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늦잠에서 일어난 우리 부부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Koica단원으로 활동 중인 제주도 출신 K양을 호텔에서 만났다. 내 딸의 절친한 후배이고, 이미 내 딸에게서 만나고 오기를 신신당부 요청받은 터여서 딸의 안부와 함께 가지고 갔던 의약품과 즉석식품 등을 모조리 인계하고 겔러니야절집까지 동행하면서 이미 글로벌시대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닷새째 되는 아침 우리 법우 일행은 그 분(A***)의 백부이자 은사 승려가 창건했다는 콜롬보 시내 마라다나 소재 O사원을 찾아 스리랑카 라만다종단의 콜롬보교구장이고 사형제가 되는 주지 승려와 나의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지만, 모자란 나의 외국어능력을 실감하며 뒤늦은 영어공부의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어 전라남도 승주군 소재 송광사에서 6년 수행을 했고 한국 불명까지 있는 그 분(A)의 사형제 승려가 운영하는 콜롬보 시내 일요불교학교를 찾으니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우리들이 준비했던 학용품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기념사진까지 촬영하고는 답례로 스리랑카 절집 음식으로 점심식사 대접을 받으면서 인연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았다.
엿새째 되는 날까지 이틀에 걸쳐 느긋하게 콜롬보 시내에 위치한 노천시장, Fort 지구, 콜롬보국립박물관, 국회의사당, 대통령궁, 독립기념관, 갤러니아대학 등의 화려하고 번화한 시가지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결코 뒤쳐진 나라가 아님을 알게 하였다. 특히 4세기 반이나 외세의 지배 흔적인 곳곳의 유럽풍 건물 등은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당한 피지배 민족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픈 흔적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불과 6박 8일의 짧은 일정으로는 스리랑카의 모든 것을 볼 수도 없거니와 알 수도 없겠으나, 우리들을 더욱 놀라게 한 일은 곳곳에서 만났던 스리랑카 사람들의 깊은 불심과 승려에게 보내는 살아있는 부처, 즉 생불처럼 우대하는 절대적인 무한의 신뢰와 존중의 태도는 우리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이었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그 이유가 매우 궁금했었지만 짧은 여행만으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상상 속에 기대했던 불교나라 생불로서의 승려의 모습과는 달리 그 분(A)은 우리 일상과도 별로 다를 바가 없고 먹고 마시는 것이나 즐기는 것 등에도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후불식까지도 거리감이 없는 행태에 의문은 있었지만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나 역시 외롭고 무료한 벽지 섬 두 해 동안의 삶에서 하루 서너 갑의 줄담배를 피워대다가 의사의 극단 경고를 듣고서야 어렵게 끊었던 경험이 있었으니, 흡연이 건강에는 백해무익이지만 외롭고 무료한 승려의 유일한 위안과 즐거움이 될 수도 있기에 충분히 이해했다.
비록 내가 기대했던 승려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도 한 인간이고, 내 아버님의 위패가 안치된 절집 승려는 대처승으로서 절집 밖에 가정을 꾸려 자식 셋까지 둔 사실을 늘 유쾌하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기에 적어도 이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감은 있어서였다.
우리 부부는 아누라다푸라, 트링코말리, 폴론나루와, 캔디 등을 돌아보는 동안에 그가 생불이 아닌 행태는 묻혀버리면서 스리랑카 정착에 대한 꿈은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벽 2시에 스리랑카 콜롬보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방콕공항, 홍콩공항, 인천공항, 서울공항을 거치고서야 밤이 늦은 시각에 제주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일은 2000년 초여름에 아내가 스리랑카 첫 국외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인연을 맺었던 스리랑카 어린 소녀는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과 4년 사이에 평생의 짝을 만나 유부녀가 되었다고 함에 재회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잇게 되기를 기대했던 우리 부부는 아쉬운 마음과 빈손으로 귀국을 해야 했지만, 이후 오랫동안 스리랑카 향수병에 빠져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2004년 정월 엿새부터 열사흘까지 나에게는 처음이고 내 아내는 두 번째인 스리랑카 여행을 마친 우리 부부는 스리랑카에 정착한다는 믿음과 꿈(Dream)을 키우며 굳혀갈 뿐이었다.