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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4일 평양, 거리에서 수천명의 한국인을 보았습니다.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만세! 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 함성이 온나라를 뒤덮었던 1919년 3월 1일 그날의 역사를 만든 주역 중에 놓진 사람이 있다.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사진을 보며) 가운데 천막친 이 내빈석에 사무엘 마펫 목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가 우리의 만세함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던 그 현장에 벽안의 목격자가 있었다. 방관자의 벽을 넘어 고통받는 한국인의 편에 섰던 사람,
사무엘 마펫 목사: 이런 야만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조선 사람을 통치할 수 없을 것이오.
민족의 독립을 꿈꾸는 한국 청년들의 안전한 은신처였고~
학생: 우리들보다 우리 조선의 독립을 더 바라시는 분이 바로 우리 마포 목사님인데~
증인1: 그 모든 것 3월에 마펫 하우스에서 한 거예요.
그는 핍박받는 한국인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 숨은 공로자였다.
증인2: 가장 약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삶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증인1: 20세기에 가장 훌륭한, 뛰어난 선교사 중에 한 분이고요.
그가 한국에 온지 130년, 전쟁과 분단의 역사 속에 까마득히 잊혔던 그는 최근에 공개된 만여점의 편지와 사진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인: 그는 한국인을 향한 위대한 사랑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마포 삼열이라 불린 한 선교사와 그 아들들의 代를 이은 한국 사랑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3.1만세운동 연구에 중심기관 중 하나인 독립기념관(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선 이미 오래전 사무엘 오스틴 마펫과 이북지역에서의 3.1만세 운동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우석 연구원/독립기념관 3.1운동전공: 저희가 저희 1919년 3월 1일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서울 특히 탑골공원 쪽으로만 만세시위를 기억하고 있는데요. 실제로는 북한지역 특히 신의주, 평양, 선천 등지를 비롯한 지역을 포함해서 총7개 지역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준비과정에 천도교와 기독교계 불교계가 연합했다는 것도 알려져 있지만 그 모태가 되는 지역적 기반들이 같이 움직였던 거죠. 그래서 천도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평안도 지역이 3.1운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양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오후 1시,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제일 먼저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이다(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김정인 교수: (사진에서) 여기는 장대현 교회고요. 장대현 교회의 뒤뜰이고 숭덕학교의 앞 마당 운동장입니다. 3.1일날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했는대요. 그 날은 마펫 목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과 시민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만세시위 현장에 사무엘 오스틴 마펫이 있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을한 33인 민족대표 중에 다섯사람이 그의 제자였다 (양전백, 김병조, 이승훈, 길선주, 유여대)
김정인: 태극기를 나눠주고, 그 다음에 독립선언서를 읽고 그리고 나서 거리로 나가게 됐죠. 그때 사복경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의 제지를 뚫고 나가서 천도교인과 그리고 감리교인들과 함께 평양시내에서 만세시위를 하게 됩니다.
시위자1: 자, 주목! 오늘의 만세운동은 야만에 대항하는 평화운동입니다. 그러니까 폭력을 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이나 우리가 다를게 뭐요.
시위자2: 맞소! 일본 사람들을 모욕하지 맙시다. 주먹으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거나 하지마시라요!
시위자3: 한민족이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답게 하는 것은 하늘이 주신 권리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리고자 하는 거예요.
일동: 옳소!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천도교와 감리교, 그리고 장로교인들의 연합시위가 한국의 독립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인은 일본인 거주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만세를 외치며 일본인의 거주지역을 당당하게 활보해갔다.
1919.3.5.<미 북장로교 본부로 보내는 편지> 중에서-20여명의 소녀들이 내 앞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 중에 맨 앞에 있는 소녀는 겨우 12,3세쯤 되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한국인은 그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인: 비폭력 시위를 했기 때문에 평양 인근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이 볼일을 보러왔다가 아, 우리 동네에서 하면 되겠구나 하는 비폭력 평화시위라고 하는 방식이 사람들한테 쉽게 만세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거대한 만세함성에 일제는 당황했다.
평양경찰서장: 도대체 몇번이나 말을 해야 알아듣나! 지금 평양뿐 아니라 선천 의주에서 벌떼같이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니까, 못믿겠으면 직접 달려와서 눈으로 확인해보면 될 것 아냐! 만세운동의 중심은 서울이 아니라 바로 여기 평양이야!
일제는, 경찰은 물론 인근 국경지역에 있던 군까지 출동시켜 무차별적인 폭행, 구금과 고문으로 대응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마펫은 약 2주간 자신이 목격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미국 북장로교 본부와 언론에 알렸다. Pyeng Yang Station Annual Report 1918-1919 Pyeng Yang, Chosun (Korea). The Police Department sent out an order to arrest every student in the Union Christian College and the Boys’ Academy whether guilty of any offense or not.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들 체포 및 구금, 19개 교회건물파괴, 26개 교회 3개월 이상 폐쇄조치, 숭실대학교 숭실중학교 학생을 무조건 체포
투옥 347명
태형 236명
사상자 13명
교회폐쇄 26곳
마펫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옥성득 교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 주었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옥성득 석좌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아시아언어문화학과: 마펫의 부인 서재가 있어요. 거기에 책도 두는 곳인데 그곳에서 서기들이 일을 합니다. 등사실도 있고, 그곳에서 뭘 하냐 서로 거사를 의논하고 3월 10일경 부터는 ‘독립신보’를 출판합니다. 7호까지 나온 걸로 보이는데요. 그 모든 것을 3월에 마펫 하우스에서 한 거예요.
이보식/독립신문 발행인: 미행은?
학생1: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마펫 목사님댁 아닙니까? 어째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이보식: 목사님은 지금 집에 안계셔! 서울 출장 가셨데요.
학생2: 사모님한테는 교회일로 인쇄를 할게 있다고 말했어요.
학생1: 그게 말이 됩니까! 달포 가까이 여기서 찍어 대는데 목사님이 모를리가 있습니까?
이보식: 우리들보다 우리 조선의 독립을 더 바라시는 분이 바로 마펫 목사님인데~
어른: 사실 그만들 늘어놓고 날래날래 움직이지 않고 뭘 하냐!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들에게 마펫의 집은 안전한 은신처였다.
옥성득: 이 사실을 마펫 선교사는 몰랐냐 그게 아니고 한 달 정도 진행되는 상황이니까 다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 말은 그것을 허용하고 가능하면 보호해 주려고 하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평양의 3.1운동은 모우리나 마펫 선교사 집에서 거의 이루어졌고 진행되어서 3월에 계속되었죠.
하지만 독립신보 배포망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일본경찰은~ 마펫을 비롯한 선교사의 집을 긴급 수색한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12일자, 미국 선교사 자택이 수색당함. 소요 범인과 유력한 증거를 발견하여 체포, 압수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일본경찰은 마펫, 모우리, 일라이 등 주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색을 실시했다 (일라이 모우리 집에서 숭실중학교 학생 박기복, 이인선, 숭실대학교 학생 김태술, 숭실중학교 교사 김영순 체포 사무엘 마펫의 집에서 숭실대학교 학생 이양호 체포 독립신문(신보)를 발행한 이보식은 포위망을 뜷고 도주). 일라이 모우리는 끝내 유죄판결을 받고 재판에 회부된다. 그는 자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야만적인 고문을 받은 뒤 16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모펫: 일라이! 일라이! 정신차려! 정신차려!
일라이: 샘! (하고 고꾸라진다)
모펫: (경찰을 향하여) 누가 선교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일본경찰: 열쇠를 가지고 있던게 문제지~ 만세운동을 주도한 반역자들이 숨어 있던 방의 열쇠, 그 방에서 독립신문과 태극기가 발견됐지. 하지만 내 장담컨데 당신도 오래 못갈거요. 당신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리스도인들의 베후란걸, 내가 꼭 밝혀 내고야 말테니까~
모펫: 당신들이 총칼로 위협해서 조선인들의 영혼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큰 오산이지요. 이런 야만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조선 사람들을 통치할 수 없을 것이오!
그것은 마펫의 신념이었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일제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한국인의 친구이자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짓밟은 사람들은 한국인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야만족으로 대하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합법적인 통치입니까?
최우석: 선교사들 중에 3.1운동에 대해서 우호적인 분도 있었고 반대적인 분도 있었지만 마펫 선교사는 대표적으로 우호적인 분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접촉하고 경험했던 한국인들의 품성이나 행실 같은 것들이 충분히 독립국가를 유지하고 그것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보였고 실제로 3.1운동이 터졌을 때 국제적인 감각과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폭력적이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그들에게 감명을 주고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펫은 점점 더 깊이 독립운동에 개입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 겨울, 제2의 3.1운동이라 불리는 대한 독립청년단의 시위계획도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옥성득: 평양에 있는 마펫이나 여러 선교사들이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 희생하는 곳으로 나아가게 된 거죠 (사무엘 마펫, 조오지 매큔, 윌리엄 베어드). 3.1운동이 끝나고 나서도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결된 세력은 압록강을 오가면서 자금도 보내고 3.1운동이 끝나고 나서의 독립운동도 사실은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이 주도해 간 것입니다.
사무엘 오스틴 마펫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된 것일까. 미국 동부 뉴저지주의 교육도시 프린스턴의 한 실버 타운에는 종종 한국인 방문객이 찾아온다. 그곳에서 익숙한 한국말로 꼭 이들을 맞는 사람이 있다. 아이린 마펫(92세), 안녕하십니까? 멀리서 찾아온 남편의 제자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올해 아흔 두살의 아이린 마펫, 그녀는 오래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살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지도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고 한국에서 태어난 남편도 세상을 떠났지만 사실 그녀의 삶의 한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에 있다. 그것은 이렇게 한국인들과의 오랜 우정을 나눌 수 있게 해준 특별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정운 명예총장/장로회신학대학교, 이장호 목사/선교학자,
서정운: 이 앨범사진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아이린: 여기 사무엘 오스틴 마펫이 있네요.
그녀의 시아버지 사무엘 오스틴 마펫은 한국 선교사였다. 오래 전 이북지역을 근대교육과 독립운동의 심장부로 변화시켰다는 시아버지, 그러나 세상은 그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이린 마펫(92세)/사무엘 A. 마펫의 며느리: 남편은 수집가이자 사학자였죠. 한국역사에 관한 주요 자료들을 수집하고 시아버지(사무엘 마펫)의 편지를 모우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지요. 미국으로 돌아온 후 할 일이 없었던 저는 시아버지의 편지를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대략 10년쯤 했습니다.
아이린과 남편은 노년의 삶을 고스란히 바쳐 시아버지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유물을 정리해 한 신학교에 기증했다 (프린스턴 신학교). 그렇게 프린스턴 신학교에 마펫 기록관이 탄생했고 베일에 가려졌던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한국 사랑이 세상에 공개됐다.
켄 헨케 학예사/프린스턴 신학교 마펫기록관: 여기 여권이 있습니다. 1889년에 발행된 건데요. 120년전에는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상세한 설명이 있었지요. 이 사람이 키는 6피트(183센티미터)에 나이는 25살, 입은 적당한 크기, 턱은 뾰죽하고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 피부는 희고, 얼굴은 갸름한 편,
빛바랜 종이와 희미한 사진, 그리고 실감나는 설명 속에서 앳된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켄 헨케: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한 50개의 한국어와 그 사용법에 관한 책인데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어 입문서입니다.
한국말을 배우는 데에도 남달리 열정적이었던 마펫은 한국에 있는 동안 미국에 있는 지인과 가족들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아니었다. 때론 눈물로 때론 기쁨에 겨워서 써내려간 편지들은 그가 남긴 흑백사진들과 함께 한국에서 보고 듣고 겪은 역사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기 시작했다. 사무엘 오스틴 마펫이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 것은 1889년 겨울, 태평양을 건너 한국 땅을 밟은 그 이듬해 1월 25일, 마침 그 해 스물 여섯번째 생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프랑스 신부를 공개처형한 대원군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지만 서울은 선교사들의 안전지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달리 개척정신이 강했던 그는 서울을 벗어나 한국 주요지역을 도는 탐사길에 오른다. 약 4년간 아홉 차례에 걸쳐서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 요동군과 산동지역까지 여행했다. 거의 전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
모펫: (어느 주막에서) 이거 뭡니까?
선비: 이건 국밥이지요
모펫: (어느 주막에서) 주모! 국밥 한 그릇 더 주세요.
무엇보다 그는 한국인들과 어울려 한국식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임성빈 총장/장로회 신학대학교: 서글서글한 성품이셨던 것 같애요. 사실 그 당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조선과 미국은 문화적 차이가 극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오셔서 조선 분들과 그 당시에 아주 스스럼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셨고 또 그들과 한 방에서 주무셨고 어떻게 하든지 같이 삶을 누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서양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안했던 구한말, 봉변을 당한 적도 많았다.
평양 왈패: (모펫을 향하여) 뭐이가 어드래?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회개를 하라는 거이가, 당장 꺼지지 않고 뭐하니~ 혼나야 정신을 차리겠어! (돌을 들어 모펫의 얼굴을 향하여 집어 던지다).
아이린 (92세)/마펫의 며느리: 그는 굉장히 유머 감각이 있는 분이었어요. 평양에 6번이나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난 날씬해서 참 다행이야 사람들이 돌을 던져도 잘 안 맞거든’
결코 쉽지 않았던 한국인과의 첫 만남,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오물을 끼얹는 한국인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I believe there are great attractive and when once relieved from official extortion and from the idea that labor is dis-honorable, will develop into a strong people (나는 이 나라에 대한 위대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인은 지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관리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노동이 천하다는 생각만 버린다면 강력한 민족으로 성장할 것입니다)--1890년 3월 18일 미국 북장로교 본부로 보낸 편지 中에서. 사무엘 오스틴 마펫은 서울을 떠나 평양에 정착하기로 뜻을 굳힌다.
동료 선교사: 잠깐만, 기념 촬영을 해야지,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잖아. (1893년 1월 평양으로 떠나는 사무엘 마펫과 선교사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마펫은 변두리에 허름한 집을 얻어 목회를 시작한다 (사무엘 A. 마펫의 첫번째 집).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사무엘 마펫을 널다리골 교회의 마포삼열(馬布三悅) 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무렵, 청일전쟁(1894년)이 터졌다. 평양이 격전지가 될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교사들도 평양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1894년 7월 30일 북쪽에서는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서는 일본 군대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마지막 남아있던 사람들도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는 돌아오라는 연락이 빗발치지만 심사숙고 끝에 저는 여기에 남기로 했습니다. (평양은 전투로 폭탄이 터져서 거리가 혼란스러움).
주민1: 당신들 누구요?
마펫: 저는 널다리골 교회 마목사입니다. 여기 위험합니다. 어서 갑시다.
주민1: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주민2: 그저 불벼락 맞기 싫으면 날래 따라 오시라요. 삽시간에 여기 불바다가 될거니까니~
평양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진 그해 여름 내내, 마펫은 교회와 피난민들 곁을 지켰다.
교인: 정말 안떠날거십니까? 이 평양 바닥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목사님 혼잡네다.
마펫: 이 사람들 옆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전쟁터에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환경에서 밤낮으로 사람들을 돌보느라 지친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한국교회사: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을 무조건 껴안아 주고 이제 보살펴주고 좀 더 나아가서 보호해주고 하는 그런 일을 이제 마포삼열 목사님이 하셨지 않겠습니까. 그게 평양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졌죠.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이 그의 작은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교회는 일년이 멀다하고 새로 지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펫은 원칙을 세웠다 (1900년 평양 장대현교회 건축).
임희국: 이제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신앙이고 또 교회는 우리의 교회다. 선교사들의 교회도 아니고 선교사들의 신앙도 아니고 우리의 것이다 하는 그런 분명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교회를 건축하게 합니다.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 본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 학교와 병원을 지을 자금과 인력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그는 요구한 것이 관철될 때까지 포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켄 헨케: 우리는 그걸 끈기라고 말하죠.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끈기 있게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나가면 결국 해낼 수 있다고 믿었죠. 그는 끈기 있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마펫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는 1907년 목사 7명을 배출했다 (1905년 평양신학교 학생과 교수진-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그 중에는 평양 시내에서 마펫에게 돌을 던졌던 이기풍도 있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한국인 목사들에게 넘겼을 뿐 아니라 한국장로교의 전체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목사들이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인 숭실대학교를 세워 평양도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수준 높은 근대교육을 제공했다. 동시에 한국 여성들의 남다른 교육열에 감동한 그는 최고의 시설을 갖춘 여학교를 세웠다 (숭의여학교).
구건서 총장/숭의 여자대학교: 마포삼열 목사님께서는 가정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라는 큰 그림을 그리셨죠. 또 한 가지 여인들을 교육함으로 인해서 차세대에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었고 숭의여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마펫의 주변에는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애국적 신앙심을 가진 지식인 청년들로 일제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용기있게 외치는 시대의 등불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사무엘 A. 마펫, 조만식, 윤동주(숭실중학교), 차이석(숭실대학), 이재(일신학교), 손정도(숭실대학), 박현숙(숭의여학교), 김경희(숭의여학교)).
이치만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한국교회사: 역사의 주체가 되는 개인을 길러냈다. 근대라고 하는 것은 근대정신을 향유하는 개인이 있어야 그 근대는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 개인은 단지 혼자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는 개인이어야 되는데, 마펫 선교사님이 길러냈던 그 개인들, 근대에 발견된 개인들은 역사의 주체가 되시고 그러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애국적 신앙심을 가진 이들은 당시 평안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안창호,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의 꿈을 키웠고 마침내 3.1만세운동의 주역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일제는 이런 사무엘 오스틴 마펫과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평생 일본의 대학에서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온 재일 사학자 이성전 교수,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제 강점기 북한지역에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 학교에 주목한 사람이다.
이성전 명예교수/게이센여학원대학교, 재일사학자: 이 즈음에 조선총독부 안에 종교과가 설치됐습니다. 종교과는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 대비해서 신설됐죠. 그 정도로 기독교를 경계했던 겁니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와 한국기독교 사이에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신사참배가 시작됐다. 이와 함께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는 기독교계 학교를 향한 강력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회고록 와타나베 도요히코 구술). 일본의 한 극우단체에서 발행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 와타나베 도요히코의 회고록은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원중 박사/일본 도시야대학교 신학부 강사: 이 자료는 와타나베 도요히코 라는 사람이 구술한 내용인데, 여기서 재미있는 구절이 있는데, 조선에는 합병할 때부터 이미 기독교 학교가 상당수 있었는데 교육면에 있어서 기독교의 세력은 굉장히 강했고 교육행정상 그게 큰 문제였다. 게다가 그 학교의 중심지는 평양이고 그 안에는 숭실대학과 숭실전문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이들 기독교계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자 조선총독부는 언론을 동원해 선교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신보 1920년 8월 3일자, 조선에 펼친 미국인의 악마의 손 통치의 해충은 선교사다 무지하고 불만 가진 조선인을 선동했다) (일본 국민신보 1920년 8월 1일자, 미국 선교사의 교회당에서 음모자 10여명 체포되다 교회에서의 검거는 처음 향후 감시를 한층 더 엄격하게) (일본 매일신문(오사카판) 1932년 11월 1일자 침략적 미국과의 국제동맹).
이원중: 1932년도에 신문기사들을 보면은 일본이 그때부터 미국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나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을 적국으로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신학이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들 뒤에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너희들도 다른 일본 사람들처럼 신사참배를 해라.
그 즈음 조선총독부는 대만에서 신사참배 거부문제를 해결한 야스다케 다다오를 평안남도 지사로 불러온다. 야스다케 다다오는 마펫과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게 신사참배를 하라고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치만: 그 핵심이 바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그래서 이 세 학교를 평양 삼숭이라고 부릅니다. 총독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평양 삼숭을 꺾어야 되고 평양 삼숭에 있는 마펫과 맥큔은 절대 꺾일 생각이 없고 평양이 버텨주면 전국이 버티는 이런 국면이었습니다.
어느 덧 마펫은 나이 이른, 친구 베어드 선교사에 이어 길선주 목사까지 세상을 떠난 뒤, 힘겹게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1936.2.16 <아들 제임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가끔씩 손가락 마비로 글을 쓰기 어렵다. 학교를 폐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결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1936년 마펫과 평양의 선교사들은 숭실대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를 자진폐교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남장로교 기독교 학교를 비롯 다른 많은 학교에 자진 폐교에 영향을 끼쳤다 (선천, 서울, 대구, 군산, 전주, 순천).
박은영 연구교수/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충격이었을 겁니다.선교사들이 학교 폐교와 추방령을 감수하고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자 하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이 되거나 투옥이 돼서 다시 감옥에서 나와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다거나 하는 1945년 일본의 패전 때까지 신사참배 거부가 본격화되는 시점부터 오히려 조선이 독립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성전: 마펫은 조선인과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념이 확고하고 애정이 깊은 인물이 조선인 편에 있다는 것은 통치를 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고 할 수 있죠 (마펫-1936년 한국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마펫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1936년 10월말 그는 급거 미국으로 돌아간다. 마펫을 떠나게한 것은 한 일본여인의 편지, 고위관리의 아내이자 기독교인인 그녀가 마펫 암살음모를 알려 준 것이다. 하지만 마펫은 그 소식을 듣고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찰스 마펫/사무엘 A. 마펫의 손자: 일본인들의 위협이 상당했지만 할아버지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고 곧 떠나게 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곧장 기차역으로 가서 항구로 가는 첫 기차를 태웠고, 거기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도록 했죠. 그렇게 미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온 마펫은 사실상 가진게 거의 없었다(미국 캘리포니아 카펜테리아). 아내의 고향이었던 이 마을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은 한 지인이 내어준 작은 창고였다. 한국기독교의 대부였던 그였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계속되는 병,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배표 한 장, 죽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그의 고향은 한국이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했다.
Sammual Austin Moffett 1864~1939 Pioneer Missionary to Korea 1889~1936/Lucia Fish Moffett 1877~1962.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한국인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던 그는 그가 세운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찬송가 #304--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던 평양의 학교들은 해방후 서울에서 다시 태어났다(장로회 신학대학교, 서울광진구). 요건은 마지막 때쯤에 찍으신 여권 사진인데요~ 평양신학교도 장로회 신학대학교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문화훈장 국민장(1966) 이것은 마목사님이 쓰셨던 반지예요. ‘마’자가 쓰여 있잖아요 자세히 보면 참 놀랍지요. 그 당시에 이분이 굉장히 크셨는데 기골이 장대하신 분인데 손가락은 가느셨던 모양입니다.
마펫은 서북지역 한국인들에게 삶의 대소사를 나누고 싶은 가족이었다. 그렇게 46년을 사는 동안 다섯명의 아들이 평양에서 태어났다.
임성빈: 아들이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다섯 명한테 될 수 있으면 목사되지 말라고 했대요. 근데 그 중에 네 명이 목회자가 됐고 한 명은 의료 선교사가 됐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게 아니 거든요. 그만큼 진실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따랐고 또 아들들이 한결같이 존경했다는 거~
마펫은 의료 선교사였던 첫 아내를 잃는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 목사들의 무릎에서 자란 다섯명의 아들들은 모두 건강하게 장성해 아버지와 같이 선교사가 됐다 (장남 제임스, 2남 찰스, 3남 사무엘, 4남 하워드, 5남 토마스). 그 중 두명은 한국 선교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사무엘 휴 마펫(한국명 마삼락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3남),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샘휴 마펫, 중국 선교사였던 그는 예일대 박사가 되어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30년간 장로회 신학대학교와 연세 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대학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서정운 명예총장/장로회 신학대학교: 우리 마삼락 목사님은 저희가 신학생일 때 선생님이셨죠. 장로교 교회사를 배웠습니다. 이미 그분은 그 방면의 석학이셨고 또 젊으셨지만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배웠습니다. 가끔 식사를 많이 하시면 평양 사투리로 ‘배가 뺑뺑합니다’ 라고 말씀하셔서 저희가 웃곤 했습니다.
의사였던 넷째 아들 하워드 마펫은 대구의 한 병원에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선교 박물관), 그런데 불과 1년만에 일본으로 피난을 가야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워드 마펫 한국명 마포화열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4남, 그러자 그는 일본에 있는 미군부대를 찾아갔다 (Headquarters Fifth Air Force in Korea).
찰스 마펫/하워드 마펫의 아들: 그는 군부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훈련된 의사이고 한국에서 자랐습니다. 만약 나를 사흘 안에 내 병원으로 돌려보내주면 군대에 지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비아냥 거렸어요.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려고 했고 아무도 다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렇게 공군 의무관이 되어 돌아온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김준식 관장/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 제가 볼 때 사람을 키우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마펫 원장님은 일일이 추천서를 쓰는 거죠. 그래서 미국에 있는 병원에 사람을 보내고 또 미국에서 유명한 분들을 많이 모시고 와서 우리 병원에서 우리나라에서 치료할 수 없는 그런 병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유수한 병원에서도 여기 와서 연수를 받기도 했었죠.
당시 그는 전쟁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또한 미국 유수의 대학과 교회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아 어린이 병원과 간호학교,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만드는데 헌신했다.
(기부금모금 홍보영상), 미국교회의 지원이 없이는 더 이상의 의료시설도 치료장비도 후송병원 건설도 불가능합니다.
미군이 주고 간 군 막사용 건물에서 시작한 작은 병원은 46년 후 대학병원을 포함한 국내 굴지의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던 하워드 마펫은 자신을 대구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My home is in Daegu. 대구의 우리 집 앞 마당에 묻힌 부모님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었습니다.
Moffett-Dr.Howard Fergue 1917~2023/Delle MacKenzie 1915~2010
Missionary
Superintendent of Daegu Presbyterian Hospital
Superintendent of Leprosarium Keimyung University Board of Director
Associate Medical Director of Keimyung University Dongsan Medical Center
1948~1993 “It was their privilege to serve God and the Korean people whom they loved.”
찰스 마펫: 부모님은 한국인과 한국을 사랑하셨고 자신들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대구에서 한국인 고아들과 함께 성장한 찰스 마펫이 아버지에게서 한국인 고아들을 향한 사랑을유산으로 물려 받은 그는 세명의 한국인 고아를 입양했다. 지난해 (2019년) 10월말 교수와 학생 대표가 한 자리에 모였다. 설립자 초대교장 마포삼열(馬布三悅) Founder and First President Samual Austin Moffett.
사무엘 오스틴 마펫을 추모하는 이 작은 동산이 조성된 것은 14년전 봄, 그날 이곳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사무엘 오스틴 마펫 사후 67년만인 2006년 유해의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만난 사람,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마펫, 그리고 代를 이어 한국을 사랑한 그의 아들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 역사의 소중한 이름들이다. 끝. (KBS 다큐세상 50회 3.1절 특집 130년간의 한국사랑-마포삼열과 그의 아들들에서 정리).
① 1885.4.5.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두와 아펜젤러에 대한 서울과 남한지역 교회사는 배웠지만, 마펫 선교사의 평양과 북한지역 선교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KBS 다큐세상 50회를 보면서 평양, 북한에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사무엘 오스틴 마펫 (Samuel Austin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의 활약을 심도있게 알게 되어 기쁘다. 그는 1889년 겨울에 배를 타고 미국을 출발, 그 이듬해 1890. 1. 25에 조선에 도착하였다.
② 마펫 선교사가 도착한 당시 서울은 선교사들의 안전지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달리 개척정신이 강했던 그는 서울을 벗어나 약 4년간 아홉 차례에 걸쳐서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 요동군과 산동지역까지 여행했다. 전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
③ 마펫은 사랑방에서 전도를 시작해서 교회를 세웠고 장로교 신학교를 세워 1907년 목사 7명(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을 배출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 시내에서 마펫에게 돌을 던진 깡패였다. 마펫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한국인 목사들에게 넘겼을 뿐 아니라 한국장로교의 전체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목사들이 관리하도록 했다. 학교를 세워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④ 20여년 동안 마펫은 진취적 애국적 신앙심을 가진 지식인 청년들을 길러냈다. 즉, 윤동주(숭실중학교), 차이석(숭실대학), 이재(일신학교), 손정도(숭실대학), 박현숙(숭의여학교), 김경희(숭의여학교) 등은 마펫 선교사가 길러냈던 사람들이다. 마펫의 기독교계 학교들이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하니까 조선총독부는 언론을 동원해 선교사들을 공격하였다. 일본 국민신보 1920년 8월 1일자, 미국 선교사의 교회당에서 음모자 10여명 체포되다. 1932년도 신문기사들을 보면 일본은 이때부터 미국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⑤ 조선총독부는 마펫과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게 신사참배를 하라고 집요하게 압박했다. 그 핵심이 바로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였다. 총독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 학교를 꺾어야 되고 마펫과 맥큔은 절대 꺾일 생각이 없었다. 어느 덧 마펫은 나이 이른, 친구 베어드 선교사에 이어 길선주 목사까지 세상을 떠난 뒤, 힘겹게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학교를 폐교해야 결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⑥ 결국 1936년 마펫과 평양의 선교사들은 숭실대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를 자진폐교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다른 많은 학교에 자진 폐교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충격이었다. 선교사들이 학교 폐교와 추방령을 감수하고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이 되거나 투옥이 돼서 다시 감옥에서 나와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조선이 독립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⑦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마펫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1936년 10월말 그는 급거 미국으로 돌아간다. 마펫을 떠나게한 것은 한 일본여인의 편지, 고위관리의 아내이자 기독교인인 그녀가 마펫 암살음모를 알려 준 것이다. 하지만 마펫은 그 소식을 듣고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 들였고 곧 떠나게 했다. 그 바람에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⑧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온 마펫은 사실상 가진게 거의 없었다. 아내의 고향이었던 이 마을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은 한 지인이 내어준 작은 창고였다. 한국기독교의 대부였던 그였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계속되는 병,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배표 한 장, 죽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그의 고향은 한국이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했다.
⑨ 마포삼열 목사는 46년간 조선에서 사는 동안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네명은 목사가 되었고 한명은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그들 중에 아들 둘은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3남 사무엘마펫과 4남 하워드 마펫(한국명 마삼락)이다. 하워드 마펫도 병원(현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고 많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하워드 모펫의 아들 찰스 마펫도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어 3대가 한국을 섬기고 있다.
⑩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던 하워드 마펫은 자신을 대구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대구의 아들은 집 앞 마당에 부모님의 유해를 모셨다. 찰스 마펫은 아버지에게서 한국인 고아 사랑을 유산으로 물려 받아 세 명의 고아를 입양했다. 지난해 (2019년) 10월말 교수와 학생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설립자 초대교장 마포삼열 추모행사가 있었다. 2006년, 사무엘 오스틴 마펫 사후 67년만에 유해의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마펫, 代를 이어 한국을 사랑한 그의 아들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 역사의 소중한 이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