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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선배
김 광 욱
1
남편은 오늘도 그 이중성을 드러냈다. 남편은 잠자리에서 행위할 때와 식사 시간에 빈아를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밥투정의 선수였다. 반찬이 짜니 싱겁니 밥이 지니 되니 짜증 부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늘은 좀 얌전히 밥을 먹는가 싶으면 돌을 딱 씹고는 돌밥했다고 아내에게 욕을 하며 식탁을 발로 걷어찼다. 이상하게 그의 밥에만 돌이 들어갔다.
빈아는 그 화풀이를 쌀집에다 했다. 밥쌀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마트에서 단골로 사 먹고 있었다. 식료품 코너의 아가씨는 사장에게 빈아가 한 말을 전하고, 사장은 빈아에게 자기 아내는 같은 쌀로 밥을 지어도 돌을 씹은 적이 없다고 하며 빈아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밥 지을 때 먼지나 돌이 들어갈 수 있고 반찬에 들어간 돌을 돌밥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빈아더러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빈아는 사장과 말씨름하기 싫어서 거래처를 바꿔 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정말 내가 돌을 달고 다니나. 빈아는 돌 노이로제에 걸려 밥 지을 때, 반찬 만들 때 목욕재개하고 새옷을 갈아입은 상태에서 일을 봤다. 밥 차릴 때도 몸을 청결히 하고 먼지가 일어나지 않게 살금살금 움직였다. 미세한 먼지까지 빈아에겐 돌로 보였다. 빈아는 남편의 밥투정 때문에 꼬장꼬장 마르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조심해서 한다고 해도 남편 태기는 성미가 난폭해서 돌 하나 씹으면 아내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밥상을 엎어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빈아는 남편에게 맞아 머리에 혹이 생기고 귀가 앵앵거리는 이명증에 걸렸다. 남편의 폭행과 밥상 엎는 버릇은 결혼 6개월 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욕설만 하고 가볍게 때렸으나 날이 갈수록 때리는 횟수와 정도가 심해졌다.
그녀는 남편의 주먹에 맞아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빈아는 그 일을 친정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으나 형제들이 어떻게 알고 소동이 벌어졌다. 친정 부모님은 애지중지 기른 딸을 이렇게 학대해도 되냐고 따졌고 시부모님은 무릎 꿇고 사죄했다. 죄없는 부모들이 고생했다. 태기는 다시는 아내에게 폭행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그 버릇이 되살아났다. 빈아는 남편에게 맞아도 친정에 알리지 않고 꾹꾹 참았다. 그녀 혼자 소화시키려고 했다. 빈아는 부유한 가정에서 고이 자랐으나 귀한 티내지 않고, 이해심이 많고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빈아가 경솔하고 인내성 없는 여자였다면 벌써 이혼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빈아는 이혼이란 단어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남편을 받들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신혼 초에 그들 부부는 깨가 쏟아지게 행복했고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아기자기한 사랑을 나누었다. 빈아는 남편을 잘 얻었다고 생각했다. 태기는 큰 수출업체 사장의 둘째 아들이고 부친 덕분에 젊은 나이에 상무가 되었다. 빈아는 부잣집 며느리이고 상무 사모님이었다. 빈아는 겸손한 성품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귀부인 행세를 하지 않고 검소하게 차려 입고 다녔다. 백화점에도 잘 가지 않고 쇼핑에 취미가 없었다. 쇼핑하면 잘 속고 후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성격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음악 감상이나 영화 관람이 그녀의 취미였다. 남편이 잘 벌기 때문에 돈이 궁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지참금도 은행에 넉넉히 예치되어 있으므로 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돈을 어떻게 쓸지 몰라서 쓰지 않고 보관해 둔다. 원래 어려서부터 깍쟁이였고 사치와 낭비를 싫어했었다.
2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 가고 놀이공원에도 가 보는 게 소망이었으나 남편은 아내와 함께 이출하는 걸 싫어하고 골프를 치거나 낮잠으로 소일했다. 신혼 초에는 빈아의 의견을 존중하고 함께 영화 관람도 하더니 이제는 그런 일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여겨진다. 그 때는 결혼의 즐거움에 취해서 억지로 그녀의 의견을 따랐던 것 같다. 그들은 대화도 잘 하지 않고 극히 사무적인 짧은 대화만 주고 받는다. 아침에 출근할 땐
“잘 다녀오세요.”
“그래.”
하는 판에 박은 인사가 고작이고 저녁에 퇴근하면
“이제 오세요?”
“응.”
하고 코로 대꾸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태기의 기분이 좋을 때이고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대답도 하지 않고 거실이나 안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에 정신을 팔았다. 그는 항상 찌부드등하고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려고 정성들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예쁘게 차려입고 아양을 떨라치면,
“그 옷이 뭐야? 패션쇼에 나가려고 그래?”
“이걸 반찬이라고 만들었니? 돼지도 안 먹겠다!”
하고 애써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뱉어 버렸다. 그는 빈아가 만든 음식, 그녀가 하는 행동은 뭐든지 못마땅해했다. 그런다고 달리 사귀는 여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참 건조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차라리 식당에 가서 사 먹겠다고 하며 밥 먹다 말고 일어서서 나가는 남편. 그럴 때 빈아의 심정은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남편의 투정을 그녀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애교를 떨면 남편은 징그럽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나 드라마 얘기를 꺼내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만 보았다. 다정한 대화, 따뜻한 부부애는 가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빈아는 그 이유를 회사일 때문이겠거니 했다. 환율이 급락해서 그의 부친의 회사가 무역을 중단하고 있었다. 남편이 회사 불황의 화풀이를 가정에 쏟아붓는 건 당연했다. 그 기간이 너무 길고 남편의 손찌검이 점점 더 심해져서 한심스러웠다.
부부의 성관계 횟수는 정상적이었다. 빈아는 자신의 생김새와 몸매에 자신 있어서 차림새에 별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게 태기에게는 멋있게 보이는지 야수처럼 덤벼들어 격렬히 행위를 했다. 마음 내키면 아무 때고 덤벼들어 욕망을 채우고 타인처럼 멀어졌다. 빈아는 그것을 그의 애정 표현이라 생각하고 행위의 시간을 좀이라도 연장시키려 노력했다. 그 순간만은 부부이고 남자와 여자였다.
행위할 때와 식사할 때의 태기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섹스할 때처럼 아름답고 멋있게 세상을 산다면 그녀는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가 야수처럼 자기 만족에 도취해서 그녀의 몸을 난폭하게 다루어도 부부니까 흠이 될 게 없었다. 일상생활에도 그 열정이 계속된다면 그녀는 더한 고통도 참을 수 있었다.
3
빈아의 친구들은 그녀가 행복하게 사는 줄 안다. 동창생 친구들이 찾아와서 진종일 먹고 놀다 간 자리엔 음식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도 친구들과 수다떠는 재미에 살았다. 빈아가 외출하지 않으니까 여자 친구들이 날마다 집으로 찾아왔다. 친구들은 먹고 놀면서 킁킁 행복의 냄새를 맡아 보고는 빈아 부부가 별로 행복하지 못하단 걸 눈치챈 것 같았다. 태기는 여자들이 찾아오는 걸 싫어했다.
그의 퇴근 시간까지 술에 취해 놀다가 그녀들이 썰물처럼 몰려나오는 걸 보고 그녀들 면전에서 아내에게 호통을 쳤다. 다음부터는 집 안에서 놀지 말고 술집에 가서 놀라는 것이었다. 비아냥거린 말이었다. 그뒤로 친구들도 떨어졌다. 친구들은 빈아가 재미없고 난폭한 남편과 산다는 걸 알고 빈아를 동정했다. 이제는 놀러오라고 전화해도 빈아의 남편이 무서워서 오지 않는다.
“야, 너의 집 안 갈란다. 네 남편 주먹에 맞아 병신되면 어쩌니? 네 팔자도 참 불쌍하다. 그런 남편과 평생 마주보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안 됐니? 나 같으면 이혼하겠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빈아에게 하는 동정이었다. 빈아는 깡마르게 야위어 진종일 집 안에만 갇혀 있었다. 태기가 집에 전화하여 아내가 없으면 밤에 그 대가를 치렀다. 태기의 주먹은 쇳덩이처럼 무겁고 커서 한 대 맞으면 정신이 몽롱했다. 그는 꼭 그녀의 머리만 때렸다. 머리는 웬만큼 때려도 표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골병들어 있었다. 좋아하는 극장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음악이나 틀면서 독서로 소일했다.
그녀가 외출하는 경우는 마트에 갈 때. 아파트 주위의 동산을 산책하고 가벼운 조깅을 했다. 친정에 전화도 하지 않고 잘 가지도 않았다. 자신의 불행을 부모님들께 전이시키는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이 삶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느 시기가 되면 남편의 못된 버릇이 고쳐지려니 했다. 그 노력은 그녀의 몫이고 가정의 행복도 그녀의 몫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만드는 거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안하고는 아내 하기 나름이라는 친정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히고 있었다.
어머니한테선 가끔 전화가 왔다. 딸의 안부를 묻는 전화였다. 사위가 각서를 쓴 다음에도 아내한테 손찌검을 한다는 걸 알고 노발대발했으나, 출가외인 딸을 가진 부모로서 자식 편만 들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태기가 출근하고 나서 빈아 혼자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그 사람 출근했냐? 내가 너무 일찍 전화를 했는가 모르겠다.”
“네, 출근했어요 어머니.”
“출근 하나는 제대로 하는구나. 뭬가 무서워서 전화할 때 이렇게 떨리는지 원. 없다니 다행이다. 사위 출근 체크하려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사람이 있으면 전화도 못하니까.”
“괜찮아요 어머니. 제가 하녀인가요?”
“맞다, 어엿이 최태기 상무의 조강지처지. 그런데 자꾸 시집을 잘못 보냈단 생각이 드는구나. 내 딸을 그 집에 식모살이 하라고 보낸 것 같아.”
“어머니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전 행복해요.”
“행복이 말라 비틀어졌는가 보다! 너 어디 아프냐?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너 주려고 보약 좀 지어 놨는데, 너는 친정에 오지 않을 것이고, 택배로 보내 주랴?”
“저는 건강해요 어머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약 아버지 드리세요.”
“네가 먹을 약이다. 잔말 말고 집에 있거라. 너한테 할 말도 좀 있고, 내가 지금 갖고 가겠다.”
4
빈아 집에 보약을 갖고 오시겠다며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보약은 반갑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빈아는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가서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친정집은 빈아의 아파트에서 택시로 삼십 분 거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로 오셨다. 어머니는 한 팔에 해피를 안고 있었다. 해피는 빈아가 사랑했던 개였는데 빈아가 심심할 거라고 갖고 오신 것이었다.
개는 빈아를 보고 낑낑거리며 좋아했다. 빈아는 개가 반가우면서도 남편이 개를 좋아할까 걱정했다. 아무래도 개 때문에 청소에 더 신경 쓸 것 같았다. 그러나 보약보다도 개가 더 반가운 게 사실이었다. 한약은 액체로 되어 있어 무거웠다. 그걸 어머니와 함께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 내 새끼야!”
어머니는 수척해진 딸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집구석에 와서 남편한테 달달 볶이고 이렇게 삐쩍 말랐단 말이냐? 이혼해라 응? 내가 볼 때 네 남편은 싹수가 없어요. 그 말 해 주려고 왔다.”
“아이 엄마,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어떻게 이혼해요?”
“결혼 예식장에서 나오자마자 이혼하는 부부도 있다더라. 아기가 하나도 안 생겼을 때 일찌감치 헤어지는 게 좋아. 이대로 가면 넌 말라 죽는다.”
“저는 이혼할 생각 없어요.”
빈아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마음 속으로 수없이 생각한 일을 어머니가 말했을 때 빈아는 슬펐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배신한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그리고 태기가 이혼에 합의해 줄지도 알 수 없다. 성격이 까다롭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못된 습성은 있으나 잠자리에서만큼은 괜찮은 남편이었다. 그 기쁨이 없다면 부부의 의미도 없었다. 동물적 본능에서였건 어쨌건 그 행위는 사랑이었다. 태기가 합의해 줄 것 같지 않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니? 태기가 너한테 잘해 준 게 뭐야?”
“잘해 준 것도 있어요.”
“잠자리에서? 그게 사랑이라더냐? 널 사랑한다면 이렇게 머리가 붓도록 두들겨패겠어? 그놈은 신사가 아니야. 넌 체면을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남이 네 인생을 살아 주는 게 아니야.”
“체면도 중요해요 엄마.”
“듣기 싫다. 이혼해라. 난 내 자식이 남의 집에서 천덕꾸러기 되는 것 볼 수 없어.”
“해피한테 물어 보고요. 해피야, 나 이혼할까? 하지 않는 게 좋지? 봐요. 하지 마라고 끄덕이잖아요?”
“에유, 속없는 것!”
어머니는 개와 철없이 장난하는 딸이 안쓰러운지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는 집에 할 일이 있다며 한 시간도 앉아 있지 않고 가셨다. 빈아는 해피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고기와 밥을 주었다. 해피는 뭐든지 잘 먹고 말을 잘 들었다. 태기가 해피를 미워하더라도 사정해서 꼭 그녀 옆에 두고 싶었다. 친구가 생기니 우울했던 표정이 펴지고 마음의 근심도 지워졌다. 해피를 데리고 해질 무렵까지 아파트 동산에서 놀았다. 해피는 빈아의 식구가 되었다.
5
빈아는 해피를 안고 전동차를 탔다. 해피는 얌전히 그녀 품속에 들어 있었다. 코트 옷자락 속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어서 얼른 보면 인형 같았다. 사람들이 개와 빈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러다 똥 싸면 어째? 옆자리의 부인이 걱정하며 낯을 찌푸렸다.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 우리 해피는 사람처럼 아침에만 한 번 똥을 싼답니다. 빈아는 부인에게 미소로 답해 주었다. 오줌 쌀 것에 대비해서 비닐주머니를 항상 갖고 다녔다. 히피가 낑낑거리면 오줌 마렵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한쪽에 가서 누게 하면 된다. 해피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지?)
빈아는 자기가 가고 있는 행선지를 알지 못했다. 습관처럼 그전에 탔던 전동차를 타고 을지로 3가에서 내렸다. 내려서 걷다 보니 낯익은 골목이었다. 그녀는 한 건물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입구와 계단 옆면에 똑같은 연극 공연 포스터가 현란하게 붙어 있었다.
지하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빈아는 비로소 자기가 여기에 온 목적이 뭔가를 알았다. 오래 전에 헤어진 선배가 보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가 시간을 낸 것이었다. 해피가 없었다면 그런 결심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선배는 그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를 찾아오지 않는 건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였다. 그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여야 하니까.
빈아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도어로 된 큰 철문을 열었다. 문소리가 “찌그덕!”하고 정적을 깨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철문 안에 매표대가 있고 나무문이 또 하나 있었다.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관객은 없고 어둠침침한 무대에 젊은 남녀가 마주서 있었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여자는 뒷걸음질치며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남자는 위통을 벗고 있고 여자는 브래지어와 치마만 걸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요?”
“고개를 젖히고 시선을 천장에 두라고. 한 쪽 다리를 이렇게, 쳐들어서 침대 끝에 기역자로 걸치면 좋겠어.”
“대본엔 그런 게 없는데. 그냥 입 맞추고 포옹만 하면 안 되나요?”
“그건 흔한 표현이야. 마치 포옹엔 자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두 사람은 다정한 사이처럼 대본에 없는 대사를 주고 받았다. 그 장면은 대사 없이 행동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남녀가 성관계하는 장면을 리얼하게 흉내내야 한다. 관객들이 낯뜨겁지 않게 예술적으로 소화해 내야 한다.
빈아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연습을 진지하게 관람했다. 그런 연기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선배의 대본엔 남녀의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선배는 사회의 고발물을 다루면서 내면 연기에 치중하는 배우 겸 연출가였다. 선배도 타락했구나. 사회 고발물은 돈이 되지 않으니까 외설물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속셈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