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엄마 / 박미숙
내게 있는 여러 개의 가방은 대부분 선물 받은 것이라 그것을 사용할 때면 자연스럽게 준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비싼 것은 딱 한 개 있는데, 작은딸이 사줬다. 딸은 몇 년 전 내 생일에, ‘결혼하고 나면 큰돈은 쓰기 어려울 것 같은데 미리 말하면 말릴 것이 분명해 몰래 샀다’라며 선물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것이 아니고 필요성을 못 느껴 안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도 친구들 엄마는 다 가진 명품 가방이 우리 엄마에게도 있었으면 싶었나 보다. 힘들게 부장을 하며 받은 에스(S) 등급의 성과상여금을 선물 사는 데 다 썼다. 미안한 마음이 컸으나 나의 취향을 잘 알고 골랐기에 색이나 모양이 과하지 않고 예뻤다. 가끔 결혼식이나 모임에 메고 가면 가방 좋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딸이 사줬다고 넌지시 자랑한다.
출근할 때 들고 다니는 것은 손재주가 좋은 시누이가 만들어 줬다. 짙지 않은 회색에 예쁜 레이스가 넓게 깔리고 붉은색 꽃 자수가 놓였으며 꽃무늬 천의 안감까지 덧대고 있어 고급스럽다. 게다가 큼직해서 서류와 수첩, 물병도 다 들어가며 각이 잡혀있지 않아 책상 서랍에도 쏙 들어가니 참 좋다. 시누이는 검정 고무신에 예쁘게 꽃 그림을 그려서 주는가 하면 올 때마다 김치도 담그다 주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나 목도리도 종종 사다 준다. 친정 언니처럼 살갑다.
그런데 요즘 즐겨 메는 것은 재작년에 연아 엄마가 만들어 준 구찌 스타일(Gucci Style)의 작은 가방이다. 가볍고 예쁘며 지갑과 차 열쇠, 휴대전화 넣기에 알맞은 크기다. 끈이 길어 대각선으로도 멜 수 있어서 가볍게 산책하거나 장을 볼 때 제격이다.
재작년 2학년 담임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연아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언니,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고. ‘이게 뭔 말이지?’ ‘아하, 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에게 보낼 것을 내게 잘못 보냈구나’ 싶었다. 하도 흔한 이름이라 대학교 때 우리 과 친구 백 명 중 미숙이가 여섯 명이나 있었고 다른 모임에 가도 같은 이름이 많으니 상황이 빨리 파악되었다. -연아 담임인데 문자 잘못 보내신 것 같다, 아이 일로 의논할 일 있으실 때는 언제든지 연락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짐작했던 대로 같이 요양병원에 있던 분이 퇴원했는데 나랑 이름이 같아서 실수했단다.
그런데 그날 문자를 주고받은 것이 오히려 연아 엄마랑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 2학년답지 않게 긴 글을 잘 쓰는 연아는 일기장에 집안일을 아주 상세히 적어온다. 엄마가 암 수술을 하였는데 항암치료가 끝나 쉬는 기간에도 집에 오지 않고 요양병원에 머무르니 글 속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삼 남매 중 막내인 연아 걱정이 제일 컸지만, 아이는 자기 일을 야무지게 잘 해냈다. 난 연아에게 준비물을 미리 챙겨두었다가 건네주고 어려운 수학 문제는 남겨서 가르치는 등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꾸어 주려고 했다. 또, 잘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칭찬하는 문자를 보내고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를 알려주었다. 학급 누리집에 활동사진도 많이 올렸다. 내가 하는 작은 것들이 힘든 병원 생활에 위안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큰오빠에게 하는 욕설이나 폭력으로 자기까지 불안해하는 일기를 써 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다 적어 온 것을 읽을 때면, 혼자서 엄마 몫까지 감당하느라 힘든 아빠가 이해되면서도 오빠가 비뚤어지진 않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2학년이 끝나던 날, 연아 엄마가 마지막인데 찾아 뵙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방과 후 수업 때문에 교실을 비켜주어 교사연구실에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딸과 엄마는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병원 생활을 오래 한 사람 같지 않게 아주 고왔다. 이제 치료가 다 끝나고 정기 검진만 다니면 된다, 아프기 전에 어린이집 교사였는데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들에게 폭력적인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하니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쉽게 변하지 않아 걱정이라고도 했다. 난 다시 아프지 않으려면 음식이 반, 운동과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이 반이니 건강관리 잘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꼭 껴안아 주었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난 시각에 교실로 오니 그녀가 두고 간 종이가방이 보였다. 그 안에 구찌 스타일(Gucci Style)의 작은 가방이 들어있었다. 병원에서 선생님을 생각하며 직접 만든 것이니 받아주면 좋겠다는 편지도 함께였다. 아픈 몸으로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기웠을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부디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어 병원에서 치료받던 그 시간이 추억으로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복도에서 연아를 만나면 ‘엄마 잘 지내시냐?’고 묻곤 했는데, 올해는 학교를 옮겨와서 만날 수가 없다. 가방만 보면 생각나는 연아 엄마, 새로운 일자리는 찾았는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을 큰아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무엇보다 건강은 괜찮은지 그녀의 안부를 묻고 싶은 밤이다.
첫댓글 그런 경황 중에도 고마움을 전하려는 연아 엄마 마음이 예쁘네요.
아, 왜 이렇게 슬프지.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연아와 연아 엄마에게 큰 일을 해 주셨네요. 연아집이 평온해졌기 바랍니다.
엄마도 없는 집, 아빠와 오빠의 갈등 연아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글로 쓰고 거기에 따뜻하게 반응해 주신 선생님이 계셔서 잘 견뎌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연아 엄마도 선생님 생각을 하겠네요. 뭉클합니다.
글이 술술 잘 읽힙니다. 재미있으면서 슬프기도 하네요.
작년에 제가 만났던 아이도 이름이 연아인데, 이글을 읽으니 생각나네요.
연아와 엄마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엄마의 부재, 아빠와 오빠의 갈등에 어린 연아의 환경이 안쓰럽네요.
그 어려운 시기에 만난 선생님의 자애로움이 아이에게 스며들어 견디게 했을 거예요.
연아 가족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연아 엄마 같은 분들이 가끔 있나 봐요. 선생님의 손길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아요.
아픈 데도 선생님 생각하면서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기웠을 연아 엄마 생각하니 뭉클합니다.
제자의 부모와 이런 따뜻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름답네요.
같은 업종에 근무했다는 걸 이제야 압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