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95)
2부(45)
다시 떠나는 방랑길
천동 마을을 떠나서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은
지나간 만 일 년 동안의 일로,
오만가지 감회(感懷)에 젖어 들었다.
애당초 방랑(放浪)에 나선 것은,
인간사(人間事)로 구애(拘礙)를 받지 않고,
허공(虛空)을 떠도는 한 조각 구름처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살아가자는데 있었다.
처자식(妻子息)과의 인연(因緣)조차 끊어 버리고
표연(飄然)히 방랑(放浪) 길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상(世上)일은
결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지난 일 년 동안은 수안댁(遂安宅)과
생각하지도 못한 결혼(結婚) 생활(生活)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 와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수안댁(遂安宅)과
결혼(結婚)했던 일도 꿈만 같았고,
그런
생활(生活)이 일 년 남짓하게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별(死別)하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인생(人生)이란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모든 것과 헤어짐이
일상적(日常的)이고 통상적(通常的)인
과정(過程)에 의해 이루어진 죽음이라면 ,
어느 정도는 애를 써보고 이별(離別)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準備)가 된
상태(狀態)였다면 조금이나마 위안(慰安)을
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의 수안댁
(遂安宅)과 짧은 결혼(結婚) 생활(生活)은,
두 사람 사이에 복잡(複雜)한 사연(事緣)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멀쩡해 보이던 여인(女人)이 미신(迷信)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혀 공포감(恐怖感)에
떨던 일도 흔히 보는 일도 아니려니와,
남편(男便)을 살리겠다는 일념(一念)에서
남편(男便) 대신 목을 매 죽은 것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복잡(複雜)했던 일도 일단
지나고 나니 세상(世上)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했다.
김삿갓은 구월산(九月山)과 평양(平壤)을
가볼 생각으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산길을 걸어가노라니 바람은 차도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땀을 식히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풀 언덕에 주저앉아 삿갓을 벗어들고는
눈 앞에 펼쳐진 초겨울의 유리알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쓸쓸한 자신(自身)의
마음을 시(詩) 한 수에 담았다.
생종하처래 (生從何處來)
인생은 어디로 부터 오며,
사향하처거 (死向何處去)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야일편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과 같구나,
부운자체본무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생사거래역여시 (生死去來亦如是)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겠지.
독유일물상독로 (獨有一物常獨露)
여기 한 물건 있으니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불수어생사 (湛然不隨於生死)
고요하여 생사에 걸림 없어라,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새소리를 들어가며 산을 넘고
언덕길을 굽이굽이 감돌아 내려가니
산골짜기에 조그만 주막(酒幕)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세워놓은 말뚝에 야몽(夜夢)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있는 주막(酒幕)이었다.
김삿갓은 주막(酒幕) 마루에 걸터앉아
주모(酒母)에게 술을 청(請)하며 물었다.
"이 집을 들어오다 보니,
야몽(夜夢)이라 쓴 말뚝이 있던데
그 야몽(夜夢)이란 어떻게 나온 말인가?"
주모(主母)가 술상을 갖다 주며,
"나도 모르지요. 간판(看板)도 없이
술장사를 시작(始作)하는 첫날, 어떤
점잖은 첫 손님이 마수걸이 외상술을
잡숫고 가시면서, 주막(酒幕) 이름을
야몽(夜夢)으로 하라고 일러 주더군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첫 손님부터
외상술을 주었다니 그래서 장사가 되겠는가?"
"장사가 되든 말든, 술을 자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그러니 인심(人心)을
좀 쓰기로 설마하니 밥이야 굶겠어요?"
주모(酒母)는 얼핏 보기에 수안댁
(遂安宅)과 인상(人相)이 비슷했는데,
대답(對答) 또한 천하태평
(天下泰平)이었다.
"마수걸이 외상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알고 있는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름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 하! 하! 이름도 모르면서 외상을
주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외상값은 언제 받으려나?"
"갖다 주면 받고, 안 갖다 주면 못 받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술 한 잔 선심(善心) 썼다고 여기면 되지요, 뭐."
가뜩이나 수안댁(遂安宅)을 닮아
호감(好感)이 갔었는데 마음을 쓰는
통이 넉넉한 주모(酒母)를 만나니
김삿갓의 울적(鬱寂)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해서, 짓궂은 소리를 해보는데,
"혹시 내가 외상술을 먹겠다고 해도
외상을 줄 수 있겠는가?"
"돈이 없다는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외상도 드리지요."
주모(酒母)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허기는 그 양반(兩班)은 개업(開業)하는
첫날 첫 손님이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마시기가 미안했던지,
떠날 때 저 바람벽에 시(詩) 한 수를 써 주고
가셨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시(詩)가
그 양반(兩班)이 써 주신
시(詩)입니다."하며
벽(壁)에 씌어 있는 시(詩)를 가리켜 보였다.
김삿갓이 주모(酒母)가
가리킨 바람벽을 보았더니
첫눈에 보아도 기막힌 명필(名筆)이었고,
제목(題目)은 야몽(夜夢)이었다.
향로천리장 (鄕路千里長)
고향길은 천 리 밖 멀고 먼데,
추야장어로 (秋夜長於路)
가을밤은 그 길보다도 더욱 길구나,
가산십왕래 (家山十往來)
고향 산을 열 번이나 갔다 왔다 했다만,
첨계유미호 (簷鷄猶未呼)
처마 밑의 닭은 아직도 울지 않네,
낙관(落款)이 산운(山雲)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산운(山雲) 이양연(李亮淵)은
당대(唐代)의 유명(有名)한 풍류(風流)
시인(詩人)이었기 때문이다.
"여보게!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어머! 손님은 저분을 알고 계세요?"
"알다마다, 직접(直接) 만나 뵌 일은 없어도
유명(有名)한 시인(詩人)이신걸.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내가 술장사를 시작했을 때
다녀가셨으니까,
벌써 7년 전 일인걸요.
그때도 60이 넘어 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만약(萬若) 돌아가셨다면,
자네는 외상값을
영원(永遠)히 못 받게 될 것 아니겠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 돈을
못 받는다고 죽을 형편(形便)은
아니니까요."
"가만있자, 그 어른 외상값이 얼마인가?
그 돈은 내가 갚아주기로 하겠네."
그리고 김삿갓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모(酒母)는
고개를 좌우(左右)로 흔들었다.
"그 어른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저는 그 외상값을 받지 않겠어요."
"내가 외상값을 대신 갚겠다는데
어째서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외상값이라야 몇 푼 아닌걸요.
그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처럼 훌륭한 분한테 외상을 지웠다는
사실(事實)만 하더라도
얼마나 영광(榮光)스러운 일이 되겠어요!
안 그래요? 호! 호! 호!"
주모(酒母)는 호탕(豪宕)하게 웃어 젖혔다.
마음이 유쾌(愉快)할 때면 호탕(豪宕)하게
웃어 젖히던 버릇도 어딘가 모르게
죽은 수안댁(遂安宅)과 비슷해 보였다.
(수안댁(遂安宅)도 이와 같은,
경우(境遇)였다면 과연(果然) 외상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수안댁(遂安宅)도
저 주모(酒母)처럼 꼭 그랬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