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있을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
“ (전략)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유기되어 혼자 늪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은 어린 소녀를, 우리는 돕지 않았습니다. (중략) 대신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우리가 일원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 그녀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해 주었다면, 우리 교회와 집에 초대했다면, 그녀를 향한 편견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범인으로 기소되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겁니다.(후략)”
-<가재가 노래하는 곳>(전자책 794쪽) 중 카야의 변호사 톰의 변론 중-
“늪지 쓰레기, 마시 걸(marshi girl:습지 소녀)”로 불리며 배척받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연인이 떠나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던 주인공 카야가 살인사건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는데 변호인 톰이 배심원들을 향해 진심으로 호소하는 장면이다. 톰의 명쾌한 반론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했고, 고개 숙인 카야에게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똑같은 편견에 둘러싸인 채 누군가를 열심히 밀어내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유려한 문체와 대조적으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하는 스릴러가 혼합된 듯 몰입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는 책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델리아 오언스, 김선형, 살림, 2019)은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일흔의 나이에 출간했다. ‘2019년 가장 많이 팔린 책, 출간 반년 만에 밀리언 셀러를 돌파!’ 등 각종 찬사와 추천사가 넘쳐나는 이 책을 이제야 알았다. 서정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마침 글쓰기 주제가 독서라 독후감을 한 편 써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부리나케 읽었다. 습지의 생태계가 주인공의 삶과 어우러지면서 글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밤은 휘몰아치며 다가왔고 잠은 조각조각 찾아왔다.”(위의 전자책 90쪽) 카야가 녹슨 못에 발이 찔려 고통으로 얼룩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공포의 나날들로 채워진 그 불멸의 밤을 표현한 문장이다. 기댈 곳이라곤 폭력을 일삼고 걸핏하면 사라져서 오지 않은 아빠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라진 아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딸을 두고 떠나버린 무정한 아비였다. 아내와 자식들이 폭력에 시달리다 떠났어도 후회도 반성도 할 줄 몰랐다. 어느 날 문득 딸에게 돌아와 며칠 화를 내지 않고 지낸 게 그나마 남은 아버지의 도리였다.
치욕스런 하루가 학교생활의 전부인 카야는 오빠 조디의 친구인 테이트에게 글을 익히고 시와 사랑을 배운다. ‘테이트와 삶과 사랑은 같은 말이었’는데 이젠 테이트가 없다. 그를 기다리며 ‘심장이 흘리는 눈물’을 지켜봐야만 했던 날들을 덮어버릴 수 없었다. 그 쓰라린 시간에 또 다른 남자 체이스가 나타난다. 늘 멀리서 지켜보며 그 무리에 끼고 싶었다. 애초에 뻔한 그런 사람이기에 제발 카야가 그 노림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육체적으로 제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도 잠깐 왜 나쁜 일은 꼭 일어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이 체이스를 믿게 했다. 결혼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체이스를 멀리한다. 그가 사체로 발견된 것은 데이트 폭력을 휘두른 뒤의 일이었다.(이야기는 살인사건의 수사와 카야의 어린 시절로 시간이 교차되며 펼쳐진다.)
말없이 떠난 테이트는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 “왜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용서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테이트의 말에 대답 하지 않는다.(위의 전자책 472쪽)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폭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걸 쉽게 용서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그래도 테이트는 그런 사람 아니니 그냥 다시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랐다. 카야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뛰는 심장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테이트의 도움으로 홍합을 따서 팔아야 하는 고달픈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테이트는 카야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살았던 세월은 깃털을 모으고 습지의 생태를 조사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이겨낸다. 그 외로움의 대가가 책이 되었다.
늘어나는 참고인들의 증언으로 죄여오는 법망을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가기 어려운 카야는 구금되고 말았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도 체이스에게 버림받았다는 정황이 사람들의 편견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처음부터 내가 카야, 카야의 엄마 또는 테이트가 되기도 하면서 같이 절망하고 절규하며 울며 웃었다. 극적으로 배심원들의 무죄를 받고 풀려나는 장면에서는 나도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선고가 내려지는 이야기를 빼고 열린 결말로 끝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말들이 손아귀로 강렬한 의미를 움켜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손을 활짝 펼쳐 의미를 풀어낼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시인이 된다면 카야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쓰고 싶었다'는(위의 전자책 282쪽) 문장은 뒤에 남겨진 시의 의미를 적확하게 설명하는 복선이었다. '존재 의미는 말’이라는 테이트의 아버지 말처럼 그녀는 그동안 필명으로 시를 써 발표했다. 그날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카야의 다음 시는 봉투에 따로 담겨 있었다. 테이트가 카야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반딧불
그를 꼬드겨내는 건 / 밸런타인의 불빛을 깜박이듯 쉬웠지 / 하지만 숙녀 반딧불처럼 / 그 불빛들에는 죽음의 은밀한 부름이 담겨 있네 // 마지막 터치, / 끝이 아니야 / 마지막 발자국, 덫 /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네 / 그 눈이 내 눈을 꼭 붙들다 / 끝내는 다른 세상을 보지 // 그 눈이 달라지는 걸 봤어 / 처음에는 질문 / 다음에는 해답 / 마침내 끝 // 그리고 사랑 그 자체가 스쳐지나 / 그게 무엇이었든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네
A.H (어멘다 해밀턴, 카야의 필명, 위의 전자책 857~858쪽)
'봄이 팔꿈치로 쑥 밀치고 들어와서는 아예 눌러앉았다. 낮이 따스해지고 하늘이 윤을 낸 듯 반들거렸다.'(위의 전자책 323쪽)라는 문장처럼 봄이 왔다. 하얀 목련잎이 뚝뚝 지는 계절에 간만에 소설책에 푹 빠졌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카야를 응원한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인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떠오른다.
첫댓글 하하. 같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어요.
물론 저는 읽은 지 좀 되어서 머릿속에 남은 줄거리 위주로 썼어요.
또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얼마나 몰입이 잘 되던지요.
좋은 책은 이렇게 독후감을 쓸 정도로 뇌리에 깊숙이 박히나 봅니다.
친구들과 모여서 영화로도 봤어요.
원작에 충실하지만 또 봐도 재미있었지요.
영화도 볼 계획입니다.
참 재미있는 책이긴 한가 봅니다. 둘이나 독후감 쓴 걸 보니. 꼭 읽어 보고 싶네요.
추천합니다. 선생님도 독후감 쓰세요. 하하!
와! 저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서평 쓰셔도 되겠어요.
과찬의 말씀
꼭 읽어 보세요.
와우! 작품 하나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감 받고 나서 책 한 권을 뚝딱 읽고 이렇게 좋은 독후감을 써 내시다뇨. 이 책은 저도 꼭 읽어 봐야겠어요.
두 분 선생님 덕분에 성미 급한 저는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끝냈습니다. 오프닝 영상에 혼이 나갈뻔 했답니다. 하하
이젠 책으로, 문장에서 퍼지는 맛을 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선생님이 올려주신 문장들 보니 역시 영상으로는 다 담을 수 없구나 싶네요.
멋진 서평, 잘 읽었습니다.
아! 저도 오늘 1회차 완독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