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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가지 회중
29. "사리뿟따여, 이런 여덟 가지 회중이 있다. 무엇이 여덟인가?
끄샤뜨리야의 회중, 바라문의 회중, 장자의 회중, 사문의 회중, 사대왕천의 회중,
삼십삼천의 회중, 마라의 회중, 범천의 회중이다. 사리뿟따여, 이것이 여덟 가지 회중이다.
사리뿟따여, 여래는 네 가지 담대함을 구족하여 이들 여덟 가지 회중에 다가가고 안으로 들어간다.”
30. "사리뿟따여, 나는 수백의 끄샤뜨리야 회중에 다가가서 그곳에서 전에 그들과 함께 모여서 앉았고,
전에 그들과 함께 대화를 했고, 전에 그들과 함께 토론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에 관해 내게 두려움이나 당혹함이 생길 어떤 표상도 나는 보지 못한다.
사리뿟따여, 나는 내게서 이런 표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을 얻고
무외를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사리뿟따여, 나는 수백의 바라문의 회중에 … 장자의 회중에 … 사문의 회중에 …
사대왕천의 회중에 … 삼십삼천의 회중에 … 마라의 회중에 …
범천의 회중에 다가가서 그곳에서 전에 그들과 함께 모여서 앉았고, 전에 그들과 함께 대화를 했고,
전에 그들과 함께 토론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에 관해 내게 두려움이나 당혹함이 생길 어떤 표상도 나는 보지 못한다.
사리뿟따여, 나는 내게서 이런 표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을 얻고
무외를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31. "사리뿟따여, [73]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나를 두고 어떤 이가
'사문 고따마는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 없다.
사문 고따마는 이론으로 완전 무장하여 법을 설하고, 자기의 영감에 따라 검증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 말을 철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는 한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네 부류의 태어남[四生]
32. "사리뿟따여, 네 부류의 태어남[四生](*1)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다."
33. "사리뿟따여, 무엇이 난생인가?
사리뿟따여, 알의 껍데기를 깨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난생이라 한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태생인가?
사리뿟따여, 태의 막을 찢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태생이라 한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습생인가?
사리뿟따여, 부패한 생선, 부패한 시체, 부패한 유제품, 소택지,
오물구덩이에서 태어난 중생들을 습생이라 한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화생인가?(*2) 사리뿟따여, 신들(*3),
지옥에 태어난 자들, 몇몇 인간들,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을 화생이라 한다.
사리뿟따여, 이들이 네 부류의 태어남이다."
34.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나를 두고
어떤 이가 '사문 고따마는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 없다.
사문 고따마는 이론으로 완전 무장하여 법을 설하고, 자기의 영감에 따라 검증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 말을 철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는 한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1) 여기서 ‘태어남’은 yoni를 옮긴 것이다. 무더기의 부분도, 원인도, 소변이 흐르는 길(尿道)도 yoni라 하지만,
여기서는 무더기의 부분을 말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MA.ⅱ.35)
(*2)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 난생(卵生)이고, 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태생(胎生)’이고,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습생(濕生)’인데, 이런 근원들이 없이
일어난 것처럼 태어나는 것이 화생(化生)이다.”(MA.ⅱ.36)
(*3) “사대천왕부터 시작해서 그보다 높은 것의 신들은 화생이다.
그러나 땅에 사는 신들(bhūma-deva)은 사생(四生)모두에 다 속한다.”(MA.ⅱ.36)
다섯 가지 태어날 곳[五趣]과 열반
35. "사리뿟따여, 다섯 가지 태어날 곳[五趣](*4)이 있다. 무엇이 다섯 인가?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신이다."
36. "사리뿟따여, ①나는 지옥과 지옥에 이르는 길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도닦음(*5)을 알고,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6)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안다.
사리뿟따여, ②나는 축생과 축생에 이르는 길과 축생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고,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는 것도 안다.
사리뿟따여, ③나는 아귀와 아귀에 이르는 길과 아귀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고,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아귀계에 태어나는 것도 안다.
사리뿟따여, ④나는 인간과 인간계에 이르는 길과 인간계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고,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인간에 태어나는 것도 안다.
사리뿟따여, ⑤나는 신과 신의 세계에 이르는 기롸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고,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도 안다.
사리뿟따여, ⑥나는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고,(*7)
그 길을 그렇게 가다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무는[漏盡通] 것도 안다."
(*4) ‘다섯 가지 태어날 곳[五趣]’은 pañca gati를 옮긴 것이다.
이처럼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의 다섯을
니까야 안에서 다섯 가지 태어날 곳[五趣, 五度, 五道]으로 부르고 있다.
(*5) “‘지옥에 이르는 길(niraya-gami magga)’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도닦음(niraya-gami paṭipadā)’은 둘 모두
태어날 곳으로 인도하는 업(gati-saṃvattanika kamma)을 말한다.”(MA.ⅱ.37)
(*6) “번영이라 불리거나 혹은 행복이라 불리는 기쁨(aya)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처참한 곳(apāya)’이라 하고 고통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불행한 곳(duggati, 惡處, 惡趣)’이라 하고,
나쁜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따로 분리되어 이 곳에 떨어지기 때문에 ‘파멸처(vinipāta)’라 한다.”(MA.ⅱ.37)
(*7) “‘열반(nibbāna)’은 분명 태어날 곳(gati)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날 곳을 벗어난 열반도 아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감(magga)과 도닦음(paṭipada)은 둘 모두
성스러운 도(ariya magga=출세간도(lokuttara-magga를 뜻함)를 말한 것이다.”(MA.ⅱ.37)
37. "사리뿟따여, ①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불꽃이나 연기도 없이 새빨갛게 달구어진, 한길이 넘는 숯불구덩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ekāyanena magga) 오직 그 숯불구덩이를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바로 저 숯불구덩이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숯불구덩이에 떨어져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본다."
38. "사리뿟따여, ②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똥으로 가득 찬, 한길이 넘는 똥구덩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똥구덩이를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바로 그 똥구덩이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똥구덩이에 떨어져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서 고통스럽고 살을 에는 듯하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 것을 본다."
39. "사리뿟따여, ③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아귀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아귀계에 태어나서 괴로움을 더 많이(*8)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잎사귀와 가지가 적어 그림자가 드문드문 있는 비탈진 곳에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나무를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바로 저 나무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나무 그늘 밑에 앉거나 누워서 괴로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아귀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아귀계에 태어나서 괴로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을 본다."
40. "사리뿟따여, ④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인간 가운데서 태어나서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잎사귀와 가지가 많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평지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나무를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바로 저 나무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나무 그늘에 앉거나 누워서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인간 가운데서 태어나서 즐거움을 더 많이(*9) 느끼는 것을 본다."
41. "사리뿟따여, [76] ⑤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趣],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누각이 있고 안팎이 회반죽으로 잘 칠해졌고
바람막이가 잘 되었으며 빗장이 채워졌고 여닫이 창문이 있는 저택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긴 의자에는 긴 양털의 덮개가 펴져있고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흰색의 깔개가 있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깔개가 있고 침상에는 천개(天蓋)가 있고
진홍색의 머리 베개와 발 베개가 양쪽에 놓여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저택을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바로 저 저택으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저택의 누각에서나 침대에 앉아서 누워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그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 본다."
.42. "사리뿟따여, ⑥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는[漏盡通]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10) 그가 모든 번뇌를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면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11) 본다.
사리뿟따여, 마치 물이 맑고 상쾌하고 차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제방이 있고
쾌적하고 가까이에 짙은 숲이 있는 그런 호수가 있는데
그때 열기를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호수를 향했다면, 안목이 있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말할 것이다.
'오, 저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바로 저 호수로 갈 것이다.'라고.
그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이 그 호수에 들어가서 목욕하고 물을 마시고
모든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가라앉히고 나와서 숲에 앉거나 누워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리뿟따여, 그와 같이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대하여 어떤 사람을 이와 같이 안다.
이 사람은 그 길을 그렇게 가고 그렇게 행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는[漏盡通] 것을 안다.
그 다음에 나는 그가 모든 번뇌를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면서 오로지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을 본다.
사리뿟따여, 이것이 다섯 가지 태어날 곳[五趣]이다."
“사리뿟따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나를 두고
어떤 이가 '사문 고따마는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 없다.
사문 고따마는 이론으로 완전 무장하여 법을 설하고, 자기의 영감에 따라 검증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 말을 철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놓아버리지 않는 한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8) “‘아귀계(petti-visaya)’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더 많고 즐거움은 적고
가끔씩 경험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MA.ⅱ.38~39)
(*9) “인간 세상에서 끄샤뜨리야 등의 가문에는
즐거운 느낌을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MA.ⅱ.39)
(*10) “‘번뇌를 다함’의 이 문단에서는 ‘신성한 눈으로 본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나는 그를 본다.’라고 하신 것은 [신성한 눈에 대한 ] 확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신성한 눈으로도 볼 것이고, 타심통의 지혜로도 알 것이고,
일체지로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MA.ⅱ.40)
(*11) “여기서도 ‘오로지 즐거운 느낌만(ekanta-sukhā vedanā)을 느낀다.’고 하고,
천상세계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은 같지만 뜻은 같지 않다.
천상세계의 즐거움은 탐욕으로 인한 열병 등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오로지 즐거운 느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반의 즐거움(nibbā-sukha)은 모든 열병이 다 가라앉았기 때문에
모든 측면으로 오로지 즐거움만 있다.”(MA.ⅱ.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