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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시는 하나님 / 시 139:1-12, 눅 5:1-10
지난 수요일 대입 수능시험이 있었다. 이날 시험에서 73살이나 된 할아버지 한분이 시험을 보았다. 칼갈이 할아버지라 불리는 이 분은 낮에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칼을 갈아줘 생활비를 벌고 밤이면 대입학원에서 영어단어를 외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못가본 게 너무나 한이 되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64세 때인 88년, 침침한 눈으로 초등학교 교과과정부터 시작해 책과 씨름한지 3년만에 초등학교 학력인정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어 2년만에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했다. 그러나 기초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 4년간 대학의 문은 그렇게 멀게만 보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올해 다시 도전하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칼을 갈아주는 직업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공부를 한다해도 책과 씨름할 시간이 부족하여 4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경기도 강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20살 때는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가느라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한이 올해 또다시 시험에 도전을 하게 했다. ‘해마다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지만 힘이 있는 한 공부를 계속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이근복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번에는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관광에 나가서까지 밤새며 소리 질러가며 즐긴다는 고스톱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다. 정전이 되어 등잔불이라 쬐끔 어두운 곳에서 패를 다 돌렸다. ‘설 사람 서고 들어갈 사람 싸게 들어가더라고.’ ‘아따, 패 참 좋네, 요번 판은 완전히 내 판이구만. 야! 너는광이나 팔아야 겠다.’ ‘어매, 무슨 소리여, 내가 이래봬도 쌍피를 들었구만.’ ‘다섯이 치니께 둘은 광 팔아야지 안그러냐?’ ‘나보다는 네가 팔아야겠다. 이번 판은 내가 운명적으로 먹을 거니까. 먹으면 반절 줄게.’ ‘그래? 그럼 난 죽었다. 반절 약속 모른다고 잡아떼면 안돼.’ ‘야, 너도 들어가라. 네 패보다는 내 패가 더 낫잖아.’ ‘그래, 네가 치고 꼭 나야 돼.’ ‘이 새끼들, 왜 짜고 치냐? 그리고 너는 나랑 맞들어서 둘 다 치면 피박 쓴다.’ 이때 정전이 되었던 전기가 들어왔다. 들러보니 이번 대선 주자 다섯명이 두명은 광팔고 들어가고, 세명이 패를 잡고 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한신대학교 신문에 나오는 대선 풍자 만화이다.
오늘 본문인 시편에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는 말씀이 있다. 이 시인은 한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자 했던 경험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가 허사임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시인이 다윗이라면,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함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한번씩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였을 때, 그 동산에 숨어 하나님을 피하여 했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두려웠던 것이다. 전에는 정답던 하나님의 음성이 이제 두려워진 까닭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려 할 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여 하나님을 피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니느웨로 보내셨을 때,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책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망을 받았을 때도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소명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소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가운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땅 속에 묻어놓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압박을 느낀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그런 모든 것에서 도피하여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걸리는 것은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이다.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인간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 그에게서 도망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어떤 사람은 하늘로 도망을 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시도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아 이 세상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 이르면 하나님은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돈과 권력으로 천국을 이루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더 큰 두려움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도망을 간다.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지옥 또는 스올, 곧 죽은 자들의 거처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기에 알맞은 장소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압박하여 오는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은 죽음을 택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되지를 못한다. 거기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한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과학을 발전시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온 우주를 다 정복하면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무수한 노력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11-12절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하나님을 잊기 위하여 어둠 속으로 달아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한때는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 하나님을 반박하고, 그가 계시지 않는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쳐대면서, 하나님 없어도 편안히 살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피한 그 어둠이 곧 빛으로 변함을 알게 된다.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맞부딪치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 없이 머물 수가 없게 된다. 다윗왕은 자기가 지은 죄를 권력으로 은폐하려고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는 이와같은 경험을 통해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길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도망하는 우리를 쫓아오신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우리를 하나님은 굳이 찾으시려는 것이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서 안심하고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어코 찾아내시어 니느웨로 보내셨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도망다니는 인간을 찾으시려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셨다. 그는 심판주로 범죄한 인간들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어줌으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눅 15장에 보면, 잃은 영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비유이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불평과 시비를 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책망하고 심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들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점이 두가지인데, 하나는 목자나 여자가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열심히 찾는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무척 기뻐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그가 범죄한 인간을 찾으러 온 것은 그들을 벌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요, 기쁨을 얻고자 함이라는 사실이다.
TV영화인데 ‘초원의 집’이라고 하주 오래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의 이야기를소개하고자 한다. 한 소년이 친구와 함께 지하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선생님이 문을 여는 바람에 놀란 나머지 불붙은 곰방대를 그냥 버려둔 채 지하실을 나온다. 이로 인하여 불이 나서 맹아학교가 전소되고, 그 소년의 눈먼 누나의 아기를 구하려던 한 보모와 그 아기가 함께 불에 타 죽게 된다. 나중에 불탄 자리를 조사하다가 곰방대가 발견되므로 그것이 화재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이 소년은 이로 인해 고만을 한다. 자기 누나는 아기를 잃고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소년은 자기 누나를 기쁘게 하고 도와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이 소년은 집을 뛰쳐나와 도망을 간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이 소년의 아버지가 그를 찾아 나선다. 이 소년은 결사적으로 도망간다. 그는 자기의 죄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끝까지 도망을 간다. 아버지와 그 친구가 이 소년을 쫓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아들을 찾는 것은 벌주려 함이 아니라 그를 도우려고 함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도망을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소년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죽은 보모의 남편을 만나 용서를 받는다. 그 후에 정신이 나갔던 소년의 누나가 온전해지고 불타버린 자리에 다시 맹아학교가 세워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가 간직한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저질러 놓은 이 무서운 전쟁의 비참과 그들이 파괴하여 놓은 이 지구의 파멸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저질러 놓은 이 무서운 좌악의 결과들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망가려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네가 지은 모든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고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찾으신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이 죄악의 잔인한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도망가지 말고 예수께로 나아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가 너무 커서 진정 이것이 다 사함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잔인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너무 갑싸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인류가 저질러 온 모든 죄악이 용서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사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그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안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 이 땅 위에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죄악의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야 할 죄인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그 신비하고 오묘한 섭리를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겸손함으로 그에게 순종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탕자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다. 아들될 자격은 없고, 다만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되는 죄인들이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잔인한 죄악들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기를 촉구하고 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일어나는 이 땅 위의 비극들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아픔이 얼마나 큰 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아픔을 극복하고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픔을 안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며, 우리를 주의 참된 자녀로 삼아주실 줄로 믿는다. (1997-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