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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공자의 예술관 : 훈민정음과 회사후소
제16강 공자의 예술관
2부 ‘훈민정음과 회사후소’
1. 세종과 훈민정음
이 태조가 일종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방원이라는 사람이 고생고생을 하다가,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 때에 가서야, 문화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새롭게 문명의 축을 바꾸었다.
고려의 분권화된 권력구조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제로 전환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다. 그리고 이방원의 아들 세종으로부터 그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문화적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종은 패러다임을 쉬프트했는데,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고생을 한 사람이다. 초기에 고려에 있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뭔가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한 이방원의 희생 위에 똑똑한 아들을 두어서 다행히 세종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세종이 나라를 다스리다 보니 나라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발상한 것이 우리민족자체의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상 자체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집현전에 있던 학사들이 모두 반대를 했다. 그 당시에 모두 반대했다.
당시 신숙주라든지 사육신은 모두 집현전의 소장파들이었다. 그런 진보적인 사람들을 동원해서 ‘우리 민족의 글을 만들어야 뭔가 주체적인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생각과 틀이 잡힌다. 중국에만 의존하고, 중국문자를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한다.
2. 한문과 한글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갑골문이 생기기 전에도 중국 사람들의 말은 존재했다. 중국 사람들도 신석기, 구석기 시대부터 말은 하고 살았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혼동하면 안 된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글자가 아니라 사운드다.
언어는 문자가 아니다. 모든 언어는 일차적으로 소리의 체계(system of sound) 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소통하는 것은 사운드의 체계이다. 글씨를 써서 소통하는 게 아니다. 전부 소리로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글자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 하던 말을 기술한 것뿐이다.
갑골문도 중국인의 소리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한국말은 중국말과 다르다. ‘안녕하십니까.’와 ‘니하오마!’는 전혀 다르다. 발음도 다르고 문법구조도 다르다.
‘나는 학교에 간다.’는 중국어로 ‘我去上学.(워치샹시에)’가 된다. 기본적으로 우리말의 구조는 ‘주어+동사+목적어’가 아니고, ‘주어+목적어+동사’가 된다. 목적이 앞으로 오고, 동사가 뒤로 간다. 그런데 중국말은 기본적으로 영어와 같다. 그러니깐 문법이 서로 다르다.
S(주어)+V(동사)+O(목적) : 영어, 중국어
S(주어)+O(목적)+V(동사) : 한국어, 일본어
우리가 말은 하고 있었지만, 말을 표현하는 글자는 없었다. 옛날에도 이두라는 게 있었지만, 세종대왕이 ‘우리말이 있는데, 이것을 표현할 우리 문자가 없지 않은가? 우리말을 이두로 표현하려니깐 얼마나 불편하냐?’면서 글자를 만들라고 하였다.
한국말을 표현하는 ‘글자를 디자인해라!’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였겠나? 내가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빨리빨리 하고 있는데 ‘이걸 표현하는 글자를 빨리 디자인해내라!’고 했다. 이것이 어명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건축이라는 것은 모델이 있다. 그렇지만 이건 모델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이런 몇 사람들한테 명령한다. 요즘 같으면 프로젝트주면서 ‘돈을 주고, 연구소를 줄 테니, 너희들이 모여서 거기서 만들어라!’ 이런 것이다.
훈민정음의 집필자는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8인이다. 세종대왕 자신도 문종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손수 깊게 관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상에 그렇게, 한 민족의 말을 그런 프로젝트로, 몇 년 만에 몇 사람이 만들어서, 그것도 몇 백 년을 쓸 수 있는 유효한 체계로 지속한 유례가 없다.
파스파 문자도 그렇게 만들었지만 쓸모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들어 놓아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1269년 중국원나라 국사인 파스파가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 원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폐기됨.
중국 문자는 자그마치 몇 천 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한글은 몇 년 프로젝트로 세종대왕이 만들라고 지시해서 만든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명령을 받아 처음 시작한 것은 중국말 분석이었다. 한국말을 공부하기 전에 신숙주, 성삼문은 중국말을 공부하기 위해 몇 차례나 중국을 다녀온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함께 '중국을 열세차례나 왕래하여 중국성운학을 공부하였다.
중국말은 발음기호로 표현할 수 없다. 중국말은 뜻글이다. 소리글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뜻글을 가지고 발음을 표현하는 게, 참으로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영어는 알파벳만 알고, 알파벳을 조합하면 발음이 나온다. 하지만 한자는 발음이 아니라 모양을 보고 뜻을 아는 것이다. 뜻글자이다. 한자는 발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
3. 반절
그래서 한자의 발음을 표시하는 방법이 나온다. 동한 말부터 시작해서 위진남북조를 거쳐서 수당 대까지 내려오는 반절(反切)이라고 하는 특이한 체계가 나온다.
반절(反切) : 한자의 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두 개의 한자를 조합하는 체계, 上字가 聲母이고, 下字가 韻母이다. 廣韻이 그 대표적 운서.
그래서 東을 德紅節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德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들은 성모(聲母)라고 했다. 紅을 운모(韻母)라고 했다. 그리고 성모에서는 최초의 子音만을 떼어낸다. 즉 ‘t’소리를 떼어낸다. 그리고 운모에서는 자음을 떼어낸 나머지 후반부를 떼어낸다. 즉 ‘ung’소리를 떼어낸다. 그러면 東(tung)이라는 발음이 나온다.
東: 德(聲母, 최초의 자음) + 紅(韻母, 나머지 부분)
‘가’ ‘타’ ‘나’라고 발음할 때, 앞에 나오는 최초의 발음이 자음(子音)이다. 이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뒤에 ‘ㅏ’라는 소리 등에 반드시 닿아야 하기 때문에 ‘닿소리’라고 한다. 그리고 ‘ㅏ’와 같은 소리는 자기 혼자 나는 소리이므로 ‘홀소리’라고 그런다.
닿소리(자음) 홀로 설 수 없는 의존적인 소리
홀소리(모음) 홀로 설 수 있는 독립적인 소리
닿소리는 반드시 닿아야 한다. dependent하다. 그리고 independent하게 가는 건 홀소리다. 그게 자음과 모음이라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德에서 최초의 이니셜 사운드인 ‘t’를 취한다. 그리고 운모인 紅에서 ‘ung’을 취한 다음에 결합시켜서 tung이 된다.
이렇게 운(韻)만 맞추는 것을 시(詩)의 운을 밟는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시(詩)를 짓는 사람들이 운을 맞추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성모를 빼고 운모를 맞춘 것이다.
한시(漢詩)는 첫 행의 마지막 글자가 운의 기준이다. 2,4,6,8행의 마지막 글자는 그 기준음과 같은 운의 글자이어야 한다.
중국 사람들이 tung이라고 그럴 적에, ‘t’라는 성모와 ‘ung’이라는 운모를 합쳐서 ‘tung’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모의 경우, 복합적이다. 이걸 또 u와 ng로 나눌 수 있다. 그러니깐 중국 사람들은 성모와 운모의 이분법 체계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집현전 학자들이 중국말을 조사해 보니깐, 이런 2분법은 우리나라 말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3분법 체계를 취한다.
중국어 : 이분법 : 성모와 운모
한국어 : 삼분법 : 초성, 중성, 종성
그게 뭐냐 하면, ‘t’가 있고, 중간에 모음인 ‘u’가 들어가고, 다시 받침인 ‘ng’ 사운드로 분리된다. 그러니깐 우리말로 하면, 이게 ‘ㄷ’과 ‘ㅗ’와 ‘o’이 된다. 삼분이 된다. 중국말의 경우는 ‘ㄷ’과 ‘ㅗ o’의 이분이 된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3분을 한 것이다. 그러니깐 C+V+C가 된다.
C(자음)+V(모음)+C(자음)
4. 닿소리
그리고 우리말에서 가능한 닿소리를 모두 조사했다. 그래서 닿소리 17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V라는 모음을 11개 찾아냈다.
그런데 이게 기가 막히다.
우리 닿소리를 보면 牙舌脣齒喉(아설순치후)音의 5개로 나누었다.
아음(牙音):木:velar,
설음(舌音):火:alveolar,
순음(脣音):土:labial,
치음(齒音):金:dental,
후음(喉音):水:glottal
아설순치후는 오행의 목화토금수의 원리를 맞춘 것이다. 그러면서 집현전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ㄱ ㄴ ㅁ ㅅ ㅇ 의 메이저 닿소리를 만들었다.
얼마나 체계적으로 디자인했냐 하면, 영어에서 g와 k은 발음상 유사하지만, 형태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페니키아 문자인가 어디서 그냥 주워온 거다.
그러나 우리글 ㄱ과 ㅋ은 형태적 디자인이 체계적이고 간단하게 되어 있다. ㄴ은 ㄷ으로 가고 ㄸ으로 간다.
훈민정음 해제를 보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것은 ㄱ를 발음하면 혀가 ㄱ으로 구부러지는 느낌이 들고, ㄴ을 발음하면 혀가 ㄴ으로 되는 느낌이 있다고 한다. ㄷ이라고 하면 혀가 ㄷ모양이 되는 느낌이 있다. ㅁ이라고 하면 입술이 꽉 막혔다. ㅅ라고 하면 뭔가 닿는 느낌이 있다. o라고 하면 목구멍이 동그래지는 거 같다.
이것이 디자인이다. 인간의 발성이라는 무형의 체계를 디자인했다는 것이 기가 막히다. 이걸 이렇게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영어 알파벳과 게임이 안 된다. 우리의 알파벳은 체계가 있다.
오행의 원리 위에서 음성 기관의 모습을 가지고 무형의 세계를 디자인한 것이다.
5. 홀소리
그러면 이제 홀소리로 가보자! 홀소리도 기가 막히다. 우리 동양의 삼재론(三才論)은 天地人이다. 아까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가운데 기(氣)가 있다고 했다. 氣는 사람이다. 이걸로 집현전 학자들이 문자를 디자인했다. 난 이걸 생각하면집현전 학자들의 발상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ㅡ은 땅이고 ㅣ은 사람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천원지방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깐 옛날에 .은 하늘이다. 이것이 천지인이다. 이것을 가지고 모음을 체계적으로 조합해서 디자인한 것이다.
ㅛ
ㅗ
ㅕㅓ ㅏㅑ
ㅜ
ㅠ
이것을 조합하면 된다. 하늘과 땅을 결합하는 것이다.
ㅛㅗ와 ㅏㅑ는 양성모음이 되고, ㅕㅓ와 ㅜㅠ는 음성모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막힌 디자인이 세상에 어디 있나?
정말 우리가 알고 살아야 한다.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심플한 structure를 가지고 모음을 만들었다. 하늘은. 땅은 ㅡ 사람은 l 라는 천지인을 결합해서 모두 해결한다. 우리의 발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결했다.
그러면 이 홀소리와 닿소리로 사각의 우주를 만든다. 각각의 위상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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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C V ㅣ
ㅣ C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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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홀소리는 반드시 상좌단에 와야 한다. 위상을 만들어서, CVC를 가져다가 이 사각의 우주에다 배열을 하였으며 위치는 고정이었다. 즉 위상을 만들어 배열하여 위치를 고정하였다. 그러면 한글이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발음 체계를 이 단순한 도상을 가지고, 아주 체계적으로 담아놓았다. 이런 디자인이 어디 있겠나?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단순한 도형의 형태로 가장 복잡한 인간의 발성체계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이상의 창조가 어디 있겠나?
한국인들이 몇 명이 몇 천 년 동안 이어갈 우리 민족의 언어를 디자인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에게 과연 이러한 발상이 있나? 이렇게 창조적인 민족의 창조성이 도대체 어디로 갔나? 이게 통탄할 이야기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잠재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이렇게 위대한 민족의 후예들이 내 강의를 듣고 좀 깨어나길 바란다.
6. 공자와 노래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페이퍼의 5페이지 14번을 봐주기 바란다.
자하(子夏) 성이 卜이고 이름이 商이다. 44세 연하, 子游, 子張과 더불어 공자말년교단의 삼걸. 위문후(魏文候)의 스승이 되었다.
자하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질문하는 내용이다.
이 자하(子夏)라는 사람은 자유(子游)라든가 자장(子張)이라든가 하는 사람과 더불어 공자의 말년 제자로 가장 유명한 3대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하는 위나라 문후에의 카운셀러로 가서, 유명한 학원을 경영하면서 유명한 사상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나중에 제나라 직하학파의 모델이 된다. 중국의 맹자라든가 순자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다 이 모델에서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위대한 문화운동을 전개한 사람이다.
그런데 공자를 예술가라고 할 때, 공자를 음악가로 볼까? 아니면 화가로 볼까? 공자는 역시 화가라기보다는 음악가이다. 공자에게 예술의 기준은 음악이다. 인간의 사운드였다.
공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노래였다. 공자가 요새 세상에 살았다면 노래방을 매일 갔을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만나면 흥분해서 그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고 항상 따라 했다는 그런 구절이 논어에 나온다. 그만큼 이 사람은 노래를 좋아했다.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술이 31
노래라는 것을 중국에서는 시(詩)라고 불렀다. 시라는 말이 지금은 포엠이 되어 있는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시는 공자에게 시가 아니었다. 공자에게 시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노래의 가사로만 존재한 것이다.
詩는 포엠(poem)이 아니라 노래(song)다.
7. 관저(關雎)
예를 들면 시경(詩經)을 딱 펼치면, 관저(關雎)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관저(關雎) : 시경의 첫수. ‘周南’에 속함.
關關雎鳥 在河之洲
관관(關關)이라는 한문을 해석하면, 관계되어 있다는 게 아니라, ‘까악 까악’이라는 의성어다. 저조(雎鳥)라는 새는 황새 같은 것으로 물수리라고 한다.
그래서 ‘까악, 까악’ 소리를 내며 날아서, 물수리가 황하의 삼각주에 앉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窈窈淑女 君子好逑
그리고 갑자기 ‘窈窈淑女 君子好逑’라고 한다. ‘하늘거리는 저 아름다운 여인이 군자의 좋은 배필이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君子)라는 것은, 공자가 의미를 새롭게 부여한 군자가 아니라 그냥 사내라는 의미이다. 시경은 공자보다 훨씬 윗대의 글이기 때문이다.
이 시(詩)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갑자기 처음을 ‘까악, 까악’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것을 흥이라고 부른다.
흥(興) [시경]의 전문용어로 인간의 감정을 일으키는 상황묘사, 주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시경의 노래 구조는 흥으로 시작한다. 주제랑 무관한 어떠한 흥으로 시작한다. 요새로 말하면 엄청난 몽타주다. 그렇게 노래를 시작되는데, 이러한 것이 시경의 세계이다. 아름답다. 시경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위대한 시(詩)가 있을 수 있나 할 정도로 재미있고 오묘한 맛이 있다.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시경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8. 興於詩, 立於禮
공자의 삶에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태백 8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예, 성어악)’이라고 했다.
‘興於詩’
‘시로부터 흥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공자의 삶이라는 것도 詩로부터 흥이 일어난다. 이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은 사실 공자라는 사람이 자기의 삶을 평가할 때 한 이야기 같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체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일생 전체를 포괄해서 한 이야기 같다.
공자에게 시(詩)라는 것은 단순히 노래가 아니다. 그때는 신문도 없고, 모든 정보의 교류가 없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 공자는 이 노래를 통해서, 어떻게 인간을 교육시킬지 생각했던 사람인 거 같다.
노래를 통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노래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다스리고, 노래를 통해서 정치를 표현했다.
춘추좌시전을 보면, 546년 진나라의 명 재상인 ‘조문자’가 정나라를 방문할 적에 7명이 나와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대를 보지 못해 내 마음이 두근두근. 아! 이제 그대를 보고, 그대를 만나니 내 마음 가라앉네.”
未見君子, 憂心仲仲, 亦旣見止, 亦旣覲止, 我心則降. - 召南 ‘草蟲’
이 노래는 정나라의 엄청난 연애시이다. ‘초충’이라는 유명한 시인데 외교 사신으로 조문자가 왔을 때, 그런 노래를 불러서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옛날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노래들이 전부 외교 사신의 접대에 쓰였다.
立於禮
그 다음에 ‘입어예’다. ‘예에서 선다’고 했다.
노래로 인생을 시작해서, 노래의 인생이라는 것은 예를 갖춤으로서 일어선다고 한다.
예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 앉아서 강의를 듣는 자세도 하나의 예다.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강의하는 것도 하나의 예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헤어질 적에도 예이고, 만날 적에도 예고, 여기서 퇴장할 때도 예이다. 예가 아닌 것이 없다.
예라는 것은 삶의 질서이다. 인간은 그러한 예를 통해서 립(立)한다.
9. 成於樂
成於樂
제일 마지막으로 인생이라는 것은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악에서 이루어진다(成於樂)고 했다. 공자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악(樂)에서 이루어진다.
악(樂)을 음악이라고 보면, 음악에서 인생은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음악대학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나는 국악적인 세계에 대해서 굉장히 동경이 많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동네에 국악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국악에 귀가 밝다.
그런데 귀국해서 판소리를 들으러 국립극장을 갔는데, 김명환 선생이 북을 치고 계셨다. 이 분은 북의 대가다. 다 이 동네 사람들이다.
김명환(金命煥, 1913-1989)
전남 곡성 옥과 출신. 20세기 소리북의 최고 명인.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장판개, 이화중선 등의 명창이 모두 김명환의 북을 거쳤다.
전라도는 판소리의 명 고장이다. 정권진 씨의 아버지 되는 정응민 씨 계보로 조상현 씨도 있다. 모두 그 집안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정권진(1927-1986)
보성출신의 명창. 아버지 정응민으로부터 수업, 정응민의 문하에서 성우향, 성창순, 조상현 등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우리 판소리는 이상하게도 추임새라는 게 있다. 관객이 ‘얼씨구! 좋지!’와 같은 추임새를 한다. 물론 고수도 하지만 관객들도 한다. 그게 아무렇게나 막 하는 게 아니다. 뭔가 唱者의 리듬을 타서 ‘좋~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리듬의 박자에 따라, 중머리면 중머리, 중중머리면 중중머리에 맞추어서 딱딱 들어가야 한다.
내가 앉아서 그걸 듣는데 ‘얼씨구!’하고 탁 나오는데 그렇게 멋있었다. 공연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귀명창들만 앉아 있었던 거 같다. 어느 장면에 가면, 착착 추임새가 나오는데 그렇게 멋있었다.
그래서 나도 흉내를 내서 ‘얼씨구!’라고 했는데, 엉뚱한 데서 나 혼자만 나온 거였다. 얼굴이 뜨거워서 ‘아..나는 한국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부끄러웠다.
‘내가 외국 학문만 알았지.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창피해서, 옆에 있는 사람한테 ‘그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라고 했더니 장단을 알아야 된다는 거였다. 장단을 알려면, 어떤 게 제일 좋으냐니깐 북을 배우라고 했다. 소리북을 배우면 장단을 알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저기 앉아서 북 치는 노인네가 누구요?’했더니, 우리나라 국보급인데, 김명환 선생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날로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찾아갔다. 찾아갔더니 노량진 시장의 꼬린내 나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지나, 어느 집 단칸방에 세를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고수가, 우리나라 문화재가, 그런 데 살고 있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
그래 가지고 들어가서 절을 하고 ‘선생님. 제가 북을 좀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했다. 당시에 아는 게 없었다. 나는 북 배우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것인 줄 알았다. 복잡한 이론이 들어가고, 초급, 중급부터 들어가려면 한참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앉게!’하시는 거였다. 배우고 싶다는 말만 했는데 ‘앉게.’ 그러시더니, 북을 툭 굴러주고, 북채를 던져주고 딱 자세를 잡더니 따라하라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딱 앉아가지고 그냥 따라했다. 그래서 내가 그 양반한테 몇 년을 배웠다.
내가 최근에 대금을 불고 싶어서 이생강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한테 ‘악보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요새는 다 악보로 배우던데...’ 그랬더니 이생강 선생이 이야기하길 ‘악보로 배우면 그건 국악이 아니야! 내 입모양을 보고 그대로 따라해!’라고 했다.
이게 재미난 것이다. 이게 직관의 세계이고, 과정이 없는 것이다. 곧바로 직입하는 것이다. 우리 동양 예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절차가 없는 것이다. 그냥 들어가는 것이다. 맨투맨으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다. 직관의 세계다. 무슨 이야기냐? 그렇게 되면 이 악(樂)이라고 하는 것은 곧 作이다.
樂은 作이다. 작이란 창작이다.
스승한테 가야금 산조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나의 창조이다.
옛날 사람들은 요새처럼 배운다고 하는 게 없다. 배워서 내가 산조를 켠다는 것은 나의 느낌을 가지고 키는 것이다. 선생을 따라 하면, 그것은 내 산조다.
악(樂)이라고 하는 것은 요새말로 작(作)이다. 작곡(作曲)이다. 옛날에는 작곡자와 연주자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전통음악에서는 작곡자와 연주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작곡자 따로 연주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면 그것이 악이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작이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을 완전히 창작하는데서 완성되는 것이다. 成於樂은 그런 뜻이다.
나의 인생은 내가 나의 삶을 창작하는데서 완성된다.
그것이 成於樂의 의미다.
10. 석인(碩人)
자하(子夏)라는 사람이 공자한테 시경(詩經)의 어느 구절을 인용한다. 이것이 [衛風]의 석인편이다.
석인(碩人) 시경 [衛風]의 노래이름
위나라 군주부인 莊姜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
위나라 군주의 부인인 장강이라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다.
석인(碩人)의 석은 ‘클 석’자이다. 그때 이 여자는 그 나라 군주의 왕후였는데 키가 컸던 거 같다. 옛날에는 키가 큰 여자가 적었던 거 같다. 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다.
군주의 부인이 굉장히 섹시하고 근사했던 모양이다. 하늘하늘거리는 손결의 모습이라든가 눈썹의 묘사가 대단히 아름답게 나온다.
그러면서 ‘巧笑倩兮’라고 한다.
교소(巧笑)는 아주 아름답게 웃는 것이다. 천혜(倩兮)는 보조개다. 보조개가 생기는 걸 아름답게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이야기한 게 ‘미목반혜(美目盼兮)’이다.
눈이 아름답다고 하는 옛날 사람들의 기준을 보면, 눈동자가 까맣고, 옆의 하얀 부분이 정말 하얗게 보이려면 약간 푸른 기가 돌아야 한다. 그렇게 흰자와 검은자의 경계가 완전하게 딱 갈라져야 한다. 그래야 이쁜 눈이다.
盼(반) 눈의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가 완벽하게 분별되는 모습의 형용.
이것이 흐리멍텅하면 썩은 동태눈깔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눈은 이게 기준이다.
그래서 ‘巧笑倩兮, 美目盼兮’는 ‘아름답게 웃는 보조개의 모습이여, 그 아름다운 눈이여’가 된다.
그리고 ‘素以爲絢兮’라고 한다.
‘素以爲絢兮’는 소(素)를 가지고서 빛나게 한다. 또는 소(素)를 가지고서 장식한다. 소(素)를 가지고서 찬란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여인을 형용한 노래구절인데, 이것의 뜻을 자하가 공자에게 묻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라고 한다.
何謂也?
11. 繪事後素, 주자 신주
그러자 공자가 그 유명한 말인 ‘繪事後素’라고 답한다.
회사(繪事)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회화라고 할 때, 이 회(繪)자를 쓴다. 회사(繪事)라는 것은 쉽다.
그런데 여기서 후소(後素)라는 말의 해석이 어렵다.
여러분들 내가 입은 게 뭔가? 이게 소복이다. 흰옷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내려와 있으면서, 부인을 그리워하며 흰치마에다 난초를 쳐서 부인에게 보냈다. 그게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럼,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素’ 즉 흰천 후에 오는 것이다. 흰천바탕이 있고 여기에다가 그림은 이루어진다.
인간의 흰 바탕이 중요하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것을 인간의 교육이라든가 교양의 세계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인간은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흰 바탕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렇게 해석한 것이 주자의 신주다.
12. 도올의 해석
그런데 나는 주자의 신주 해석이 개똥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회사후소’라는 것을 어디다 걸어놓았다. 전라도를 다니다 보면, 논어에 나오는 구절을 사방에 걸어놓았다.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 없다.
주자의 신주는 이미 宋나라 때 주이다. 고주는 한대(漢代)이다. 그러면 송나라 때 그림하고, 한나라 때 그림은 다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체험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송나라 때는 이미 그림은 수묵산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화하면 딱 떠오르는 게 수묵산수다. 허소치부터 허백련 등 엄청난 문인화의 본고장이 진도다.
허련(許練, 1809~1892) 호는 小痴, 허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의 후손,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남종화풍을 이룩.
여러분들은, 동양화라는 것은 원래 수묵산수인데, 요새 서양의 영향을 받아서 그림이 전부 채색화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란하게 물감을 들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동양화는 옛날부터 수묵산수라는 말은 개똥같은 이야기다.
고구려 벽화를 보라. 수묵산수가 어디 있나? 한나라를 보라. 당나라의 삼채를 보라. 전부가 채색화이다. 漢대의 벽화를 보라. 어디 수묵산수가 있나? 모든 중국의 그림은 원래 물감 채색화였다.
그것이 소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당을 지나 불교가 들어왔다. 그런데 불교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반야심경에 뭐가 있나? 색증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
색깔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깔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사상이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았다면 수묵산수는 태어날 길이 없었다.
수묵산수는 불교적 세계관이 들어오면서 채색화가 空化(공화)되어간 것이다.
수묵산수는 채색화가 공화(空化)되어간 것이다. 그 효시로서 盛唐의 왕유(王維, 699~759)를 들 수 있다. 왕유는 불교사상에 심취하여 독특한 화풍을 창조, 후대 문인화의 조종이 되었다.
채색화의 현란함이 단순한 묵과 옛날에는 없었던 종이가 나오면서 수묵산수가 태어났다. 종이에 발묵을 하고, 발묵의 농담에 따라서 모든 인간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주 후대에 발전한 것이다. 송나라 이전에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자는 대단하고 백자는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청자의 색깔이 점점 세련되고 세련되어야 백자가 나오는 것이다. 청자 색깔을 못내서 백자가 나오는 게 아니다.
백자는 청자의 완성이다.
색깔이 있는 것보다 색깔이 없는 것이 후대다. 공자 시대에는 수묵산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봐도 後素라는 말이 素 뒤로 온다고 해석하기가 어렵다. 繪事라고 하는 것은 素가 가장 뒤로 오는 것이다. 즉 素에서 완성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素라는 것은 흰물감이다. 옛날에는 모든 그림을 그리고, 마지막에 그림의 최후 완성을 흰물감으로 흰 바탕을 칠해 가면서 그려서 완성했다.
後素는 莊姜이 얼굴에 흰 분을 발라 화장을 완성하는 것처럼 흰 물감으로 채색화를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13. 起予者, 商也!
그래서 공자의 말을 듣고, 자하가 ‘禮後乎?’ ‘예가 가장 뒤에 오는 것이겠군요?’ 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모든 교양을 습득하고, 예라는 것으로서 인간을 바로 잡을 때, 그 그림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巳矣’라고 한다. 즉 ‘나를 깨우치는 자는 상(商)이로구나.’하면서 자하를 극찬하는 것으로 이 대화는 끝난다.
14. 사혁의 육품
AD 490년 전후로 추측되는데, 사혁이라는 사람이 ‘고화품록’이라고 하는 27명의 유명 화가들을 품평한 책을 남긴다.
사혁(謝赫)
南朝 齊나라의 화가, 세밀한 인물화에 뛰어났다. [古畵品錄](AD490)이라는 미술평론집을 남김.
사혁이라는 사람은 위진남북조 초기 사람들인데, 이 사람의 전기에 대해선 정보가 없다. 이 사람이 ‘고화품록’이라는 책의 서문에 육품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길, 육품에 다 능한 자들이 요새 참 없다. 통탄할 노릇이라고 한다.
여기서 첫 번째로 그 유명한 ‘기운생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어서 여섯 가지를 이야기한다.
1. 氣韻生動(기운생동)
2. 骨法用筆(골법용필)
3. 應物象形(응물상형)
4. 隨類賦彩(수류부채)
5. 經營位置(경영위치)
6. 傳移摸寫(전이모사)
내가 보기에 1과 2, 3과 4, 5와 6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6부터 3까지 이어진다. 6에 전이모사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우선 모사를 했다. 그대로 보고 모사를 했다.
그리고 위치와 구도 잡는 법을 배웠다. 경영위치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수류부채, 채색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응물상형, 형체를 그려내고 난 다음에 골법용필, 기운생동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15. 절파와 오파
저번에 명청회화전을 소개했지만, 소위 말해서 오파, 절파니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절파(浙派) 절강성의 載進을 시조로 하는 직업화풍
오파(吳派) 강남의 吳縣의 沈周를 시조로 하는 문인화풍
‘동기창’이라는 사람이 남종화, 북종화의 개념을 만들어서 북종화는 화원 화가들을 중심이 되었고, 남종화라는 것은 문인화 중심이었다.
절파들은 붓을 가져다가 측봉이니 하면서, 면을 과감하게 쓰고 붓을 기교 있게 썼다.
문인화라는 것은 중봉으로 해서, 붓을 휘날려서는 안 되고, 수렴이 되어야 하고, 고졸해야 했다. 진도에서 나오는 화풍을 보면, 그게 다 문인화 계열의 오파다.
그리고 절파가 북종화의 대표다. 이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없어서 다 이야기를 못하겠다.
하여튼 그래서 나중에는 화원 화가들까지 이 오파들의 문인화 기법을 다 마스터해 버린다. 그래서 명말에서 청대로 들어오면 문인화의 특색이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해서 문인화와 직업적인 화가들의 구분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자, 나 같이 문인화를 그리는 학자들은 핏대가 난다. 화원화가들이 다 문인화가들을 흉내를 내버리니깐 화가 났다. 물론 테크닉 면에서는 화원화가들이 더 뛰어났다.
그래서 문인화가들이 과감하게 전통적인 기법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개성주의로 나갔다. 그게 소위 석도니 팔대산인이니 하는 사람들이다.
청나라에 들어오면 양주팔괴 등이 등장하며 수묵산수가 극단화된다. 단숨에 붓을 휘날리면 그림이 되었다. 세세한 공필이 없어진다.
16. 골법용필, 기운생동
쉽게 말해서 골법용필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形似(형사)의 문제이다.
형사(形似) 형체를 리얼하게 그려내는 뎃생의 기법
옛날에는 수묵산수가 아니라 원래 채색화였기 때문에, 그리고 정물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형사가 중요했다.
나중에 청나라 때 와서 기운생동론을 전부 오해해서 해석이 잘못되었다. 기운생동이라는 말을 전부 발묵이라든가 붓을 한 번에 움직여 그리면, 거기서 기운이 생동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굉장히 추상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원래 사혁이가 말하는 기운생동이라는 것은 후대의 수묵산수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운생론은 수묵산수가 아니고 채색화에 대한 것이었다.
공자가 말한 회사후소처럼 기운생동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골법용필에서 넘어가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골법용필이라는 것은 정물화들에 대한 정확한 형체를 똑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겸제도 나비, 개와 같은 정물화에서 정확한 형체를 그렸다. 솔거가 소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새들이 와서 진짜 나무로 알고 부딪쳤다고 했다.
거기에서 일차적인 것은 形似(형사)다. 즉 소나무가 정말로 소나무 같아야 한다. 이것이 골법용필이다. 골격이 되는 골법은 있는 사물을 우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다.
17. 한비자 이야기
한비자의 이론이 있다. 外儲說左上(외저설좌상)에 나오는 이야기다.
齊王問 : 畵孰最難者?
제나라의 왕이 화공에게 물었다. ‘무엇을 그리기가 가장 어려우나?’ 당대의 유명한 화가한테 물으니깐, 말하기를 ‘견마최난’이라고 한다.
犬馬最難
‘개와 말이 가장 그리기 어렵습니다.’라고 한다. 그 다음에 ‘뭐가 가장 그리기 쉬우냐?’고 한다.
孰最易者?
‘귀신이 제일 그리기 쉽습니다.’라고 말했다.
鬼魅最易.
왕이 ‘왜 그러하냐?’고 묻자, 화공은 ‘개와 말은 일상적으로 노상 눈 앞에 보이니깐, 똑같이 그리지 않으면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귀신은 안 보이는 것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도 됩니다. 그래서 귀신이 가장 쉽습니다.’라고 말했다.
추상화고 입체파고 다 좋지만, 요새 컨템포러리 아트라고 하는 게 전부 이런 개똥 같은 귀신 그림만 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 설화는 구상과 비구상에 관한 인류미술사의 최초의 언급일 것이다.
이런 그림은 내가 그리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얼마든지 그린다. 요새 현대 미술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다.
일차적으로 ‘사혁’이 이야기했던 것은 정확한 형사였다. 그런데 그 형사라는 것이 형체만 같게 골법이 서있는, 붓의 법에 의해서 형사를 해도, 아까 그 솔거의 새가 날아왔다는 것은 그 그림의 氣가 韻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세계는 리듬의 세계이다. 리듬이 있어야 한다. 붓질을 해도 생명의 약동에는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이 있을 적에 그림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골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생동하는 그림이 되어야만 제대로 그림이 되는 것이다.
‘기운생동’이라는 것은 청나라말기에 타락한 오파니 절파니 하는 이런 사람들의 말류에서 나오는 발묵의 장난이 아니다. 원래 그림이라는 것은 기운생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18. 공자의 새끼돼지 이야기
‘장자’에 보면 공자가 초나라에 갔는데,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았다. 돼지가 누워있으니깐, 새끼돼지들이 젖을 빨아먹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보기가 좋나?
그런데 돼지새끼들이 어미 젓을 열심히 빨다가 갑자기 솨악 도망을 갔다. 약간 놀라서 어미를 버리고 도망갔다.
少焉絢若, 皆棄之而走.
보니깐 그 어미가 죽은 것이었다.
所愛其母者, 非愛其形也, 愛使其形者也
장자, 덕충부
그러면서 공자가 하는 말이, 그들이 사랑한 것은, 자기 어미라고 믿고 젓을 빨았던 것은, 그 형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젓이 나오고 온정과 어떠한 생명으로서 자기들을 껴안아 주고 젖을 주던 어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미가 죽은 순간에 새끼돼지들이 떠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하기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어미, 자기를 보살펴주던 어미를 사랑한 것이지. 그 어미의 형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그 형체를 형체로서 만들고 있는 그 무엇을 사랑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예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기운생동하는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온갖 형체를 가지고 무슨 장난을 해도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나는 디자인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심미적 분노가 끓어오른다. 이제 우리 민족은 깨어나야 하고 정말 우리 삶을 되찾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 - 도올 -
어떤 디자인이 되었든, 이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디자인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사는 건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모든 디자인은 철저히 배격해야한다. 이제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집을 하나 지을 때, 화장실 하나를 생각할 적에, 부엌 하나를 생각할 적에,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주체적으로 요구하고, 그러한 심미적 안목을 갖는 위대한 국민이 되어서, 이제는 21세기의 다가오는 한국에는 다시는 20세기의 썩어빠진 디자인으로 우리 문명이 망가지는 터무니 없는 일이 없기를 나는 바란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