 등 많은 문인들이 조선의 민족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일본의 기술 문명에 대한 관심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원중거는 일본 학자와 필담을 통해 사상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제12차 마지막 사행인 신미사행(1811년) 때는 대마도까지만 갔는데, 시의 창화를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교류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일본사행에서 위항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며, 조선의 문학적 수준을 과시하고 일본 학계의 면모를 전달해 주는 역할 하였다. 한편 통신사 일행은 일본 체험을 통해 실학적 사고를 강화시켰다. 그들은 도일하기 이전에는 일본을 비하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도일한 뒤에는 일본의 재부와 경관, 그리고 정밀한 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문물제도와 지리풍광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다. 조엄이나 원중거는 수차에 관심을 보였고, 김인겸은 고구마 종자를 가져 올 방법을 궁리하였다. 홍경해는 일본의 구체적인 거리나 크기를 탐구하였고, 원중거는 성벽의 양식, 제도, 건축 상황 등을 상세히 살폈다. 또 원중거와 성대중은 우리나라의 울릉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홀로 싸웠던 안용복에 대한 이야기를 환기하여, 영토의 문제를 새삼 부각시켰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은 일본 문사들이 자국을 중국과 전혀 관계없고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고 자부하면서 조선이 역사적으로 중국에 예속된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대하여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 문사들의 민족주의적 색채는 사상적으로 우리의 민족의식을 검토하게 하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한편 일본 문사들은 천하가 중국만이 아니며 광대한 세계가 있음을 알려 줌으로써 통신사 일행을 놀라게 하였다. 일본인들과의 대화는 서양이나 기타 외국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고 화이론(華夷論)의 관념을 고수하였던 조선 문사들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통신사행의 종사관들은 활동무대를 국제화하고 서적 교류의 중개 역할을 했다. 그들은 18세기 일본의 상업 발달 양상과 무사집단의 집권을 통한 사회 질서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러한 사실을 조선의 선진 지식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실학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5. 유기(遊記)・유록(遊錄)과 기행가사, 그리고 기행화첩의 발달
사대부 양반들은 산놀이에서 느낀 감흥과 머릿속에 떠오른 착상을 시와 산문으로 적었으며, 그림으로 남겼다. 이를테면 박제가는 보현사 관음전에 유숙하면서는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지어, 서정을 토로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용문사 절방에서 기생 두 명이 추는 검무(劍舞)를 보고 감상문을 적었다. 그것들은 이후 유록(遊錄)으로 단행(單行)되었다.
선인들은 다른 사람의 산수 유람의 기록물을 읽으면서 미리 일정을 잡아보고, 유람길에 그러한 기록물들을 가지고 가면서 자신의 경험과 대비하였다. 산수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먼저 깨달았던 선배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도 있었다. 이를테면 박제가는 중국 문인 원굉도(袁宏道)가 지은 〈서문장전(徐文長傳)〉을 읽으면서 서위(徐渭)의 광기 어린 삶을 상상하여 보았고, 고려 말 이색(李穡)의 〈향산윤필암기(香山潤筆菴記)〉를 읽고 묘향산 지세에 관한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논하였다. 보현사에서는 고려 시인 김양경(金良鏡)의 시를 읊었다.
또한 사대부 문인들은 스스로 산수 유람의 경험과 산수에서 얻은 사유를 적은 유록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유록을 읽으면서 마치 스스로 거듭 산에 노니는 것 같은 기쁨을 누렸다. 그것을 와유(臥遊, 누워서 놂)라고 하였다. 어떤 분들을 유록의 명문들을 골라 아예 와유록(臥遊錄)을 엮어두고 종종 눈을 주었다. 처사로 살다간 남하행(南夏行)같은 이는 평소에 산수에 유람하기를 좋아했으나 국토 안의 산천을 두루 다닐 수 없자 선배들의 유록을 모아서 와유록을 엮어 멀리 산에 노닐어 세속을 벗어나려는 뜻을 부쳤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의 유록은 서양 근대에 출현한 여행기․풍토기와는 형식과 내용이 달랐다. 서양 근대의 그것은 사회비판의 색채가 강하였고, 그것이 곧 근대산문의 주요 양식이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의 여행기는 사회비판의 산문으로 출발하지 않고, 저자의 처지와 심경을 가탁하는 창작방식을 더 중시하였다. 일본에서는 신화전설의 낭만적 공간을 그려보이는 풍토기(風土記)가 발달하다가,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풍물과 삶을 기록한 일기체 여행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국문학사에서도 고려시대에 신화․전설을 기록한 풍토기가 나와서 고려 중엽 이후 현실 기록의 여행기 양식으로 전환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다만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 중종 때 김정(金淨)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지역의 신화․전설이나 역사를 기록하기보다는 풍속을 기록하여 조정에 ‘풍토를 채보하여 알린다(譜風土)’는 의도가 더 강하였다. 또한 조선중기까지 단형의 산수유기는 유종원의 예를 따라 산수의 발견을 재덕자의 우불우(遇不遇)와 유비시켜 논하는 관점을 고수하였고, 산수 유람기에 의론을 직접 개입시키고는 하였다. 그 이후 산문유기가 장형화하고 시와 함께 유록으로 단행되면서, 풍속을 서술하고 고증하며 감개를 풀어 보이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정시한(丁時翰)과 이만부(李萬敷)가 장편의 여행기를 남긴 것은 그 좋은 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된 금강산 유람의 열기를 반영하여, 금강산 기행을 한글로 기록한 산문도 나왔다. 조병균(趙秉均)의 《금강록》은 1890년경의 기록물이라서 시대가 내려오지만, 같은 류의 국문기록이 진작에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18세기 중엽, 19세기초 기행가사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