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다, 虛數지요.”
연중 가장 큰 국내 행사를 며칠 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오고가는 와중에, 한 젊은 대리가 인파를 향해 이런 말을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내게 건넸다. 이 많고 많은 인간들이 그에겐 그닥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조어린 짧은 분석이었는데, 나는 그이의 반 혼잣말에 크게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수가 그저 虛數로 쳐질 수밖에 없는 건, 虛數가 아닐 다른 수가, 실다운 수(實數)가 어딘가에는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올 數, 인생을 뒤바꿀 유의미한 數가 어딘가에 여전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예상보다 몹시도 강렬하여, 웬만한 간난신고에도 그 존재가치가 변질되지 않은 채 길고도 멀쩡히 살아남아 있다.
장사꾼들에겐, ‘실 매출’을 일으킬 바이어라는 數, 신자들에겐 구원자로서의 신이라는 數, 상처받은 이들에겐 모든 아픔의 자리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품어줄 戀人/동무/조력자라는 數에 대한 환상이 그야말로 검질기게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만약 이러한 實數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이 험한 세상,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살아남을수 있을지, 솔직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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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질기게 옭아매는 무수한 虛數들로 인한 고통이 극에 달할 때면, 나는 아주 먼 나라에 가서 맑고도 깊은 물에 몸을 던지는 상상을 해보곤 하(였)다. 가령, 캐나다와 미국 국경을 넘어 나이아가라 어디쯤에 훌쩍 몸을 던져 그 큰 물 가운데 소리 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나의 얌전한 육신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 상상 속에서 나의 虛數됨으로 인한 갖은 죄성은 이미 깨끗이 씻겨나가고, 나의 흔적 따위는 이미 아무것도 없을 그 자리에는 하이얀 泡沫만이 남아, 알량한 인간됨이 어느 새 혼미하다.
그럼에도, 나는, 먼 나라에서 숨을 끊었다는 이들의 소식을 실은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왜 인간들은 자신이 자신으로 완결되고 말 그 '코 앞'에서, 虛數가 虛數로 남을 수밖에 없는 물리적 한계를 지닌 그곳에서 거칠게 목숨을 끊는 것일까. 虛數가 實數로 마지막 단 한 번만이라도 변화 할 수 있는 원근법적 면죄부를 그 자신에게 허여해 볼 너그러움이 없을 만큼, 인간은 아둔한 동물이거나 잔인한 진화이니, 이것,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현실으로부터 아무런 낙차 없는 편편한 곳에서 스스로를 거두어버림으로써 자신과 주변의 죄성을, 虛數의 한심함을, 일거에 도말할 수 있다니! 인간이 결국 만물의 영장으로서 추구하는 건 효율성일 따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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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분명 虛數인데, 그 검질김이 심상찮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인간이 그 자신으로부터 낙차를 얻게되는,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인해 '존재의 물매'를 얻게 되는 물리학적 과정에 대한 영상적 논설이다. '나'로부터 '너'에게로 가는 하나의 오솔길을 어렵사리 뚫어냄을 통해, '나-아닌-나'를 조금은 담담하게 혹은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철 지난 이야기다.
지금보다 내가 더 어렸을 시절, 이런 虛數로서의 관계가 나를 살게 만들었던 어떤 기억이 이 영화와 함께 가물가물 잡힐 듯 말 듯 하(였)다. 복숭아에다가 뜨거운 속엣 것을 아낌없이 쏟아낼 수 있는 어린 시절이, 부끄러울 정도로 무언가가 넘실거리던 한 시절이 누구나에게 있듯,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며 내가 實數라고 여겼던 어떤 관계들에 대하여, 아니, 이제 와서는 결국 失手라고 여겨야 좋을 몇몇 순간들에 대하여 잠잠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때 나의 實數/失手였던 당신(들). 결국 세월 속에서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처연히 증명해 내고 마는 우리는, 밑질 것도 말 것도 없는 虛數가 되어, 허수아비가 되어, 그럼에도 다시 만나야만 하는 것일까. 이 끔찍한 되새김 속. 어느 새 다시 나이아가라 속으로 깊이 침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銅綠이 슨 골동마냥 숨이 끊어진 채 고요하다. '나'는 결국 사라지고 없다. 이 물살을 기어이 뚫어내면, 나와 당신이라는 虛數는 實數가 되어 어느 곳으로든 일순 증발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감히 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치. 그것. 虛數가 實數가 되는 오직 단 하나의 가능성. 당신이 잠시 나와 하나 되는 순간. 그것이 육체적 교합과 상상 속 ‘자아의 죽음’이라는 유치한 시나리오 밖에서도 과연 꿈꿔 봄직한, 실현 가능한 일일까. 당신은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이름이, 나의 實數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